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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의 재현? :
누더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안 갖고 시간 끄는 정부

단식 12일째인 고(故)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 ⓒ조승진

“왜 사람들이 일하다 목숨을 잃어야 하는가? 더 이상의 원통한 죽음을 막아야 한다.”

고(故)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 고(故) 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 씨 등이 살을 에는 칼바람 속에 국회 본청 계단에서 단식 농성을 시작한 지 (12월 22일 현재) 12일째다. “정치인과 정부가 나 몰라라 하기 때문”에 유족들이 나섰다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산재 사망사고는 법의 필요성을 더하고 있다. 가령, 12월 20일에는 평택 물류창고 신축공사 현장에서 콘크리트 구조물이 무너져 노동자 3명이 추락사 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22일 금속노조에 따르면, 지난달 말과 이달 초 화재 폭발 등으로 노동자 4명이 사망한 포스코에서 최근에도 화재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그런 만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커져 왔다. 강은미 정의당 원내대표와 이상진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유족들과 함께 단식 농성을 해 온 데 이어, 500인 동조 단식, 촛불집회, 각계 지지 기자회견 등도 이어지고 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이미 지난 9월 국민청원 10만 명 동의를 얻어 국회에 상정된 바 있다.

차 떼고 포 떼기

주류 양당 정치인들도 여론의 눈치를 보며 잇따라 단식 농성장을 찾았다. 이낙연 민주당 원내대표,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 등은 유족들을 만나 “법안 취지에 공감”한다며 연내 입법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들은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친기업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반발하는 기업주들을 편들며 누더기로 만들려는 것이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이 국회에 발의한 관련 법안들은 이미 그런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12월 17일 민주당 의원총회는 좀더 선명히 후퇴의 길을 열어젖히는 결정을 내렸다. 이 법 제정 추진을 거듭 약속했던 당 대표 이낙연은 정작 이 자리에서는 “당론으로 정하는 것은 민주적이지 않다”며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서 차 떼고 포 떼서 누더기로 만들자는 주장이 난무하는 난상 토론만 벌어졌다. 그리고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보수적 태도를 취해 온 민주당 정책위원회와 국회 법사위(국민의힘과의 협치를 위한다며)로 공을 넘겼다.

실제로 민주당 정책위는 기업주에 대한 처벌 대상 범위를 좁히고, 반복적 법 위반과 산재 은폐 시도 기업주에게조차 유죄 추정(“인과관계 추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적 견해를 내놓았다.

민주당 내에서는 인과관계 추정 삭제, 50인 미만 사업장 처벌 유예, 다중이용업소 제외 등으로 가닥이 잡혔다는 얘기도 나온다. 기업주들의 안전·보건 책임과 처벌 범위를 대폭 낮추려는 것이다.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라는 비판을 받은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 아니냐는 정당한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이다.

그조차 상임위 일정도 아직 잡지 않아 이번 회기 내 통과시킬 의지도 별로 없어 보인다. 상임위까지만 통과시키고 차기 국회로 넘길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 바 있다.

12월 20일 산재 추락사로 세 명이 목숨을 잃은 평택 물류창고 신축공사 현장 공사판은 죽음이 도처에 널린 지뢰밭이나 다름없다 ⓒ출처 경기소방재난본부

구의역 김군 사망 모욕

최근 폭로된 국토부 장관 내정자 변창흠의 ‘구의역 김군 사망 모욕 발언’은 많은 이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 또 다른 사례이다. 2016년 용역업체에서 일하던 19세 청년 김군은 구의역에서 홀로 스크린도어 작업 도중 들어오는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몸이 끼어서 참혹하게 죽었다. 그때까지 알려진 바로 서울지하철2호선에서 벌어진 13번째 유사 사망 사고였다.

당시 서울주택도시공사 사장으로 재직하던 변창흠은 “업체 직원이 실수로 죽은 것”, “걔(김군)가 조금만 신경 썼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비용 절감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노동자들을 희생시킨 구조적 살인을 개인 탓으로 몬 파렴치한 발언이다.

문재인은 김군 동료들이 장관 사퇴를 촉구하고 나선 데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문제에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중대재해법을 배제할 이유는 없다”면서도 내년 2월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른 양형 기준이 만들어지는 만큼, 이를 고려해 “종합적 검토”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간을 질질 끌며 내용상 산안법의 양형 기준을 보강하는 수준을 제시한 셈이다.

국민의힘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문제에서 정의당과 “초당적 협력”을 약속했지만, 기업주들의 이익에 반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이 당 소속의 임이자 의원이 제출한 관련 법안은 기업주들에게 매우 제한적 의무 규정을 둬서 책임과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단식 농성 중인 유족들이 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를 향해 “기업 눈치 그만 보고” 연내에 온전한 법 제정에 나서라고 촉구한 이유이다.

그 점에서 정의당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정치적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하고 주류 양당을 비판한 것은 옳다. 그럼에도 “조속한 법 제정”을 위해 인과관계 추정 조항 삭제 등에 타협할 수 있다고 열어 뒀는데, 이는 부적절하다. 주류 양당의 시간 끌기와 후퇴 시도에 제동을 걸지도 못하면서 운동의 대의만 훼손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빈번한 산업재해 줄이려면

끊이지 않는 산업재해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둘러싼 갈등은 이 체제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준다.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보다 기업의 이윤이 우선되는 문제 말이다.

노동자들의 비극적 재해와 죽음은 개인의 부주의나 안전불감증 탓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이 갑자기 닥친 불운 때문도 아니다. 안전을 지킬 기술이 부족해서? 안전에 투자할 돈이 없어서? 그것도 아니다.

기업이 막대한 이윤을 거둬 들이는 동안,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안전망도 없이 단독 작업과 과로로 몰리고, 유해가스에 노출되고 폭발사고에 희생되고, 기계에 끼이고 추락하고, 직업병에 걸려서 목숨을 잃고 있다. 기업주들의 탐욕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부 정책이 비극을 낳고 있다.

빈번한 산업재해를 줄이고 원청 기업주들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온전히 제정돼야 한다.

그리고 이런 법·제도적 장치만이 아니라, 실제 그것을 현장에 강제할 수 있는 투쟁을 강화해 나가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특히 지금처럼 경제가 위기인 상황에서 기업주들은 안전에 대한 투자를 더 한층 꺼리며 ‘수익성을 제약하는 낭비’로 여기고 있다.

사업주에게 안전 수칙을 지키고 투자를 늘리도록 요구하고, 작업 환경을 개선하고, 위험요인이 발견됐을 때 작업을 중단시키고 실질적 대책이 마련되도록 강제할 수 있는 현장 통제력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좀더 자세한 논의는 본지 337호 ‘말뿐인 ‘안전’ 약속에 끊이지 않는 산업재해’를 보시오.)

노동자들은 안전보다 돈벌이를 중시하는 자본주의 이윤 논리에 도전할 수 있다. 지난 몇 년 동안에도 건설 현장, 조선소, 발전소와 우체국, 택배·콜센터·마트 등 서비스 산업, 고속도로와 철도, 병원 등 곳곳에서 노동자들은 법·제도 개선과 작업 현장의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투쟁했다. 노동운동은 이런 노동자들의 투쟁을 활성화 하려고 애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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