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사망:
용서받지 못할 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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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3일 전두환(1931~2021)이 사망했다. 한국 현대사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오명을 남긴 학살자가 드디어 죽은 것이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 성장한 군인이었다. 그는 육군 대위 시절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조직해 종로를 관통하는 쿠데타 지지 행진을 벌여, 박정희의 눈에 들었다. 그 후 전두환은 군 내 주요 보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가히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이라고 할 만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었을 때, 전두환은 군부 내 핵심인 보안사령관이었다. 박정희가 살해되면서 생긴 권력 공백은 그의 충복이었던 전두환에게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그는 박정희 살해 사건 수사를 맡는 합동수사본부장이 됐고, 신속하게 경찰·검찰과 중앙정보부까지 장악했다. 10·26 직후 이미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라고 했다.
당시 대통령 최규하와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유신 독재에 대한 대중의 염증과 반발을 의식해 긴급조치 9호 해제 등 약간의 유화 조처를 폈다.
그러나 전두환과 신군부는 ‘박정희 없는 유신 정권’을 연장하려고 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은 노태우 등과 함께 군대를 동원해, 자신의 상급자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체포했다. 이것이 12·12 쿠데타다.
이로써 전두환이 군부 내 주도권을 쥐게 됐고, 이 신군부가 권력의 새로운 중심이 됐다.
“박정희보다 더 지독한 놈”
이제 신군부는 유신 정권의 억압이 종식되기를 바라는 대중의 반발을 눌러야 했다. 박정희 사망 이후 그동안 숨죽이던 학생운동이 부활하고 있었다. 노동자들도 억눌린 불만을 터뜨려, 노동쟁의가 급증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은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전면적 탄압을 시작했다. 이날 하루에만 재야인사, 학생운동 활동가, 언론인 등 600명 이상이 체포됐다.
광주에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저항이 터져 나왔다. 공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돼 시위를 잔인하게 탄압하고 심지어 사람들을 죽였고, 이에 광주 시민들이 분노하면서 시위는 거대한 무장 항쟁으로 번졌다.
전두환은 광주를 총칼로 짓밟았다. 헬기 기관총 소사까지 이뤄진 진압과 학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그러나 광주에서의 저항과 학살은 한 세대의 청년들을 통째로 급진화시켰고, 전두환에 맞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을 다짐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들도 전두환의 폭압을 피하지 못했다. 전두환은 ‘노동조합 정화지침’을 실시하고, 민주노조들을 파괴했다. 많은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해고되거나 체포됐고, 일부는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신군부는 노동법을 개악해, ‘제3자 개입금지’ 등의 독소 조항을 넣어 노동운동을 억눌렀다.
전태일의 어머니이자 노동운동 활동가였던 고(故) 이소선 씨는 이때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독재가 죽어서 민주주의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더 지독한 놈이 나타났다.”
이처럼 전두환은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하고 총칼로 대중을 억누르고 대통령이 됐다.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은 전두환 정권에서 요직을 독차지하며 권력을 누렸다.
박종철
전두환 정권하에서 경제 성장이 잘 이뤄진 것은 인정해야 한다는 자들도 있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 윤석열 같은 자들. 이들은 김재익 같은 자를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등용해 호황을 이끌어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호황은 세계적인 저물가·저유가·저금리에 연동돼 가능했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은 미국 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세계은행의 공공차관, 일본의 막대한 구제금융도 받을 수 있었다.
경제 상황은 나아지고 기업들이 엄청난 이윤을 축적했지만, 노동자들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임금 상승은 억제됐고, 전두환의 엄혹한 탄압이 강압적인 군대식 노동 규율의 유지를 뒷받침했다.
반면 권력자들의 축재와 비리가 만연해 대중의 공분을 샀다. 장영자·이철희 어음 사기 사건 같은 권력형 부패 사건이 잇달아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장영자 사건이 민주정의당(전두환의 당) 정치자금과 전두환 일가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검찰 발표를 비웃었다.
전두환과 그 일가는 권력을 이용해 어마어마한 축재를 저질렀다. 일해재단은 비자금 창구가 됐다. 훗날 밝혀진 바로 전두환 자신이 9000억 원 넘는 돈을 비자금으로 챙겼다.
폭압과 부정부패는 결국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부딪혔다. 1985년 대우차 파업과 구로동맹 파업 등 탄압을 뚫고 숱한 투쟁이 벌어졌다.
전두환은 탄압 강화로 이를 억누르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 살해 사건 같은 야만적 국가범죄들이 벌어졌다.
그러나 결국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밀려 전두환은 장기집권을 포기하고 뒷걸음치는 양보를 해야 했다. 거리에서 전투성을 발휘했던 노동자들은 군부가 물러서는 모습을 보면서 작업장 민주주의로 눈을 돌렸다.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부터 대략 2년여 더 노동자 투쟁의 고조기가 이어지면서 군부는 다시 돌아올 꿈을 포기했다.
29만 원
투쟁에 밀려 전두환은 1988년 백담사로 정치적 유배를 가야 했다. 그럼에도 학살자를 처벌하라는 항의는 이어졌다. 결국 1995년 쿠데타 처벌 공소시효를 앞두고 대학생 중심으로 항의 시위가 터져 나왔다.
법 해석이 바뀌었고,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던 검찰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했다. 그러나 김영삼과 김대중에 의해 1997년 말 대선(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된) 직후 사면됐다.
사면된 후 죽을 때까지 전두환은 자신의 잘못을 단 한 번도 뉘우치지 않았다.
이 자는 비자금 조성 혐의로 거액의 추징금을 내야 했으나, 제대로 내지도 않고 ‘전 재산이 29만 원밖에 없다’고 버텼다. 그의 자식들은 지금도 고가의 부동산과 여러 알짜배기 기업들을 갖고 있다.
5·18 광주 항쟁에 대해서도 일절 반성이 없다. 2003년 KBS 인터뷰에서 전두환은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라고 학살을 정당화했다.
회고록에서는 광주 항쟁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가리켜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모욕했다. 이 때문에 전두환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전두환은 잔악한 독재자이자 학살자였으며, 끝까지 반성할 줄 모르는 파렴치한으로 죽었다.
그러나 그는 대중 항쟁으로 권좌에서 쫓겨나야 했던 자다. 그의 친구 노태우와 더불어 역사의 단죄를 결코 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