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지도부의 선제적 양보 제안:
불가피하지 않은 양보 제안은 취약계층 보호도 어렵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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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8일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위원장은 올해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분으로 연대기금을 조성해 취약계층 지원에 쓰자고 제안했다. 정의당도 “노동계가 선도적으로 고통을 분담하여 더욱 어려운 계층을 위해 나서겠다고 한 것”을 환영했다. 6월 17일에는 주요 시민단체와 종교계 인사들이 공공부문 임직원의 임금 양보와 같은 ‘선제적 양보’가 필요하다는 호소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민주노총 제안의 구체적 내용은 고용보험료 인상, 사업장별로 근로복지진흥기금 조성, 올해 임금인상분의 일부로 공동근로복지기금 조성 등이다. 이 안을 선제적으로 제안하기로 결정한 것은 6월 18일 (노사정대표자회의 직전에) 열린 중앙집행위원회(중집)이다.
민주노총 중집은 이런 고통분담 방안과 함께 해고 규제, 전 국민 고용보험, 공공의료 확충, 유급병가·상병수당 도입 같은 사회안전망 확대도 핵심 요구로 정했다. “파견·하청·간접고용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 중소영세노동자 등 가장 취약한 노동자에 대한 특별한 보호 대책 마련에 집중[한다]”는 취지다. 내년 최저임금 요구안도 올해보다 25.4퍼센트 인상한 1만 770원(월급 기준 225만 원)으로 결정했다.
다시 말해, 민주노총의 결정과 제안의 취지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고용보험료 인상, 취약계층 지원을 위한 사회연대기금 조성에 선제적으로 나설 테니, 정부와 사용자들도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 보호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와 사용자들이 취약계층 보호에 돈을 쓸 생각이 없다는 점이 거듭 확인돼 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용자 단체들은 전 국민 고용보험 적용을 위해 추가로 재정을 부담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특수고용 노동자에 대한 고용보험 적용도 별도의 제도를 마련하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노사정대표자회의 의제 설정 논의에서 사용자 단체들은 임금과 휴업수당의 삭감, 교대제 개편과 배치전환, 생산성 향상 협조, 직무성과급제 도입, 탄력근로제 확대, 임단협 조기 타결과 쟁의 자제 등을 요구했다. 한마디로 투쟁할 생각 하지 말고 임금 삭감과 노동조건 악화나 수용하라는 것이다.(관련 기사 본지 326호에 실린 기사 ‘사용자의 개악 요구는 둘러앉아 논의할 의제가 아니다’를 참조하시오.)
정부도 노동계에 개악을 수용하라고 압박할 뿐 취약계층 노동자 보호에는 관심이 없다. 정부는 특수고용 노동자에게 고용보험을 적용하자는 2018년 고용보험위원회(노사정 참여) 의결 사항조차 무시하고 있다. 또, 최저임금 인상 논의가 시작되자마자 기획재정부 장관 등이 인상에 난색을 표하며 바람을 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 지도부가 선제적 양보안을 내놓는 것은 부정적 효과만 낸다. 노동계가 먼저 양보한다고 해도 앞서 본 것처럼 정부와 사용자들은 자신들도 양보해야 한다는 부담을 받기보다는 자신들의 노동귀족론이나 정규직 양보론이 옳았음을 보여 주는 사례로 선전을 할 것이다.
또한 지도부가 양보안을 지렛대로 노동자들의 요구도 받아내겠다며 대화에 집중하며 실상은 양보의 수준을 두고 공방을 벌이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상층의 대화(협상) 결과를 기다리며 지켜보는 수동적 처지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노동조건 후퇴나 고용 위협에 맞서면서 대기업/공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대화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거스를라치면 정부와 사측이 언론을 통해 정규직 이기주의를 비난하기도 더 쉬워진다. 이런 모든 일들이 노동자들이 당면한 조건 후퇴나 고용 위협에 맞서 싸우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든다. 결국 노동자들에 대한 양보 압박만 커질 것이다.
앞으로 열리는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는 민주노총의 요구안뿐 아니라 사용자들의 개악 요구도 다뤄질 것이다. 사회적 대화 자체가 타협을 전제로 성립되는 것이므로 사용자의 요구를 무조건 반대하고 나섰다가는 대화 자체가 유지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나 사용자들이 기금 조성 등에서 아주 약간 양보를 하더라도, 앞서 소개한 사용자들의 개악 요구가 (개악 조건을 약화하더라도) 일부라도 수용된다면 비정규직 같은 취약계층 노동자들은 더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취약계층 보호에 집중한다는 민주노총 지도부의 목표도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번 양보안 제시를 민주노총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이라고 포장했다. 이는 계급 간 협력으로 국가적·사회적 위기를 극복해 보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에서 사측과 정부는 이윤을 지키기에 혈안이 될 뿐이다. 무엇보다 노동계급에게 위기의 대가를 떠넘겨야만 이윤 지키기가 가능하다. 따라서 노사정 협력으로 서로 윈윈하자는 것은 공상적일 뿐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계급 협력을 부추겨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흐리거나 투쟁에 나서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계급 간 협력 방안은 정작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민주노총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책임과 역할”은 불가피하지 않은 양보안 제출이 아니라 정규직·비정규직 모두의 고용과 조건을 방어하기 위해 노동자 투쟁에 앞장서는 것이다.
사회연대기금이 노동자 단결에 도움이 될까
이처럼 정부와 사용자들은 취약계층 보호에 돈을 쓸 생각이 없기 때문에 ‘사회연대기금’ 방안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예를 들어, 2017년 공공운수노조 집행부를 비롯한 공공부문 노조 지도부들이 성과연봉제 도입 때 받은 인센티브를 반납할 테니 정부도 돈을 내어 ‘공공상생연대기금’을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에 문재인 정부는 기금 구성에 전혀 돈을 내지 않았다. 공공부문 노조들이 580억 원을 모았지만 이 돈으로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처우 개선에 턱없이 부족하다. 설사 정부가 비슷한 금액을 냈더라도 큰 효과는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무금융노조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우분투재단에도 제2금융권 회사 100여 곳 중 고작 12곳이 출연하거나 출연을 약정해 80억 원가량의 약정금액이 모였다고 한다. 우분투재단은 이 중 1억 5000만 원을 지난해 6월 사무금융 분야 비정규직 노동자 고작 100명에게 전달했다. 1인당 고작 150만 원을 지원한 것이다. 그러나 우분투재단 자신이 조사한 바를 봐도, 제2금융권 노동자 중 정규직은 고작 37.49퍼센트밖에 안 될 정도로 비정규직 비중이 높다.
공공운수노조나 사무금융노조 사례를 봐도, 비정규직 노동자의 극히 일부를 지원하고 말 게 아니라 당장 정규직 전환이나 처우 개선을 위한 투쟁을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시급한 것이다.(더 자세한 내용은 본지 315호에 실린 기사 ‘사회연대기금, 비정규직 처우 개선과 노동자 단결에 도움 될까’를 참조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