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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정 대표자회의의 위험한 의제 합의:
사용자의 개악 요구는 둘러앉아 논의할 의제가 아니다

5월 20일 시작된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대표자회의’(이하 노사정대표자회의)가 몇 차례의 실무협의를 통해 6월 10일 의제 조율에 도달했다고 한다.

사용자 단체들은 임금과 휴업 수당 삭감, 교대제 개편과 배치전환, 생산성 향상 협조, 직무성과급제 도입, 탄력근로제 확대, 임단협 조기 타결과 쟁의 자제 등을 요구했다. 한마디로 임금 삭감과 노동조건 악화를 수용하고 투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면, 노동계는 해고 규제, 공공의료 확충과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전 국민 고용보험제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 보도를 보면, 노·사·정 실무협의에서 총고용 보장과 임금 조정, 고용유지지원금 등 정부의 코로나19 관련 대책 개선, 사회안전망 확대 등 8개 범주를 정했다고 한다. 이 중 노동계의 고용보장 요구와 사용자들의 임금 삭감 요구, 전 국민 고용보험제 문제가 가장 큰 쟁점이라고 알려졌다.

사회적 대화 테이블에 노동계의 요구와 사용자들의 개악 요구가 나란히 주요 의제로 포함된 것이다.

타협이 전제된 대화 테이블

앞으로 이 의제들이 논의될 텐데, 일단 사용자들의 개악 요구가 포함된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다. 합의된 의제에 관해 노동계도 양보하라는 압박을 크게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도 개악 수용 압박을 가하면 가했지, 결코 노동자 편을 들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문재인 정부는 경제 위기 상황에서 기업 경쟁력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용자들이 원하는 임금 삭감과 노동시간 유연화 같은 조처들을 함께 추진해 왔다. 6월 1일 정부는 ‘2020년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에서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과 직무성과급제 확산 추진 방침을 분명히 했다. 20대 국회 마지막에 교원노조법을 개악했고, 또다시 노동법 개악 재추진에 나섰다.

6월 5일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과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면담 ⓒ출처 기획재정부

그런데 6월 5일 민주노총이 발표한 ‘김명환 위원장과 홍남기 경제부총리 면담 결과 브리핑’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표자회의가 노사정 간에 연대와 협력으로 잘 마무리되어 국민과 노동자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

이런 기조 속에 민주노총 집행부가 임금 조정과 노동조건 악화 내용을 의제로 인정해 준 이상, 개악 저지가 아니라 개악의 수준을 최소화하는 것이 목표가 되기 십상이다. 사회적 대화 자체가 타협을 전제로 성립되는 것이므로 사용자의 요구를 무조건 반대하고 나섰다가는 대화 테이블 자체가 유지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민주노총 집행부는 이미 책임 있는 자세로 협력에 나서 대화를 파투내거나 뛰쳐나오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얼마 전 한 토론회에서 김명환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민주노총 중집에서] 이번에는 ‘민주노총이 [중간에] 나간다 만다’ 이런 얘기하지 말자고 했다. … 대안과 실천방안, 우리가 책임질 것 등을 논의해서 하나의 발판으로 삼자고 이야기했다.”(5월 28일 ‘코로나 대응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위한 노동의 과제’ 긴급 정책토론회)

적잖은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일자리 나누기’를 적극 주장하는데, 임금 삭감과 조건 악화 없이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지 않고 있다. 민주노총 집행부가 노사정 대표자회의에 제출한 ‘일자리 나누기’ 방안도 마찬가지여서 노동자 양보의 여지를 열어 두고 있다. 이런 모호한 태도로는 노동자들의 조건 악화를 일관되게 반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대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노동자들에 대한 양보 압박은 커지고, 노동자들은 상층의 논의 결과를 기다리며 지켜보는 수동적 처지가 된다.

게다가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양보의 수준을 두고 공방을 벌이는 상황 자체가 노동자들이 당면한 조건 후퇴나 고용 위협에 맞서 싸우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든다.

지난 3개월 동안 코로나19와 경제 위기로 해고와 임금 삭감에 시달려 온 노동자들의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현재 벌어지는 공격에 맞설 투쟁 계획을 제대로 내놓지 않고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최근 열린 민주노총 비정규직 대표자 수련회에서도 투쟁 계획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일부 활동가는 민주노총 집행부가 사회적 대화에 힘을 쏟느라 투쟁 계획이 부실한 것 아니냐는 날카로운 비판도 제기했다.

불필요한 양보가 위험한 이유

노동운동 내에서도 적잖은 사람들은 일정한 임금·조건 양보로 고용 보장을 얻어 낼 수 있다고 기대한다.

우선 지금도 고용 불안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5월 고용 통계는 취업자 수가 3개월 연속 감소했고 실업자가 통계 작성 이래 최대치(127만 8000명)를 기록했다. 게다가 일시 휴직자가 102만 명, 실업률에 포함되지 않는 비경제활동인구도 55만 5000명이 늘어난 상황은 공식 실업률(4.5퍼센트)보다 고용 상태가 훨씬 심각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정부는 재정을 투입한 기간산업에서조차 해고를 막지 않고 있다. 고용 유지를 압박해 기업 수익성을 악화시킬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사용자들과 정부가 사회적 대화 테이블에 앉은 것은 위기 극복을 위한 대가를 노동자들이 떠맡게 하고(착취율 제고), 노사 갈등을 줄이려는 것이지 고통을 분담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건 양보는 일자리를 지키는 대안이 되기 어렵다. 기업 사정 악화를 이유로 노동자들의 임금 양보는 더한층 양보 압박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2008년 경제 공황 이후 세계 자동차 산업에서 벌어진 양보 교섭의 경험이나, 지난 몇 년간 한국 조선업에서의 경험이 이를 보여 준다.

기업들의 수익성이 더 나빠지면 고용 보장 합의는 결코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개별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해고를 통해 비용을 줄이는 것이 가장 화급하고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보기 마련이다.

최근 STX조선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이 이를 잘 보여 준다. 노조 지도부는 해고를 피하기 위해 2년간의 무급휴직 후 복직이라는 양보 교섭을 했으나, 회사 사정이 여전히 나쁘다며 또다시 무기한 무급휴직을 강요 받고 있다.

그런데 앞으로 경제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라는 전망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이런 악순환이 얼마든지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 대화 테이블에서 요구되는 양보는 노동자들의 조건 악화뿐 아니라 고용 보장도 이룰 수 없다.

특히 미조직·비정규직·영세 기업 등 취약한 노동자들은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취약 계층 보호를 위해 추진한다는 사회적 대타협이 그 목적과 명분을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노·사·정 대표자회의 의제에는 취약계층의 사회안전망 확대 문제가 포함됐다. 그러나 핵심 쟁점인 전 국민 고용보험제 논의는 시작부터 난항에 부딪혀 있다.

일단 사용자 단체들은 추가 재정 부담 의사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특수고용 노동자에 대한 고용보험 적용도 별도의 제도를 마련하라고 주장한다.

문재인 정부는 전 국민 고용보험제를 도입할 것처럼 떠들었지만, 실제로는 제한적으로 일부분에 대해서만 확대 적용하는 단계적 추진 방안을 내놓았다. 특수고용 노동자의 고용보험 우선 적용 대상도 매우 제한(전속성을 전제로 9개 직종)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점들을 볼 때, 취약계층 보호와 사회안전망 강화 역시 광범한 노동자 투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알량한 수준에 그칠 공산이 크다.

지금처럼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에서 노·사·정이 “협력과 연대”해 서로 윈윈하자는 것은 공상적일 뿐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계급 협력을 부추겨 오히려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기 어렵게 만든다.

일자리를 지키고 취약계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양보를 강요 받는 사회적 대화 테이블이 아니라 노동자 투쟁을 통해 정부와 사용자를 강제해 내는 힘을 발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