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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반신자유주의 대안 논쟁 ②:
교착 상태에 빠진 베네수엘라 혁명

나는 2005년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 세계사회포럼에 참석한 차베스를 멀찍이서 본 적이 있다. 당시 룰라와 차베스가 하루걸러 포르투알레그레 체육관에서 연설을 했고, 수만 명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룰라가 일부 참석자들의 야유를 받은 반면 차베스는 모든 사람들한테서 박수를 받았고 청중도 차베스 연설 때 훨씬 많았다.

2009년 초 개헌 투표 지지를 호소하는 차베스

룰라는 브라질 민주화 투쟁에서 영웅적 구실을 한 노동자 출신이고 차베스는 군인 출신으로 원래 룰라와 같은 확고한 좌파적 기반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차베스가 세계사회포럼 참가자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게 된 것일까?

룰라는 2003년 집권하면서 전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승했기에 급격하게 지지자들의 환멸을 샀다. 그러나 차베스는 이날 연설에서 ‘21세기 사회주의’를 외쳤다.

차베스 지지자들 중 일부는 차베스가 집권할 때부터 룰라와 달랐다고 주장한다.

차베스는 1958년부터 베네수엘라를 통치한 양대 정치 세력, 즉 민주행동당(AD)과 기독사회당(COPEI)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실망한 대중의 반발 — 그것은 1989년 ‘카라카소’라는 대중항쟁으로 나타났다 — 덕분에 집권했다.

그러나 사실, 차베스는 집권하기 전 자신의 모델이 영국 노동당의 ‘제3의 길’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그래서 초기 차베스의 정책을 보면, 그는 2003년 룰라 정부와 비교해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차베스는 한편으로 빈민 정책을 확대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베네수엘라의 특권층과 갈등을 빚지 않으려 했다.

일부 차베스 지지자들은 1999년 헌법을 차베스의 ‘혁명성’을 입증하는 사례로 자주 인용한다. 이 헌법이 좀더 진보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의 직접 민주주의를 약속한 구절을 당장 실현하려는 노력은 뒷받침되지 않았을 뿐더러(주민자치위원회는 2006년부터 본격화), 사유재산을 엄격히 보호하는 조항도 포함돼 있었다.

쿠데타와 민중 저항

그는 2000년 신헌법 아래 치른 대선에서 1998년보다 표를 4퍼센트 더 얻은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사회·경제적 개혁에 착수했다. 대표적인 것이 2001년 11월 대통령령으로 49개 법을 통과시킨 것이었다. 당시 차베스는 신중함을 보여, 이 법안들 중 상당수는 2004년에 가서야 실제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정치는 친차베스와 반차베스로 급격하게 양극화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차베스가 통과시킨 법안에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PDVSA)의 수입에서 정부 몫을 늘리고 정부 통제를 강화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조처는 정부 몫을 15퍼센트에서 30퍼센트로 늘리는 정도였는데도, 베네수엘라 지배자들은 철저히 특권층의 이익에 복무해 온 PDVSA의 사소한 변화도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2001년 말부터 거리에서 반정부 우익 시위를 시작했다. 그러나 차베스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그에게는 대중조직 ‘볼리바리안 서클’이 있었지만 선거 운동 조직의 성격을 넘어 대중 운동 조직으로 발전시키려 하지 않았다.

우익은 차베스의 약점을 봤다고 생각했고 2002년 4월 12일 군사 쿠데타로 차베스를 몰아냈다. 이때 우익과 심지어는 차베스 측근 인사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베네수엘라의 평범한 민중 수십만 명이 차베스의 복귀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것이었다. 4월 13일 차베스는 대통령 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돌아온 차베스가 처음 한 일은 PDVSA의 사장으로 친우익 인사를 임명하는 등 쿠데타 세력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시 한번 차베스의 약점을 봤고 그해 말 PDVSA와 주요 기업을 포함하는 전국적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 차베스를 내쫓고 대중의 급진화에 쐐기를 박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차베스가 조직하지 않은) 기층의 반격을 받았는데, 특히 중요한 것은 PDVSA 노동자들이 쿠데타와 사보타주에 동조한 우파 노조 지도부의 명령을 거슬러 직접 시설을 접수하고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차베스는 이런 기층 투쟁의 압력 속에서 급진화했다. 2003년 4월 우익의 패배가 명백해지자 미시온(교육, 보건, 고용 등을 담당한 사회복지 시설)을 근간으로 하는 급진적 사회정책들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차베스는 PDVSA 재국유화를 진행했고, 여기서 들어오는 수익을 이용해서 25개 미시온들을 설립했다.

차베스가 반신자유주의 대안을 추진하게 된 것은 대중투쟁이 지배자들을 두 번이나 완패시키고 세력균형을 완전히 바꿔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차베스는 대중의 에너지를 흡수해 2004년 말에는 ‘볼리바르식 혁명’, 또는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데까지 나갔다.

21세기 사회주의

한편, 국제적 상황도 베네수엘라 정부가 반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기에 유리하게 변했다. 일단 미국이 이라크에 발목이 잡혀 자기 뒷마당에 손을 대기 힘들어졌다. 또, 전쟁 여파로 각국이 비축 석유량을 늘리고 특히 중국 등이 고도성장을 위해 다량의 석유를 구매하면서 유가가 크게 올랐다.

무료 병원을 대거 설립한 미시온 바리오 아덴트로

미시온은 큰 성과를 거뒀다. 절대적·상대적 빈곤이 모두 줄었고 단지 소득 격차만이 아니라 교육, 주거, 의료, 식량 등 다양한 방면에서 진전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쿠바 의사들을 대거 초빙해 방방곡곡에 의료원을 설립한 미시온 ‘바리오 아덴트로’일 것이다.

미시온 프로그램의 규모나 성과는 룰라 정부의 빈민 정책 ‘성과’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반시장적 개입이 시장에 의존한 것보다 빈곤 퇴치와 복지 확충에 훨씬 더 효율적임을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우파들은 여전히 베네수엘라의 부와 생산수단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고, 차베스가 운영하는 기존 국가 기구는 그런 특권 보호에 헌신해 온 인사들로 가득했다. 베네수엘라 국가 기구가 다른 자본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자본의 이윤 창출을 돕는 방향으로 구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베스는 기존 국가 기구의 저항을 피하고자 기존 국가 기구와 독립적으로 미시온을 운영했고 여기에는 지역 활동가와 대중의 자발적 참여가 필요했다.

실제로 기층 미시온의 경험을 다룬 르포를 찬찬히 읽어 보면 헌신적인 지역 활동가들과 구성원들의 눈물 나는 노력을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1970년대 유가 호황기 베네수엘라 포퓰리즘 정부나 브라질 룰라 정부의 복지 정책과 미시온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앞선 정부들은 대중에게 약간의 떡고물을 던져 준 대신 그들을 수동적 표밭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차베스 정부는 2002∼2003년 투쟁에서 정치적으로 각성한 기층의 에너지와 호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시온은 한계도 있다. 미시온은 여전히 베네수엘라 자본주의에 포위돼 있다. 그래서 기층에서 사람들은 미시온을 최대한 이상적 형태로 운영하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자주 좌절했다.

예컨대, 미시온 메르칼은 국가 운영 상점으로 식료품을 일반 상점보다 훨씬 값싸게 공급한다. 그런데 식료품 생산은 사회화돼 있지 않고 시장 메커니즘에 휘둘리는 자본가나 자영업자에 의한 생산이 지배적이다.

그러자 차베스 정부는 처음에는 우유 등 식료품 가격을 강제로 정했다. 그러나 생산 통제가 없는 가격 통제는 생산자의 반발에 직면해 무기력함을 드러냈고 일부 생필품은 품귀현상을 빚었다.

2007년 신헌법 국민투표가 부결된 것은 대중이 ‘볼리바르식 혁명’에 지쳤다기보다는, 이런 모순이 낳은 효과 때문이었다.

차비스모

차베스 정부의 대응은 한 걸음 후퇴하는 것이었다. 그는 〈포브스〉 선정 2백대 기업 중 하나로 꼽힌 베네수엘라 최대 식료품 업체에서 시장가격으로 식량을 사들여 미시온 메르칼에 공급했다. 그러나 대중의 불만은 생산의 민주적 통제와 계획을 포함하는 훨씬 급진적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

차베스는 반자본주의적 대안의 실험 — 노동자 자주관리, 협동조합, 주민자치위원회 등 — 을 시도했지만,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2006년 초 국유화를 통한 노동자 관리를 요구하며 공장 점거에 들어간 셀펙스 의류 공장 노동자들 2년에 가까운 투쟁 끝에 요구 사항을 성취했다. 볼리바르식 혁명의 미래는 이런 움직임의 확산에 달려 있다.

예컨대, 그중 가장 급진적인 노동자 자주관리 공장의 경우, 알카사나 인베팔 등 중요한 사례들이 있지만, 아직은 소규모일 뿐이다. 게다가, 차베스 정부는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장 중 하나인 PDVSA를 노동자 자주관리 사례로 발전시킬 생각이 없다. 2002~2003년 직장폐쇄 당시 이미 기층 노동자들이 그 실험을 했는데도 말이다.

대안적 생산방식 실험이 이륙하지 못하면서 볼리바르식 혁명의 재원은 거의 전적으로 PDVSA에 의존해 왔다. 미시온부터 주민자치위원회까지 모두 PDVSA의 수입에 의존한다.

이것은 고유가가 유지된 2008년 여름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경제가 후퇴하면서 유가가 하락하자 베네수엘라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볼리바르식 혁명은 진정으로 갈림길에 서 있는 듯하다.

이 갈림길에서 중요한 변수는 다양한 정치로 분화된 차비스모(‘차베스주의’) 내부의 역학관계다. 차비스모 중 정부 운영에 밀접히 연관된 가장 영향력 있는 세력은 자본주의의 틀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거나 그것을 먼 미래의 과제로 여긴다.

또, 일부는 사사로이 부를 축적하는 데 몰두하면서 ‘볼리부르헤세스’(‘볼리바르식 혁명’이 탄생시킨 부르주아)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 차비스모 관료들은 급진파의 투쟁을 탄압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 사례는 노동부가 기존 우파 노총에 반대해 나타난 베네수엘라판 민주노총인 전국노동자연합(UNT)의 급진파인 ‘통합적 게급적 혁명적 자주적 경향’(C-CURA)를 종종 탄압한 것이다.

차베스는 사회주의통합당(PSUV)을 건설해서 이런 다양한 조류들 간 토론을 활성화하고 볼리바르식 혁명을 전진시키려 했다. 그러나 PSUV에서 차비스모 관료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원래의 목표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오늘날 볼리바르식 혁명은 2002 ~2003년처럼 기층의 움직임이 급격한 전환을 낳은 유동적 상황과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갈림길에 선 혁명이 자체의 모순을 극복하려면 진정한 반자본주의로 나아가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베네수엘라 노동자·민중이 다시 한번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