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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6월 파리 혁명 ─ 민주개혁과 노동계급

노무현 탄핵 사건을 계기로 “민주수호” 정서가 국민의 대중을 휩쓸고 있는 지금 시민·사회 단체들은 “민주개혁”에 대해 얘기한다. 한국 “민주화” 논쟁 때마다 ‘다함께’는 그 동력이 아래로부터의, 특히 노동계급의 대중 운동이었음을 역설해 왔다.

그러나, ‘탄핵무효 부패정치청산 국민행동’ 지도부 내의 유력한 분위기는 노동계급의 참가를 고무하기는커녕 오히려 경계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국민행동 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는 “노무현 정권의 역사적 사명이 민주개혁을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총선에서 열우당에 투표하는 걸로 나타날 수 있는 견해다.

그러나 자본가 계급의 자유주의적 정치인들이나 중간계급 시민들은 주요 민주개혁들을 이룰 수 없음을 1848년 6월 파리 혁명에서 알 수 있다.(칼 마르크스,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소나무 출간.)

마르크스는 1789년에서 1793년까지 프랑스 대혁명의 잇따른 급진화 양상을 묘사하는 데 “연속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말뜻 자체는 처음에는 소박했다 ― ‘중도에서 멈추지 않는 혁명’이라는. 그 뒤 마르크스는 이 용어를 1848년 유럽 혁명과 관련지어 사용했다. 1849년쯤엔 이 용어는 명확한 뜻을 갖게 됐다. 민주주의의 권리들, 민족 통일과 독립, 지주제도 폐지를 부르주아지나 쁘띠부르주아지가 아닌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음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1848년 6월 파리에서 일어난 나흘 간의 노동자 반란은 1848년 내내 혁명이 유럽 전역을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휩쓰는 가운데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였다.

유럽 대륙 전역에서 민중은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당시에 많은 유럽 나라들에서 민주적 권리는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

민중은 군주정의 전제적 권력 종식, 투표권 확대, 선거를 통한 의회 설립, 언론의 자유 등을 요구하며 일어섰다.

1848년 2월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군주정이 타도되고 새로 개혁 정부가 수립됐다.

성인남자의 선거권이 도입돼, 유권자가 25만 명에서 8백만 명으로 확대됐다.

노동자이자 오랫동안 활동가였던 알베르가 정부에 입각했다.

새 정부는 하루 노동시간을 한 시간 반 줄이고, 실업자 노동권 보장책의 일환으로 “국립작업장”을 설립했다.

파리와 지방 도시들의 노동자들은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마음이 설레었다.

이러한 기대에 근거해 클럽들과 정치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갑작스런 해방감과 정치 생활의 자각은 정부가 개혁 조처를 계속 내놓아야 한다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프랑스의 부유층과 보수파는 겁을 먹었고, 그래서 강력하고 권위주의적인 정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국립작업장은 혁명의 성과를 상징하고 노동자의 희망을 상징했다.

하지만 우익이 보기로는, 국립작업장은 게으른 실업자들이 국민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 먹는 대표적인 골칫거리였다.

노동자들은 점점 정부에 실망했고, 실업 증대에 실망했다.

국립작업장은 혁명의 상징이긴 했지만 커다란 실망거리였다

많은 사람들은 국립작업장이 생산자 협동조합이 되기를 바랐으나, 국립작업장은 최소한의 보수만을 받고서 힘들고 흔히 무의미한 일을 하는 곳이었을 뿐이다.

국립작업장은 새 사회의 기초가 되기는커녕 구빈원(救貧院: 영국의 자선 노역장)의 프랑스 버전(版)이었다.

1848년 6월 22일 정부는 그나마 국립작업장의 폐쇄를 발표했다.

이제 17∼25살의 노동자들은 군에 입대하거나 아니면 농촌의 늪 지대에 배수시설 설치 일을 해야 한다. 만일 이도 저도 안 하려는 노동자가 있다면 강제로 보내겠다고 정부는 협박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2월에 창출한 정권에 커다란 배신감을 느꼈다. 이제 반란을 다시 시작하는 것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다고 그들은 느꼈다.

파리 시 곳곳에서 대중 집회와 시위가 열리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국립작업장”이라는 말을 적은 깃발을 들고 행진하면서, “부자들은 도둑들이다”, “일, 일, 일”, “우리는 [군대나 늪 지대로] 가지 않겠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들은 의회에 맞서서 무장을 요구했다.

그들은 파리 동부 지구들에서 보도 블럭을 깨 바리케이드를 쌓고, 어디에선가 구해 온 총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무장 시위대는 파리 중심가로 행진했다.

자연히 부자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때까지 유럽 전역에서 민주개혁 운동은 서로 다른 계급들의 이해관계를 통합시켰었다.

그 때까지 노동자, 자영 수공업자, 사업가, 전문직 종사자 등이 모두 옛 지주 계급의 권력에 직면해 민주주의의 확대를 요구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제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은 주로 노동자들이었다.

파리의 주요 저항 중심지는 각각 특정 업종의 노동자들이 주력을 이루었다. 짐마차꾼 노동자들이 주력을 이루는 구역, 부두 노동자들이 주력을 이루는 구역, 청동제품 제조 노동자들이 주력을 이루는 구역, 가구 제작 노동자들이 주력을 이루는 구역 … 식으로 말이다.

나중에 연행된 사람들 가운데 최대 집단은 건축노동자, 금속노동자, 인부와 일꾼, 가구제작공, 의류제조업 노동자 들이었다.

약 4만∼5만 명이 반란에 참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많은 노동자들이 단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공화국”을 요구했는데, 그들은 나중에 재판정에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밝혔다. 사회주의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사회적 공화국”

“법질서” 세력이 노동자에 맞서 조직되고 있었다. 파리의 부유한 지구에 사는 가게 주인들과 전문직 종사자들 등으로 이뤄진 국민방위군이 결성됐다. 유산 계급들에게 이들은 진정한 영웅이었다.

언론은 이들을 자유와 문명과 프랑스공화국의 존엄을 상징하는 측으로, 노동자들을 무법·야만·학살·약탈을 상징하고 가정을 무시하는 난잡하고 불쾌한 일당으로 묘사했다.

나흘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노동자들은 국민방위군에 패배했다. 그 뒤 거리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학살당하고 12만 명이 연행됐다. 파리의 거리는 “시체와 피바다로 가득했다.”

온건개혁파는 반란에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마침내 탄압을 지지했다. 그들은 한 군장성(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했다.

반혁명 과정은 프랑스에서 시작돼, 몇 년 안에 프랑스는 루이 나폴레옹의 독재 하에 놓이게 된다.

유럽 전역에서 1848년은 전환점이었다. 프랑스 사태는 민주개혁을 위한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중대한 사건이었다.

유럽 전역에서 지배계급은 반란을 탄압했다.

사업가들(부르주아지)은 민주주의적 선동이 부를지도 모를 결과가 두려워 개혁 지지에서 반동(수구) 지지로 돌아섰다.

그들은 노동계급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들 자신의 민주주의 혁명도 이루려 하지 않았다.

칼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다른 사회계급들과 별도로 조직해야 함을 역설하면서 이렇게 썼다. “많든 적든 재산을 가진 계급들이 모두 유력한 지위에서 밀려날 때까지, 프롤레타리아가 국가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 혁명을 연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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