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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민주대연합론은 진보진영의 계승 대상이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죽은 이후, 박지원이 전한 그의 유언은 “민주당은 정세균 대표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야4당과 단합하라. 모든 민주 시민사회와 연합해서 반드시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문제 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승리하라”였다. 즉 민주당을 중심으로 민주대연합을 추진하라는 것이다.

민주당은 “김대중 대통령의 유지를 잘 받들”겠다고 하지만, 이는 진보진영을 향한 진지한 메시지라기보다는 범민주당 세력을 향한 집안 단속용 발언인 듯하다.

한편, ‘공공의 적’ 이명박 정부를 심판하려면 어떻게든 뭉쳐야 하지 않느냐는 절박감이 광범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 죽음 뒤의 파장 속에 민주당이 반MB연대의 대주주가 된 상황에서 시민사회와 진보진영 일각의 고민이 김대중의 ‘민주대연합’론과 겹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DJ의 민주대연합론은 권위주의적 우파 정부에 맞서기 위해 진보진영이 자유주의 야당과 손잡아야 한다는 고전적인 계급협력 전략의 재판일 뿐이다.

이것은 진보진영이 지난 세월 동안 부르주아 야당에 의존해서는 더는 진정한 민주주의도, 노동자들의 요구도 성취할 수 없다는 자각 속에 독립적인 조직과 운동을 건설해 온 역사를 후진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명박의 민주주의 공격에 맞서 몇몇 쟁점에서 민주당과 동맹을 맺는 것은 (좌파들이 원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운동의 폭을 확장하기 위해 용인할 수 있는 문제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이것이 노동계급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수준까지 나아간 것도 아니다. 그러나 민주대연합은 단지 몇 가지 민주적 과제를 둘러싼 한시적 동맹이 아니라, 민주당과의 연합 정권 창출을 목표로 삼는 포괄적이고 전략적인 연합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연합은 연합의 대상인 자본가 계급 정당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노동계급의 독립적 요구를 양보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사실, 민주대연합론은 오래된 레퍼토리다. 김대중과 같은 자본주의적 야당조차 탄압받던 독재시절에 이것은 꽤 설득력있는 주장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성조차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을 때다. 그러나 진보진영의 상당수는 독재의 영향에서 벗어난 1997년 대선에서도 민주대연합론의 포로였고 2002년 대선에서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김대중과 노무현 집권 10년은 민주대연합론에 대한 무장해제를 경계한 좌파의 주장이 왜 옳았는지를 철저하게 보여 준 시기였고, 진보진영의 독립적 운동과 조직, 선거대안이 필요함이 입증된 시간이었다.

김대중이 최루탄과 백골단을 없애고 계급 갈등을 체제 내로 일부 흡수하려는 시도를 병행했지만, 1987년 항쟁 이래로 성장해 온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노총과 전교조 합법화를 김대중의 공로로 꼽지만, 민주노총과 전교조가 쌓아 온 투쟁이 조성한 현실적 힘 관계에 대한 타협일 뿐이었다. 더구나 김대중은 노동 (3권이 아니라) 1.5권만 허용하며 전교조에게 족쇄를 채우려 했다.

2001년 효성 경찰력 투입 규탄 및 김대중 정권 퇴진을 위한 영남노동자대회 △ DJ·노무현 10년은 민주대연합론이 왜 진보의 선택이어서는 안 되는지 입증해 주는 시기였다. ⓒ사진 레프트21

더 정확한 그림을 보여 주는 것은 김대중 정부 내내 국가보안법 구속자가 속출했고, 노동자 투쟁에 대한 강경진압은 ‘민주정부’라는 말을 무색케 했다는 것이다.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는 공무원 노동자들의 노조 출범식에는 무장한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고용보장을 요구한 대우차 노동자들과 파업 지지자들은 지하철까지 들이닥친 군홧발에 짓밟혔다. 민주노총이 김대중 정권 말기에 정권 퇴진을 요구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본격 도입했다. 이 때문에 비정규직이 급증했고, 노동유연화가 증가했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 봉사하는 부르주아 야당의 계급적 본질을 보여 준 것이다.

진보진영조차 입을 모아 칭찬하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북한을 악마화한 이전 정부보다는 나은 것이었지만, 진보진영이 무비판적으로 지지하기에는 미흡한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 아래 두 차례나 벌어진 서해교전은 햇볕정책이 군사적 충돌을 배제하지는 않음을 보여 줬다. 김대중은 한반도 긴장 격화의 핵심적 원인 제공자인 미국 정부의 대북정책에 도전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6·15공동선언은 남북 민중의 자유로운 교류, 분단을 빌미로 한 남북한 정권의 억압적 법률 폐지와 같은 노동자·민중에게 절실한 실질적 변화는 포함하지 않았다.

쓰라린 경험

그런데도 이런 미흡한 대북정책에 매달리느라 진보진영의 투쟁은 종종 발목 잡혔다. 노동자 투쟁은 6·15선언 경축 분위기를 해쳐서는 안 된다는 논리에 외면당했고, 정부가 주도하는 남북통일행사 참가를 위해 자제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결국 집권 초기부터 지지를 잃고 위기를 맞은 김대중 정부는 이런 운동의 약점을 이용해 활동가들을 대거 구속하고 노동자 투쟁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죌 수 있었다.

김대중 정부의 경험은 부르주아 야당과는 독립적인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자각을 일깨우는 직접적인 배경이 됐다. 이것은 2000년에 민주노총이 주도해 민주노동당을 창당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김대중을 경험하고도 2002년 대선에서 또다시 진보진영 내에서 이회창에 맞서 노무현을 지지해야 한다는 민주대연합론의 새로운 버전이 유행했다. 다만, 은밀히 지지했다는 점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러나 노무현 5년의 경험도 다를 바 없었다. 파병, 비정규직 확대, 양극화 심화, 한미 FTA 체결, 국가보안법 탄압 등 개혁 열망에 대한 배신이라는 쓰라린 경험만 남겼다. 노무현 정부의 경험을 거치면서 민주노동당과 거기서 분리해 나온 진보신당은 한나라당만이 아니라 민주당과도 독립적 대안을 주장하며 주요 선거에서 독자 후보를 내세웠고 국회의원까지 배출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 이명박에 맞서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맺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는 진보진영 내 활동가들도 노무현 5년의 배신이 이명박을 낳았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한다. 노회찬 의원 말대로 “1948년 이래로 가장 나은 정부가 1987년 이래 가장 나쁜 정부를 탄생시키는 배경이 된 역설”이 존재하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은 후 반MB연대에서 민주당의 지분이 커졌지만 그럼에도 민주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확고하지는 않다. 그래서 진보진영 내 어떤 세력도 민주당과의 포괄적 연합을 선명하게 제기하지는 않고 있다. 사실상 민주당과의 연결고리 구실을 했던 민생민주국민회의의 주요 활동가조차 반MB진영이 반대하는 정책의 뿌리가 대부분 이전 정부에 있었고, 이 같은 ‘원죄’가 있는 민주당과의 연합은 더디고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쌍용차 파업 지지 문제와 같은 노동자들의 요구는 이 동맹의 공식적 의제로 오르지조차 못했다.

따라서 진보진영의 선택은 이미 파산한 김대중의 민주대연합론을 계승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경제 위기와 정부의 막가파식 탄압 때문에 대중운동의 분출이 쉽지 않은 조건에서 민주당을 넘어선 반이명박 진보 대안을 건설하는 과정이 녹록치 않지만, 그럼에도 꾀죄죄한 과거와 단절하지 못한 민주당과의 민주대연합으로 후퇴할 수는 없다.

노동자들과 이해관계가 완전히 다른 민주당과의 민주대연합은 노동계급의 요구 삭감과 양보를 강요할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일관되게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인 노동계급의 투쟁을 자제하라는 거대한 압력을 형성할 것이다. 이것은 반이명박 연합의 수혜가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진보진영의 반MB 대안은 자본가 정당과는 독립적인 정당과 운동을 건설하려고 노력해 온 진보진영의 역사를 거슬러 다시금 과거로 회귀하는 것 이상이 돼야 할 것이다.

김대중 죽음에 대한 본지의 입장은 <레프트21> 웹사이트에 실린 온라인 기사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에 부쳐’를 읽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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