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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 복지국가의 21세기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이 기사는 7월 2일 발표한 온라인 기사를 지면용으로 축약한 것이다. 원문과 관련 토론회 영상은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기본소득이 공식 정치권의 뜨거운 쟁점의 하나로 떠올랐다.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이 중요한 계기였다. 코로나19와 경제 위기 상황에서 주로 문재인 정부가 전 국민에게 현금을 지급한 사상 초유의 일 덕분에 민주당이 총선에서 대승을 거뒀다. 김종인 등 우파 정당 정치인들이 기본소득 논의에 뛰어든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기본소득 논의는 몇 달 사이에 새롭게 시작된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는 대표적으로 기본소득당(옛 사회당)과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난 몇 년 동안 관련 논의를 이끌어 왔다. 녹색당도 기본소득을 지지한다.

국제적으로는 2008년 경제 공황으로 실업과 긴축재정이 확산되자 그 대안으로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리스 시리자와 스페인 포데모스 같은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들이 기본소득을 유력한 대안으로 제시했다.

기술 혁신에 따른 일자리 감소 우려가 4차산업혁명론의 영향으로 커져 온 것도 기본소득 논의가 활발해지는 데 영향을 끼쳤다.

‘좌파적’ 기본소득(특별한 언급 없이 기본소득을 말할 때는 좌파 측의 기본소득을 가리킨다)은 긴축재정 등 신자유주의가 낳은 폐해의 대안으로 등장했다.(우파 측 기본소득의 기원은 대체로 밀턴 프리드먼으로 여겨진다. 그는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로, 1962년 ‘음의 소득세’를 제안했다. 이를 통해 공적부조를 모두 폐지하고 공무원 수를 대폭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서구에서는 장기 호황 덕분에 복지가 확대됐다. 197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이 시기에는 노동자들이 낸 세금과 보험료를 주된 재원으로 삼아 비교적 후한 복지가 제공됐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윤율이 떨어지면서 장기 호황이 끝났고 기업들과 정부들은 수익성을 만회하려고 노동자들이 호황기에 쟁취한 것들을 도로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사회보험과 공적부조* 급여는 갈수록 심사가 까다로워지고 그 액수도 줄이는 등 저질 일자리로 내몰기 위한 괴롭힘이 심해졌다.

기본소득론자들은 불안정 노동이 크게 늘어나고 고용구조가 질적으로 변한 상황에서는 기존 복지제도가 더는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복지 사각지대가 해소되기는커녕 늘어날 것이므로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것이 출발점이었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회 구성원 혹은 거주자 개인에게, 유급고용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 여부와 관계없이, 가난하든 부유하든 따지지 않고(개인의 다른 수입원과 독립적으로), 가정이라는 영역 내의 동거 형태와 무관하게 국가에 의해 주어진다.”(다니엘 라벤토스)

기본소득론자들은 기본소득이 단지 실업과 저임금의 대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 ‘실질적 자유’를 부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실질적 자유란 ‘억지로 일하지 않을 자유’를 뜻한다.

기본소득론자들이 기본소득에 대해 설명할 때 여러 가지 단서를 붙이는 것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국내의 기본소득안들

현재 국내에서 제안된 기본소득안 중에서 대표적인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안이다. 이 지사는 일인당 연간 100만 원 지급을 ‘중기적’ 계획으로 제안한다.

이재명 지사의 안은 액수가 적어도 너무 적다. 매달 8만 3000원가량의 돈으로는 “인간적 삶을 보장”받지도, “불평등을 완화”하지도 못한다.

현재 경기도에서 시행하는 청년배당이 이 정도 액수인데, 2018년 알바몬의 조사에서 대학생 월평균 생활비는 51만 4000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으로 생각하지 않고 추가적인 보너스 개념”이라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기본소득 전도사라고 불리는 이재명 지사가 이처럼 인색한 안을 제시하는 이유는 조세 저항을 의식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이 정도 액수로는 기본소득론자들이 말하는 목표에 다가설 수 없다. 재난지원금처럼 소득 절벽에 부딪힌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지급되는 돈이라면 잠시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재명 지사는 국토보유세를 거둬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하는데, 자본가들의 저항을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서는 대안이 없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누더기가 된 종부세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둘째, 기본소득당의 안을 살펴보자. 기본소득당은 매달 60만 원 지급을 말한다. 기본소득당의 안은 현재 국내에서 제시된 안들 중에 기본소득 액수가 가장 크다.

그럼에도 기본소득의 취지를 충족시키기는 어렵다. 60만 원은 지속적으로 생계를 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이다. 2018년 국민연금연구원이 중고령자를 조사해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노후에 평범한 생활을 유지하려면 개인은 월 154만 원, 부부는 월 243만 원이 필요하다.

기본소득당의 재원 마련 방안에는 국토보유세 같은 부유세뿐 아니라, 근로소득과 종합소득의 15퍼센트를 사회세로 추가 징수하는 안도 포함돼 있다. 단순하게 계산해 봐도, 월소득 400만 원이 넘으면, 받는 돈(기본소득)보다 세금으로 내야 할 돈이 더 많다.

그러나 정작 기초생활보호대상자들의 처지에서는 나아지는 게 거의 없다. 기초생계급여 등 다른 사회부조 제도들을 통폐합하기 때문이다.

또, 기본소득당은 근로소득에는 15퍼센트의 세율을 추가하면서, 법인세는 현재 세수의 15퍼센트만 추가로 부과하겠다고 한다. 기업 부담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에 92조 원에 이르는 국토보유세를 거두겠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기업주 등 부자들의 저항을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서는 대안이 없다.

민주당의 위성정당에 참가해 당선된 용혜인 의원의 행보에 비춰 보면 민주당과 타협하기 위해 기본소득 액수가 낮아질 개연성도 크다.

셋째, ‘랩2050’의 안이 있다. 이 연구소의 이원재 대표는 〈한겨레〉 신문 기자와 한겨레경제연구소장을 지냈고, 문재인 정부에서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그는 미국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지내기도 했다.

랩2050의 안을 보면, 2021년 기준으로 매달 30만 원씩 지급하고 추가 세원을 만들지는 않는다. 2021년 30만 원으로 시작해 2028년 50~65만 원까지 늘린다는 계획이다. 연소득 4700만 원을 기준으로 그 아래층은 내는 돈보다 받는 돈이 많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랩2050의 안은 기업주 등 부자들에게 추가 증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장 온건한 안이다. 오히려 상대적 고소득 노동자들의 부담을 대폭 늘려, 저소득 노동자와 청년 실업자들을 지원하는 안이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기초생계급여 수급자들은 피해를 볼 수 있다. 기초생계급여를 비롯해 현재 지급되는 수당을 상당히 많이 삭감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 안들의 액수 비교 '저질 일자리를 거부할 자유'는커녕 생계비로도 턱없이 부족하다

기본소득과 기존 사회복지, 그리고 기본소득의 모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본소득은 노인이나 아동, 장애인 등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을 늘리기 위해 제안된 것이 아니다. 이들은 그동안 부족하게나마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보험에 가입돼 있는 노동자들도 고려 대상이 아니다. 앞서 살펴본 기본소득안들에서 보듯, 오히려 이들은 ‘특권층’으로 간주돼 증세의 주된 대상이 되기도 한다. 기본소득론자들 중에는 ‘고용지대’라는 개념을 사용해, 오늘날처럼 실업이 만연한 상황에서는 일자리를 가진 것 자체가 일종의 ‘독점’이고 따라서 이에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기본소득의 핵심 타깃층은 그동안 복지 급여에서 배제돼 온 사람들, 즉 경제활동인구 중 사회보험과 공적부조 어느 것으로부터도 지원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다. 기본소득론자들은 기존 복지제도가 이들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경제 침체기에 복지 비용을 삭감하려는 지배자들의 공격은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집중됐던 것이 아니다. 지배자들은 자신들에게 더는 이윤을 가져다줄 수 없는 사람들의 복지를 삭감하는 데에서는 더욱 가차없었다. 노인이나 장애인들이 대표적 희생자들이었다.

따라서 기본소득 도입이 이들에게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도 중요하게 따져봐야 한다.

영국의 ‘예술, 제조 및 상업 장려 협회’(RSA)는 2015년 스코틀랜드 4개 지자체가 실시하려던 기본소득 모델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기본소득이 도입될 경우 소득 10분위 중 최하층인 1~3분위에서 소득이 20퍼센트 감소하는 것으로 예측됐다. 장애인들의 소득이 줄어드는 곳도 있었다.

국내에서 제안된 기본소득안들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예컨대 기초노령연금이나 아동수당 등 현재 지급되고 있는 공적부조들은 도입된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실질적인 생계보장 기능을 하려면 그 액수를 훨씬 인상해야 한다. 그러나 기본소득안들에는 노인이나 장애인들의 열악한 복지를 개선하는 방안이 담겨 있지 않다.

기본소득 도입이 오히려 장차 공공서비스를 더욱 약화시키거나 개선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정부가 책임지고 양질의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기보다는 기본소득으로 민간 서비스 기관을 이용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로 우파적 기본소득론자들이 고려하는 안이기도 하다(공공서비스의 민영화·영리화).

물론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는 2016년 7월 9일 서울 총회에서 이런 진술을 제시했다. “상대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취약하거나 소득이 낮은 사람들의 상황을 악화시킨다면, 사회 서비스들과 수급권을 기본소득으로 대체하는 것에 반대[한다.]”

더 나아가 일부 기본소득론자들은 무상급식, 무상의료 등 사회서비스도 개선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하지만 기본소득론자들은 재원을 어디서 마련할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본소득 도입만 원 포인트로 강조하는 것은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필요한 다양한 서비스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기본소득 도입이 저소득층의 처지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우선, 일부 우파도 (기존 복지를 통·폐합하는) 기본소득 도입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더 중요한 점이 있다. 기본소득이든 기존 사회수당이든 결국 자본주의적 국가가 운영하는 제도라는 점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가들과 마찬가지로 수익성과 이윤 논리를 우선시하고, 이를 위해 이윤의 원천인 착취를 둘러싼 기존 사회관계를 유지하고 착취의 효율을 높이는 것을 핵심 임무로 삼는다.

모든 국가가 이 일에 얼마나 충실한지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서로 앞다퉈 경제활동 재개에 나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필수적인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덕분에 지금 각국의 코로나19 방역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되고 있다.)

흔히 복지국가의 황금기로 알려진 전후 장기 호황기의 유럽 복지국가들조차 복지 지출에 사용된 재원을 대부분 법인세 등 기업주들에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에 부과하는 세금으로 마련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지금의 계급 세력 균형이나 경제 위기의 심각성을 고려하면, 기본소득 도입은 사회 취약계층에게 지급되는 복지 수준을 저하시키거나 그 개선을 막는 수단이 될 공산이 크다.

기본소득이 사회 취약계층의 처지를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는 현실적이다 ⓒ조승진

기본소득 액수 — 이상과 현실

가이 스탠딩(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기본소득론 주창자)이나 금민(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 등은 기본소득을 통해 서민층과 빈곤층 사람들이 저임금 일자리를 ‘거부’할 힘을 가질 수 있게 된 결과 양질의 일자리를 갖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노동시장 바깥에서 살아갈 수도 있는 선택지(‘자유’)가 마련된다고 보는 듯하다.

기본소득 액수가 얼마쯤 돼야 그 기본 취지를 충족할 수 있을까? ‘충분한’ 액수가 얼마일지는 여전히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오늘날 기본소득을 제안하는 사람들은 대개 최저생계비를 ‘기본’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최저생계비는 굶어 죽지는 않을지언정 저질 일자리를 거부할 만한 액수는 되지 못한다.

사실 기본소득을 최저생계비 수준으로 잡자는 제안은 기본소득의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당혹스러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그동안 정부가 저질 일자리를 거부할 ‘자유’를 일부에게 부여해 왔다는 말인가?

이렇게 되면 기본소득이 저임금 일자리를 유지·지원하는 구실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임금노동을 거부할 ‘자유’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 거부는 공상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노동 거부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기본소득의 효과를 과장되게 이해할 수 있고, 그 결과 매우 중요한 다른 것들(가령 고용 안정, 임금 등 노동조건 방어, 기존 복지 방어 또는 개선 등)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할 수 있다.

계급 투쟁으로부터의 탈주

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에 맞서 일자리와 복지를 지키기 위해 저항해 왔다. 물론 저항이 대체로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개혁주의 정당과 개혁주의 노조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던 곳에서는 노동자들의 잠재력이 자기제한적으로 사용돼, 대중의 조건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투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투쟁들 중 일부는 저항이 가능할 뿐 아니라 효과적으로 저항한다면 어느 정도 지켜 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유류세 인상에 맞선 프랑스 노란조끼 운동의 승리가 그 최근 사례다.

당장 괜찮은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이런 저항은 필수적이다. 경제 위기가 장기화된 데다 코로나19가 경제에 사상 초유의 충격을 가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단호하고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다면 지배자들은 더한층의 공세를 취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투쟁을 회피하거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유감스럽게도 기본소득론은 (원래 의도가 무엇이든) 그런 구실을 할 위험이 크다.

특히, 불안정 노동이 크게 늘어 노동시장 구조(와 심지어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변했다는 그들의 주장에는 약점이 많다. 먼저, 지나치게 과장돼 있다. ‘프레카리아트’ 개념으로 유명한 가이 스탠딩은 2011년에 쓴 책에서 “대다수 나라에서 지난 30년 동안 임시직 노동자 비율이 가파르게 상승한 것은 통계로 확인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OECD 통계는 그렇지 않다.

OECD 나라들에서 임시직 노동자 비율 추이 통계 방식에 차이는 있겠지만 가이 스탠딩이 얘기한 것 같은 "가파른" 상승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처럼 신흥국에서 선진국으로 막 진입한 나라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다. 비정규직 비중이 계속 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비정규직으로 표현되는 ‘불안정 노동’ 집단도 그 내부가 매우 이질적이다.

각종 사회보험 가입도 꾸준히 늘고 있다.(물론 더 확대돼야 한다.) 비정규직만 놓고 봐도 그렇다. 고용보험 피보험자 수는 1996년 433만 1000명에서 2019년 1386만 4000명으로 늘었다.(1997년 한 해를 제외하고는 전년 대비 감소를 기록한 해가 없다.) 노동자들의 국민연금 가입도 2008~2018년에 73.7퍼센트에서 85.1퍼센트로 늘었다. 같은 기간 비정규직의 가입도 53.6퍼센트에서 63.1퍼센트로 늘었다. 전년 대비 감소한 때는 2015년 한 해뿐으로 그 폭도 1.1퍼센트포인트였다(61.0 → 59.9).

불안정 노동에 대한 지나친 과장은 노동자들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 전혀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고용 불안을 겪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강조점은 노동자들이 겪는 불안정성은 특정 유형(형태)의 자본주의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고용 불안을 겪는 노동자들도 사용자에 맞서 싸울 힘이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강조하려다 노동계급이 신자유주의에 맞설 힘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김하영, 《오늘날 한국의 노동계급》, 책갈피)

지배자들은 노동자들이 저항해 봐야 쓸모없다는 사상을 퍼뜨린다. 그것의 최신 버전인 4차산업혁명론은 고용 구조가 변하고 사회보험의 사각지대가 생기는 것이 모두 기술 발전에 따른 것으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소득론자들은 대개 이런 생각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 일부는 이런 생각을 발전시켜 ‘노동 없는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다 보니 일자리 감소나 고용 구조 변화에 저항하는 것이 부질없다고 여긴다. 그것이 기술 발전이 낳은 불가피한 변화임을 강조하다 보니 그들은 일자리를 지키고 노동조건과 사회안전망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기술 발전에 역행하는 퇴행적인 시도인 것처럼 암시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가장 멀리 나아간 인사는 금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일 것이다. 그는 오늘날 이윤의 원천이 더는 임금 노동이 아니라 데이터에서 창출된 가치라고 주장한다.

크게 잘못된 주장이다. 코로나19 발병으로 노동자들이 노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즉각 생산이 대거 감소하고 경제가 크게 수축됐다. 또, 인공지능과 데이터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인 구글은 2018년 수익의 85퍼센트를 광고에서 얻었다. 또 다른 데이터 공룡 기업인 페이스북도 2018년 수익의 98.5퍼센트를 광고에서 얻었다.

데이터 자체가 아니라 광고 기업의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한 노동자들, 데이터를 정리하고 데이터 장비를 운영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이 이윤의 원천인 것이다.

금민 이사의 주장은 노동자들의 저항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일 뿐 아니라 무력감을 심어 줌으로써 그 힘을 약화시킨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오늘날 자본이 더는 임금 노동에 의존하지 않으므로 노동자들에게 집에 가서 기본소득이나 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결론 - 도피 아닌 도전이 요구된다

노동의 본질이 변하고 있다는 가정은 불안정 고용과 임금 삭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나 기술 발전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와 불안정 고용의 확대는 자연스러운 것도, 불가피한 것도 아니다. 노동자들은 이런 변화 속에서도 자신들의 조건을 지키기 위해 싸울 수 있고, 또 일부는 싸우고 있다.

기본소득은 세계적 경제 침체와 신자유주의가 낳은 폐해를 해결하고자 하지만, 그 원인인 지배자들의 공격에서 눈을 돌리고, 맞서 싸우지 않으려 한다. 기본소득은 계급 불평등과 권력 구조를 문제 삼지 않는다. 현 상황에 도전하기보다 받아들이고 적응하라고 한다. 기본소득이 노동계급에게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노동자들은 일자리 보장, 임금 인상, 사회 보장 확대 등을 요구하는 경제적·정치적 투쟁을 건설해야 한다. 그 속에서, 제대로 된 실업급여, 충분한 연금과 아동수당,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등을 요구해야 한다.

기본소득 실험 사례

일부 나라들에서 시행된 기본소득 시범사업 결과를 보면, 그 효과가 그저 좋지만은 않았다.

일부 시범사업들에서는 소득 증가와 함께 노동과 자립 의욕을 높이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런 곳들은 대개 기존 복지가 거의 또는 전혀 없는 경우였다. 이런 사례들은 빈곤층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게 인기 있고 빈곤 감소 효과가 있다는 사실 말고 알려 주는 바가 거의 없다.

알래스카나 이란처럼 천연자원 판매에서 얻는 재원을 활용한 경우는 다른 나라로 확대 적용이 불가능하다.

정부 차원의 시범사업으로 유명해진 핀란드의 경우 시범사업의 목적 자체가 자본가들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시범사업에 깔린 문제의식은,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얻게 되면 실업급여가 삭감되므로 새로 직업을 찾는 데 소극적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 시범사업의 목적은, 일자리를 얻어도 계속 지급돼서 소득에 추가되는 기본소득이 구직 노력을 더 장려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결과는 별 차이가 없었다. 실업자들이 새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었기 — 애당초 제대로 된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