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항쟁과 2008년 촛불항쟁, 무엇이 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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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촛불항쟁을 1987년 6월항쟁에 비유하는 얘기가 많다. “어게인 1987”이라는 구호에서 보듯이 말이다. 또한 “5공식 독재로의 회귀”에 대한 우려도 많다. 그러나 다함께 운영위원 최일붕은 지난 20년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고 이 변화의 정치적 함의를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함께 주최의 대규모 포럼 맑시즘2008에서 이 글의 초안에 따라 연설했다.
1987년 6월항쟁은 위대한 반독재 민주화 민중 항쟁이었다. 독재 하에 신음하던 수백만 민중이 거리로 나온 역사적 사건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민주화’가 6·29선언으로 일단락된 1987년 6월항쟁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단숨에 이뤄진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민주화는 6월항쟁과 뒤이은 7~9월 노동자 대파업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아직도 안 끝났다. 그러기에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1980년대식 권위주의 정권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민주당과 다수 개혁주의자들의 주장은 분석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인상에 따른 것일 뿐이다.
1987년과 2008년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다. 물론 그 변화는 모순 투성이의 변화다. 앞으로도 변화가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다(모순은 변화의 동력이므로). 여기서는 몇 가지 주요한 변화에 대해서만 설명하겠다.
1. 권위주의에서 준(準)자유민주주의로 국가 형태의 변화
언제나 우파는 소위 ‘건국’ 이래 지난 60년 동안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들의 다른 많은 말처럼 거짓말이다. 언론·출판·결사의 자유가 없던 정치체제를 ‘자유주의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속임수다. 심지어 지금의 정치체제도 온전한 자유민주주의가 못 된다. 사노련(사회주의노동자연합) 사건에서 보듯이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전혀 사문화(死文化)되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소제목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 앞에 ‘준(準)’이라는 접두사를 넣은 것이다.
그럼에도 친북 좌파와 혁명적 좌파를 제외하면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는 지난 20년 동안 크게 신장됐다. 그런데 흔히들 이 ‘민주화’의 동력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듯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또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라고 부른 자유민주주의의 사회적 내용은 대중적 노동자 조직들이라고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즉, 민주화의 동력은 노동계급의 투쟁과 그 조직이다(디트리히 뤼시마이어,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 나남, 1997년).
자유주의 야당과 그 정치인들이 민주화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 교수와 지식인 등 전문가 계층이 가져다 준 것도 아니다. ‘제도권’이 아니라 거리와 산업현장의 투쟁과 조직이 군장성들과 국가관료, 재벌 등에게 민주화를 아래로부터 강제해 온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노동계급의 대중 조직들이 아직 건재한 상황에서 1980년대식 권위주의로의 회귀는 그다지 쉽지 않다. 물론 바이마르공화국이 심각한 경제·사회·정치 위기와 파시즘의 위협에 직면하고 공산당과 사민당이 이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하기를 거부함에 따라 히틀러가 어부지리로 집권한 사례에서 보듯이 반동에 의한 민주화 과정의 역전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노동계급의 대중 조직들이 와해되거나 심각하게 약화된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명박의 경찰국가는 분명히 저항운동 세력에게는 독재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지적했듯이, 다른 모든 자본주의 국가 형태들과 꼭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도 부르주아 독재의 한 형태다. 형태가 다양하긴 해도 자본주의 국가는 본질적으로 자본가 계급의 도구다. 형태가 다양해도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가 계급을 필요로 하고,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작용한다. 더구나 경찰과 군부 등 국가의 억압 기구는 자본가 계급을 위한 최후의 보루 구실을 한다.
동력
그러나 1987년 6월항쟁 전에 전두환 정권이 당시 김영삼·김대중의 민주당(정확한 명칭은 통일민주당)에게 가했던 것과 같은 수준의 탄압을 이명박 정부는 현 민주당에게 가할 수 없다. 당시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권리도 없었고, 심지어 가택연금 상태였다. 오히려 지금의 민주당은 바로 몇 달 전까지 십년 간 정권을 잡았던 자들이고, 그래서 아직도 국가 기구 안에 그 지지자들이 상당수 있다.
1980년대 마거릿 대처 정부에 대해 개혁주의 정당인 영국 공산당은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정권이라고 규정했다. 영국과 같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권위주의로 착각함으로써 공산당은 자신의 ‘민주대연합’ 노선(비금융 분야 자본가들을 대변하는 보수당 내 ‘개혁파’ 정치인들과 동맹한다는)을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급진 좌파는 지금 “반독재 국민전선”의 필요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 최규엽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장 등)이 혹시 이명박의 경찰국가를 1980년대식 권위주의로의 회귀로 착각하고 자본가 계급 정당인 민주당과 동맹하려 하는 게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 민주당 정치인들은 더는 6월항쟁 당시처럼 탄압받지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바로 몇 달 전까지는 10년 동안 집권하며 자본가 계급의 노동계급 착취·억압 강화에 협력했던 세력이다.
물론 민주당과 사안별로는 연대할 수도 있다. 그들이 우리 운동에 동참한다면 그것은 우리 운동이 강력하다는 것을 반영한다는 뜻에서 우리 운동에 대한 찬사일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동참은 우리가 그냥 덤으로 얻는 것으로, 그것도 매우 경계해야 할 덤인 것이다. 촛불 시위가 한참 진행되던 때에야 비로소 동참한 민주당은 촛불 시위가 정점에 도달하고 이명박 정부가 30개월령 쇠고기 관련 양보 제스처를, 그리고 한나라당이 가축법 관련 양보 제스처를 취하면서 반격의 시간을 벌던 때 맨 먼저 ‘제도권’으로 돌아가려 안달이었다.
급진 좌파는 1936년 프랑스와 스페인, 1973년 칠레 등 각국 공산당의 국민전선(민중전선) 경험에서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 교훈인즉, 반동에 직면해 노동계급 세력이 자본가 계급 세력과 동맹하면 오히려 마비돼 버려, 반동을 물리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2. 노동계급 조직의 성장
권위주의에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국가 형태의 변화에서 핵심적 동인(動因)은 노동조합과 개혁주의 정당 등 노동계급 조직이라는 사실이 두 번째로 언급할 변화다.
6월항쟁 직후인 7월 초부터 9월 초순 사이에 대중 파업 물결이 크게 일었다. 그 성과로 ‘민주노조’ 조직들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민주노조 지도자들의 정당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도 설립됐다. 이 조직 노동계급의 존재가 6월항쟁에 견주어 본 2008년 촛불 운동의 최대 이점이었다.
불행히도 촛불 운동은 이 이점을 활용하지 못했다. 조직 노동계급의 힘은 사용되지 않았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처음부터 조합원들을 조직이 아니라 개인으로 참가시키겠다고 말했고, ‘정치 파업은 안 된다’는 이명박 정부와 사용자들, 주류 언론 등의 협박 앞에서 우물쭈물하며 시간을 다 까먹었다. 야구식 파업을 말하며 힘을 분산하다가 나중에야 비로소 그것도 기껏해야 겨우 2시간 파업을 한 것이 전부였다.
촛불 운동에 적극 나서지 않은 민주노총 노동조합원들의 노동조합주의(정치 문제들보다는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경제적 생활조건에 집중하는 방식)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그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에게 걸었던 기대가 물거품이 되면서 그 반발로 나타난 경향이라는 점에서 이해할 만하다.
남아공과 브라질의 노동운동 경험은 한국 같은 신흥공업국 노동자들의 의식에서 ‘국민주의’(이하 포퓰리즘)의 요소들과 ‘노동자주의’(이하 노동조합주의)의 요소들이 우세하고,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정치도 이 둘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나라들에서 노동자들은 포퓰리즘 정치의 일정 요소들을 받아들였다가 포퓰리스트들이 아무것도 가져다 주는 게 없자 그에 반발해 다시 노동조합주의 방향으로 튀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정치적 쟁점들을 사실상 회피하고 노동조합적 쟁점들에 집중하는 걸로는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포퓰리즘 정치 쪽으로 설복되게 된다.
흔히 포퓰리즘과 노동조합주의 사이에서의 이러한 동요는 개혁주의 정당들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 개혁주의도 그러한 동요에 내포된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위해, 민주화 이행(移行)의 진정한 실체는 노동계급 조직들의 성장이라는 마르크스의 지적에 트로츠키가 덧붙인 다음의 지적을 상기할 만하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이 조직 노동계급의 세력을 하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 등 경제적 쟁점들을 놓고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사용자와 협상하고, 의회 선거나 대통령 선거 등에 관련된 정치적 쟁점들을 놓고는 개혁주의 노동자 정당이 활동하도록 허용하는 국가 형태다. 이는 정치 ‘투쟁’(의회에서의 협상도 일종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몰라도)과 경제 투쟁을 둘러싼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사회민주주의 정당 지도자들 사이의 분업으로서, 개혁주의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3. 개혁주의의 등장
앞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전환의 사회적 내용은 대중적 노동단체들(민주노총 조직들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이라고 했다. 개혁주의를 가리키려면 이 단체들에다 적어도 NGO들, 진보연대 등도 덧붙여야 한다.
이 개혁주의는 1987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다시피 했다. 그 때는 자유주의적 자본가들의 정당인 통일민주당이라는 자본가 계급의 개혁주의만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을 지지하는 일종의 DIY(do-it-yourself: 이하 ‘자발적’)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경향이 노동자·민중 운동 내에 존재했다. 당시에 ‘재야’로 불렸던 덕망가들 가운데 김대중과 김영삼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자발적 개혁주의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 개혁주의 경향은 노동자와 여타 천대받는 사회집단들 속에서 자발적 경향에 머무는 게 아니라 자의식적 개혁주의 지도자들에 의해 잘 조직된 명확한 세력으로 존재한다.
이 개혁주의는 촛불 운동이 1백만 거리 시위 수준으로 고양되는 데까지는 정치적 상징 구실뿐 아니라 집회 현장에서의 조직 등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운동이 정점에 도달하고부터는 온건파 NGO 지도자들이 앞장서 운동의 수위를 조절하려 노력했다. 온건파 NGO 지도자들은 운동의 규모가 더 커지지 않고 부드럽게 연착륙하도록 애썼고, 광우병 위험 쇠고기 문제라는 단일 쟁점에서 진정으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의제 확장’(요구 확대)은 실질적이라기보다는 형식적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1990년대 중엽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포스트모더니즘의 일종 또는 아류)으로 상당 정도 되돌아가, 그 자율주의적 개념들로써 자신들의 개혁주의를 정당화하려 애쓴다는 것이다. 가령 이명박의 대통령직 사임을 촛불 지지 세력 전체의 공동 과녁으로 삼아야 한다는 급진 좌파의 주장에 반대해 그들은 ‘운동을 어느 한 방향으로 가져가려 하지 마라’, ‘생활 속 운동이 중요하다’며 국가 문제를 회피했다. 의제 확장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것도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정체성 정치의 잔재라 할 수 있다.(물론 1990년대 중엽의 정체성 정치는 연대 자체를 거부하고 파편화를 선호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정체성 정치와 다르긴 하다.)
또한 대중의 자발성을 이유로 리더십과 그 리더십에 권한이 집중된 정치단체를 거부할 때도 포스트마르크스주의나 네그리-홀러웨이의 ‘자율적 사회운동’ 개념들이 동원된다. 물론 자발성은 훌륭한 것이다. 하지만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 제시 등 엄연한 리더 구실을 하면서도 리더십이 배제된 의미의 자발성을 얘기하는 것은 실제로는 대중의 선두가 아니라 후미를 쫓겠다는 것으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온건파 NGO
리더십이 스탈린주의 정당의 군대식·하향식 일방주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너희 평당원들과 대의원들은 맘껏 토론해라. 리더인 나는 내 길을 간다’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방식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투쟁 속에서 토론하고 다수결로 결정해 행동 통일을 하는 일종의 파업위원회식 리더십이 있을 수 있다. 서로 배우고 교육하는 리더십 말이다.(이와 관련해 〈맞불〉 90호에 실린 필자의 글, ‘현 촛불시위의 잠재력과 과제’를 참고하시오.)
실제로는 지도권을 행사하려 애쓰면서도, 지도력을 인정받기 위해 분투하는 다른 사람들의 노력은 ‘자발성’의 미명 하에 폄훼하거나 배격하는 것이야말로 개혁주의자들의 비민주적인 책략이거나 정치적 무능력자들의 자기 정당화일 뿐이다.
개혁주의 문제는 우리를 6월항쟁과의 네 번째 차이점 문제로 이끈다. 바로 급진 좌파의 취약성 문제다.
4. 급진 좌파의 취약성
6월항쟁은 지금 이 순간 촛불 운동이 겪는 탄압 수준보다도 더 혹심한 탄압 수준 하에서 치러졌다. 그런데도 거리 현장에서, 또 기층에서 수많은 혁명적 또는 급진적 좌파 투사들이 존재했기에 운동은 더욱 커져만 갔다. 대학 각급 학생회와 학회·동아리, 가톨릭과 개신교 민중교회, 노동운동 지원단체, 토론 서클 등 ‘풀뿌리’ 수준에서 곳곳에 혁명적 또는 적어도 급진적 좌파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모두 모종의 스탈린주의자들이었다. 특히 주체주의 계열이 다수였다. 하지만 모두 혁명가들이거나 급진파들이었다.
2008년 거리와 기층에서는 급진 좌파의 조직 규모가 협소했고, 사기도 높지 않았다. 이는 옛 소련 붕괴와 현 북한의 존재와 관계 있다. 그나마 개혁주의 지도자들과의 공동 행동에 대해 회의적인 종파주의로 말미암아 그 존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또, 상당수는 노동조합주의적 유산을 던져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종파주의
이들은 급진 좌파답지 않게 조직 노동계급의 결정적 중요성이라는 원칙을 현실에 적용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배자들이 쳐놓은 함정인 ‘폭력 대(對) 비폭력’의 딜레마에 스스로 빠져 기껏해야 전경버스 치우기나 넘어가기, 전경과 충돌하기 등 물리적 돌파구를 찾는 데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맞불〉 91호에 실린 필자의 글, ‘체제의 폭력에 맞서는 효과적 방법’을 참고하시오.)
그러나 한국 자본주의는 1960년 4월혁명 때의 경제력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 한국 경제의 규모가 세계 13위가 된 오늘날, 게다가 1980년대까지의 일당국가 하에서와 달리 (준準)부르주아 민주주의 하에서는 자본의 권력도 강화됐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거리 시위가 군대와 전의경 사병들의 사기 급저하 등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청와대 진격이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이는 그런 사병들의 부모·형제·자매·친구인 노동자들의 대중 파업을 통한 자본가 경제력 마비시키기가 없으면 별로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다. 참전한 전쟁의 패배 같은 정부의 정치적 대실수 같은 이례적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다행히도 한국 경제의 성장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대와 함께 노동계급의 힘과 조직도 성장했다. 급진 좌파는 이 점을 밑천 삼아 전진할 엄두를 얼마든지 낼 수 있다. 게다가 심각해지는 자본주의 경제 위기는 이들에게 쇄신의 기회를 제공한다.
5. 경제 위기
경제 상태의 차이가 사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1987년은 경제적으로 어떤 해였는가? 1960년대 초 산업화 드라이브가 걸린 이래 1980년대 중엽은 GDP(국내총생산) 증가율로 따진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최고조에 이른 때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1987년의 경제성장이 단연 최고 수준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1987년은 한국 자본주의의 최전성기이자 절정기였다. 반면에 촛불항쟁이 분출한 2008년은 IMF 공황 이래 위기와 제한적 회복이 되풀이되는 한국 자본주의의 쇠퇴기다. 이 시대는
(1) 지배계급의 위기 시대이다. 자본의 수익성 위기뿐 아니라 체제 신뢰성의 위기, 지배 이데올로기의 위기가 엄습하는 시기다. 물론 저항 이데올로기도 시험대에 오른다.
(2) 지배자들 간의 갈등 격화 시대다. 국내 지배자들 사이의 분열 등 정치 위기가 격화하고, 각국 지배계급 간 갈등이 전쟁을 낳는다. 지금까지는 주로 미국이 다른 경쟁 열강을 의식해 독재정권 하의 후진국을 공격하고 점령했지만, 앞으로는 다른 열강, 가령 러시아가 대리인을 내세워 미국과 서구의 대리인과 충돌을 불사할 수도 있다. 그루지야 사태에 이어 어쩌면 우크라이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3) 1987년은 노동계급 대중에게 희망이 있었다. 연공서열의 평생직장과 퇴직금이 보장돼 있는 듯했고, 국민주와 사원아파트 등도 있었다. 노동자들은 자기 자녀는 공부를 너무 못하지만 않는다면 자기가 겪은 고생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노동자들은 불안, 불확실, 뼛속 깊이 쓰라린 감정 등이 특징인 마음 상태에 있다. 이런 상황은 1987년이나 1997년 대파업보다 더 큰 투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활발하게 벌어지지는 않아도 화산처럼 대규모 분출을 기다리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노동조합이 정치 행동을 회피하는 한은 이런 일이 쉽사리 일어나지는 않는다.
(4) 개혁주의 정당들이 이득을 볼 것이다. 대규모 저항은 조직과 의식이라는 퇴적물을 반드시 남긴다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지적했다. 이번 촛불항쟁의 최대 성과는 우파 정권에 맞서서도 저항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저항 운동 참가자들이 얻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촛불항쟁을 통해 새로운 급진적 청년세대가 출현했다. 이들은 온/오프라인 모두에서 조직화할 것이다. 그리고 그 조직이 채택하는 이데올로기는 혁명적이라기보다는 단지 개혁적이거나 기껏해야 급진적이기 쉽다. 의식이 하루아침에 도약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정당들이 득을 볼 것이다.
하지만 개혁주의도 위기에 처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위기로 지배자들이 개혁 양보를 좀체 안 하려 할 뿐 아니라 기존의 개혁조차 도로 빼앗아가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개혁주의의 핵심 모순이다. 즉, 광범한 노동 대중에게서 한창 인기를 얻으며 상종가를 치는 때는 동시에 개혁주의자들이 공약을 이행하기가 가장 어려운 때이기도 하다.
(5) 급진 좌파에게도 기회가 온다. 앞의 (1)~(4)의 조건들은 급진 좌파에게도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다. 하지만 그저 순탄하기만 한 길은 아니다. 우여곡절과 패배, 사기저하가 그득한 우회로다. 게다가 북한을 핑계로 한 보안법에 근거한 국가 탄압마저 혁명적 좌파에게는 위협으로 존재한다.
이런 일련의 조건들은 급진적, 특히 혁명적 좌파가 일희일비하다가 공동전선 활동을 기피하고 종파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에 심란해질 수 있는 상황을 시사한다. 일례로 촛불 운동에 대한 비관적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4)에서 언급한 성과말고도 억압받는 대중 모두의 적인 이명박의 지지율이 촛불 운동으로 20퍼센트 대로 떨어진 것 자체가 크나큰 성과인데도 말이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하나 막지 못했다는 생각은 일면적이다. 촛불 운동은 이미 6월 10일 이후 ‘반정부 운동’으로 질(質)이 달라졌다. 우파와 지배자들 말대로 ‘변질’한 것이다.
게다가 의료 민영화 반대, 공기업 민영화 반대, 경쟁 몰입 교육 반대, 유가인상 제한 등 촛불 운동 참가자들이 자유발언 등을 통해 스스로 제기하거나 전폭 지지한 요구들과 의제들은 거의 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물가 상승으로 말미암은 생활고 문제에 민감한 관심을 나타낸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그들은 노동자들과 서민들이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반체제 운동”이라고 부른 것이 한국에서 이제 막 시작됐다. 열쇠는 비종파적이면서도 정치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근본적 사회변혁 운동가들이 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