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예멘 난민들의 고난:
난민보다 국민이 우선이라는 포퓰리즘 반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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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피해 한국을 찾은 예멘인들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 일자리는 구했지만 숙소로 돌아갈 차편을 구하지 못해 화장실에서 노숙한 사례, 인건비도 못 받고 해고됐지만 주변의 비난이 두려워 항의도 못 하는 사례 등 제주도에서 예멘인을 돕는 커뮤니티에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올라오고 있다.
그들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난민 100여 명이 한데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 숙박비를 절반만 받은 숙박업소 주인, 숙박비 수십만 원을 남몰래 대신 내 준 사람, 난민과 그 자녀들을 자기 집으로 들이거나 사비를 들여 아픈 난민을 돌보는 사람들까지. 예멘 난민들이 제주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지 두 달이 되도록 큰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숨은 노력 덕분이다.
숨은 노력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언론은 난민과 무슬림에 대한 악의적 보도를 내보내고 있다. 난민을 범죄자 또는 국가 경제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묘사하는 우익도 인터넷을 중심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런 여론몰이 속에 난민 배척을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에 50만 명 넘게 서명했다. 6월 30일 저녁 서울 도심에서 난민 수용 반대 집회를 하겠다는 블로그도 나왔다.
정치권은 대부분 눈치만 살피며 침묵하고 있다. 원내 정당들 가운데 중앙당 차원에서 난민에 대한 논평을 낸 곳은 여태 한 곳도 없다.(원외 정당인 노동당과 녹색당만이 난민 지원을 촉구하는 논평을 냈다.) 국민청원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지만 청와대는 답변 시한을 8월 13일로 미뤘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인도주의적 접근이 우선”이라고 밝힌 것은 모호하므로, 두고 볼 일이다.
한편, 법무부 차관은 6월 29일 대책회의를 소집한 이후 주되게 난민 신청을 억제하고 ‘가짜 난민’을 막겠다는 대책을 발표했다. 난민들이 기대하는 출도 금지 해제는 없었다. 이런 ‘대책’은 난민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만 부추길 뿐이다.
진정 필요한 대책은 예멘인들이 스스로 안정된 삶을 꾸릴 수 있도록 제주도 밖 이동을 허락하고 난민 지위를 신속하게 부여하는 것이다. 생계비 지원처럼 현행법이 보장하는 지원도 실제로 제공돼야 한다.
기만적인 난민 비방들
포퓰리스트들은 ‘난민이 아니라 국민을 챙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난민 수용과 대중의 안전·경제적 이익이 대립한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주민 범죄를 연구해 온 형사정책연구원 최영신 연구위원은 이렇게 지적했다. “내국인과 외국인 전체 범죄의 인구 10만 명당 검거인원을 비교해보면, 내국인의 검거인원지수는 매해 외국인보다 현저하게 높[다.]”(형사정책연구원 이슈페이퍼 2017 제4호) 이주민 중에서도 체류 지위가 불안정할수록 범죄율이 더 낮다. 낯선 지리, 도피하거나 변호받기에 불리한 조건, 의사소통 상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오히려 그런 처지 때문에 난민들은 불법 행위나 인권 침해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피해자
많은 언론이 서방의 우익 단체나 황색 신문을 인용하며 난민이 연루된 특정 사건을 선정적으로 보도한다. 그러나 독일에서 그렇게 보도된 난민 범죄 138건을 분석한 결과, 41건만 실제로 벌어졌고 그중에서도 난민이 실제로 연루된 것은 20건에 불과했다.
바른미래당 국회의원 이혜훈은 ‘서울대에서 무슬림 학생들이 기도를 한다며 수업을 방해했고 이를 제지하는 교수를 위협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작 언론이 사실관계 설명을 요구하자 얼버무렸다.
일부 언론은 ‘난민에 의한 국제범죄가 심각하다’고도 떠든다. 그런데 그 ‘국제범죄’라는 것은 거주지가 법적 기준을 갖추지 못했다거나 난민 사유가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열악한 난민 지원과 세계적으로 낮은 난민 인정률이 난민에 ‘의한’ 범죄로 둔갑한 것이다.
난민들이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주장도 사실무근이다. 흔히들 일자리 수는 정해져 있고 난민이 늘면 청년 몫이 줄어든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난민들도 소비를 하고,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낸다.
일자리
1985~2015년 30년 동안 서유럽 15개국에 유입된 난민들이 미치는 경제적 효과를 분석한 연구는 “난민들은 거시 경제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국내총생산 증가, 실업률 하락, 세수 증대에 도움을 준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일자리 위기의 진정한 원인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이윤율이 낮아서 기업들이 생산과 인력을 줄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저출산과 청년 실업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보라.
한국 입국을 알선하는 난민 브로커의 존재가 ‘가짜 난민’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다. 난민들은 한국 정부가 무비자 입국 금지 등 난민 유입을 차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브로커의 도움을 구한다.
난민 때문에 위기에 빠진 유럽?
이처럼 논리와 사실관계 모두 엉성한 주장에 사람들이 현혹되는 데는 ‘유럽이 난민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는 오해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럽을 찾은 난민은 유럽 인구의 극소수에 불과하고, 지난 3년간 난민 100만여 명을 받아들였다는 독일에서도 인구의 2퍼센트 수준밖에 안 된다. 유럽보다 인구도 적고 가난한 레바논, 우간다 같은 나라들이 난민을 훨씬 더 많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유럽은 능력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난민을 수용한다고 비판한다.
유럽에서 난민이 사회 혼란 원인으로 책임 전가되기 쉬운 이유는 따로 있다. 유럽의 무슬림은 지독한 인종차별 때문에 다른 인구 집단보다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고 빈곤층으로 전락할 위험이 높다.
영국의 무슬림은 나이와 숙련도가 같은 크리스천 백인보다 일자리를 구할 확률이 70퍼센트가량 더 낮다. 무슬림은 다른 인구 집단보다 자택 보유 비율이 낮은 반면, 수감될 확률은 훨씬 높다. 영국과 프랑스의 무슬림은 인구의 각각 4, 7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전체 수감자 중에서는 각각 13퍼센트, 70퍼센트를 차지하고, 이는 미국의 흑인 수감자 비율보다도 높다.
서구 지배자들은 무슬림의 열악한 처지를 개선하기는커녕, 그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부추기고, 차별을 제도화하고, 그 부정적 이미지를 새로 유입되는 난민에게도 씌우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유럽 위기의 진정한 원인은 드러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유럽 지배자들이 미국과 함께 중동에서 벌이는 전쟁에 있다. 유럽을 찾는 난민은 그 피해자들이다.
서구 지배자들은 무슬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부추김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제국주의 정책(무슬림이 다수인 중동·북아프리카를 상대로 집중적으로 자행됐다)을 미화하고 실업, 복지 삭감 등 경제 위기의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
유럽을 보라면서 한국의 난민을 비방하는 우익은 유럽 지배자들의 인종차별과 무슬림 혐오를 한국에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난민을 환영해야 한다
난민을 환영해야 하는 첫째 이유는 ‘인도주의적’ 위기를 막기 위해서다. 난민들은 전쟁이나 경제적 위기를 벗어나고자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다.
전 재산 200만 원을 들고 요르단, 카타르, 말레이시아를 전전긍긍하다 한국 제주도까지 왔다는 한 난민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우리를 원치 않았다. … 미국도, 유럽도, 사우디아라비아도 우리를 원치 않았다. 제주에 대해 들었을 때 ‘저기 가면 안심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이미 고향에서 8000킬로미터 떨어진 한국에서 내쳐진다면 이들은 더 위험하고 먼 길을 택할 것이다. 유럽이 군함까지 동원해 단속하고 민간단체의 난민 구조까지 탄압하는 올해에도 벌써 1000명이 넘는 난민이 지중해를 건너다 목숨을 잃었다.
난민을 환영하는 것은 여성, 성소수자 등 다른 차별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방어하는 데서도 중요하다. 오늘날 서방 각국에서는 극우가 난민 마녀사냥을 자양분 삼아 성장하면서 유대인·성소수자 배척, 여성차별 부추기기도 함께 자행하고 있다.
이런 마녀사냥은 경제 위기의 책임을 전가하고 노동계급 내부를 이간질해 약화시키려는 것이다. 특히, 서구 지배자들은 난민이나 무슬림의 위협을 과장하며 진정한 쟁점인 실업이나 복지 부족으로 인한 고통, 군비 지출 증대, 민주적 권리 침해 등을 회피하고 또한 노동계급 내 분열을 조장해 왔다.
경제 위기와 높아지는 청년 실업 때문에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지는 지금, 이런 책임 전가와 이간질에 단호하게 반대해야 한다. 난민을 지원하고, 조직하고, 함께 싸우는 것은 가장 효과적인 대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