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산부인과 전문의 특별 기고:
임신중지약 도입을 둘러싼 의료계 제안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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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여성위원회의 고경심 산부인과 전문의(인의협 이사)가 여성의 건강과 재생산권 보장의 관점에서, 산부인과 단체들이 주장하는 임신중지약 도입 조건들이 왜 문제인지 살펴본다.
필자는 40년 경력의 산부인과 의사로, 2018년 낙태죄 위헌 소송 공개변론에 참여해 헌법불합치 판결에 기여했다.
“그동안 사회적 낙인과 차별을 통해 숨죽이고 있던 ‘여성의 목소리’가 사회적 고통을 드러내고 발화하는 현상을 주목하길 바란다. (중략) 특히 기존의 헌법재판소의 논의에 나타나는 낙태를 둘러싼 논점, 즉 태아의 생명권과 대 여성의 선택권이라는 고식적인 프레임에서 벗어나서 낙태 개체인 태아의 생명권을 태아의 발달단계에 따라 구분하는 논쟁보다는, 낙태로 인한 여성의 건강상의 위해성과 안전성을 검토하고, 여성의 건강권과 재생산 건강권을 보장하는 시각으로 낙태죄의 위헌성 여부를 검토하기를 요청한다.”
위 글은 2018년 4월 4일 헌법재판소 형법 낙태죄 조항 위헌심판 당시 필자가 제출한 참고인 의견서의 끝 문장이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조항에 대한 위헌 판결을 한 후 7년이 지나도록 개정 입법이 되지 않았다. 지금의 입법 공백 상태는 처벌 조항의 공백 상태가 아니라 안전한 임신중지와 재생산권 보장을 위한 입법의 부재를 의미한다.
2026년 9월 16일 정부가 임신중지약 미페프리스톤 도입을 공식화했다. 현재 이 약이 도입되면 한국은 세계 101번째 도입국이 된다. 국제적으로 수십 년간 안전하게 허가 사용되고 있는 약을 이제야 도입하겠다고 하니 만시지탄할 일이다.
정부는 내년 초 도입하게 될 임신중지약의 시행 방안에 대해 산부인과 3개 단체(대한산부인과학회,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직선제대한산부인과개원의사회)의 의견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 단체는 “안전한 도입과 관리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하면서도, 임신 9주 이내로 사용 범위를 제한할 것, 도입 초기 2년간 의료기관 내에서 의사가 직접 처방·조제하도록 할 것, 위해성관리계획(Risk Management Plan: RMP)을 통해 안전성을 확인한 뒤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단계적 설계를 할 것 등 가장 엄격한 제한 조건을 주장하고 있다. 안전한 도입을 주장하지만 이면에 숨어 있는 의도는 가급적 제한 조항을 둬 처방을 독점하고 도입을 늦추려는 방식이며 여성이 처한 현실과 필요성을 외면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임신중지 임상 경험이 풍부한 산부인과 의사들이 주축이 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회는 이러한 제한 조건이 여성의 임신중지 접근성을 막고 여성의 건강과 재생산권 보장 측면에서 문제가 많은 주장이라고 본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한 조건에 반대해야
첫째, 임신 9주 이내 사용 범위 제한은 가장 짧은 일본 후생노동성의 임신 9주 기준과 같으며 다른 나라의 승인 기준은 더 포괄적이고 다양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법으로 임신 주수 상한을 두는 것에 반대하며, 12주 미만은 자가 관리를, 12주 이상은 별도 요법을 권고한다(Abortion care guideline, 2022). 실제 미페프리스톤의 효능은 10주에 국한되지 않으며 그 이상의 임신 주수에서도 자궁경부 연화, 처치 시간 단축, 안전성 측면에서 의학적 적용 근거가 있다. 지금 도입하려는 미프지미소(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의 미 식품의약국(FDA) 승인 기준은 9주, 미국 미페프렉스(미페프리스톤·미프진)는 10주이다. 허가 사항에 주수 상한을 두더라도 그 수치를 근거로 상위 주수의 사용을 원천 차단하지 말아야 하며, 주수별·적응증별 세부 사항은 허가 사항이 아니라 학회의 임상진료지침에서 관리하는 것이 국제 표준에 부합한다. 또한 ‘허가 또는 신고 범위 초과 약제 사용승인 제도’를 이용해 오프라벨 사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프라벨은 식약처에서 의약품을 허가한 용도 이외의 적응증에 약을 처방하는 행위이다. 오프라벨 사용의 불가피성을 인정해 환자의 치료받을 권리를 향상하기 위한 체계적인 모니터링 및 평가 인정 확대가 필요하다.)
둘째, 의료기관 내에서 의사가 직접 처방·조제하도록 하는 제안은 처방자 자격과 시설 요건에 제한을 두는 조치로 우려가 된다. 처방자 자격을 산부인과 의사 중심으로 제한할 수 없는데, 이는 특정한 전문과목만 전문의약품을 처방할 수 있게 하는 제도는 한국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부인과 전문의나 학회 인증자로 처방 자격을 한정하는 등록기관을 두는 것은 여성의 ‘접근성 확보’에 역행할 수 있다. 미국이나 뉴질랜드의 경우는 일반의나 가정의는 물론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전문간호사(NP), 조산사(CNA) 등도 처방이 가능하다. 영국은 등록 의사 2인이 사유를 확인하되 실제 상담과 처방은 일차의료를 포함해 일반의가 하고 있으며 간호사와 조산사가 투약을 담당한다. WHO(2022)는 12주 미만의 경우 지역사회보건요원, 약사, 간호사, 조산사, 준임상의, 일반의, 그리고 당사자 본인(자가 관리)까지 폭넓게 제공·관리할 수 있다고 권고하고 있다. 특정 제공자를 제한하는 규제, 초음파를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는 것에 반대한다.
셋째, 도입 초기 2년간 의사가 처방·조제하고 이후 원내 처방과 원외 약국 조제로 전환하는 단계적 방안은 의료기관 방문 횟수와 비용이 늘어나고 산부인과가 없는 지방에서 접근성을 떨어뜨리는 문제가 있다(지방 의료 소멸 현실을 외면하고 있음). 캐나다의 경우 시판 후 1년 안에 처방자 교육 의무, 유통사 등록, 서면 동의가 폐지되고 약사 직접 조제가 허용되고 초음파 검사 의무도 폐지되었다. 캐나다의 사례를 보면 규제 철폐 결정부터 시행까지 1년이 걸리지 않았고 그사이 안전성 지표에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볼 때, 엄격한 요건이 안전성 확보에 필수적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넷째, 위해성관리계획(RMP)을 통해 안전성을 확인한 뒤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설계를 하겠다는 주장은 식약처 허가 조건과 혼동하고 있다. RMP의 이행 주체는 품목허가를 받은 자(제조·수입업체)이며, 구성 내용은 안전성·유효성 중점 검토 항목, 의약품 감시 계획, 위해성 완화 조치와 그 효과성 평가지표다. 그런데 국가가 구축 운영해야 하는 인프라(처방자 국가 등록망,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전산 연계, 학회·부처 간 협의체, 24시간 응급 이송 네트워크 등)는 민간 품목허가권자가 이행하는 RMP의 범주가 아니다. 따라서 RMP로 담을 수 있는 것과 별도 제도인 건강보험 수가 및 급여, 학회 임상진료지침, 모자보건법 하위법령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이슈는 임신중지를 ‘필수의료서비스’로 규정해 의료보험 급여를 적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보편적인 재생산 건강권의 핵심 요소이며, 국가가 차별 없이 안전한 의료서비스를 보장하는 기초다. 고가의 의료비는 접근을 막고 시기를 지연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다. 비보험 상태에서 관련 검사, 진료, 시술, 처방 등에 드는 비용은 60만 원에서 수백만 원 이상이며 지역과 의료기관마다 편차가 매우 크다. 특히 입법 공백이 장기화되면서 법적 불확실성을 이유로 총비용이 상승했고,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탈세 수단으로 현금 결제만을 요구하는 불법적 관행도 늘고 있다. 더구나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일수록 비용 문제로 지인이나 상대 남성에게 돈을 빌리다 폭력이나 협박을 당하기도 하며, 청소년의 경우는 부모 동의를 요구 받아서 시간이 지연되는 경우도 많다.
또 건강보험 적용으로 체계적인 의료 질 관리를 보장하게 된다. 표준 진료 지침이 적용되고 전수 집계와 공식 통계가 가능해져 국가 차원의 보건의료 인프라 개선과 여성 건강과 재생산 건강 개선 지표를 확보할 수 있다.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지와 그로 인한 합병증(패혈증, 불완전 유산, 불임 등)을 치료하는 데 드는 비용은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지원하는 비용을 훨씬 초과한다. 세계 80개국 중 캐나다, 영국, 스웨덴 등을 포함한 34개국이 공공의료제도로 비용을 전액 또는 일부 보조하고 있다. 따라서 지불 능력과 무관하게 급여를 적용해 감당 가능한 비용을 일차적으로 전제하고, 별도 지원은 이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임신중지약 도입이 여성의 절실한 요구와 재생산권을 도외시하는 산부인과 단체의 주장에 경도되지 않고, 우리 사회에 정착을 하고 나아가 성과 재생산권 건강을 위한 입법이 만들어지는 기초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