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누구를 위한 축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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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국제축구연맹(피파) 회장 인판티노는 2026 북중미 월드컵이 “세계를 하나로 묶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현실은 딴판이다.
미국은 ‘테러리스트’ 잠입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이란 대표팀 스태프 다수의 입국을 거부했다. 이란 대표팀 선수들은 조별 예선 모든 경기를 미국에서 치러야 하는데도 미국 내 장기 체류가 금지돼 멕시코에 캠프를 차렸다.
지난 2월 미군이 이란 미나브 지역 초등학교를 폭격해 어린이 수백 명을 무참히 학살한 사실을 생각하면, 미국의 ‘잠재적 테러리스트’ 운운은 역겹다.
트럼프 정부의 강화된 국경 통제는 “세계인의 축제” 기간에도 작동한다.
월드컵에 출전하는 이라크 대표팀 부주장 아이멘 후세인은 공항에서 7시간 넘는 장시간 조사를 받았고, 대표팀 사진사 탈랄 살라 씨는 10시간 넘게 조사받고도 입국을 거부당했다.
소말리아 출신 피파 심판 오마르 아르탄은 월드컵 주심으로 배정돼 여행 비자까지 발급받았으나, 마이애미 공항에서 미국 관세국경보호청(CBP)에 의해 입국을 거부당하고 추방됐다.
지브릴 라주브 팔레스타인 축구협회장 역시 미국의 비자 발급 거부로 미국 입국이 불가능해졌다.
피파의 위선과 이중잣대
피파는 축구와 정치의 분리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미국 등 서방 강대국과 결탁해 매우 정치적으로 움직인다.
월드컵을 반년 앞둔 지난해 12월 피파는 ‘피파 평화상’을 급조해 트럼프를 첫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어 피파는 트럼프의 가자 ‘평화이사회’ 계획에도 참여했다.
피파는 서안지구 불법 정착촌 내 이스라엘 축구 클럽들의 활동을 허용한다. 탐사 보도 기자이자 팔레스타인 연대 활동가인 질 톰슨은 피파가 “이스라엘의 불법적 존재를 묵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몬도와이스〉 6월 9일 자)
피파의 ‘정치적 중립’ 원칙은 피억압자에게만 엄격히 적용된다.
아이티 대표팀은 이번 월드컵에서 착용할 새 유니폼에 1791~1803년 프랑스 식민주의에 맞선 아이티 혁명의 마지막 전투인 베르티에르 전투 장면을 새겼다. 그러나 피파는 ‘정치적 메시지 금지’ 규정을 근거로 해당 유니폼 착용을 불허했다.
기업들의 돈 잔치
월드컵은 기업들과 피파가 막대한 이윤을 벌어들일 기회다.
경기 자체가 거대한 광고판이다. 경기장 라인을 따라 각종 기업들의 광고판이 촘촘히 배치된다. 중계 카메라는 선수들의 축구화와 공인구에 새겨진 브랜드 로고를 클로즈업해 보여 준다.
이번 월드컵에는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수분 섭취 시간)가 운영된다. 전·후반 22분마다 3분간 휴식한다. 이는 미국프로풋불(NFL)이나 미국프로농구(NBA)처럼 쿼터제 방식으로 경기를 운영해 광고 시간을 확보하려는 목적이다. 피파는 선수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정작 혹사와 부상 위험을 이유로 경기 수 감축을 요구하는 유럽 리그 선수들의 목소리는 외면한다.
사상 최대인 48개국이 참가해 104경기가 열리는 이번 대회에서 피파는 중계권과 입장권 판매, 스폰서십 등으로 약 19조 8,000억 원의 수익을 올릴 전망이다.
월드컵 경기 티켓값은 비싸기로 악명 높다. 이번 월드컵도 마찬가지인데, 수요에 따라 실시간으로 티켓 가격이 변하는 유동 가격제를 최초로 도입해 더 비싸졌다. 결승전 티켓값은 한화로 308만∼1,021만 원에 달한다.
애국주의와 억압
정부와 기업은 월드컵을 이용해 애국주의(민족주의) 분위기를 조장한다. 일반 축구팬부터 대통령과 대기업까지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며 국민적 단결 분위기가 조성된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결승전에서 잉글랜드와 독일이 맞붙자, 영국 언론은 결승전을 제2차세계대전에 비유했다. 잉글랜드가 독일을 꺾고 우승한 뒤 잉글랜드 팬들은 독일과의 경기에서 “세계대전 두 번, 월드컵 한 번(Two World Wars and One World Cup)”이라는 응원가를 불렀다.
월드컵으로 고양된 애국주의 분위기가 계급투쟁을 자제시키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기간에 에어프랑스 노동자들이 파업하자, 당시 프랑스 사회당 의원이었고 미테랑 정부에서 예산부 장관을 지낸 미셸 샤라스는 파업 노동자들을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이기주의자들”이라며 맹비난했다. 공산당 주요 인사였던 로베르 위도 “프랑스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며 노동자들을 비난했다.
그러나 월드컵을 ‘볼모’로 삼은 단호한 파업은 효과적이었고, 에어프랑스 노동자들은 승리했다.
2002년 김대중 정부는 전국 34개 노사 대표와 함께 “산업평화 정착”을 골자로 한 “월드컵 노사 평화 선언”을 발표해 월드컵 기간 파업 자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극우·권위주의 정부가 월드컵을 애국주의 선동과 체제 선전에 이용하기도 한다. 1934년 이탈리아 무솔리니 파시즘 정권, 1978년 아르헨티나 호르헤 비델라 군사 정권은 월드컵을 체제 선전의 장으로 활용했다.
한편, 월드컵 개최지의 빈민들은 국가적 이벤트를 위해 희생을 강요받아 왔다.
예컨대 2014년 브라질 월드컵과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을 앞두고 개최 도시의 빈민들이 경기장 건설과 치안 유지 등을 명분으로 강제 퇴거당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경기장 건설 과정에서는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월드컵 이면의 저항
물론 전 세계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월드컵을 즐긴다. 노동자들은 월드컵 경기 중계를 보며 잠시 고단함을 달랜다.
적잖은 팔레스타인 연대자들은 모로코 대표팀이 지난 월드컵에서 팔레스타인 깃발을 흔든 것을 기억한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피파의 정치적 표현 금지 규정을 뚫고 팔레스타인 깃발이나 케피예 등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난민 출신 선수의 활약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도 한다. 탄자니아 난민 캠프에서 태어나 호주로 이주해 자란 네스토리 이란쿤다 선수는 이번에 호주 대표팀으로 월드컵에 출전해 본선 첫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었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축구를 향한 사람들의 애정과 열광을 이용해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추구한다. 그래서 월드컵은 흥미진진한 경기와 여러 감동적인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지배자들의 이익을 위한 이벤트가 된다.
그러나 경기장 밖에서 지배자들과 ‘원팀’이 되기를 거부하며 들고일어나는 사람들의 저항도 있다.
지난 6월 6일 로스앤젤레스 소피스타디움의 식음료 노동자 2,000여 명은 월드컵 기간 파업 돌입을 선언하며 투쟁에 나섰고, 지난 9일 임금 인상과 이민 단속 보호 조처 등이 담긴 잠정 합의안을 이끌어 냈다.
공동 개최국인 멕시코에서는 사회민주당 정부의 긴축에 항의하는 교사들의 파업과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멕시코 정부는 월드컵 개최에 30억 달러를 지출했지만, 학교 예산은 대폭 삭감했다.
‘우리 나라’ 말고 우리 계급의 투쟁이 승리하기를 응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