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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업 교섭”이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결할까?

“다음은 초기업 교섭.” 노란봉투법 통과를 앞둔 8월 22일 김영훈 노동부 장관이 한 인터뷰에서 강조한 얘기다. 노란봉투법 국회 통과 직후인 29일에는 국정기획위원회와 고용노동부가 공공 부문부터 초기업 교섭을 활성화하겠다고 밝혔다.

초기업 교섭은 산별(“대산별”)이나 업종별(“소산별”) 교섭을 뜻한다. 의미를 더 확장하면 사회적 대화나 노정교섭도 초기업 교섭에 포함될 수 있다.

정부는 단체교섭 효력을 산업 전반에 적용하는 안으로 노조법을 개정하는 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프랑스 모델’이다. 프랑스는 한국처럼 노조 조직률이 10퍼센트를 조금 넘는 수준이지만, 교섭 내용은 산업 전반에 적용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부는 노란봉투법에 초기업 교섭을 더하면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노란봉투법의 핵심은 원청 사용자에 대한 하청 노동자들의 교섭권 보장, 합법 파업의 범위 확대이다. 이 중 하청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초기업 교섭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일리가 있다. 하청 노동자들이 투쟁해 성과를 낸다면 그 성과를 명문화하기 위해 초기업 교섭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업 교섭만으로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해결되리라고 기대하는 힘들다.

우선 자본가들이 산별 교섭을 거부할 공산이 크다. 지금까지 한국 산별노조들은 지금까지 실질적인 산별 교섭을 하지 못했는데, 사용자들이 그것을 거부해 왔기 때문이다. 대기업과 잘나가는 기업들은 경쟁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중소기업이나 영세기업들은 인건비 부담을 늘릴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지금도 자본가들은 초기업 교섭이 시행되면 대기업 정규직에게 적용되는 호봉제가 하청·비정규직에게 확대돼 임금 부담만 키운다고 반발하고 있다. 그래서 직무급제 도입이 초기업 교섭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직무급제는 ‘공정’ 논리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대기업·정규직·고경력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전체 인건비 지출을 줄이려는 의도로 추진되는 것이다.

자본가들의 반발이 거센 상황에서 정부도 얼마나 의지를 발휘할지는 미지수이다. 노란봉투법 통과 전후로 정부가 보여 준 태도(일부 조항 후퇴, 모호한 규정 등)를 보면, 앞으로 여섯 달 동안 이러저러한 가이드라인으로 반쯤 누더기로 만들 공산이 큰 데서도 알 수 있다.

초기업 교섭은 직무급제를 확산시키는 고리로 악용될 수 있다 ⓒ출처 금속노조

그런데 노동조합 상근간부 상당수는 직무급제 도입을 일관되게 반대하는 것 같지 않다. 초기업 교섭을 위해서는 정부·사용자들과 거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4월 1일 민주노총과 진보당·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주최한 ‘산별 초기업 교섭 활성화 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연세대 권오성 교수는 초기업 교섭 함께 직무급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무급제가) 높은 임금을 받아 온 계층의 손해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손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취지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노조 상근간부 상당수도 고임금·정규직이 양보해야 저임금·비정규직 처우 개선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임금피크제 도입에 합의하거나, 고임금·정규직 노동자의 건강보험·국민연금 보험료 인상을 지지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노조 상층 상근간부들이 더 열악한 노동자들의 조건 개선을 위해 열심히 싸워 온 것도 아니다. 평소에는 비정규직 처우 개선, 최저임금 인상 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조합에게 유리한 양보를 조금 얻어 내고는 입을 씻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현대·기아차 비정규직의 사례는 물론이고 건강보험콜센터 노동자들의 경험도 있다. 공공 부문의 정규직 노동조합들이 ‘비정규직 자회사 채용’을 수용해 이중임금제 도입에 합의해 준 것도 결코 언행일치라고 말할 수 없다.

사실 노란봉투법의 또 다른 핵심인 합법 파업 확대는 노조 간부들에게는 마냥 반갑지 않을 수 있다. 기층의 조합원들이 파업 투쟁을 요구할 가능성이 커지고 노조 간부들은 이를 회피할 명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란봉투법으로 인해 원하청 노조 사이의 교섭권 분배도 뜨거운 쟁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김영훈 노동부 장관은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으로 이런 사정을 매우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초기업 교섭을 다음 과제로 제시한 것은 노조 상층 간부들에게 기층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라고 신호를 보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초기업 교섭은 정부가 노조 상근간부들을 회유해 직무급제 도입 등을 받아들이게 하는 반대급부가 되기 쉽다.

그러나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결하겠다며 정규직이나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 조건을 악화시키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단결의 발판이 되기는커녕 노동자들을 이간질해 기층의 투쟁 능력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사용자와 기층 노동자 사이에서 협상을 담당하는 노조 지도자들에게는 운신의 폭이 넓어지는 효과를 낼지는 몰라도 말이다.

실제로 프랑스의 산별협약 확장/확대 제도 자체가 노동자들의 조건을 개선했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프랑스의 산별협약 확장 제도는 1936년에 체결된 마티뇽 협정에서 시작된 것인데, 이 협정은 그 유명한 점거파업 물결의 성과였다. 하지만 동시에 민중전선 정부가 노동자들의 투쟁을 억누르고 예방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기도 했다.

프랑스 산별협약의 실정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오늘날 “산별교섭은 다분히 형식적인 것으로 전락”했고, 그런 협약으로 체결된 임금은 사실상 정부가 정한 “최저임금의 변동을 그대로 받아 적는” 구실을 했다고 지적한다.(한국노동연구원, ‘1990년대 말 이후 프랑스의 임금교섭 현황’, 2005)

스웨덴의 유명한 연대임금 정책도 “임금인상 억제정책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신정완, 《복지자본주의냐 민주적 사회주의냐 — 임노동자기금논쟁과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은 부족한 임금을 추가로 인상하기 위해 작업장별로 사용자들과 별도 교섭을 벌였는데, 전후 호황기에는 전체 임금인상액의 절반가량이 이렇게 얻어 낸 것이었다고 하니 임금 인상 억제 효과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선진 노동자들은 초기업 교섭에 대한 환상을 경계해야 한다. 교섭에서의 법률적·형식적 통합이 아니라, 투쟁에서의 연대와 단결만이 승리의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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