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정부안 :
기업주 책임도, 처벌 수준도 대폭 후퇴 … “껍데기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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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12월 28일 중대재해 기업 처벌에 관한 입법안(정부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예상대로 내용은 형편없다. 법의 취지가 무색하게 처벌 수준도, 책임 범위도 대폭 제한했다. 9월 중순 노동계가 10만 국민 청원 동의를 얻어 발의한 법안에 턱없이 못 미칠 뿐 아니라, 그동안 정부·여당 내에서 제시된 문제적 안들보다도 한층 더 후퇴했다.
20일가량 단식 농성을 이어 온 유가족들은 “정부안은 한마디로 알맹이 빠진 껍데기”라고 즉각 반발했다. “저번에 산안법을 만들 때도 (김)용균이가 빠졌는데 또 용균이가 빠졌다!”(고 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 씨) 유가족과 노동·시민단체의 동조 단식도 확대되고 있다.
문제투성이
정부안은 우선, 기업주의 책임 범위를 대폭 좁혔다. 경영책임자의 안전·보건조치 의무를 몇 가지 경우로 제한해 구멍이 숭숭 뚫렸다.
원청·발주처에는 아예 책임을 면해 줬다. 가령, 건설공사 발주처는 공사 현장에서 빈번히 벌어지는 사망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대기업이 업무를 외주화해 하청업체에 넘길 경우에도 안전·보건 조치의 의무가 없다.
또, 정부안은 사망자가 1명 발생한 재해는 중대재해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고 열어 뒀다. 동일 원인으로 동시에 2명 이상 사망한 경우에만 중대재해로 인정하자는 의견도 (별도 안으로) 함께 제시한 것이다. 그러면 단독 근무를 하다 사망한 고 김용균 씨의 참사는 중대재해가 아니게 된다. 기존 산업안전보건법보다도 후퇴한 안이다.
처벌 수위와 범위도 크게 낮췄다. 민주당 박주민 의원안과 비교해 봐도, 법 위반 시 벌금 하한액을 대폭 낮추고 상한액을 마련했다(5억 원 이상 벌금 → 5000만 원~10억 원 벌금. 손해배상액도 최저 5배 → 최대 5배).
그것도 50인 미만 사업장에는 4년간, 50인 이상 100인 미만 사업장에는 2년간 적용을 유예한다. 올 들어 9월까지 사고재해의 79.1퍼센트(건설업에선 94퍼센트)가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한 점을 볼 때, 대다수가 법 적용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장, 중앙행정기관장 등 책임 공무원에 대한 처벌도 까다롭게 만들었다. “형법상 직무유기죄를 범한 경우”로 제한했는데, 이는 극히 드문 경우에만 처벌하겠다는 뜻이다.
논란이 돼 온 인과관계 추정 조항(기업주의 법 위반이 반복된 사업장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하거나 사측의 산재 은폐 시도가 벌어지면 유죄로 추정)은 삭제했다. 헌법상 무죄 추정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댔다. 그러나 같은 사업장에서 유사하게 산업재해가 반복되고,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재발률은 97퍼센트에 이른다. 이런 구조적 문제를 야기한 기업주들을 무고한 피해자로 감싸는 것은 의도가 뻔하다.
정부안은 작업중지, 영업중지 명령도 노동부 장관의 재량에 맡겨 버렸다.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즉시 작업중지, 영업중지를 단행해야 같은 조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도 닥칠 수 있는 위험을 피할 수 있을 텐데, 그조차 의무로 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 조항에서 정부안은 문제투성이다. 그동안 있는 법도 제대로 안 지키며 기업주들을 지원해 온 정부가 이번에도 노동자·유가족들의 요구를 매몰차게 외면한 것이다.
사기로 끝난 노동안전 약속
사실 이 같은 상황은 정부가 ‘노동 존중’ 약속을 내팽개치고 친기업 정책으로 기울었을 때부터 예견돼 왔다. 산재 사망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던 공약도 이미 사기임이 드러났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약속이 누더기가 된 것만이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과로사 예방, 산업안전보건법 전면 개정을 통한 위험의 외주화 방지, 유해물질 안전관리 강화 등도 약속 위반, 개혁 시늉만 하다 되돌리기, 그마저도 후퇴시키기로 얼룩졌다.
정부가 주 52시간제를 도입해 놓고 기업주들의 요구를 수용해 곧바로 무력화 공격에 착수한 것이 대표적이다. 주 52시간제는 거듭 시행이 유예됐고, 특별연장근로도 크게 늘렸다. 급기야 지난 12월 9일 탄력근로제·선택근로제를 개악해 장시간 유연 노동을 허용했다. 과로사를 막기는커녕 특정 기간 내에 과로사 기준을 초과하는 연장근무가 가능해진 것이다.
2018년 말 통과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은 “김용균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누더기가 된 경우이다. 핵심적으로 원청의 책임과 외주화 금지 범위를 극히 제한했다. 그리고 바로 몇 달 뒤에 하위법령을 개정하면서 그조차 더한층 후퇴시켰다. 외주화 금지 범위를 더 좁히고, 노동부가 명령할 수 있는 작업중지 범위를 축소하고 더 쉽게 해제할 수 있도록 했다.
정부는 유해화학물질 관리 분야에서도 후퇴를 거듭했다. 2019년에는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응해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며 화학물질의 안전 규제(인허가 기간과 절차)를 완화했다. 올해 들어서는 코로나19와 경제 위기에서 기업주들의 고충을 해소해 주겠다면서 화학물질 관리에 대한 정기검사를 유예해 줬다. 유해화학물질 취급 시설의 부분적 변경에 대해서는 안전검사를 하기 전에 공장부터 가동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기업주 살리기
1997년 경제공황 때도 김대중 정부는 경제 살리기라는 명목 하에 노동자들을 희생시켰다. ‘기업활동 규제완화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발동해 안전관리자 규모를 대폭 줄이고, 유해작업을 외주화 하면 안전보건 평가를 중단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프레스·리프트에 대한 정기검사를 면제해 주는 등 각종 안전 규제를 풀어 버렸다. 그 뒤로 2000년대 초중반까지 산업재해율이 치솟았던 이유이다.
문재인 정부도 경제 위기에서 기업·국가의 경쟁력을 높인다며 노동자들을 위험에 방치하고 있다. 기업주들의 이익을 위해 개혁 약속을 파기하고 노동조건을 후퇴시키고 규제 완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끊이지 않는 산업재해는 노동자들의 안전보다 이윤을 우선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비극이다. 순전히 기업주들의 이윤과 탐욕을 위해 노동자들은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질병에 걸리고 다치고 있다. 정부는 솜방망이 처벌, 규제 완화, 노동개악 등으로 이를 뒷받침한다.
이런 기업주들과 정부에 도전하는 노동자 투쟁만이 산업재해를 줄이고 소중한 생명과 안전을 지킬 수 있다. 위험한 작업환경과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자들의 현장 통제력을 강화하고, 안전·보건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 위한 투쟁이 강화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