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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윤석열의 쿠데타 기도가 노동계급 대중의 저항으로 좌절되자, 진보진영 일각에서 “민중 세력만이 자유주의의 상속자라는 책임을 떠맡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물론 윤석열이 자유민주주의, 즉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권위주의 정치 체제를 복귀시키려 할 때 대자본이나 정부 관료들이 “헌법에 규정된 자유주의적 권리들”을 방어하려는 의지나 의사가 없었던 것은 명백히 드러난 사실이다. 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회의사당 앞으로 달려 나가고 거리와 광장에 모여 민주주의를 지키려 한 것은 대부분 노동계급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중 세력”이 “자유주의의 상속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일시하고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이들은 민주당 같은 중도 세력과 동맹해 자유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을 노동계급의 당면 목표로 제시한다. 개헌을 통한 “국가기구의 민주화”를 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별 관계가 없었고, 오히려 종종 적대적이었다.

자유주의는 봉건제하에서 자본가 계급이 성장하면서 등장했다. 당시 자본가 계급은 봉건 귀족들에게 종속돼 있었지만 이미 착취 계급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봉건 귀족을 밀어내고 권력을 차지하려면 자신을 전체 사회의 대표자인 것처럼 보이게 해야 했다.

17세기 영국 혁명부터 18세기 미국 독립 혁명, 프랑스 혁명 등에서 이들은 “천부인권”이나 “자유, 평등, 우애” 같은 보편적이고 모호한 구호를 외치며, 자신들이 특정 계급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전체 인류를 대표한다고 내세웠다.

은폐되는 계급 불평등

그러나 이런 자유주의적 구호들은 항상 중대한 예외 조건과 회피 조항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들에게 완전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자본가들의 재산을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유라는 구호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착취할 자유를 누리려 했겠지만, 민중은 ‘착취에서 벗어날 자유’로 해석할 수 있다. 평등이라는 구호는 자본가의 지위가 봉건 귀족보다 낮지 않다는 것을 뜻했지만, 모두를 위해 부를 더 평등하게 분배하자는 약속으로 들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자본가들은 보통선거권의 확립 같은 민주주의 확대를 매우 두려워했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의회 통치를 추구하면서도, 선거 참여자나 대표자를 일정한 신분과 재산을 가진 자들로 한정하는 자유주의 정부를 수립했다.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핵심 구성 요소로 여기는 참정권뿐 아니라,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노동조합 조직의 자유, 파업권, 저항권, 법 앞의 평등 등과 같은 민주적 권리들은 자본가나 그 자유주의자 친구들이 선사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기나긴 싸움을 통해 쟁취해 낸 것이다. 보통선거권은 20세기 초중반이 돼서야 겨우 확립됐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서서히 확립된 것은 자본가들이 민주주의를 통제해 자기네 재산권을 노동계급 대중이 침해하지 않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을 차츰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는 핵심 생산수단이나 사회에 축적된 부가 여전히 선출되지 않은 자본가들의 수중에 남아 있으며, 자본주의적 경쟁 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점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스의 좌파 정당 시리자는 긴축 반대를 내걸고 집권했지만, 유로존 자본가들의 긴축 강요에 굴복하고 지지자들을 배신했다. 시리자 정부가 합의한 긴축안에 반대하는 그리스 노동자들 ⓒ출처 그리스 〈노동자 연대〉

아무리 선출된 정부라도 만약 자본가들의 재산권에 도전하려는 듯하면 투자 중단, 자본 도피 등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자본가들의 요구에 굴복했다. 게다가 의회나 대통령 등 일부 선출직을 제외하면, 대다수 국가기구(군대, 경찰, 사법부, 행정부 등)는 선출되지 않고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와 수천 가닥으로 묶여 있는 고위 관료들의 통제 아래에 있다.

따라서 아무리 이상적인 자유민주주의 정부라고 하더라도 자본가 계급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 안에서만 통치할 수 있을 뿐이고, 결코 진정으로 민중의 통치를 구현할 수 없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사회민주당 같은 좌파 정당들도 체제의 이윤 논리를 가장 우선에 두고 노동자들을 공격해 왔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자유민주주의 정치 일반에 대해 느끼는 환멸은 더 심해졌다.

게다가 지금 자본주의는 세계적인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고, 이 위기가 다양한 경제·사회·정치적 긴장을 낳고 있다. 지배자들은 통상적인 수단으로 위기를 통제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파시즘이나 군사독재 같은 공공연한 독재를 용납할 수 있다. 이는 세계 각지에서 극우와 파시스트 세력들이 힘을 키워 나가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번 윤석열의 쿠데타 기도도 세계적인 극우·파시스트 세력의 준동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단지 자유민주주의로 축소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자유주의가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실현할 수 없었던 이유는 법적·정치적으로 자유와 평등을 도입했을지라도 실제 사회에서 대다수 사람들을 부자유와 불평등 속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가 여전히 계급 사회로 남아 있기 때문에 진정한 민주주의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자유민주주의는 자본가 계급한테서 얻어 낸 양보이기 때문에, 이를 파괴하려는 극우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한 대중의 투쟁은 자유민주주의 강화에 머무르지 말고 경제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노동자 대중이 실질적 결정권을 가지는 노동자 민주주의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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