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과 1930년대 미국 노동운동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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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노동자연대가 5월 28일 주최한 온라인 토론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을 글로 옮긴 것이다. (영상 보기)
1930년대 중후반(특히 1934∼1937년) 미국에서 전투적 노동조합 운동이 성장했다. 대규모 노동자 투쟁의 물결이 일고, 공장점거 파업이 확산됐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 역사상 최악의 경제 불황기였고 나치가 진군하던 때였다. 1933년 1월 독일에서 나치인 히틀러가 집권했다. 1936년 5∼6월 프랑스에서 혁명적 대사건이 벌어졌지만 혁명의 물결이 오래가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그 뒤 스페인에서 혁명이 패배해 파시스트인 프랑코가 승리했다.
이 시기에 미국 노동운동은, 유럽 노동운동처럼 혁명(적 상황)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지만, 그 역사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1930년대 미국 노동운동은 경제 위기 시기에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뉴딜 정책의 역설적 효과
루스벨트 정부의 뉴딜은 노동자들에게 일부 양보를 했지만, 근본에서 자본가들의 이익을 보호해 자본주의를 구출하려는 정책이었다.
리오 휴버먼은 《가자, 아메리카로!》(비봉출판사)에서 과대 포장된 뉴딜 정책을 폭로했다. 뉴딜 정책은 생산수단의 사유제도를 바꾸지 않았고, 고용주는 여전히 옛날의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노동자도 옛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바뀐 게 있었다. 뉴딜 정책을 계기로 기업주의 자유방임 자리에 정부 개입이 들어섰다. 그러나 뉴딜은 경제를 회복시키지 못했다. 자본주의를 불황에서 구출한 것은 뉴딜이 아니라 제2차세계대전이었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하면 끔찍한 야만에 의지해 벗어나려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뉴딜이 노동 존중 정책이었다는 것도 신화이다. 1935년 한 해에만 미국 20개 주에서 벌어진 파업 73건을 파괴하기 위해 민병대가 고용됐다. 그 주들은 대부분 민주당 ‘뉴딜 정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자기 지역 동맹들의 파업 파괴 행위에 대통령 직권을 행사한 적이 없다. [뉴딜 정책을 간편하게 더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본지에 실린 ‘뉴딜 정책이 미국을 대불황에서 구했나?’(이정구, 320호), ‘1930년대 미국의 뉴딜과 노동운동: 계급 협력 노선의 우울한 결말’(이정구, 322호)를 추천한다.]
그런데 뉴딜 정책은 노동계급에게 역설적 효과를 일으켰다. 루스벨트는 애초 단결권만 허용해 노동자들을 달래고자 했다. 이를 통해 경제를 안정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1933년 전국산업부흥법(NRA)이 통과되자 파업이 분출했다. 루스벨트가 노동자들에게 한 양보는 그가 의도한 효과를 내지 못한 것이었다.
전국산업부흥법 파업의 지도부는 두 부류였다 — 보수적인 미국노동총연맹(AFL) 지도부와 혁명가·극좌파가 주도한 비공식적 지도부.
섬유 노동자와 광원들의 파업은 노동총연맹 지도부가 이끌었다. 이 파업은 기존 노조 관료의 힘을 재건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이와 달리, 혁명가와 극좌파가 이끈 파업들은 효과적으로 연대를 구축해 승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34년 거의 동시에 벌어진 캘리포니아주(州) 샌프란시스코 항만 노동자 파업, 오하이오주(州) 털리도의 오토라이트 파업, 미네소타주(州) 미니애폴리스의 트럭운송노조(팀스터스) 파업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항만 파업은 공산당이 주도했다. 파업위원회 위원장이 공산당원인 해리 브리지스였다.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해 미국 서부 해안에서 일하는 항만 노동자 1만 4000명이 파업하자, 팀스터스가 운송을 거부하고 선원 노동자들이 동조 파업에 들어갔다.
털리도 소재 자동차 부품 공장인 오토라이트에서 벌어진 파업은 미국노동자당(AWP) 투사들이 주도했다. 사측이 실업자들을 파업 파괴자로 활용하자, 미국노동자당은 실업 노동자들과 파업 노동자들의 연대를 조직했다. 1만 명이 넘는 실업자 지지자들이 대규모 피켓 라인을 형성해 주 방위군과 육탄전을 벌였다.
미니애폴리스 팀스터스 파업은 소규모 트로츠키주의 단체인 미국공산주의자동맹(CLA)의 패럴 돕스와 빈센트 던이 이끌었다. 이 파업은 다른 파업들보다 더 나아갔는데, 현장 조합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통제했다. 파업 참가자들은 자체 병원과 대중 식당을 조직하고, “이동 중대”가 미니애폴리스를 순찰하며 파업 파괴 트럭의 운행을 막았다. 이 파업은 “미국 투쟁의 역사에서 가장 멋진 페이지들 가운데 하나”가 됐다.
작고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토니 클리프(1917~2000)는 미니애폴리스 트럭 운전사 파업을 조직하고 지도하는 트로츠키주의 활동가들의 정치적 수준이 매우 높았다고 평가했다. 미국노동자당과 공산주의자동맹은 1938년에 통합해 트로츠키주의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이 됐다.
산별노조 운동과 점거파업의 물결
1934년 파업들을 계기로 정세 흐름이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대중적 산별 노동조합 운동이 시작됐다. 보수적인 미국노동총연맹(AFL) 지도자들은 숙련 노동자들 중심의 직업별 노동조합을 고수했다. 직업별 노조는 보통 숙련 노동자들만 포함했고, 노동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미숙련·반숙련 노동자들에게 종종 적대적이었다. 노동총연맹 전 위원장 샘 곰퍼스는 미숙련 노동자들을 “쓰레기”라고 불렀다. 게다가 노동총연맹은 인종차별적 전통과 단절하지 않았다.
혁명가와 극좌파, 특히 공산당원들이 산별노조 조직화 운동을 주도했다. 노동총연맹의 일부 관료들이 직업별 노동조합 조직과 결별했다. 미국광원노조 위원장 존 L. 루이스가 그랬다. 루이스는 결코 좌파가 아니었다. 그는 1932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허버트 후버를 지지했다. 루이스는 혁명가들과 극좌파들이 산별노조 조직화 운동을 주도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그 운동의 얼굴이 되고자 했다.
1935년 산업별조직위원회(CIO; Committee for Industrial Organization)가 노동총연맹의 한 분파로 등장하자, 자동차와 고무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가입이 쇄도했다. [1938년 노동총연맹이 CIO와 수백만 노조원들을 축출하자, 산업별노조회의(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 CIO)로 이름을 바꾸고 노동총연맹과 경쟁 노조가 됐다.]
대중적 산별노조 운동과 함께 점거파업 물결이 나라를 흔들었다. 경제 위기가 근본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1935년부터 경기가 호전돼 1937년 가을까지 지속되자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크게 올라갔다. 트로츠키는 노동자들이 흔히 통계학자들보다 더 빨리 경기회복을 체감한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신규 주문이나 심지어 신규 주문에 대한 기대가 있을 때나 생산 확대를 위해 기업 조직이 재편될 때, 심지어 노동자 해고가 중단되기만 해도 곧바로 노동자들의 저항 능력과 요구 사항이 증대한다고 주장했다.
1936년 공장점거 파업이 고무산업의 중심지인 오하이오주(州) 애크런으로 확산됐다. 때로 경제적이지 않은 쟁점을 두고도 점거파업이 벌어졌다. 예컨대, 굿이어 고무 노동자들은 백인 극우 단체인 KKK가 애크런 공장 앞에서 십자가를 불태우자 그 불이 진화될 때까지 작업에 복귀하지 않았다.
1936년 말에 시작된 전설적인 지엠(GM) 플린트 공장의 점거파업이 가장 극적으로 사태의 흐름을 바꿔 놨다. 플린트는 지엠 제국의 심장부였다. 1936년 플린트 인구 16만 명 중 4만 7000명이 지엠에 고용돼 있었다.
플린트 점거파업은 1936년 12월 30일에 시작돼 1937년 2월 11일까지 44일 동안 지속됐다. 지엠 생산직 노동자 15만 명 중 14만 명이 점거파업 또는 동맹 파업에 참가했다. 전 국민의 이목이 플린트 자동차 노동자들에게 쏠렸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이겼다.
파업 참가자들은 매일 집회에서 모든 사안들을 결정했다. 사수대, 식량 배급, 심지어 오락을 조직했다. 노동자들은 단호하게 방어적 물리력을 행사해 경찰 공격에 맞섰고, 기발한 전술적 책략을 발휘해 지엠의 핵심 공장을 점거했다.
여성들도 플린트 공장파업에서 결정적 구실을 했다. 파업 노동자들의 아내 350명이 플린트여성비상군을 결성했다. 전형적인 보조 구실을 한 것이 아니라 방송차로 시내를 돌며 선동하고 경찰과 전투를 벌였다.
플린트의 승리로 노동계급의 자신감이 더 올라, 1937년 말 전국에서 50만 명이 점거파업에 참가했다.
제3정당 건설 움직임과 좌절
그런데 계급투쟁이 고양되던 1936년 대선에서 루스벨트는 어떻게 역대급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을까?
강력한 투쟁을 통해 많은 노동자들이 급진화됐다. 산별노조 운동이 기업과 국가의 탄압을 받으면서 불가피하게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됐다. 그래서 루스벨트 지지 압력이 상당했음에도 노동계급 속에서 강력한 사회주의 운동을 건설할 잠재력이 있었다.
1935년 자동차노조 대의원대회는 논쟁 끝에 루스벨트 지지 결의안을 부결시키고 “전국적인 농민-노동자당 창당”을 지지·지원한다고 결정했다.
점거파업의 물결이 휩쓸던 1937년 8월에 실시된 갤럽 조사를 보면, 21퍼센트가 전국적인 농민-노동자당 결성을 지지했다.
이 무렵 미국에서 다양한 진보 세력들이 제3정당을 창당하려 했는데, 이 운동의 전략적 요체는 미네소타 농민-노동자당(Farmer-Labor Party)이었다. 미네소타에서는 농민-노동자당이 1934∼1936년 선거에서 주지사 한 명과 연방상원의원 두 명을 배출했다.
그러나 독자적인 노동자 정당이 건설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먼저, 루스벨트 정부가 1935년 와그너법(전국노동관계법) 제정 등 일시적으로 좌선회해 급진파 세력을 민주당의 영향권으로 끌어당겼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1935년 노동계급 투쟁 수위가 올라가고 경제가 안정화되는 듯하자, 대기업들이 루스벨트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제 뉴딜 동맹에는 서부와 남부의 중소 자본가들로 구성된 반(反)월스트리트 블록만이 남게 됐다.
루스벨트는 께름칙하지만 할 수 없이 CIO 반란자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를 위해 루스벨트는 노동자들에게 상당히 큰 두 가지를 양보했다. 와그너법을 통과시켜, 사용자가 노동조합과의 협상을 거부하는 것을 불법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사회보장 프로그램 통과를 약속했다.
이 두 가지 양보는 대불황 시기에 노동자들이 정부로부터 따낸 최대 성과물이었다. 그리고 루스벨트가 ‘노동계급의 친구’라는 전설적 지위를 얻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양보들의 근본적 목적은 고양되던 노동운동을 민주당에 충성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반란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이제 농민-노동자당과 사회당의 주요 인물들이 루스벨트를 지지했다. 농민-노동자당 출신의 미네소타주 주지사 올슨이 1936년 대선에서 루스벨트를 지지했다. 사회당의 많은 선임 당원들도 1936년 루스벨트 선거 운동 압력에 굴복했다. 국제여성복노조(ILGWU)의 지도자이자 선임 사회당원인 데이비드 뒤빈스키가 1936년 사회당을 탈당해 미국노동당(ALP)을 만들었다. 미국노동당은 뉴욕 급진파의 표를 루스벨트에게 몰아 주기 위해 창당됐다.
무엇보다, CIO 지도자들이 루스벨트가 노동자들 사이에서 계속 인기를 끌 수 있도록 도왔다.
현장 조합원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기 위해 존 루이스와 시드니 힐먼 같은 CIO 관료들에게 정치적·법률적 지원 같은 루스벨트의 영향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CIO는 루스벨트에게 선거 자금 등을 제공하기 위해 노동자무당파동맹(LNPL)을 설립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루스벨트는 노동부와 전국노동관계위원회에 CIO와 친한 자유주의자들을 임명했다.
그러나 공산당의 협조가 없었다면 CIO 관료들이 쉽게 통제력을 강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30년대 미국 공산당은 비슷한 시기 프랑스 공산당이나 스페인 공산당보다 규모가 작았다. 프랑스 공산당 당원 수는 산업 투쟁 물결이 고조되던 1936년에 28만 8000명에 이르렀다. 스페인 공산당은 1936년에 11만 7000명이었다. 미국 공산당은 1938년 말 8만 2000명이었다.
그럼에도 미국 공산당은 노동운동에서 당원 수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공산당은 산업 노동자들 속에 실질적인 기반이 있었다. 1937년까지 공산당원들은 CIO 산하 노조들의 40퍼센트에서 핵심 지도부 지위에 있었다.
1930년대 미국 공산당은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초좌파적인 ‘제3기’ 전략을 실천하다 1935년부터 민중전선으로 이동했다.
‘제3기’는 스탈린의 자의적 시기 구분이었다. 즉, 1917∼1923년 혁명기, 1924∼1927년 자본주의의 안정기를 지나 1928년부터 자본주의가 새로운 경제 위기 시기로 접어들었고, 혁명이 곧 의제에 오른다는 것이었다. 1928년은 스탈린이 러시아 공산당을 처음으로 확고하게 통제한 때였다.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머잖아 유일한 대안은 공산주의이거나 파시즘이 될 것이다. 따라서 세계 도처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는 모든 자유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다가올 위기에 대비하는 것이다. 스탈린은 이들을 ‘사회 파시스트’라고 불렀다. 미국에서는 루스벨트와 민주당, 자유주의자들과 사회당, 개혁주의적 노조 관료들이 ‘사회 파시스트’였다.
또, 미국 공산당은 스탈린의 지시를 따라 1928년 당내 트로츠키주의 분파를 축출했다. 트로츠키가 히틀러와 동맹을 맺었다고 중상모략했다. 그러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매우 달라진 정치 상황에서 혁명적 전통을 보존하고 스탈린주의의 대안을 건설하려고 노력했던 혁명가들이었다.
1935년 스탈린의 대외 정책이 180도 바뀌었다.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자, 스탈린은 히틀러가 소련에 잠재적 위협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 이제 스탈린은 다른 열강 사이에서 동맹을 찾기 시작했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도 그중 하나였다. 이를 위해 소련은 1934년 9월 국제연맹에 가입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민중전선” 정책을 발표했다. 스탈린이 미국과 다른 나라 부르주아 정당들의 환심을 사고자 한다는 것이고, 각국 공산당원들도 똑같이 그래야 했다.
1936년 대선에서 민중전선은 공산당이 루스벨트의 당선을 위해 적극 노력하라는 지시였다. 1935년 1월 미국 공산당 기관지 〈데일리 워커〉는 루스벨트를 “미국에서 파시즘의 지도적 조직자이자 격려자”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제 미국 공산당은 뉴딜 동맹에 초대받지 못했지만 뉴딜 동맹자들에게 충실하기 시작했다.
대선에서 공산당은 자신들의 공개 지지가 루스벨트의 표를 깎을까 봐 지지를 공개 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당은 루스벨트의 승리를 희망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CIO 관료와 공산당이 투쟁을 가라앉히다
민중전선을 향해 달려가는 길에서 공산당은 CIO 관료들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뉴딜 동맹의 좌파로 빠르게 전환하기 위해서는 CIO 관료와의 관계 개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산당이 CIO 고위 관료들을 전폭 지지하면서, 민중전선은 선거 무대를 넘어 계급투쟁에 극히 나쁜 영향을 끼쳤다. 공산당이 자신들의 노동조합 영향력을 이용해 최상의 노동자 투사들이 전투성에서 멀어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플린트 점거파업이 끝난 뒤 존 루이스가 앞으로 영원히 비공인 파업을 관용하지 않겠다고 밝혔을 때, 공산당은 이를 적극 옹호했다.
1937년 말 다시 경기 침체가 시작됐다. 생산이 감소하고 수백만 명이 실업자가 됐다. 1936년 대선이 끝나자 루스벨트는 자신의 진정한 계급 충성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루스벨트는 제2차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대기업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했다.
루스벨트는 실업자가 급증하는데도 1938년과 1939년 연속 빈민과 실업자 구호 및 취업 프로그램을 대폭 삭감했다. 그리고 노동운동을 매우 강경하게 대했다. 1937년 시카고 소재 “리틀 스틸” 파업에서 사용자들이 총으로 무장한 구사대를 고용해 미국 노동운동 역사상 가장 유혈낭자하게 노동자를 공격해 18명이 살해됐다.
그런데도 CIO 노조 지도자들과 공산당은 “루스벨트, 와그너법, 시카고의 ‘뉴딜’ 민주당 시장 켈리가 평화적인 피켓팅 권리를 약속”했다며 노동자들에게 폭력 대비를 준비시키지 않았다. CIO 지도부는 심지어 뉴딜 주지사들이 요청했다는 이유로 주 방위군을 “환영”해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개입을 거부했고, 파업이 끝나고 나서야 입장을 발표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양쪽 집안 모두에 역병이 들기를!”을 인용했다.
“리틀 스틸” 파업의 패배는 미국 노동운동의 고양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오늘을 위한 교훈
1937∼1939년 미국 공산당은 독립적인 노동계급 정당 개념으로부터 후퇴했다. 1938년 공산당 지도자 유진 데니스는 미국에서 제3정당 건설 사상을 포기하는 발언을 했다. “선거 운동에 관한 한 주로 민주당을 통해 이뤄지므로 [민중전선이] 정치 연맹의 형태를 띨”수 있다고 주장했다. 1938년 공산당은 당 공장세포를 철수하고 공장 신문들을 폐간했다. 이제 민중전선은 “민주당 전선”으로 대체됐다.
공산당의 민중전선은 마침내 루스벨트의 참전을 지지하는 순도 높은 애국주의로까지 나아갔다. 1937년 한 연설에서 루스벨트는 미국이 침략국들을 “격리”하기 위해 세계 “평화 애호” 국가들에 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그 연설에 반대했는데, “평화”라는 말이 있긴 해도 미국이 사실상 참전에 한 발 더 다가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산당은 의도적으로 모호한 성명을 발표해 대통령의 연설을 지지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편이나 저편에 서야 한다. 누구든 평화를 위한 집단 행동에 반대하는 사람은 평화의 적이고 국제 도적의 대리인이다.”
1939년 스탈린이 히틀러와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자 또다시 공산당의 정책이 돌변해 루스벨트 지지를 갑자기 폐기했다. 그러자 많은 당원들, 특히 흑인들이 많이 탈퇴했다.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소련의 동맹을 옹호하는 입장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41년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하자 미국 공산당은 루스벨트의 참전을 지지하는 쪽으로 다시 입장을 바꿨다. 그리고 작업속도 증가, 성과급 등을 옹호했다. 또, 현장 조합원들이 파업하면 공산당이 파업 중지 서약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 결과 CIO 안에서 반공주의 분파가 영향력을 확대했다.
1930년대 대불황 시기에 노동계급 운동 내 리더십을 두고 경쟁하는 사회주의 단체가 공산당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공산당이 결정적 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당이 비교적 큰 규모였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주의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의 당원은 가장 많을 때가 2500명이었다. 미국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제4인터내셔널에서 단연 가장 강력한 지부였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공산당보다는 훨씬 약했다.
훨씬 더 결정적이었던 것은 공산당이 노동계급에게 미친 영향력이었다. CIO 초기에 용감한 조직자들의 압도 다수는 공산당원이었다.
공산당은 자신들이 볼셰비키 전통의 진짜 상속인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공산당이 창당된 1921년에는 이 말이 진실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세계 도처의 공산당들이 그랬듯이, 미국 공산당도 스탈린의 무비판적 추종자가 됐다. 그런데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승리하자 스탈린은 극우에 맞선 진실된 방어자로 행세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들로 공산당은 재빠르게 다른 좌파 단체들보다 앞섰다.
공산당의 교훈은 당의 규모가 얼마가 됐든 전투적 노동자들 속에 내린 뿌리가 얼마나 깊든지 결국 정치가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이었다. 스탈린주의가 1930년대 미국 노동운동을 처참하게 약화시켰음이 입증된 길로 공산당을 끌고 갔다.
1930년대에서 배울 가장 중요한 교훈은 다른 결말을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혁명적 대안이 노동계급에 의해 채택되려면, 노동운동 속에서 강력한 혁명적 리더십을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혁명적 조직이 더 큰 규모로 성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