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베네수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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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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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엔 산하 국제이주기구(IOM)는 2014년부터 지금까지 베네수엘라를 탈출한 난민이 전체 인구의 7퍼센트 정도인 약 230만 명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대부분 주변국에서 저임금 노동에 종사하며 번 돈을 베네수엘라에 남은 가족들에 송금한다.
이는 베네수엘라의 처참한 경제 상황의 단면이다. 최근 5년 동안 베네수엘라에서 1인당 실질 소득은 40퍼센트, 생필품 공급량은 80.9퍼센트 줄었다. 물가 상승도 문제다. 올해 물가가 18일마다 두 배씩 오른다고 한다. 기반 시설도 매우 열악하다. 올해에만 이미 7000건의 정전이 있었고, 공공기관에도 1주일에 3~4일 전력이 공급되지 않는다.
경제 불안과 함께 정치·사회 불안도 커졌다. 범죄율이 세계 2위로 치솟았다. 그나마도 (한 해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대규모 소요 사태, 우파의 군부대 습격, 대통령 암살 기도 등 정치적 범죄는 통계에서 제외했는데도 그렇다.
미국 지배자들은 이 비극을 자기네 목적에 맞게 이용하느라 여념이 없다. 도널드 트럼프는 9월 25일 유엔 총회 연설에서 “사회주의 때문에 산유국이 파산하고 국민들이 가난해졌다”면서, 베네수엘라 경제를 더한층 수렁으로 밀어넣을 “추가 경제 제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며칠 전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는 “베네수엘라인들이 [현 정부에 맞서] 한마디 하게 할 ... 일련의 행동”을 미국 정부가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폼페이오의 전임자 렉스 틸러슨은 더 노골적이다. “베네수엘라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군부가 변화의 주체였던 역사적 사례가 드물지 않다.” 쿠데타를 암시하는 발언들이다. 미국 지배자들은 베네수엘라의 위기를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정부들을 흔들 기회로 보고 있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 집권당이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역대 미국 정부는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군사 행동(파나마 등), 경제 제재(쿠바 등), 쿠데타 획책(칠레와 온두라스 등) 등을 벌였다. 미국은 늘 “민주주의와 번영”을 말하지만 라틴아메리카 민중은 학살, 빈곤, 독재를 겪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베네수엘라의 자본가들과 우파가 의도적 품귀 현상 조장 등으로 위기를 증폭시켜 왔다.
그럼에도, 차베스 때부터 추구된 전략의 문제도 있다. 좌파 측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점에서 이것이 오히려 중심 문제이다.
도중에 멈춘 “21세기 사회주의”
1980년대 세계경제 불황으로 외채 위기가 라틴아메리카를 휩쓸었다. 세계은행과 IMF가 요구한 복지 삭감, 구조조정, 사영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에 대륙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실업 상태에 빠졌다. 15퍼센트가 극빈층으로 내몰렸다. 반면 자본가들은 돈을 갈퀴로 긁어모았다. 불평등이 극심해졌다.
라틴아메리카 여러 곳에서 이에 항의하는 대중 투쟁이 벌어졌다. 에콰도르·볼리비아·아르헨티나에서는 대규모 운동이 등장해 정권을 교체했고, 브라질·우루과이에서도 신자유주의 반대를 약속한 정부가 들어섰다.
1989년 2월 베네수엘라를 달군 ‘카라카소’는 이런 대중 항의의 정점이었다. ‘카라카소’는 국내 유가(와 그에 연동된 대중교통 요금)가 하룻밤새 갑절로 뛴 데 분노한 저임금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앞장선 대규모 항의 운동이었다. 사흘 동안 들불처럼 번진 항쟁은 주방위군과 충돌했고, 공식 통계로만 1500명 이상이 학살당하며 종료됐다.
수십 년 동안 번갈아가며 정권을 잡던 베네수엘라의 양대 우파 정당은 물론이고, 작고 종파적이던 스탈린주의 좌파들도 사태를 전혀 주도하지 못했다. ‘카라카소’의 분노를 대변한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에 쿠데타를 일으킨(그러나 실패한) 좌파 청년 장교 우고 차베스였다. 차베스는 1998년 중도파와 좌파를 아우르는 선거연합을 결성해 대권을 잡았다.
차베스는 ‘볼리바르식 혁명’을 공약했지만 개혁이 부딪히는 본질적인 한계로 실제 정책은 온건했다. 차베스가 1999년 제정한 새 헌법은 이전보다는 노동자 권리를 옹호했지만, 자유 시장도 옹호했다. 차베스는 부패를 척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수십 년 동안 경제를 지배해 온 부패의 복마전인 국영석유기업 PDVSA은 건드리지 않았다. 집권한 차베스의 슬로건은 “가능한 한 많은 시장, 필요한 만큼 충분한 국가[개입]”이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지배자들은 차베스의 온건 개혁조차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2002년 4월 우파 군 장교들이 차베스를 납치해 감금하고, 한 기업인이 대통령을 자처하고 나서 차베스의 개혁 조처들을 백지화하려 했다. 쿠데타였다.
학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다수가 빈민인 수십만 대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 거대한 항의 운동에 밀린 우파는 사흘 만에 쿠데타를 접었다.
같은 해 말 자본가들은 직장 폐쇄로 베네수엘라 경제를 압박했다. 차베스에 대한 압박과 도전이었다. 이번에는 노동자들이 노동자위원회를 건설해 폐쇄된 공장을 재가동하고 대중교통과 생필품 운송을 조직해 이를 저지했다.
노동자 대중의 힘으로 차베스는 기사회생했고, 우파는 기세를 잃었다. 차베스 자신도 좌경화했다. 여느 개혁주의 지도자들과는 다른 면모였다.
이제 차베스는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전 세계 좌파들이 큰 영감을 얻었다. 그의 “21세기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와 대중의 참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스탈린주의와 확실히 달랐고, 미국 제국주의에 단호하게 반대했다. 차베스는 유엔 총회 연설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와 그의 이라크 침공을 맹비난했다. 전 세계 반전운동은 고무됐다. 차베스는 볼리비아·에콰도르 등에서 집권한 “새로운 좌파” 정부들과 연계하려 했다.
차베스는 국내에서는 석유 수출 수익에 기대어 운영되는 사회 복지 프로그램 ‘미션’을 발족했다. ‘미션’은 베네수엘라 인구의 절반에 이르던 빈곤층의 삶을 약간 개선했다. 의료·교육·주택 등에서 지표가 어느 정도 개선됐다.
차베스의 좌파적 개혁주의 전략
그러나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는 국가를 이용해 위로부터 개혁을 이루겠다는 전략에 기초한 것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여러 난점을 불가피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차베스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에 도전하지 않았다. 차베스는 ‘미션’을 추진하면서도 민간 기업의 고수익을 여전히 보장했다. 전체 경제에서 민간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늘었다. 자본가들의 ‘사적 소유’는 온전히 존중됐다. 우파들이 ‘사회주의’적이라며 맹비난한 차베스의 국유화 조처는 경영 위기에 처한 기업에 유상으로 보상하며 인수하는 수준에 그쳤다.
차베스와 국가 기구의 관계도 문제적이었다. 차베스 집권 시기에 국가 관료의 규모는 네 배로 늘었는데, 그중에는 부패한 기회주의자들이 많았다. ‘볼리부르게스’(볼리바르식 혁명으로 탄생한 부르주아들)라는 신조어가 생길 지경이었다. 차베스는 대중 운동과 하등 연관이 없는 군 장성 출신자들을 내각에 많이 기용했는데, 그중에는 2002년에 쿠데타를 주모했던 장성들도 있었다. 차베스는 쿠데타가 끝난 직후 ‘대화합’이라는 명분으로 이들을 사면 복권시키기도 했다.
차베스는 빈민과는 대체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노동자와는 미묘한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차베스는 노동자들이 기존의 어용 노총에 맞서 전국노조연합(UNT)을 설립하는 것을 지지했다. 하지만 석유 산업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늘리자는 요구를 적극 가로막았고, 때로는 노조의 단체교섭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차베스가 2006년 창립한 베네수엘라통합사회주의당(PSUV)은 차베스의 그런 전략을 잘 표현하는 당이었다. 이 당의 당원은 600만 명에 이르렀지만, 전혀 노동자 대중의 정당이 아니었다. 쿠바 공산당을 모델로 한 PSUV는 차베스의 정책을 아래로 전달하는 상명하달식에 국가 관료와 기회주의자들이 가득한 관료적 중앙집권 정당이었다.
모순의 표출
유가 하락으로 개혁의 재원이 부족해지자, 차베스의 전략이 내포하고 있던 모순이 드러났다.
전체 수출의 95퍼센트에 이르는 석유 수출 수익이 줄어들면서 경제가 정체 상태로 빠져들었고,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려는 다각화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미션’은 가장 활발히 운영될 때조차 그 혜택을 받는 사람이 전체 국민의 25퍼센트 정도에 그쳤는데, 이제는 그조차도 힘들어졌다. 빈곤율이 이전 수준으로 급격히 상승했다.
급격히 심해진 경제 위기 때문에, 민간 자본가들의 수익성과 경영권을 보장해 주면서 개혁을 제공하려던 좌파적 개혁주의 전략이 벽에 부딪힌 것이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사후 후임자 니콜라스 마두로는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고난의 행군’을 요구하면서, 우파와 자본가들에게는 ‘현실적’인 타협책을 제시하려 애썼다. 마두로 정부는 석유 수출 수익을 보존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부문 노동조합의 단체협약권을 부정하고 파업과 점거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카라카소’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이 목적인 우파는 그런 타협에 응하기는커녕, 나라를 파탄 내서라도 권력을 수복하고자 한다. 기업주들의 대규모 직장 폐쇄, 이웃한 친미 국가 콜롬비아의 무장 세력과 연계한 폭력 사태가 일상이 됐다.
오늘날 베네수엘라는 “혁명을 절반만 성공시키는 것은 자기 무덤을 파는 일”이라는 프랑스 혁명의 한 지도자 생쥐스트(1794년 사망)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차베스는 대중 운동의 분출에 힘입어 강력한 개혁을 추진할 동력을 얻었지만, 노동자 대중을 국가를 통한 개혁의 보조 수단으로 이용하려다 개혁의 동력 자체를 잃게 됐다.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에서 흔히 보이듯 노동계급의 조건을 공격하는 ‘노동자·서민의 정부’로 귀결된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 라틴아메리카를 휩쓸었던 좌파 정부 물결이 자국 내 우파에게 정권을 도로 빼앗기거나 스스로 추진했던 개혁을 뒤집고 노동자와 서민의 처지를 공격하며 좌초한 경험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21세기 사회주의’, 즉 ‘볼리바르식 혁명’은 반면교사
위에서 살펴봤듯 오늘날 베네수엘라는 끔찍한 수렁에 빠져 있다. 이미 IMF는 베네수엘라의 2018년 물가 인상율이 100만 퍼센트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 베네수엘라인 경제학자의 지적처럼, 추락 속도가 “분쟁 기간의 이라크와 시리아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그 여파는 베네수엘라 서민들에 직격탄이 되고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식량 부족 때문에 베네수엘라인 1인당 평균 체중이 2017년 한 해 동안에만 8퍼센트가 줄었다.
이런 끔찍한 상황에도 마두로 정부는 580억 달러(한화로 약 64조 원)에 이르는 외채는 꾸준히 상환하고 있다.(이는 미국이 베네수엘라에 가한 경제 제재 때문에 부채를 조정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럴 재원으로 노동자와 서민의 생계를 보장해야 하지 않느냐는 불만이 당연히 제기되고 있다.
자본가들과 우파는 베네수엘라를 혼돈 상태로 만들더라도 권력을 되찾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이 권좌에 복귀한다면 대규모 긴축과 서민 생활수준 공격은 물론이거니와, 정치적 반대파들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 벌어질 것은 명약관화하다. 국가의 상태가 끔찍한데도 마두로 정부에 대한 지지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베네수엘라는 (우파의 거짓말과 달리) 노동자와 서민의 아래로부터의 힘과 투쟁을 더 고무하고 키우지 못했기 때문에, 즉 기존 자본주의 국가를 통해 개혁을 성취하려다가 스스로 덫에 빠진 잘못된 전략 때문에 오늘의 파국에 직면해 있다. 좌파는 이 경험에서 배워 혁명적으로 좌선회해야 한다.
진정한 사회주의는 위로부터 건설될 수 없다. 그 정의 상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므로 그것은 아래로부터 건설돼야 한다. 이것은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가 가지 않은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