사회주의와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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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말 이래 지속돼 온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은 민주주의 투쟁이다. 정치적 부패와 부당함에 항의하고 정의 구현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는 민주주의 투쟁을 지지한다. 무릇 민주주의 투쟁은 사회적 특권에 대한 분노와 평등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사회주의의 전통과 민주주의의 전통은 밀접하게 관련돼 있었다.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를 살펴보면 민주주의적 권리와 인권, 부패에 대한 항의가 투쟁의 동력이 됐던 경우가 적지 않았다.
노동자 조직 자체를 봐도 정부나 사용자 단체, 우익 단체보다 훨씬 민주적이다.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민주주의를 철저히 결여하고 있다. 기업주와 정부 관료, 판사 등은 선출되지 않는다. 국회의원은 선출되지만, 대부분 선출되자마자 공약을 어기기 시작한다.
선의를 가진 개혁파 국회의원도 정부와 기업의 권력에 부딪혀 좌절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초심을 잃고 변질해 버린다.
사실, 의회는 점점 더 무책임해지고, 대표성도 더 떨어지고 있다.
김대중과 노무현 하에서도 해결되기는커녕 악화된 빈곤과 불평등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환멸도 크다.
커다란 불평등은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이다. 부(富)의 압도적인 부분이 1퍼센트도 채 안 되는 극소수의 수중에 집중돼 있는 사회는 민주적일 수 없다. 그런 격차는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권력에 커다란 격차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처럼 일반적인 민주주의에 관해 말할 수 없다. 선진 자본주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부르주아(즉,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할까?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적 권리들을 구분해야 한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는 전자는 지지하지 않지만 후자는 지지해야 한다. 민주적 권리들을 활용하면 노동계급 운동이 제약을 더 적게 받고, 정치적 성과를 지킬 수 있다.
또한 민주적 권리들의 실상을 드러내어 국민주권 이념과 자본가 계급의 국가라는 현실 사이의 모순을 부각시킬 수 있다. 국민주권 이념은 헌법 제1조에 명시돼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국민은 그저 선거 때만 주권자이고, 선거가 끝나면 자신이 뽑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감시·통제할 수단이 사실상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위해(서구 수준으로 진보케 하고자) 애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자들뿐 아니라 심지어 일부 급진좌파들도 근본적 사회 변혁에 앞서서 ‘민주 변혁의 완수’가 선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전략을 정당화하는 이론은 그들 사이에 서로 다르다(시민사회론, 스탈린주의, 유러코뮤니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등등). 그러나 민주 개혁들을 점진적으로 추구하면 결국 국가 기구들의 성격이 변해 마침내 진보진영 쪽으로 넘어온다는 가정은 비슷하다.
이 가정에 따르면, 국가 기구를 내부로부터 변모시키거나 그 기관장들을 개혁가로 교체해야 하고, 대중 투쟁은 이 목적에 종속돼야 한다. 결국 ‘국가의 민주화’가 국가의 분쇄를 대신한다.
그러나 국가의 점진적·평화적·합법적 변혁이나 국가 기관장의 좌회전은 죄다 환상이다. 국가의 민주화는 노동자 평의회로 조직된 노동자 국가에서만 가능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지지하지 않으면서 민주적 권리를 방어해야 하지만, 민주적 권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부가 극소수 자본가들 손에 남아 있는 한은 불평등과 착취, 차별도 고스란히 남아 있게 된다.
생산수단의 공유가 없으면 빈부격차는 물론 노동계급 내 격차도 남아 있게 된다. 노동계급 내 불평등은 여성차별과 인종차별의 온상이 된다.
또한 극소수인 자본가들이 계속 사회의 부를 지배하면 정치적 민주주의도 안전하지 못하게 된다. 오스트리아나 프랑스 등지에서 나치가 집권할 수도 있다는 현실이 이 점을 분명히 보여 주지만, 이명박과 박근혜 하에서 진보당과 공무원노조, 전교조가 합법성을 잃은 일도 이를 힐끗 보여 준다.
혁명이 실패했거나 위험한 고비에 처할 때마다 우익 군장성이나 파시스트들이 민주적 권리를 짓밟고 혁명가들과 전투적 노동자들을 학살한 사례가 많다.
민주적 권리들도 노동자 민주주의(노동계급이 정치 권력을 잡고 있는 국가 형태) 하에서 비로소 온전히 보장될 수 있다.
박근혜 정권 퇴진 투쟁에 참가해 얻어야 할 소득
마르크스주의자는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이라는 민주주의 투쟁을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의 힘 강화라는 목적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데 힘써야 한다.
그러나 현재 득세하고 있는 흐름은 민주당과 그 대선 예비후보들의 강화라는 목적에 도움이 되도록 힘쓰는 것이다. 대선이 사실상 두어 달 앞으로 다가왔으므로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있는 대안을 지원하자는 것이다.
이는 불가피한 듯하지만, 설사 불가피하다고 해도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사회 변화를 위해 선거만이 가능하고 바람직한 대안이라고 믿는 개혁주의자들에게는 민주당의 대선 예비후보 가운데 하나를 미는 게 ‘현실적’일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반면 혁명가들에게는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의 힘과 조직 강화가 가장 중요하다. 마치 탄핵과 즉각 퇴진의 관계처럼, 대선 승리와 노동자 투쟁 및 조직 강화도 개혁과 혁명의 관계다. 혁명가는 개혁을 위한 투쟁을 일축하지 않는다. 동시에, 혁명가는 개혁을 위한 투쟁을 혁명을 위한 투쟁에 종속시킨다.
문제는 중요한 노동자 투쟁이 지금 가까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지난해 10월 말과 11월에 철도 파업이 가까이 있던 것과는 다른 상황이다. 노동계급 선진 부분의 정서를 봐도 산업 행동에 즉각적 필요성과 중요성을 부여하는 듯하지 않다.
이런 때 상기해야 할 점은 노동계급의 투쟁이 반드시 경제적·정치적 형태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형태도 취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노동자 투쟁이 반드시 경제적 투쟁으로 시작돼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이데올로기 투쟁이 선도적 구실을 할 수 있다. 십중팔구 두 달가량밖에 남지 않은 대선 국면에서 주력해야 할 일은 이데올로기 투쟁이다. 대선 과정에서 제기돼 노동계급과 천대받는 사람들 속에서 뜨거운 정치적 논란을 일으킬 쟁점들에 관해 언급해야 한다.
이데올로기 투쟁을 중시하겠다는 것이 주요한 정치적 투쟁과 경제적 투쟁을 도외시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데올로기 투쟁을 이런 실제 투쟁과 연결시켜야 한다. 가령 버니 샌더스는 지난해 4월 중순경 파업 중인 CWA(Communication Workers of America) 미국통신노조 노동자들을 지지차 방문했는데, 〈노동자 연대〉 신문은 바로 이 같은 연관을 이뤄 내야 한다.
대선 전망이 확실한 건 아니다
대선에서 누가 당선될지는 확실하지 않다. 문재인이 언제까지 지금의 인기를 누릴지가 확실치 않다는 뜻이다. 1990년 봄 영국에서 격렬한 주민세 반대 폭동들이 일어나 당시 총리 마거릿 대처가 11월에 실각했을 때 대다수 영국인들은 1년반 뒤 치를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배하고 노동당이 승리하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고, 보수당은 5년이나 더 집권했다.
시리자도 예상보다 2년 반쯤 늦게 집권했고, 포데모스도 지지난해 집권 예상이 빗나갔다.
물론 한국인 다수의 반여권 정서는 지금 매우 강하다. 하지만 노무현에 대한 배신감과 씁쓸함도 적지 않다.
게다가 선거에서는 의식이 선진적인 사람들뿐 아니라 매우 후진적인 사람들도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선거에서 우연적 요인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투표일이 가까워질수록 덜 확실해질 것이다. 그래서 표 차이가 적을 것으로들 예상할 것이다. 따라서 만일 진보 독자후보가 나온다면 진보·좌파 진영 내부의 이견과 갈등이 날카로울 것 같다.
사회주의자가 진보·좌파 진영의 단결에 기여할 길이 있다. 부르주아 정치인 간의 선거 결과에 목매지 말고 새 정부 하에서도 결국 싸워야 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무리 불확실성이 커도 분명한 점은, 누가 당선되든 그 정부는 시차는 있겠지만 결국 노동자들을 공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누가 당선되든 노동계급 사람들은 시차는 있겠지만 저항에 나설 것이다. 조직과 의식이 촛불운동으로 다소 강화됐을 것이기에 그럴 가능성은 크다.
민주당 후보가 이긴다 해도 그 정부는 트럼프의 대외정책과 한국민 다수의 평화 염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결국 후자를 배신할 것이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싸울 수 있고 스스로 이길 수 있다
우리는 ‘긍정적 사고’ 없는 희망을 갖고 있다. 노동계급이 중간계급의 지지(소위 ‘사회적 연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저항에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민중주의자들은 이런 질문들을 우리에게 흔히 던진다: 도대체 근대 노동계급이 아동기를 갓 지나고부터 지난 2세기 동안 혁명에 성공한 적이 있는가? 러시아 혁명도 결국 패배하지 않았나. 천박한 경험론의 결과론적 논증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아직 미성숙한 나머지, 1848년 혁명에 실패한 이후 노동계급은 고립됐다는 따위의 말을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잠재력을 논증하는 조사·연구에 착수했고, 그 결과가 《자본론》이다.(올해는 그 출판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21세기의 마르크스주의자가 또 하나의 현대판 《자본론》을 써야 하는 건 아니다. 여전히 그 저작으로 노동계급의 단독 저항 성공 불가능 주장을 반격하기에 충분하다.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론》의 정치학이다. 마침 그 저작의 정치적 결론은 노동자 혁명을 뜻하는 말로 내려지고 있다.
다른 많은 곳에서 마르크스는 민중의 자력 해방에 대해 얘기하지 않고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에 대해 얘기했다.
노동계급은 단독으로 싸울 수 있고, 단독으로 승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