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위기 첫 노사정회의:
취약계층 보호 외면한 정부, 임금삭감 요구하는 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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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대화는 노동자들의 양보 압박을 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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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대표자회의’(이하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코로나19 감염 확산 국면에서 문재인이 수차례 노동계의 ‘협력’을 촉구하고, 민주노총이 ‘코로나19 원포인트 노사정 비상협의’를 제안해 성사된 것이다. 노사정대표자회의는 노동계(양대노총 위원장), 사용자 단체(경총 회장, 대한상의 의장), 정부(국무총리, 기재부·노동부 장관)로 구성된다.
민주노총은 해고 금지와 총고용 보장을 최우선 의제로 요구하고, 전 국민 고용보험제도 도입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사용자 단체들은 규제 완화와 고용·임금·노동시간 유연화가 주된 관심사다. 이날 경총 회장 손경식은 기업 살리기가 우선이라며 정부에게는 기업 지원 확대를 노동자들에게는 임금 양보를 요구했다.
며칠 전 대한상의의 한 간부는 해고 금지 요구에 대해서 ‘대화하지 말자’는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고, 사회 안전망 확대는 정규직의 고용 유연화와 연계돼야 함을 시사했다.
이처럼 노사 간의 견해 차가 상당해 자유주의 언론들은 노사 모두의 양보와 정부의 중재가 중요하다고 주문한다.
그런데 이날 회의를 주재한 정세균은 “절제와 인내”의 미덕을 강조하고 1998년, 2009년 노사정위 합의를 언급하며 신속한 합의 타결을 요청했다. 두 합의 모두 노동자 측의 양보가 핵심 내용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98년에는 정리해고 도입이, 2009년에는 임금 동결·삭감, 노동 유연화 등이 핵심 합의 내용이었다.
그간 문재인 정부의 태도를 봐도 정부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중재’하지 않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문재인은 ‘고용 보호가 최우선’이라고 거듭 말했지만, 지난 두 달 동안 해고를 막는 조처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5월 18일에는 무급휴직을 거부하다 끝내 해고된 아시아나항공 하청 노동자들의 농성장을 강제 철거했다.
3~4월에 걸쳐 일자리 60만 개가 줄었다는 통계는 정부의 고용 대책이 얼마나 실효성이 없는지를 잘 보여 준다. 정부는 기업 지원에는 수백조 원을 쏟아부으면서도 노동자들의 고용과 생계 유지에는 인색했다.
정부는 이렇게 해고 규제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급격한 고용 감소 대책으로 고작 단기 일자리를 55만 개 만드는 방안을 내놨다. 여기에 디지털 일자리, 친환경 일자리 같은 이름을 갖다 붙인다고 저질 일자리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기간산업에 대한 지원 내용이 담긴 산업은행법과 시행령 개정에서도 고용 유지, 이익 공유 등이 전제된 기업에 대해서만 금융 지원을 하라는 민주노총의 요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5월 20일 결정된 기간산업안정기금 운용방안은 항공·해운업 지원 조건으로 노동자 고용의 90퍼센트 유지를 부과하기로 했지만, 고용 유지 기간은 고작 6개월에 불과하고 하청 노동자들의 고용 유지는 아예 포함하지 않았다. 항공업에서 하청 노동자 해고가 심각한 수준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들의 고용 보호는 외면한 것이다.
취약계층 보호도 외면하는 정부
정부는 취약계층 보호를 위한 사회안전망 확충에도 전혀 진지하지 않다.
정부는 전 국민 고용보험제도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요란을 떨었지만, 정작 특수고용 노동자를 포함하는 고용보험법 개정안 통과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통합당과 사전 합의해 예술인만을 (특례로) 포함하는 개정안을 환노위에 상정했다. 이 안은 5월 20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 개정에 따라 예술인(최대 5만 명)만 고용보험을 적용 받을 수 있게 됐다. 200만 명이 넘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바람은 완전히 짓밟혔다. 고용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해소해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을 제공하겠다는 취지가 완전히 무색해진 것이다.
정부는 21대 국회에서 특수고용 노동자를 포괄하도록 다시 개정을 추진하는 등 단계적으로 전 국민 고용보험 도입을 해 나가겠다지만, 이를 믿기도 어렵다. 고용보험 적용 대상 확대도 결국 재원 문제인데, 재원 부담에 대한 사용자들의 반발이 큰 상황에서 정부가 재원을 대폭 투입하지 않으면 대상을 확대하기 어렵다. 균형 재정에 골몰하는 정부는 재정 투입에 적극 나서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험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책에서 벌어졌다. 정부는 단계적 정규직화를 추진하겠다고 했는데, 그 결과는 누더기였다. 수많은 비정규직(기간제, 민간위탁 등)이 전환에서 제외됐고 대상에 포함된 경우도 가짜 정규직화인 자회사 전환, 처우 개선 없는 무기계약직 전환이었다. 이는 정부가 정규직화에 필요한 재원은 한사코 투입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또, 21대 국회에서 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특수고용직을 고용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하는 법 개정이 될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 민주당 지도부가 ‘신중한 개혁과 야당과의 협치’를 주장하는 것을 보면 벌써 개혁 법안 추진에서 후퇴할 길을 예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고용보험법 개정안 대폭 후퇴나 교원노조법 개악 등이 여야 ‘협치’로 처리된 것처럼 말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총선 이후 정부·여당의 정책이 한국 자본주의의 경쟁력을 높이고 기업 살리기에 초점이 가 있고, 노동자들의 조건 개선은 이런 방향에 걸림돌이라고 보고 있음을 뜻한다.
계급 협조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 지도부는 정부의 여러 정책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을 하면서도 해고 금지와 전 국민 고용보험제도 같은 요구를 사회적 대화를 통해 풀어 나가려 한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정부가 노동계의 주요 요구에 힘을 실어 주기를 기대하면서 정부 정책에 협조하는 기조를 유지해 왔다. 때로 정부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항의 행동은 극도로 자제하고 사회적 대화만 촉구함으로써 협력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 벌어지는 해고와 임금 삭감 등 조건 악화에 반대하는 투쟁은 뒷전이 되고 있다. 고용보험법 개정이나 교원노조법 개악, 원격의료 추진과 같은 후퇴와 개악에도 항의가 턱없이 부족한 문제점을 보이고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민주노총 집행부가 사회적 대화에 힘을 쏟는 것은 경제 위기 시기에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자본주의 위기 극복에 동참해 체제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노총 내에서 사회적 대화에 대한 반발이 경사노위 참여 추진 때와는 달리 거의 없는 것도 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 위기 극복을 위한 협력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적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IMF 위기 때인 1998년 당시 민주노총 집행부가 노사정위에 참가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코로나19 사태 극복을 위해 국민적 협력에 함께해야 한다는 기조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봤듯이 정부의 관심사는 일자리 보호나 취약 계층 보호가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 경제를 살리기 위한 기업 살리기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사회적 대화를 통해 계급 협조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노동계급의 조건 양보를 얻어내려는 것이다.
계급 협조 노선은 노동자들의 자주적 활동을 억제해 수동화시켜 궁극으로 계급의식을 무디게 만든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정부와 사용자에 맞서 노동자들의 조건을 방어할 힘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경사노위 틀을 고수하지 않고 새로운 대화 테이블을 만들면서까지 민주노총을 끌어들이기 위해 애쓴 것은 이런 효과를 위해서다. 정세균 총리가 ‘이번 한시적 노사정 대화를 발판으로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지속해 가자’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해고 금지와 전 국민 고용보험제 도입과 같은 요구를 강제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그럴수록 사회적 대화 테이블에서 민주노총이 받는 양보 압박이 더 커질 것이다. 정부와 사용자를 압박하는 힘은 협상 테이블에 참가하는 노조 지도자들의 협상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투쟁이 가하는 정치·경제에 실질적 타격을 주는 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정부와 사용자들과 노동조건을 두고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제 위기 책임전가에 대중투쟁으로 맞서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