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법원, 낙태권 폐기 준비:
위험에 처한 미국 낙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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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낙태권이 매우 위태롭다. 연방대법원은 지난 50년 동안 유지된 여성의 낙태권 보장 판결(‘로 대 웨이드’)을 파기할 태세다. 이 판례를 폐기하는 대법원 결정문 초안이 유출돼 5월 2일 한 언론에 보도됐다.
보수파 대법관 새뮤얼 얼리토가 쓴 결정문 초안은 “헌법이 낙태권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며 낙태를 헌법적 권리로 인정한 기존 판결을 뒤집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결정에 동의한 5명은 얼리토를 포함해 모두 공화당이 임명한 자들이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 것은 공화당과 낙태 반대 세력의 숙원이었다. 트럼프가 보수적 판사들을 임명해, 대법원에서 보수파가 압도 우위가 됐다. 현재 대법관 9명 중 6명이 보수 성향이다.
그러므로 얼리토 초안의 핵심은 그대로 유지될 듯하다. 대법원 판결은 6월 말이나 7월 초에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대법원 판결문 초안은 미국인 다수의 의사와 거리가 멀다. 〈워싱턴포스트〉와 〈ABC뉴스〉의 올해 4월 여론조사에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답변이 54퍼센트였다. 28퍼센트만이 판결을 뒤집어야 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선출되지 않는 한줌의 우익 판사들이 이제 미국인 다수의 의사를 외면하려 한다.
50년 역행
완벽하지는 않지만, 로 대 웨이드 판결은 임신 24주 이내의 낙태를 여성의 권리로 인정하는 전국적 기준이 돼 왔다. 대법원이 이 판결을 폐기하면 지난 50년의 역사를 되돌려 낙태권은 완전히 개별 주(州)에 맡겨져 주별로 낙태권 허용 여부가 결정된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폐기되면 수많은 여성들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공화당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한 26개 주는 곧 낙태를 크게 제한할 것이다. 판례 파기 즉시 낙태 규제를 시행할 수 있는 법이 마련된 곳이 22개 주이고, 4개 주에서 이런 법안이 준비되고 있다.
텍사스주는 임신 6주 이후 낙태를 거의 다 금지하는 법안을 지난해 9월부터 시행했고, 미시시피·플로리다·켄터키주 등은 임신 15주 이후 낙태를 금지하는 법이 있다. 오클라호마주에서는 임산부의 목숨이 위험한 경우를 제외한 모든 낙태를 중범죄로 규정해 최대 징역 10년형이 가능한 법안이 올해 4월 통과됐다.
낙태 금지는 치명적 결과를 낳는다. 지난해 미국의 한 연구는 낙태가 금지되면 임신 관련 사망이 21퍼센트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미국의 모성 사망률은 이미 부국들 가운데 가장 높다.
낙태권을 부정하는 주들은 병원 지원비를 줄여 산전 건강 관리도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최근 《타임》지는 “1995~2017년 낙태를 가장 심하게 제한하는 법이 시행되는 주들에서 모성 사망률이 가장 두드러지게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늘 그랬듯이, 낙태가 금지되면 노동계급 여성(특히 가난한 흑인이나 히스패닉 여성)이 가장 타격을 입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낙태를 허용하는 다른 주로 이동하는 데 드는 많은 비용과 시간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직장에 휴가를 내고 낙태 시술을 받는 것도 힘들다.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면, 이것은 다른 주요 대법원 판례를 뒤집는 것을 정당화할 것이다. 피임, 동성결혼 등 성소수자 권리, 이주민 권리 등에 관한 판례도 위협받을 수 있다. 대법원의 보수적 결정이 나올 것에 고무된 우파 세력들은 여러 사회운동이 거둔 성과를 무로 돌리고자 잔뜩 벼르고 있다.
믿을 수 없는 민주당
대법원 결정문 초안이 보도되자 바이든은 즉시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대법원이 낙태권을 부정하는 판결을 내리면 낙태권을 입법화하겠다며,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투표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결코 신뢰할 수 없는 세력이다. 로 대 웨이드 판결 4년 후인 민주당 대통령 지미 카터 재임기에 낙태에 대한 연방 자금 지원을 대부분 금지하는 하이드 수정안이 통과됐다.
그리고 이 수정안은 지난해까지 민주당, 공화당 가릴 것 없이 모든 대통령과 의회가 승인해 왔다.
대통령이 된 민주당의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은 모두 대선 때는 낙태 선택권을 성문화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당선 뒤에는 그런 입법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오바마 취임 첫 2년은 민주당이 의회 다수를 차지했는데도 그랬다.
보수·우파의 낙태권 공격에 맞서는 데에 민주당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민주당은 끊임없이 낙태 반대 세력을 달래려 해 왔다. 민주당은 보수 유권자들의 표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고, 남부의 보수파 기반을 얻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최근 공화당이 여러 주에서 낙태 금지 법안을 통과시킬 때도 민주당은 그런 공격을 막는 데 무능함을 자주 드러냈다. 특히, 남부에서 민주당은 파란만장한 기록을 갖고 있다.
2019년 켄터키주 민주당 의원 존 심스는 지난해 텍사스주법과 비슷한 ‘심장박동’법에 찬성표를 던졌다. 2019년 루이지애나주에서도 비슷한 법안이 주의회를 통과했는데, 민주당 주지사 존 벨 에드워즈가 이 법안을 승인했다.
지금 바이든과 민주당은 대법원의 퇴행을 막을 최후 보루를 자처하지만, 낙태 문제를 선거에 활용하려 들 뿐, 낙태권을 지키는 데는 진정한 관심이 없다. 바이든은 집권 이후 지난 2일 대법원의 판결문이 유출되기 전까지 “낙태”라는 단어조차 꺼내지 않았다.
낙태권 운동의 과제
최근 미국 상황은 보수·우파의 낙태권 공격이 얼마나 집요한지, 그리고 투쟁을 통해 얻은 기념비적 성과조차 위협받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미국에서 낙태권 판결이 폐기되면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보수·우파의 낙태권 공격이 강화될 것이다.
대법원의 낙태권 폐기가 예상되자 미국 전역의 활동가들은 지하 낙태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다. 그런 연결망은 낙태가 불가능해진 주들에서 벌써 가동되고 있다.
이미 미국에서는 낙태 서비스를 받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 구트마허 연구소는 미국 소도시의 약 89퍼센트에 낙태를 제공할 클리닉이 없다고 밝혔다.
보수 판사들의 퇴행에 커다란 분노가 일면서 저항이 일어나고 있다. 판결문 초안이 공개된 2일 밤부터 대법원 앞에서 시위가 열렸고, 5월 14일 전국적 시위가 벌어질 예정이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통제하려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지키는 것과 함께, 낙태 서비스 확대를 위해서도 투쟁해야 한다.
낙태권을 지키려면 미국 활동가들은 민주당이 여성에게 줄 게 별로 없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지난 수십 년간 우파들이 극렬하게 낙태 반대 운동을 조직해 온 것에 비해, 주류 낙태권 운동은 민주당 정치인들에 의존하면서 운동을 온건하고 수세적으로 벌였다.
가족계획연맹, 전국낙태권행동동맹, 전미여성기구 등 대규모 재생산권 단체들은 전통적으로 민주당과 긴밀한 연관을 맺어 왔다.
수십 년 동안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려는 보수·우파의 공격에 민주당이 회피적이었음에도 이들 단체는 여전히 막대한 정치자금을 민주당에 대고 있다. 그러는 동안 여성이 낙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미국 전역에서 계속 축소돼 왔다.
미국에서 낙태권은 결코 사회 엘리트층의 하사품이 아니었다.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은 여성의 권리를 위한 광범한 대중 정치투쟁의 산물이었다. 낙태권은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를 뒤흔든 여성해방 운동의 핵심 요구였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나오기 3년 전, 약 5만 명이 뉴욕의 거리로 나와서 여성의 평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전미여성기구는 동등한 노동 기회, 공공 보육, 여성의 요청시 무상 낙태를 요구했다.
그 뒤에도 여성들은 어렵사리 쟁취한 낙태권을 지키기 위해 거듭 투쟁해야 했다.
2017년에는 거대한 대중이 여성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에 나섰다. 트럼프 취임 직후 약 500만 명이 ‘여성 행진’에 참가했다. 낙태권 방어는 반트럼프 시위의 주요 쟁점이었다.
보수·우파들의 낙태권 공격을 막고 낙태 서비스를 더 확대하려면, 다시 수많은 여성과 남성, 노동계급 단체들이 되도록 많이 참가하는 투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주당에게서 독립적인 정치가 발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