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약: 보수 의료계 압력 받아 개혁 제한하는 이재명 정부
—
청소년에게도 조건 없이 무상 지원하라
〈노동자 연대〉 구독
이재명 정부는 임신중지약을 도입하며 이용에 관한 세부 진료 지침을 의료계가 자율적으로 마련하도록 지원하고, 산부인과학회 등과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산부인과 3개 단체(대한산부인과학회,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직선제 대한산부인과개원의사회)는 정부의 이런 방침을 환영했다.(9월 16일 공동 성명서)
그러나 이는 이재명 정부가 위기 타개와 지지층 달래기를 위해 임신중지약을 허용하면서도, 여성의 필요와 요구를 올곧게 반영하기보다는 오른쪽의 눈치를 보며 개혁을 누더기로 만들려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정부가 세부 지침 마련을 맡긴 산부인과 3개 단체는 임신중지권에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해 왔다. 이들은 임신 10주 이하만 임신중지를 허용하고, 10주 초과 22주 이하는 조건부 허용, 22주 이후는 전면 금지하는 입장을 채택하고 있다.
또한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임신중지 건강보험 적용을 반대한다. 직선제 대한산부인과개원의사회 김재유 회장도 “[임신중지는] 건강상 문제가 아닌 개인적 선택에 따른 시술로서 건강보험 지원 대상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들은 임신중지를 당사자인 여성의 결정권 보장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고, 의료진의 권한과 부담 등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부인과 3개 단체에는 반낙태 운동의 인사들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대한산부인과학회 부이사장 최안나가 대표적이다.
최안나는 이명박 정부가 임신중지를 단속할 때, ‘낙태 의사 고발’, ‘낙태근절운동’ 등을 주도했고, 현재 반낙태 운동의 핵심 인물의 하나다. 그는 “낙태를 안 하는 것이 여성에게 가장 안전하다”며 임신중지를 최대한 옥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임신중지약 도입과 관련해서도 산부인과 단체들은 임신 9주 이내 허용, 병원 처방·조제, 검사 의무화, 비급여 등 매우 보수적인 세부 방침을 내놓을 공산이 크다. 이런 장벽들은 정부가 이미 도입 발표 당시 언급한 것인데 산부인과 단체들과 협의를 전제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과연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성의 건강과 안전”(이재명)을 고려한 결과인가? 이재명 정부는 산부인과 단체들과 반낙태 세력의 눈치를 보며 개혁을 누더기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건강권을 중시하는 의료계 인사들은 임신중지약 이용에 장벽을 세우는 것이 오히려 여성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지적한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이렇게 말했다.
“접근을 제한하면 이용자는 더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음성 유통 약물에 의존하거나, 비용·이동·거부의 장벽 때문에 임신중지 시기를 늦추게 됩니다.
“병원 문턱을 높여 10명의 통제된 복약만 허용하는 대신 90명을 음성적 영역으로 밀어낸다면, 인구집단 전체의 안전성을 확보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개별 환자를 대면하는 의료전문가의 우려를 넘어, 모든 사람이 더 안전한 경로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것이 보건복지부의 역할입니다.”(‘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 정부의 임신중지 의약품 도입 발표에 따른 긴급 기자간담회)
임신중지약의 접근 문턱이 높아 필요할 때 이용하지 못한 일부 여성들은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약물을 구하거나 적절한 의료적 지원 없이 이용하는 위험에 다시 노출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런 역효과는 청소년, 이주·난민 여성, 가난한 청년 등 의료서비스에 접근하기 어려운 취약계층에게 더 크게 작용한다.
실효성 있는 개혁
임신중지약의 접근성을 높여야 그 약의 실효성도 보장될 수 있다. 이를 위한 안전 가이드와 재정 등의 인프라는 이미 마련돼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는 임신중지약의 안전성을 입증하는 방대한 국제적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고, 그에 따른 사용 가이드도 마련되어 있다. 2025년 발간된 최신 임신중지 가이드에는 임신중지약 자가 복용과 원격 제공 등 접근성을 높이는 방법 등이 상세히 제시돼 있다.
이재명 정부는 보수적인 산부인과 단체들의 ‘전문성’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세계보건기구의 권고를 바탕으로 “직접 지시”하면 된다.
또한, 임신중지약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민간 의료시장에만 의존하지 말고 공공의료 체계를 강화해 임신중지약을 제공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보건소 등을 통해 정보 제공, 검사비 지원, 임신중지약 무상 보급 등을 추진하면 안전성을 보장하면서도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
현재 보건소에서 임신 관련 사전 검사비(여성 13만 원)와 임산부 영양제, 건강검진, 기형아 검사 비용 등 수십 만원 상당의 지원을 조건 없이 제공하고 있다. 물론 이런 지원은 더욱 확대해야 한다.
그런데 왜 임신·출산만 지원하는가? 임신과 임신중지 모두 여성이 선택할 권리인 만큼, 국가는 공공복지 차원에서 양질의 서비스를 무상으로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이재명 정부는 군사비와 메가프로젝트에 수조 원을 쏟아붓고 있다. 그런데 원가가 고작 3000~5000원에 불과한 임신중지약을 무상으로 지급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임신중지약 도입의 세부 방안은 여성의 건강과 안전 그리고 자기결정권 보장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청소년에게도 조건 없이 임신중지약 무상 지원하라
반낙태 보수·우파는 임신중지약이 청소년의 성을 문란하게 만들고 건강을 해친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다. ‘청소년 보호’라는 명분으로 성을 억압하고 임신중지를 규제하는 것이야말로 해악적이다.
청소년도 독립적인 성적 주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오늘날 청소년의 성관계 시작 연령은 낮아지고 성관계 경험도 늘고 있는 추세다. 청소년의 성관계는 일탈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청소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성적 보수주의가 아니라 제대로 된 성교육과 피임·임신중지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이다.
원치 않는 임신은 청소년에게도 현실이다. 2020~2021년 한국건강가정진흥원이 진행한 임신중지 관련 상담을 보면, 총 479건 중 65퍼센트(313건)가 청소년 상담이었다.
그런데 청소년들은 임신중지를 위한 의료기관에 접근하기 쉽지 않다.
낙태죄가 사라졌음에도 많은 병원들이 부모나 보호자의 동의서를 관행적으로 요구하고 있고, 부모에게 사정을 말하기 어려운 대다수 청소년들은 성인 신분증을 구입해 수술을 받거나, 음성적으로 비싼 임신중지약을 구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임신중지 비용을 마련하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임신중지 시기가 지연돼, 수술할 병원을 찾지 못하고 원치 않는 출산에 내몰리는 청소년들도 있다.
그런데도 산부인과 3개 단체는 청소년의 임신중지에 부모 등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필수로 하고, 청소년이 부모 동의 단계를 거부하는 경우 정부의 상담·승인 절차를 의무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임신중지약 진료지침에도 이를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산부인과 단체들의 이런 진료지침을 수용해선 안 된다.
임신중지권은 청소년에게도 보장돼야 할 기본권이다. 부모나 보호자의 동의 없이 청소년 자신의 요청만으로 임신중지약을 무상으로 지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