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헝가리 혁명 70년: 유럽의 잊힌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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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 헝가리 노동자와 학생들은 자신들의 이름으로 통치한다고 주장하는 정권에 맞서 봉기했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이자 헝가리 출신 마르크스주의자인 토마시 텡글리-에번스가 유럽의 잊힌 혁명 가운데 하나가 남긴 교훈을 살펴본다.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는 학생들이 술을 즐기는 허름한 술집들이 많다. 세계 어디서나 볼 법한 그런 허름한 건물 앞에서 70년 전 학생들과 경찰이 충돌했다. 유럽 역사상 손꼽히게 중요한 혁명(오늘날에는 잊혔지만)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1956년 10월 23일 사람들이 국영 라디오 방송국 앞에 운집했다. 당시 열일곱 살 학생이던 어떤 이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 일이 혁명으로 이어지리라고는 당시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혁명의 기류가 도시 전체를 휩쓸었다.”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와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비밀경찰과 탱크에 맞서 격전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파업하고 일터를 장악하고, 기존 정치 권력을 대체할 기층 조직을 세웠다.
헝가리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블라디미르 레닌과, 노동자 평의회(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한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계승자라고 자처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러시아 혁명은 국제적 고립과 전쟁의 참화 때문에 변질됐다.
1928년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이끄는 국가 관료가 독자적 이해관계를 가진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성장해 있었다.
스탈린주의 정권은 노동자 민주주의의 마지막 잔재조차 파괴하고 공포 정치를 펼쳤다. 서방을 상대로 국제적 수준의 경제적·군사적 경쟁을 하던 소련 정권의 목표는 노동자들을 쥐어짜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은 새로 얻은 동유럽 위성국들에 “국가자본주의” 모델을 도입했다.
동구권 국가자본주의도 서방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꼭 마찬가지로 호황과 불황이 내재해 있었다. 그리고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에는 동구권 지배계급들도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혹독한 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중공업을 육성하던 것이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이 위기로 관료 집단이 분열했다. “보수파”는 통제력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스탈린의 방식을 고수하려 한 반면, “개혁파”는 억압을 완화하고 투자를 중공업에서 다른 부문으로 돌리려 했다.
근본에서 이는 노동자를 가장 효과적으로 착취할 방법을 둘러싼 지배계급 내 세력 다툼이었다.
소련에서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개혁파”가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다. 새로 들어선 소련 지도부는 헝가리의 마차시 라코시 정권도 소련을 따라 노선을 바꿔야 한다고 명시했다. “개혁파” 임레 너지가 라코시의 후임 총리가 됐다.
너지는 “신노선”을 구상했지만, 라코시 지지자들은 그 제한적 개혁도 방해했다. 너지는 1955년에 축출됐다.
이후 흐루쇼프는 라코시를 실각시켰다. 1956년, 라코시의 측근 게뢰 에르뇌가 라코시의 뒤를 이어 헝가리 공산당 제1서기가 됐다. 같은 해에 흐루쇼프는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의 방식과 “개인 숭배”를 비난하는 “비밀 연설”을 했다.
이는 동유럽 통치자들에게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사회에 의문을 제기할 가능성도 열어젖혔다.
레닌은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무엇이 “혁명적 상황”을 만들어 내는지에 관해 썼다.
레닌은 “지배 계급이 자기네의 지배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지배를 유지할 수 없”게 돼야 한다고 했다. 그 때문에 상층부가 분열하며 “억압받는 계급의 불만과 분노가 분출할 틈”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 레닌은 그와 동시에 “하층 계급이 ‘이대로는 못 살겠다’”고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1956년 헝가리에서는 두 조건이 모두 충족됐다. 가장 먼저 불만을 표출한 것은, 더는 물질적 혜택을 누리지 못하며 개혁을 바라던 중간계급(저술가·언론인, 전문직 종사자, 하급 장교들)이었다.
공산당 청년 조직의 정식 하위 조직 ‘페퇴피 서클’이 토론회를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터에서도 불만이 무르익고 있었다.
학생들은 10월 23일, 자국의 스탈린주의 정권에 맞서 싸우던 폴란드 노동자들에 연대하는 시위를 계획했다.
그날 레닌이 말한 “틈”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 사이로 저항이 “분출할” 것이었다.
오후 12시 53분,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갑자기 끊겼다. 진행자는 내무장관 피로시 라슬로의 성명을 읽었다.
“공공질서 유지를 위해 내무부는 추후 통지가 있을 때까지 일체의 집회·시위를 금지한다.”
잠시 후, 국영 라디오 방송은 내무차관 페케테 미하이가 폴리텍대학교 학생 집회에 대한 금지 조처가 해제됐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미하이 차관은 내무부 직원들과 공산당원이 ‘변화를 위해 정직한 헝가리인들 편에 섰다’고 덧붙였다.”
오후 2시 23분, 음악이 다시 갑자기 멈췄다. 뉴스 진행자는 청취자들에게 이렇게 알렸다. “피로시 라슬로 내무장관께서 집회·시위 금지 조처를 철회했습니다.”
진행자는 에르뇌가 “오늘 밤 8시에 연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권 수뇌부의 혼란에 고무된 수많은 보통 사람들은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다.
오후 3시가 되기 직전, 대학생들이 페퇴피(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 활약한 혁명가·시인) 동상 앞에 모였다.
그들은 벰 장군[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제국에 맞서 싸운 장군 ─ 역자] 동상 앞에 모인 다른 학생들과 합류하기 위해 행진했다.
저술가협회 회장 베레시 페테르가 협회의 선언문을 낭독했다. 페테르는 공산당 지도자들이 “스탈린과 라코시의 공포 정치를 되살리려고 집요하게 세력을 규합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7개 항목으로 된 선언문은 정치·경제 개혁을 요구했다. 그중 한 항목은 다음과 같았다. “인민은 자유 투표, 비밀 투표로 대표를 선출해야 한다.”
또 다른 항목은 다음과 같았다. “공장은 노동자·기술자들이 직접 운영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헝가리 노동계급의 이익을 진정으로 대변해야 한다.”
성명은 너지와 그의 동료들에게 “마땅한 직책을 부여할 것”을 요구했다.
페테르가 연설을 마친 뒤에도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았다. 학생·저술가가 주축인 약 5만 명의 시위대가 도나우강을 건너 국회의사당으로 행진했다.
근무를 마친 노동자들이 행진에 합류했다. 오후 8시 무렵 시위대 규모는 20만 명이 넘었다.
그날 저녁 벌어진 몇 차례의 충돌이 운동을 급진화했다.
학생들은 16개 항목으로 이뤄진 자신들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학생 선언문은 저술가협회 선언문보다 더 나아갔다. 예컨대 “소련과의 조약 재검토”가 아니라 “모든 소련군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너지가 모습을 드러내자 학생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너지가 연설을 시작하자 학생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어느 신문 보도에 따르면, “너지는 ‘역사적 상황이 복잡하니 모두 집으로 돌아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자’고 말했다.”
“개혁파” 너지가 연설하는 동안, “보수파” 에르뇌는 방송에 나왔다. 방송에서 게뢰는 학생들이 소련에 대한 “뻔뻔한 거짓말”과 “적대적인 비방”을 한다고 공격했다.
“노동자 동지들이여, 노동자들이여! 솔직히 말하자. 지금 문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인지 부르주아 민주주의인지다.”
요컨대 에르뇌는 시위대에 정권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타도하든지 선택하라고 한 것이었다.
국회의사당 앞 대규모 시위대는 두 대열로 나뉘었다. 수천 명이 거대한 스탈린 동상을 향해 행진했다. 그들에 대한 억압의 상징인 이 동상을 쓰러뜨리려는 것이었다.
한 현장 목격자는 〈맨체스터 가디언〉 신문에 이렇게 전했다. “시위대는 망치와 쇠파이프 등을 휘둘러 동상을 산산조각 냈다.”
또 다른 대열은 국영 라디오 방송국 건물로 행진해 자신들의 요구를 방송하라고 요구했다.
오후 10시 30분에 협상단이 방송국에 들어간 직후, 건물을 지키던 국가보안국(ÁVH) 소속 비밀 경찰에 붙잡혔다. 시위대는 출입문을 부수고 건물 진입을 시도했고, 경찰은 최루탄을 던졌다. 갑자기 국가보안국 요원들이 기관총을 발사했다. 시위 참가자 한 명이 사살당해, 피웅덩이에 쓰러졌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 날 시위와 파업이 헝가리 전역의 주요 도시들을 휩쓸었다.
국영 라디오 방송국 건물에서 벌어진 전투 이후 국가의 억압 기구들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부다페스트에서는 경찰관 1,200명 중 상당수가 혁명 편으로 넘어왔다.
노동계급·농민 출신 징집병들로 이뤄진 헝가리군은 사병의 명령 불복종으로 거의 마비됐다.
강경파 군 장성 주르코가 지휘하는 제3군단은 전투에 나섰다. 주르코는 티서케치케와 케치케메트의 시위대를 소련제 미그 전투기로 공격해 수백 명을 죽였다. 하지만 주르코 역시 공중 공격 확대를 계획하던 중 명령 불복종에 부딪혔다.
헝가리에는 또 다른 무장 세력이 있었다. 에르뇌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소련군 탱크를 부다페스트로 파병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72시간도 채 되지 않아 헝가리 전역에서 대중 봉기가 일어났다.
부다페스트에서는 어린 학생들과 청년들이 거리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말레테르 팔 대령 같은 장교들과 사병들이 혁명에 합류해 소련군에 총구를 돌렸다.
10월 24일 너지가 급히 총리로 임명됐고, 카다르 야노시가 공산당 제1서기가 됐다.
신임 너지 정부는 개혁을 시행하고 운동을 개혁파의 통제하에 둬서 관료의 통치 정당성을 회복하려 했다.
그러나 너지 정부는 또 다른 세력의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었다. 바로 노동자 평의회였다.
헝가리 혁명 최초의 노동자 평의회는 10월 24일, 1만 명이 일하는 유나이티드일렉트릭 공장에서 결성됐다.
이 공장의 한 청년 노동자는 〈옵서버〉에 이렇게 전했다. “10월 23일 화요일에 우리는 일을 했지만, 일하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는 임금 문제를 두고, 또 저술가들 집회가 어떻게 됐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인쇄물이 있었고, ‘이대로는 못 살겠다’는 저술가들의 말을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일해서 받는 돈으로 도저히 먹고살 수가 없었거든요.
“우리는 일을 마친 뒤 학생들의 시위에 합류했습니다.
“수요일 아침에 우리 공장에서 저항이 시작됐습니다. 조직되지 않은 자생적 저항이었습니다. 만약 사전에 조직했더라면 국가보안국이 알아채고 시작도 하기 전에 무산시켰을 겁니다.
“청년 노동자들이 앞장섰고, 모두가 뒤따랐습니다.”
다음 날이 되자 노동자 평의회와 공장위원회는 부다페스트 일터·동네 곳곳으로 확산됐다.
주요 공장들은 부다페스트의 우이페슈트·오부더·언절푈드·체펠 지역에 밀집해 있었다.
그곳 노동자들은 10월 29~30일에 지역 노동자 평의회를 결성했다. 그다음 날, 부다페스트 내 24개 공장에서 온 대의원들이 부다페스트 노동자 평의회 의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각각의 일터를 민주적 통제하에 두고자 했다. 대의원들은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공장의 최고위 통제 기구는 노동자들이 민주적으로 선출한 노동자 평의회다.
“공장장은 공장이 고용한다. 공장장과 최고위 직원들은 노동자 평의회가 선출해야 한다.
“공장장은 공장에 관한 모든 사안에서 노동자 평의회에 책임을 진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시야는 일터에서의 변화에 국한되지 않았다. 노동자 평의회는 정치적 문제들을 다뤘고 소련군에 맞서 싸우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부다페스트 다음가는 노동자 평의회의 중심지는 미슈콜츠였다. 10월 27일 지역 라디오 방송은 이렇게 발표했다. “미슈콜츠시(市)는 이틀째 노동자 평의회와 학생 평의회의 지도 하에 있다.” 이 평의회들은 다른 조직들과 연계해 보르쇼드주(州) 노동자 평의회를 결성했다.
죄르 지역에서는, 10월 24일에 국가보안국이 소규모 시위대에 발포한 사건이 급진화를 촉발했다. 파업이 확산됐다. 국가의 권위가 무너졌다. 10월 26일, 국민혁명위원회가 국가의 자리를 대신했다.
인구 1만 명의 소도시 세게드에서는 공장들에 노동자 평의회가 세워졌다. 이 평의회들은 학생 단체들과 함께 10월 30일에 인민혁명평의회를 결성했다.
곳곳에서 평의회들은 시민군 “국민방위대”를 결성해 소련군과 헝가리 국가의 보안 병력에 맞서 싸웠다.
헝가리는 레닌이 “이원 권력”이라고 묘사한 상황, 즉 정치권력이 너지 정부와 노동자 평의회 양쪽에 있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노동자 평의회는 정치 기구였으며 식량 공급 같은 사회의 일상적 운영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의회가 아래로부터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가능성을 아직 보지 못했다. 노동자 평의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너지를 지지했고, 자신들의 구실을 너지가 더 멀리 나아가도록 압박하는 것으로 여겼다.
너지 정부는 관료의 통치 정당성을 회복하려고 여러 양보를 했다. 그중 하나가 10월 30일 신임 장관 임명이었다. 부다페스트에서 무장 저항을 이끈 말레테르도 장관으로 임명됐다.
노동자 평의회 안에서 치열한 정치적 토론이 벌어졌다. 가장 선진적인 요구들은 미슈콜츠에서 나왔다. 미슈콜츠 평의회 의장은 이렇게 주장했다. “정부는 각 지역과 부다페스트의 노동자 평의회에 기반한 혁명적 전국평의회 수립을 제안해야 한다.”
그는 이 기구가 노동자 평의회에서 “민주적으로 선출한 대표들로 구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기존 의회는 반드시 해산돼야 한다.”
그러나 이는 헝가리 전역의 다수 견해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당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는 노동계급 투사이자 부다페스트의 지도적 인사이던 벌리 산도르는 이렇게 주장했다.
“헝가리 노동계급은 이 노동자 평의회들을 완전히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다.
“우리는 평의회가 정치조직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 평의회가 경제 운영 기구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모든 혁명에 존재하는 모순을 보여 준다. 사람들은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행동에 나설 때조차 자신의 “개혁주의적” 사상을 일거에 버리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아래로부터 새로운 권력을 창출해 내는 동안에조차 더 나은 지도자가 나오기를 바라며 위를 쳐다본다.
헝가리 노동자 평의회에서는 1917년 러시아 혁명기 소비에트의 모습이 엿보였다. 혁명 러시아 소비에트도 바로 정확히 같은 문제를 토론했다.
그러면 핵심적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1917년 러시아에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기를 바라는, 소수이지만 조직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다. 볼셰비키당은 시간을 들여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지지를 얻어 냈고, 결정적 순간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1956년 헝가리에는 “모든 권력을 노동자 평의회로”라는 구호를 제시할 수 있는, 미리 건설된 혁명적 조직이 없었다. 그 전통은 오랜 스탈린주의 독재 때문에 파묻혀 있었다.
반혁명이 벌어져 토론이 중단됐다.
너지는 휴전을 체결하고 10월 28~30일에 소련군을 부다페스트에서 철수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너지는 소련군이 국경에 집결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소련 지도부는 너지가 너무 멀리 나아가는 데에,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큰 위협인 노동자 평의회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너지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11월 1일, 너지는 헝가리가 군사 동맹 바르샤바조약기구를 탈퇴하고 중립국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같은 날 부다페스트 노동자 평의회들은 파업 중단을 ─ 격렬한 토론 끝에 ─ 합의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아침, 포탄이 날아들어 폭발하는 소리가 부다페스트를 울렸다. 반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소련군 탱크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야노시 카다르를 데리고 왔다. 소련군은 카다르를 수장으로 하는 새 정부 수립을 강요했다.
두 번째 “이원 권력” 시기가 찾아왔다. 정부 청사는 카다르의 손에, 실질적인 권력은 노동자 평의회의 손에 있었다.
11월 12일 우이페슈트 노동자 평의회의 제안으로 부다페스트에 중앙노동자평의회가 수립됐다.
그러나 봉기의 성공 가능성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20만 명이 넘는 소련군과 2,000대의 탱크가 군사적으로 열세인 노동계급의 승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노동자 평의회들은 카다르 정부의 통치 정당성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다르 정부 불인정은 말로만 그런 것이었고, 실제로는 그 정부를 사실상 인정하고 그 정부에게서 양보를 얻어 내려 협상했다.
카다르는 노동자 평의회가 앞으로도 활약할 것이라고 입발림하는 뒤에서 주요 혁명가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운동을 약화시켰다. 12월 11일, 카다르는 중앙노동자평의회 구성원 전원을 체포했다.
새해에도 노동자들은 저항을 지속했지만, 관료들이 서서히 통제력을 회복했다.
카다르 정권은 1956년 이전 수준의 탄압으로 되돌아가지 못했고, 노동계급의 생활수준 개선에 막대한 돈을 써야 했다.
비록 패배했지만 헝가리 혁명은 사회주의가 노동자들의 자력 해방에 기초한다는 사상을 재확인했다.
동시에 헝가리 혁명은, 혁명이 승리하기를 바란다면 지금부터 혁명 조직을 건설해야 함을 일깨워 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