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지법 폭동 1년:
서부지법 폭동에서 얻어야 할 진정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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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19일 새벽 극우 폭도들이 서울서부지방법원 건물로 쳐들어가 광기 어린 폭동을 벌인 지 1년이 지났다.
1월 18일은 서부지법에서 윤석열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열린 날이었다. 대통령 경호처라는 무력 조직까지 앞세우며 저항한 윤석열이 극적으로 체포된 지 3일째였다.
윤석열이 합법을 가장해 체포에 저항한 것은 그자의 비상계엄이 친위 쿠데타였음을 실감하게 하는 일이었다.
결국 그날 새벽 윤석열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비상계엄 선포 직후부터 국회의사당 앞, 도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으로 나선 민주 염원 대중의 저항 덕분이었다.
그런데 45년 만의 군사 쿠데타 기도가 촉발한 극우 세력의 광기는 윤석열 구속으로 사그라지지 않았다.
18일 낮 이미 서부지법 바깥에는 전국에서 모인 수만 명이 법원 정문부터 아현초등학교 앞까지 마포대로 전 차선을 차지하고 법원을 포위했다. 그들은 윤석열을 응원하고 담당 판사를 협박하는 구호를 계속 외쳤다. 일부는 대통령 취임을 이틀 앞둔 트럼프가 윤석열을 지원할 거라는 기대도 드러냈다.
그들 중 일부는 낮부터 법원 담을 넘으려 시도했고, 영장실질심사가 끝난 뒤에는 공수처 차량을 공격했다. 결국 윤석열 구속이 발표되자 백수십 명이 광기 어린 난동을 개시했다.
폭동자들은 구속영장 발부 판사를 찾아내겠다며 한층 한층 올라가 건물을 때려 부쉈다. 경찰 지휘부는 낮부터 법원 침탈 행위들이 있었는데도 경찰을 철수시킨 상태였다.
전광훈은 낮 집회부터 대열 다수를 이끌었고, 국민의힘 의원 윤상현과 윤석열의 절친인 극우 변호사 석동현 등은 저녁부터 시위대와 교감하고 있었다.
우파의 과격화
서부지법 폭동은 윤석열의 쿠데타 기도가 실패했음에도 우익의 과격화(극우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음을 드러냈다.
극우 청년들이 주요 국가기구 건물을 파괴한 폭동은 윤석열 구속으로 사기가 저하될 수도 있었던 지지층을 다잡고 결집점을 제공하는 효과를 냈다.
극우는 존재감을 재확인했고, 국민의힘은 윤석열 옹호로 더욱 확고히 방향을 틀었다.
윤상현 등 현역 의원들뿐 아니라 이혜훈 등 원외 정치인들도 “윤 어게인” 세력과 손을 잡았다. 전광훈 집회 외에도 세이브코리아 집회가 등장해 감히 광주에서 맞불 극우 집회를 시도했고, 개강을 앞두고 대학가에서 윤석열 탄핵 반대 인자들을 결집시키는 시도로 이어졌다.
김용현은 구속된 서부지법 폭도들에게 영치금을 지원해 달라고 옥중 편지로 호소했다. 올해 1월 〈세계일보〉의 기획 보도를 보면, 수감자들은 평균 1,000만 원 상당의 영치금을 지원받은 덕에 생계 활동 중단 등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받았다고 한다. 영치금으로 빚을 다 갚았다는 자들도 있다.
“윤 어게인”과 “계몽령”에 맞서
서부지법 폭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윤석열 자신이었다. 윤석열은 연속 담화 발표로 극우 청년들을 “애국자”로 부르며 찬양·고무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 자체로 인한 충격 자체가 극우의 과격성을 자극하는 효과를 냈다.
무력으로 민주주의와 정치적 반대파를 분쇄하려는 쿠데타가 정당한 행위(“반국가세력을 척결”해 국가를 구하는 것)라면, 극우의 ‘백색 테러’도 “애국”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윤 어게인” 구호는 쿠데타(“일거에 좌파 척결”) 미수를 결국 완수하자는 것이고, 이런 각성과 메시지 효과가 “계몽령”인 것이다.
특히 국민의힘이 폭도들을 변호하자 “극우의 주류화” 속도는 빨라졌다.
과격성의 거침없는 과시와 극우의 주류화 탓에 쿠데타 청산 문제를 놓고 기성 권력자들이 극우의 눈치를 보게 됐다. 공중파 방송 뉴스에는 우익 논평가가 진보 논평가와 나란히 앉았다. 이런 주류화 효과는 윤석열 탄핵 심판을 맡은 헌법재판소에도 영향을 미쳐 파면 결정을 지연시켰다.
2월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이준석의 개혁신당까지 포함하는 민주헌정수호연대를 제안하고 “중도 보수 선언”을 했다. 극우 주류화의 영향을 받은 기회주의적 대응이었다.
서부지법 폭동은 윤석열 구속 후 쿠데타가 돌발적 해프닝으로 정리되고, 순조롭게 윤석열 탄핵, 조기 대선 등 헌정 질서가 다시 안정화될 거라는 자유주의자들의 기대에 타격을 줬다.
일부 좌파도 당황했다. 당시 좌파는 극우에 대항한 맞불 동원을 강화함으로써 극우의 주류화 효과가 최소화되도록 행동했어야 했다.
본지 지지자들은 그래서 당시에 2월 전국의 대학가, 광주 촛불집회 등에서 맞불 투쟁에 적극 참여·지지했으며, 극우 결집에 맞서는 민주노총의 파업을 호소했다. 이런 호소에는 호응이 있었다. 특히 대학가 침투를 막아 낸 이후인 3월부터는 국면의 주도권을 탄핵 운동 측이 조금씩 되찾게 된다.
부족한 수사, 관대한 판결
서부지법 폭동으로 56명이 당일 현장에서 체포됐고, 총 128명이 기소됐다. 그중 95명이 구속기소 됐다.
그러나 윤상현, 석동현, 무엇보다 대통령실에 대한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전광훈도 서부지법 폭동 1년 코앞에서야 구속됐다.
구속기소 된 자들 대부분에게 유죄가 선고됐지만, 방화 기도범 한 명만 징역 5년, 전광훈의 전도사 2명만 3년 반을 받고, 나머지 중엔 3년형을 넘은 이가 없다. 폭도들을 선동하고 이끈 자들도 1년 반 정도에 불과했다. 불구속기소 됐던 자들은 거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더욱 우려스런 것은 그조차 2심에서 1심의 형량들이 대부분 삭감된 것이다.
폭도들 중 집행유예 등으로 풀려난 자들은 극우 내에서 검증된 투사로 인정받으며 우대받고 있다.
소요죄나 내란선동죄는 적용되지 않았는데, 수사한 검·경은 그 죄들은 입증하기가 어려우니 입증이 쉬운 죄목으로 그에 준하는 형벌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결과, 극우 폭도들이 윤석열의 군사 쿠데타 기도를 지지하며 벌인 반민주적 폭력이라는 중대한 정치적 의미가 빠진 채, 건물 침입이나 기물 파괴에 대한 일반적 형사 판결로 귀결됐다.
이것은 지난 1월 16일 윤석열 재판에서 체포영장 집행 방해에 특수공무집행방해죄를 적용하면서, 일반 민간인들이 경찰 등의 업무를 방해하고 그 지시에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한 양형 기준을 적용해 극히 낮은 형량을 판결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관련 기사: 본지 569호, ‘윤석열 내란 관련 재판 첫 5년형 선고: 당연한 유죄 판결이지만 형량이 너무 적다’)
이는 13년 전 단지 모여서 토론만 했을 뿐인 통합진보당 정치인과 당원들을 검찰이 어떻게든 내란선동죄로 기소하려던 것과 대조된다. 재판에서 이른바 “RO”의 실체가 입증되지 않는다며 내란선동죄가 기각돼도 검찰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죄목들을 고집했다. 법원은 누구도 위협하지 않은 내부 토론에 최대 9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경찰·검찰·법원은 좌파로부터 기존 질서(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지키자는 극우를 (설사 그들이 ‘공권력’에 도전해 자신들이 엄벌해야 할 때조차도) 위험한 세력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기소 죄목 선택과 형량에도 반영됐다.
서부지법은 이 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자체 백서를 발간했으나, 결론 부분에서는 구속을 너무 무리하게 하는 것이 “격렬한 반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고, 1·19 폭동 사건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할 것”이라며 폭도들을 관용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서부지법 폭동은 윤석열 쿠데타 미수에도 극우의 주류화가 위험 수위가 질적으로 높아진 위협이 됐음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재판 결과는 극우가 목표한 바를 부분적으로 성취하고 있고, 기성 제도에 쿠데타 세력 청산과 극우 대응을 맡겨 봐야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는 진실을 냉정히 보여 준다. 민주주의 염원 대중의 맞대응 행동이 그들의 기세를 꺾을 때만 극우를 약화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