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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 20년의 역사:
벼랑으로 내몰며 생떼를 부려 온 미국

지난 20여 년 동안 북한은 끝내 핵무기 개발로 나아갔다. 노동자를 억압·착취하며 군사적 경쟁에 매달리는 것은 북한이 남한과 다를 바 없는 체제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북한을 그런 벼랑 끝으로 내몬 것은 미 제국주의였다는 점을 봐야 한다.

북한 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란이 된 시점은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은 탈냉전 이후 자신의 패권이 왜 존속돼야 하는지를 세계에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은 과거 소련을 대신할 악마들을 발명해내기 시작했다. 이라크와 북한이 낙점됐다.

북한 핵과 미사일은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와 이명박의 ‘비핵 개방 3000’이 만든 것이다. ⓒ사진 출처 청와대

북한 핵 문제는 북한을 악마화하는 데 핵심 코드였다. 그때까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북한의 영변 핵 시설이 갑자기 국제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소련 해체 이후 북한은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합류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유엔 남북한 동시 가입을 추진했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도 수용했고, 심지어 주한미군 주둔도 인정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 핵을 문제삼아 북한을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미국은 북한 핵 검증을 빌미로 북한과 일본의 관계정상화 시도도 가로막았다.

미국은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에서 합법적으로 인정되는 핵재처리까지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NPT 가입도 안한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핵무기 제조를 도우면서 말이다.

또, 미국은 틈만 나면 북한더러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하라고 했다. 핵미사일을 탑재한 미국의 핵잠수함이 주기적으로 남한에 입항하면서 말이다.

어쨌든, 북한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북한의 1992년 IAEA 사찰 수용도 미국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IAEA는 사찰 결과가 부족하다며 미신고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했다. IAEA 역사에서 전례가 없던 특별사찰 요구를 북한은 거부했다. 북한은 1991년 걸프전 당시 IAEA 사찰관들이 폭격 대상이 될 이라크의 주요 시설의 정보를 미국에 넘겨준 사실을 기억했던 것이다.

그러자 미국은 북침 전쟁연습 중단 약속을 파기했고, 북한은 급기야 NPT 탈퇴 선언을 했다. 이에 대응해 미국은 1994년 영변 핵시설을 폭격하려 했다. 끔찍한 재앙 일보직전까지 갔던 이른바 1차 북핵 위기는 가까스로 제네바 합의로 봉합됐다. 북한이 핵프로그램을 동결하는 대신 핵무기로 전용이 어려운 경수로를 북한에 건설해 주겠다는 것이 합의의 골자였다. 고(故) 리영희 교수는 이것을 “북한의 군사적·정치적 후퇴”라고 분석했다.

북한은 제네바 합의 이행에 협조적이었다. 미국 국무부조차 “전체적으로 북한의 협력은 양호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이었다.

미국이 북한에 요구하는 목록은 끝이 없었다. 북한 미사일 개발과 그 수출 문제, 인권 문제, 비자금 조성 문제, 심지어 재래식 무기 감축 문제 등등. 이는 북한을 완전히 발가벗길 때까지 지속될 것이었다.

미국은 그러면서 자신들의 약속 이행은 사사건건 지연시켰다. 1996년에는 제네바 합의와 전혀 무관한 북한의 미사일 수출 문제를 꺼내 들고는, 경제 제재를 풀 수 없다고 말을 바꿨다. 1998년에는 근거도 없이 금창리 핵시설 의혹을 제기하며 사찰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인공위성(또는 탄도미사일)을 발사했고, 이듬해인 1999년 서해에서는 남북 경비정 간에 교전이 발생했다.

깡패짓

이 위기는 북한이 금창리 시설 사찰을 수용하고(그 결과 핵시설이 아님이 판명됐다), 미사일 협상이 진전되면서 봉합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00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었다.

사실 미국이 금창리 핵시설 의혹을 제기하고, 미사일 문제를 제기한 것은 대중국 견제 정책인 미사일 방어(MD) 체제 구축을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이런 소동을 이용해 일본을 MD 체제에 끌어들일 수 있었다.

2012년 6월 제주 남방 해역에서 진행된 한·미·일 연합 해군 훈련. ⓒ사진 출처 미해군

2001년 조지 부시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사실상 모든 대북 협상을 동결시켰다. 북한은 미국의 대테러 국제공조에 협력할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12월 작성된 ‘핵태세검토보고서’에서 부시는 북한을 핵무기 선제공격 대상으로 올려놨다. 이는 명백히 제네바 합의를 깡그리 짓밟는 행위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듬해 여름 ‘2차 서해교전’이 발발했다.

부시가 새로운 북한 압박 카드로 제시한 것은 이른바 2002년 10월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의혹이었다. 당시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의 진위 여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당시 한반도에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이 존재했던 것은 확실하다. 미국한테는 얄궂게도 2000년에 남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추출했던 사실이 뒤늦게 발각됐던 것이다. 그렇다고 남한이 경제 재제와 가혹한 사찰압력을 받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어쨌든 부시의 새로운 의혹 제기는 두 가지 성과를 거뒀다. 첫째는 이라크 침략에 대한 의회 동의를 앞두고 ‘대량살상 무기 색출 필요성’을 환기시킨 것이다. 둘째는 일본의 대북 접근 시도에 다시 쐐기를 박는 것이었다.

부시의 깡패짓에 직면해 북한은 2003년 1월 NPT를 다시 탈퇴했다. 그 후 한동안 북한 핵 문제는 교착 상태로 유지된다. 부시는 이라크 전쟁에 전념했다.

이런 와중에 북한은 핵능력 강화에 주력했다. 북한한테 이라크 전쟁의 교훈은 명백했다. 즉, ‘만약 이라크가 러시아제 야채찜통(미국은 이를 핵시설의 일부라 주장했다가 망신당했다) 대신에 진짜로 핵무기를 보유했더라면 침략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이라크는 대통령궁까지 샅샅이 사찰을 받은 나라인데도 침략을 당했다.

결국 북한은 2005년 핵무기 보유 선언을 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열린 6자회담에서는 9·19 공동성명이 발표돼 다시금 대화의 국면으로 이행하는 듯했다. 그러나 9·19 합의는 그야말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미국의 새로운 의혹 제기(이른바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을 통한 북한의 비자금 조성 문제)로 휴짓조각이 돼 버렸다.

북한은 2006년 탄도 미사일을 발사했고, 이에 따른 제재에 맞서 결국 최초의 핵실험을 강행했다. 그 뒤 부시는 이른바 2·13합의, 10·3합의를 거쳐 상황을 봉합했다. 이는 진창에 빠진 이라크 전쟁과 이에 따른 미국 힘의 한계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봉합도 3년을 넘기지 못했다. 부시의 뒤를 이은 오바마 역시 합의 이행은커녕 ‘선 핵사찰 후 대화’를 고수하면서 상황을 원점으로 되돌려 버렸다.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은 그동안 판에 박히게 뒤따르던 후속 대화로도 이어지지 않았다. 미국은 심지어 중국의 6자회담 재개 요구조차 묵살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이 지역의 긴장은 급속히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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