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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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권은 독재자 편에 섰던 사람들” “피맺힌 심정으로 말하는데,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현 정권에 대한 김대중의 일갈은 현 정권 하에서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을 우려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었다. 반면 우익들에게 김대중은 인생 마지막까지 비난을 받아야 했다.
전두환·노태우·김종필 등 군사독재 주역들이 버젓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로 여겨지던 노무현에 이어 김대중마저 목숨을 잃은 상황은 많은 이들의 감정을 씁쓸하게 하고 있다. 노무현이 정권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 목숨을 끊었다면, 김대중은 정권의 행태에 대한 화병 때문에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다고 생각할 법도 하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듯하고 정권의 강경한 대북 정책 때문에 남북 관계가 경색돼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많은 이들이 평생 민주화와 남북 화해를 위해 노력한 정치 지도자라고 여긴 김대중의 죽음을 추모하고 있다.
실제 김대중은 군부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당시 김대중은 야당 정치인 중 정권에 가장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김대중이 정치에 입문한 것은 한국전쟁 직후였지만, 특히 그의 정치 인생에서 전환점은 1971년 대선이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한 온갖 부정선거와 지역주의를 이용한 마녀사냥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당시로서는 급진적 개혁안을 제시함으로써 군부 독재에 반감을 가진 대중의 지지를 받아 90만 표라는 근소한 표차로 패배했다.
그 무렵부터 김대중은 군부에 의해서든 대중에 의해서든 공식 정치 내에서 군부 독재에 맞설 수 있는 인물로 조명을 받았다. 그 결과 그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납치·살해 당할 뻔하고,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한 후에는 광주항쟁을 배후 조종했다는 ‘내란 음모’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는 등 야당 정치인들 중 가장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군부 정권에 의해 기층 민중은 말할 것도 없고 야당마저 탄압받던 상황은 김대중을 재야의 민주화 운동에 참가하는 것으로 내몰았다. 특히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의 ‘정신적 고향’이었던 광주 항쟁과 관련하여 탄압받았다는 점 때문에, 그는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다. 그래서 민주화 투쟁에 나섰던 선진적인 학생·노동자와 군부 독재의 분열지배 전략인 지역차별주의의 피해자였던 호남 민중들은 1987년 말 직선제 선거에서 김대중을 지지했다.
이렇듯 아직 노동자 민중이 독자적 정치세력화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던 동안, 김대중은 군부 독재에 의해 억압받던 민중의 민주화 염원을 대변했다. 그 결과 1997년 대선에서 34년 일당국가에 대한 대중의 누적된 반감과 그 해 1월 노동자 대중파업으로 인한 김영삼 정권의 정치 위기 심화, IMF 경제 공황이 불러온 집권당에 대한 환멸 등이 결합돼, 김대중은 집권당 대선후보 이회창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할 수 있었다.
집권
그러나 세간의 주된 평가와 달리, 그의 재임 기간은 민중의 민주화와 생존권 보장 열망에 크게 못미쳤다. 물론 억압적 국가 기구가 부분적으로 약화되고,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이 합법화되는 등 독재 정권 때와 달리 탄압 일변도가 아니라 노동자·민중 운동과의 갈등을 체제 내로 흡수하는 방식을 점점 더 병행하기 시작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두환이 “DJ 때 전직 대통령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듯이, 김대중은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을 사면해주는 등 우익들과도 타협하려 했다. 대표적 반민주악법인 국가보안법을 존속시키고 오히려 집권 초기에 전임 정부들보다 더 많은 국가보안법 구속자를 양산하기도 했다. 김대중의 세 아들 모두 부패 스캔들에 휘말리는 등 부패 문제도 끊이지 않았다.
김대중이 IMF 경제 공황을 극복한 지도자라는 평가도 많지만, 김대중이 공황을 극복한 방식은 대기업들과 타협하고 노동자 서민의 희생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의 재벌 개혁은 재벌의 효율적 경영을 염두에 둔 것이지 총수 일가의 소유권을 문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김대중은 집권 초부터 대중의 염원을 거슬러 IMF 프로그램에 타협하면서 시장 개혁에 충실했다. 정리해고를 합법화하고, 살인적 고금리로 노동자 민중의 삶을 파탄으로 내몰았다. 비정규직을 대량으로 양산하기 시작한 것도 김대중 정권 시절부터였다. 고금리 정책 등 IMF가 강요한 프로그램을 부분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1998년 현대차 공장점거 파업과 같은 노동자 투쟁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스스로를 민주화 정부라고 표방했지만, 노동자 투쟁은 강경하게 탄압했다. 집권 초부터 공무원 노조 합법화 약속을 뒤집고 출범식에 경찰력을 투입하여 무참하게 짓밟았다. 집권 2년여 동안 4백 명 가량의 노동자를 구속함으로써, 김영삼 정부보다 더 많은 구속자를 양산했고, 2000년 롯데호텔노조와 사회보험노조의 파업과 2001년 대우차 파업, 2002년 발전·가스·철도 파업 등에도 경찰 폭력을 이용해 강제 진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2001년 민주노총은 정권 퇴진 투쟁에 나섰고,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비판도 많았다.
한편 김대중은 햇볕정책을 추진하고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등 한반도 긴장 완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물론 6·15 남북공동선언이 표방하는 내용이 긴장 완화를 지향하고 있으므로, 문구 자체만 보면 대체로 지지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이 때문에 김대중의 햇볕 정책은 남북 화해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렸다. 계급 투쟁보다 민족 화해를 더 중시하는 좌파 민족주의 단체들은 이런 기대 때문에 김대중이 남북정상회담 정국에서 롯데호텔과 사회보험노조 파업에 경찰력을 투입한 것에 미온적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언문의 문구에서 벗어나, 실제 현실에서 김대중의 대북 정책은 모순적이었다. 남북 화해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정작 김대중은 한반도 평화의 최대 위협 세력인 미국에 제대로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북 화해가 더 진전되기 어려웠다. 게다가 김대중 정부 스스로가 꾸준히 군사력을 증강하는 등 동아시아에서 군비 경쟁을 부추겼고, 북한과의 국지적 무력충돌도 배제하지 않았다. 즉 김대중의 햇볕 정책은 동쪽에서는 금강산 관광을 추진하면서 서해에서는 북한과 교전하는 식의 모순된 정책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6·15 남북공동선언이 선언문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선언문은 분단의 아픔을 겪었던 민중들의 자유왕래 요구가 포함돼 있지 않고, 국가보안법 등 분단 상황을 이용한 억압적 법률을 폐지한다는 내용도 없다. 상호 체제에 대해 인정한다는 내용은 우익적 반공주의와는 분명히 다르긴 했지만, 통일을 근본적 사회 변혁과 연결시키려는 관점에서 보자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좌파 민족주의 단체들은 종종 자신들의 활동을 6·15 선언에 대한 지지와 이행 요구로 만족하려 했다.
김대중을 넘어
집권 시기 드러난 문제점은 애초부터 김대중의 정치적 한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김대중은 목포에서 선박·해운업을 경영하던 기업가 출신 정치인이었고, 그가 1960~70년대 가담했던 민주당 신파는 자본가적 기반을 가진 정치세력이었다.
김대중은 비록 군부에 의해 혹심한 탄압을 받았고 군부 독재에 상당히 비판적이긴 했지만, 이런 기반 때문에 자본가적 이해관계와 부합하는 일부 사안들에 대해서는 군부 정권을 지지하는 등 일관되지는 않았다. 가령 김대중은 1965년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투쟁이 벌어졌을 때 국교 정상화에 찬성하는가 하면, 박정희가 베트남에 평범한 민중의 자식들을 파병하려 할 때도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또한 김대중은 종종 기층 민중의 투쟁과 거리를 두려 했다. 부르주아 야당 정치인으로서의 이해관계에 충실했던 그는 1987년 6월 항쟁 결과 군부가 타협책으로 내놓은 직선제 안을 수용하는 수준으로 운동을 제한하려 했고,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투쟁이 더 발전하자 자제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민주화 투쟁의 성과로 1980년대 말부터 더는 억압받지 않는 처지가 되자 김대중은 선거를 통한 집권을 목표로 삼게 되면서 자신의 계급적 색깔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이 집권하기 전까지 그에 대한 기층 민중의 기대는 엄청났다. 그래서 그의 집권기는 대중의 개혁 열망이 분출했던 시기이자, 동시에 김대중이 자신의 자본가적 기반 때문에 대중의 염원을 충족시키지 못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모순은 김대중 집권 기간 동안 끊임없는 정치 위기와 불안정을 낳았다.
그러나 김대중 집권 기간 동안 진정한 민주개혁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꺾이지 않았다. 이러한 열망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또다른 부르주아 개혁주의 정치인인 노무현에 대한 기대로 표현됐다. 그러나 집권 후 노무현은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염원을 충족시켜주지 못했고, 2007년 대선에서 노무현에 실망한 다수 청년들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거나 일부는 이명박에게 투표했다.
한나라당은 어부지리로 10년 만에 정권을 탈환했지만, 금세 대중의 환멸을 샀다. 이 때문에 김대중·노무현 집권기가 차라리 나았다는 정서가 광범하게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김대중 자신은 죽기 얼마 전까지도 이명박 정권의 반민주적 조치와 대북 강경 정책, 민생 파탄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김대중은 분명히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을 보낸 정치인이었다. 그의 인생은 한국 정치의 역동성이 한 인물의 삶 속에 투영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정치인과 시대 규정을 일치시키기도 한다. 가령 노무현에 이은 김대중의 죽음에 대해, “민주화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을 이들 정치인들의 몫으로 환원할 수 없다. 무엇보다 한국의 부분적 민주화조차 노동자와 학생 주도의 평범한 민중의 투쟁 성과였다. 그런 성과로 한 때 기층 민중의 열망을 대변했던 김대중과 같은 정치인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지만, 집권기 동안 김대중은 기업주들을 위한 시장 개혁에 충실하며 민중의 진정한 민주개혁 열망을 배신했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집권기가 끝나고 우익 정부의 등장으로 두 부르주아 개혁주의 정치인에 대한 민중의 배신감이 옅어지고 있을 때, 그들은 정치 생명을 다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위한 우리의 운동도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와 진정한 개혁을 위한 운동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이 운동은 부르주아 개혁주의 정치인에 의존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정치적·경제적 민주주의를 위한 노동자 대중 스스로의 행동과 조직화라는 대안을 건설하는 것을 통해서만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