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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미니애폴리스 노동자들은 어떻게 싸워서 이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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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미니애폴리스에서는 트럭 운전사들의 노동조합 팀스터가 일으킨 항쟁이 총파업으로 발전했다. 커밀라 로일과 존 뉴싱어가 항쟁의 역사를 돌아보고 오늘날 미국의 저항에 주는 교훈을 살펴본다.
미국 미네소타주(州) 미니애폴리스시(市)에서 노동자 수만 명이 트럼프의 이주민 단속 침공에 맞서 거리로 나왔다. 이 노동자들은 미니애폴리스 노동계급이 전투적으로 싸운 역사의 일부다.
1934년 미니애폴리스의 트럭 운전사들과 석탄 하역·운송 노동자들이 노조 ‘팀스터’를 결성해 승리를 거뒀다.
노동자들은 석탄을 운송하기 위해 장시간 고된 노동을 해야 했다. 고용주는 피츠버그 석탄 회사였다. 저탄장(貯炭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6일을 일했고, 새벽 3시에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패럴 돕스는 피츠버그 석탄 회사의 팀스터 조합원이었다. 그의 저서 《팀스터 항쟁》은 당시 파업의 고무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항쟁이 시작될 때만 해도 돕스는 급진적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돕스는 항쟁을 겪으면서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됐고 미국공산주의자연맹에 가입했다. 미국공산주의자연맹은 스탈린주의 공산당에서 결별하고 나온 트로츠키주의 단체였다.
돕스는 선배 노동조합 활동가들과 공산주의자연맹 회원들의 영향을 받아 급진화했다.
돕스의 책을 보면, 카를 스코글룬드나 레이 던 같은 혁명가들에게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배우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그들은 돕스에게 노동조합에서 활동할 것도 적극 권했고, 대규모 집회에서 발언하기를 권했다.
전투적인 팀스터 노조는 노조 관료의 보수성에 맞서 싸워야 했다.
미국노동총연맹(AFL) 지도부 등 노조 최상층부는 ‘기업형 노동조합주의’ 방식으로 노조를 운영했다.
그들은 고임금의 “숙련” 노동자들만 신경 쓰며 대다수 노동자는 외면했다.
노조 관료들은 파업은 물론이고 심지어 신규 조합원들이 대거 가입하는 것조차 꺼렸다. 그런 일이 사용자 측과의 합의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관료들은 노동자들에게서도 압력을 받았다. 노동조합 지도자로서 그들은 뭐라도 제공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노동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잃어 지배계급도 노조 지도자들의 쓸모를 못 느끼게 될 위험이 있었다.
1934년 초 노조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의 파업 투표를 막으려고 했다.
많은 석탄 노동자들은 이에 분노하고 불만이 폭발해 조합원증을 찢어 버렸다. 석탄 노동자들로 이뤄진 자원 활동가 위원회는 왜 노조를 탈퇴하지 말아야 하는지 노동자들과 논쟁해야만 했다.
이 위원회는 트럭 운전사, 보조원, 석탄 저장소 노동자 600명으로 첫 파업을 호소했고, 이후 조합원 확대 활동에 공세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7월에 핵심 전투가 벌어질 즈음에 팀스터 574지부 조합원 수는 약 7,000명에 이르렀다.
파업 노동자들은 대체 인력 투입을 막기 위해 매우 전투적인 전술을 개발했다. “질주하는 피켓” 전술은 차를 끌고 파업 파괴자들이 모는 트럭을 쫓아다니는 행동이었다.
한 명이 그 트럭의 측면 발판으로 뛰어올라 운전석으로 들어가서는 트럭의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었다. 다른 한 명은 적재함 레버를 풀어서 싣고 있던 석탄을 모조리 도로에 버렸다.
매 단계마다 혁명가들은 전략 논쟁을 벌여야 했다. 한 보수적 조합원은 유인물을 만드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이미 노동조합 건물 위치를 알고 있으니 유인물이 필요 없다고 했다.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높이기 위한 집회 개최에 필요한 장소를 대관하는 데에 반대한 조합원들도 있었다.
돕스와 그의 동지들은 그런 조합원들을 설득해 장소를 대관하고 대관 비용을 모금해 마련할 수 있었다.
전면 파업을 준비하면서 팀스터 노동자들은 실업자들이 대체 인력으로 투입돼 파업 파괴자 구실을 할까 봐 우려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조직으로 활동하는 사회주의자들, 실업노동자 운동에 참여하는 공산주의자연맹 회원들의 개입이 핵심적으로 중요했다.
그들은 노조 안에 실업자 분회를 차렸고, 실업자들에게 대체 인력 투입 반대 활동에 함께해야 하는 이유를 설득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또한 농부들과 행동을 조율했다. 농부들이 파업 때문에 농산물 유통이 마비되는 것을 원망하다가 사용자 측에 이용당하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
미니애폴리스의 소기업들에서 일하는 타자수들은 파업에 유용한 정보를 기업인들 몰래 빼냈다. 팀스터의 파업이 얼마나 광범하게 지지받았는지 보여 주는 한 척도다.
여성들은 ‘여성 분견대’를 꾸렸고 돕스의 아내 마블 숄도 거기에 함께했다.
이들은 수동적 지지만 보내는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사무, 돌봄, 식량 조직 문제에서 유능하고 파업에서 핵심적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성들은 시위를 조직하고 다른 노조를 방문해 연대를 호소했다.
이주노동자들은 그들의 고유한 전투적 노동운동 전통을 파업 운동으로 갖고 들어왔다. 스웨덴 출신의 스코글룬드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한 노조 지부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 여러 명이 두각을 나타냈다.
팀스터 파업은 미니애폴리스의 상업적 운송을 거의 대부분 마비시켰다.
노동자들은 하루 14~15시간 대체 인력 투입 저지 활동을 한 후 최대 2만 5,000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그 집회에서 그들은 파업과 협상의 최신 소식을 들었다. 노동자들은 파업위원회를 스스로 선출했고 일간지를 발행했는데, 그 신문의 편집을 맡은 이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었다.
파업 노동자들과 그 지지자들은 가능한 여건에서는 커피와 샌드위치, 따뜻한 음식을 준비해서 하루 4,000~5,000명에게 제공했다.
많은 이들은 노조 건물에서 밤잠을 자기도 했다.
8월이 되자 사용자 측은 파업의 압력과 미네소타 주지자 플로이드 올슨의 개입 때문에 물러섰다.
파업 노동자들의 신문은 승리를 선언했다. 팀스터가 요구했던 임금과 노동조합 권리 보장이 관철됐다.
오늘날 미니애폴리스에서 사회주의자들은 1934년 파업이 아마존·스타벅스 등에서 노조를 조직하려 하는 노동자들에게 귀중한 교훈을 준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1934년 파업은 새로운 노동자 집단을 노동조합 운동으로 끌어들일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또, 일반 조합원들의 기구가 파업을 주도해서 승리로 이끌 수 있고, 사용자 측과의 대결에서 사회주의자들이 핵심적 구실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파업 노동자 1,500명이 몽둥이를 들고 경찰을 압도했다”
존 뉴싱어
1934년 미국에서는 계급 세력 관계를 노동계급에게 유리하도록 만든 세 건의 위대한 파업이 있었다. 오하이오주 톨레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벌어진 노동자들의 항쟁이었다.
세 파업 모두 참가자들의 투지와 결의 덕에 승리를 거뒀다. 또 세 파업 모두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이끌었다. 그들은 해당 도시 전체의 노동운동이 그 파업에 연대하도록 조직했다.
그중 미니애폴리스에서 벌어진 투쟁을 살펴보자.
미니애폴리스에서 기업인들은 노조가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려고 시민연맹(CA)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힘을 합쳤다.
CA는 사설 경비대 병력을 운영했고 모든 일터에 정보원을 두고 있었다. CA에 속한 기업주들은 노조 활동에 동조한다고 의심되는 사람을 해고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팀스터 노조에서 조직을 시작했고, 저탄장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에 성공했다.
저임금과 과로에 시달리는 트럭 운전사 수천 명이 노조에 가입했고 1934년 5월을 목표로 전면 파업을 준비했다. 파업은 미니애폴리스 전역의 사장들에게 노조 인정을 요구했다.
팀스터는 파업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위한 식당과 진료소를 차렸다.
경찰과 CA 깡패들 때문에 다치는 노동자가 나올 것은 필연이었다. 파업을 지지하는 간호사와 의사들이 진료소를 운영했다.
노조 건물을 지키기 위해 남성들은 기관단총 등 총기로 무장했다. 노동자들은 꼼꼼하게 조직된 대체 인력 투입 저지 활동으로 산업을 마비시켰다.
대체 인력 투입 저지 활동 초기에는 남성과 여성 모두 무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5월 19일 경찰과 CA 깡패들이 치밀하게 계획된 공격을 가했고, 대체 인력 투입 저지 활동가 다수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노조가 운영하는 여성 분견대 활동가 여러 명이 잔혹한 폭행을 당해 팔다리가 부러졌다.
그에 대응해 노조는 함정을 팠다. 경찰이 또다시 파업 노동자들을 공격하려 달려들 때 몽둥이로 무장한 파업 노동자들의 큰 대오가 숨어 있었다. 경찰은 자신들이 파업 노동자 1,500명에 견줘 압도적 열세에 있음을 깨닫고 이내 달아났다.
그다음 날 경찰은 CA 깡패들을 동원해 다시 나타났다. 거리 장악을 둘러싼 전투가 계속됐다.
팀스터 편에도 지원군이 합류했다. 팀스터 파업에 연대하기 위해 일손을 놓은 건설 노동자 수백 명이었다. 건설 노동자들은 팀스터가 승리했을 때도 다시 한 번 일손을 놓았다.
전투가 끝날 무렵 CA 깡패 2명이 살해됐다. 그중 한 명은 미니애폴리스에서 나름 잘나가는 기업인이었다. 전투는 노조가 거리를 장악하는 것으로 승부가 났다. 이 승리를 “임시 보안관들이 줄행랑친 전투”라고 부른다.[당시 경찰은 CA 깡패들에게 ‘임시 보안관’ 지위를 부여했다. — 역자]
노조는 이만하면 사용자 측이 합의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사용자 측은 시간을 벌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노조는 실업자들로 이뤄진 분견대를 꾸렸고 5,000명 이상을 가입시켰다. 그 기구는 〈조직자〉라는 신문을 내기 시작했는데, 이 신문은 친사용자 측 언론이 퍼뜨리는 거짓말을 반박하기 위해 한동안 일간으로 발행됐다.
노동자들은 사용자 측에 맞서 미니애폴리스의 모든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이곳을 노조의 아성으로 만들겠다는 태세를 갖췄다.
7월이 되자 사용자 측에 합의 의사가 없음이 분명해졌고 노동자들은 다시 한번 파업을 벌였다. 이번에 노동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고의적 학살이었다.
7월 20일 대체 인력이 몰던 트럭을 막으려던 활동가들이 경찰의 기습 공격을 당했다. 어떠한 도발도 없었는데 경찰은 경고 없이 노동자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경찰 공격으로 파업 노동자 헨리 네스와 존 벨로가 목숨을 잃었다. 이밖에도 67명이 다쳤는데, 다수가 평생 후유증이 남을 중상을 입었다. 한 남성은 총에 맞아 손이 통째로 날아갔다.
사용자 측은 이처럼 잔혹한 대응으로 노조가 와해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기는커녕 광범한 분노가 일었고, 네스의 장례식에는 약 10만 명이 참가했다.
노조는 굳건하게 대열을 유지했고, 경찰과 사용자 측 모두의 압력에 저항했다. 이후 주방위군이 노조 건물로 쳐들어와 파업 지도자들은 연행한 후에도 그랬다. 파업 노동자들은 곧 석방됐다.
결국 미네소타 주지자 플로이드 올슨이 마지못해 개입해서 사용자 측이 협상에 나서도록 했다. 올슨은 심지어 대통령까지 사용자 측에 압력을 넣도록 했다.
그들은 투쟁이 장기화되면 필연적으로 노조의 전투성이 커지고 노조 내 좌파가 강력해질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이것이 팀스터가 미니애폴리스 거리에서 거둔 역사적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