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 복지국가의 21세기 대안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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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7월 2일 같은 주제로 진행한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표문이다
기본소득 논의의 배경
기본소득 논의가 한창이다. 기본소득 전도사로 알려진 이재명 경기도지사뿐 아니라 차기 대선 후보로 여겨지는 이낙연 종로구 국회의원이자 전 국무총리도 기본소득 논의에 가세했다. 기본소득당의 용혜인 대표는 민주당 위성정당을 통해 처음 국회 문턱을 넘었다.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대위원장과 일부 의원들도 기본소득을 진보·좌파의 의제로만 남겨둬서는 안 된다며 달려들고 있다.
기본소득이 최근 공식 정치 무대에서 핵심 이슈의 하나로 떠오른 데에는 재난기본소득(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코로나19와 경제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전 국민에게 현금을 지급한 사상 초유의 경험은 민주당이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 중요한 요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지난 몇 달 사이 새롭게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성남시장에 재직 중이던 2016년 청년기본소득(청년배당)을 실시하며 관련 논의에 불을 붙였고, 2017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하며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2018년 도지사 당선 이후에는 청년배당을 경기도 전체로 확대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2016년 청년수당을 도입했다. 2016년 총선에서 노동당과 녹색당이 기본소득 공약을 내놓았고, 2019년에는 노동당 내 일부가 탈당해 기본소득당을 창당했다.
국제적으로 보자면 2007~2008년 경제 침체로 실업과 긴축이 확대되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리스의 시리자와 스페인의 포데모스 같은 좌파 개혁주의 정당들이 기본소득을 유력한 대안으로 거론하기도 했다.
4차산업혁명론1의 영향으로 기술 발전과 일자리 감소에 대한 우려가 커져 온 것도 기본소득 논의가 활발해지는 데 영향을 끼쳤다. 2017년에는 세계경제포럼에서 인공지능과 로봇, 일자리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면서 기본소득 도입 가능성도 함께 다뤄졌다. 2016년 스위스에서 기본소득 도입을 두고 국민투표가 이뤄지는가 하면, 2017년 핀란드에서는 정부 차원의 시범사업이 실시되면서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물론 기본소득 논의의 역사는 더 길고, 그 뿌리도 하나가 아니다. 먼저 좌파적 기본소득과 우파적 기본소득으로 크게 나눠볼 수 있다.
좌파적 기본소득 논의의 기원을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좌파들도 있지만,2 금민 기본소득네트워크 이사에 따르면 “현대적 기본소득 논의의 탄생지는 1980년대 서유럽”이라고 한다.(가이 스탠딩은 이를 “네번째 물결”이라고 부른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서구에서는 장기 호황을 바탕으로 복지가 확대됐다. 서구 복지국가의 소득보장은 대개 ‘사회보험’ 제도를 바탕으로 했다.3 기업주들이 보험료 일부(또는 전부)를 부담하기도 했다. 그래서 자영업자들이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임금노동 관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임금 노동자들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한 경우가 많았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이윤율이 떨어지면서 장기 호황이 끝났고 기업주들은 수익성을 만회하려고 호황기에 노동자들이 쟁취한 것들을 공격했다. 사회보험과 공적부조 급여를 받는 경우에도 갈수록 심사가 까다로워졌고 그 액수도 줄어드는 등 괴롭힘이 심해졌다.
좌파적 기본소득론자들은 이 과정에서 비정규직, 시간제 등 불안정 노동자들이 크게 늘어나고 고용구조가 질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기존 복지제도가 오늘날에 더는 맞지 않다고 본다. 그에 따라 복지 사각지대가 해소되기는커녕 늘어날 것이므로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것이 좌파적 기본소득론자들의 출발점이었다.(사실 고용관계 변화 등의 이런 주장은 지나치게 과장돼 있다. 이 점은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그래서 “1984년 3월 벨기에 루뱅대학교와 가까운 한 연구자 그룹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조건 없는 기본소득에 대한 도발적인 시나리오를 ‘샤를푸리에그룹’4이라는 집단 필명으로 출판했다. 샤를푸리에그룹은 이 시나리오로 노동의 미래를 논하는 시합에 참여해서 상을 받았고, 1986년 9월 벨기에 루뱅 신시가지에서 몇몇 나라의 조건 없는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모인 바로 그 첫 모임을 조직했다 ... 참가자들은 ...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를 출범시키기로 결정했다. 2006년 10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대학에서 열린 대회는 새롭게 창설된 전 세계적 네트워크[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가 유럽 바깥에서 개최한 첫 번째 대회였다.”(‘기본소득의 역사’,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좌파적 기본소득론의 스페인측 대변인 다니엘 라벤토스5에 따르면, “기본소득은 모든 사회 구성원 혹은 거주자 개인에게, 유급고용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 여부와 관계없이, 가난하든 부유하든 따지지 않고(개인의 다른 수입원과 독립적으로), 가정이라는 영역 내의 동거 형태와 무관하게 국가에 의해 주어진다.”
한편, 우파적 기본소득의 기원은 대체로 밀턴 프리드먼으로 여겨진다. 그는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로 1962년에 쓴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음의 소득세’를 제안했다. 그 저작의 골자인즉, 4인 가족 연간 소득 7200달러를 기준으로 그 이하인 사람들에게 7200달러에서 부족한 액수의 50퍼센트를 정부가 지원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모든 가정에 최소 연간 3600달러(현재가치 한화로 1200만 원)의 소득을 보장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공적부조를 모두 폐지하고 공무원 수를 대폭 줄일 수 있다고 밀턴 프리드먼은 주장했다.
세계은행이 발행한 《세계개발보고서 2019》는 노동규제 완화와 최저임금 삭감, 노동유연성 확대 등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뒷받침하기 위한 제도로서 기본소득을 지지한다. 이 보고서는 간접세(부가가치세)를 재원으로 하고 기존 공적부조를 삭감하는 것을 전제로 기본소득 도입을 고려하라고 권고한다.
양재진 교수는 우파적 기본소득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파는 기본소득이 사회보장제도의 중첩성, 파편성, 관료주의화로 인해 발생하는 막대한 행정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일정한 소득을 주면서 자산조사로부터 해방시켜 주면, 공적급여를 받기 위해 저임금 근로를 회피하고 공적 부조에 안주하는 빈곤의 덫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개인의 자유와 시장의 활성화도 기대한다.”6
이처럼, 우파적 기본소득은 복지 지출을 최소화하고 수급자들에게 일자리를 찾도록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돼 왔다. 근로장려세제(EITC)로 대표되는 노동연계복지(워크페어)가 이런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제도인데, 우파적 기본소득론자들은 효과면에서 기본소득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좌/우 기본소득론의 기원과 목적이 다르지만, 둘 사이에 공통점도 있다.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둘 다 장기 호황기(제2차세계대전부터 1970년대 초까지)에 발전한 사회보험제도가 오늘날 고용 구조가 크게 달라진 상황에서는 제대로 운용되기 어렵다고 본다. 이런 관점 때문에 둘은 비슷한 문제점을 공유하기도 한다.
한국의 기본소득안들
현재 국내에서 제안된 기본소득 중에서 대표적인 세 가지를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안이다. 1년에 100만 원(월 8만 3300원) 지급을 ‘중기적’ 계획으로 제안하고 있다. 처음에는 1년에 20만 원(월 1만 6600원)으로 시작해 장차 그렇게 늘려 가자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매달 50만 원씩 지급할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도입 후 15~20년 뒤의 일이라고 해,7 이 지사 스스로가 실현 가능성을 크게 보지 않고 있는 듯하다.
재원은 국토보유세(일종의 부유세)를 도입해 마련하겠다고 한다. 매달 50만 원씩 지급하려면 소득세 인상이나 탄소세(일종의 부가세) 도입도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치적 부담 때문에 당장의 목표로 삼지는 않는 듯하다.
이재명 지사의 안은 액수가 적어도 너무 적다. 중기 목표로 제시한 연간 100만 원(월 8만 3300원)을 두고 보더라도 ‘기본’ 소득이라고 부르기는 민망하다. 이 액수는 인색하기로 유명한 기초생계급여의 6분의 1도 안 된다. 다른 수당을 폐지하지는 않으므로 수령자들은 모두 소득이 늘기는 하겠지만 이 돈으로는 “인간적 삶을 보장”받지도 “불평등을 완화”하지도 못한다.
이재명 지사가 경기도에서 시행하는 청년배당이 이 정도 액수인데, 2018년 알바몬이 조사해 발표한 대학생 월평균 생활비는 51만 4000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으로 생각하지 않고 추가적인 보너스 개념”8이라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이 지사가 2017년 민주당 대선 경선 당시 제시한 안은 전 국민에게 지급하는 토지 배당 30만원에 더해 아동·청소년·청년·노인·농어민·장애인에게 기본소득을 매년 100만 원 씩 추가 지급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수입이 있는 가정에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기본소득의 애초 취지, 즉 실직 등으로 소득이 끊긴 경우를 생각해 보면 실질적 소득 보전 대책이라 할 수 없는 액수다.
기본소득 전도사라고 불리는 이재명 지사가 이처럼 인색한 안을 제시하는 이유는 정치인으로서 조세저항을 고려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현재 제시하는 기본소득 재원은 일종의 부유세인 토지보유세를 거둬 마련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최고 부유층의 조세저항을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 지사도 장기적으로 매달 50만 원가량의 기본소득을 도입하려면 노동자들이 내는 세금을 적잖이 인상해야 한다고 본다. 이렇게 될 경우 받는 돈(기본소득)보다 내야 할 세금이 많은 노동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증세를 별 문제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기본소득 액수와 그에 필요한 증세 규모를 매우 낮은 수준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액수로는 기본소득(론자들이 말하는) 구실을 할 수 없다. 재난지원금처럼 소득 절벽에 부딪힌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지급되는 돈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둘째, 기본소득당의 안을 살펴보기로 한다. 매달 60만 원을 지급한다고 한다. 당연히 대규모 증세가 수반된다. 거기에는 국토보유세 같은 부유세도 있지만, 근로소득과 종합소득의 15퍼센트를 사회세로 추가 징수하는 안도 포함된다.
단순하게 계산해 봐도, 월소득 400만 원이 넘으면 받는 돈(기본소득)보다 세금으로 내야 할 돈이 더 많다. 다만, 가구 구성원이 많아지면 그 수에 비례해 기본소득 수입이 늘어나므로 이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소득세 비과세·감면 조처도 모두 폐지하므로 노동자들 중 가처분 소득이 60만 원 늘어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전체 노동자의 절반 가까이가 소득이 면세점 아래여서 소득세를 내지 않는다. 그래도 탄소세 등 간접세를 추가 징수하므로 실제 소득은 더 줄어든다.
강남훈과 김교성 등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소속의 여러 연구자들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의 금민 소장 등의 아이디어는 대부분 기본소득당의 안으로 반영돼 있다.
기본소득당 안의 핵심 문제는 정작 기초생활보호 대상자들의 처지에서는 나아지는 게 거의 없다는 점이다. 기본소득을 받는 대신 기초생계급여 등 다른 사회부조 제도들을 폐지(통합)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개인별로 지급하므로 가구 구성원이 많은 경우는 가구 소득이 지금보다 좀 늘어날 것이다. 현재 기초생계급여는 가구 구성원 수에 정비례해서 늘어나지 않는다.9
기본소득당의 안은 현재 제시된 모든 안들 중에 기본소득 액수가 가장 크다. 그럼에도 60만 원은 지속적으로 생계를 꾸려 나아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2018년 국민연금연구원이 중고령자를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노후에 평범한 생활을 유지하려면 개인은 월 153만 7000원, 부부는 월 243만 4000원이 필요하다. 하물며 사회 생활이 활발한 연령층에서는 더욱 부족할 것이다. 고용보험 가입 이력이 없는 청년 실업자들과 일부 저임금 노동자들에게는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도움이 되겠지만, 기본소득 취지를 충족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상대적 고소득 노동자들은 오히려 실질소득이 줄어든다. 강남훈 교수는 간접세(부가가치세) 인상 때문에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할 가능성에 대해 “노동조합은 기본소득을 받으니 임금인상을 요구할 명분이 없[다]” 하고 말했다.10 기본소득을 위해서라면 조직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이익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또한 기본소득당이 근로소득에는 15퍼센트의 세율을 ‘추가’하면서 법인세는 ‘현재 세수의 15퍼센트’만 부과하는 것은 기업 부담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92조 원에 이르는 국토보유세를 걷겠다고 하는데, 이재명 지사와 마찬가지로 자본가들의 저항을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서는 대안이 없다. 민주당의 위성정당에 합류해 국회에 진출한 용혜인 의원의 행보에 비춰 보면 민주당의 안으로 입안되는 과정에서 더 크게 타협되어 기본소득 액수가 낮아질 가능성이 크겠지만 말이다.
셋째, 정책실험실을 지향하는 ‘랩2050’의 안을 살펴보자. 그 연구소의 이원재 대표 자신이 기본소득 연구자다. 이원재 대표는 한겨레 기자와 한겨레경제연구소장을 지내어 진보파 측에도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는 미국 MIT에서 경영학 공부를 하고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지내기도 했다. 희망제작소 소장, 여시재11 기획이사를 지냈고, 현 정부에서는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랩2050의 안은 2021년 기준으로 매달 30만 원씩 지급하고 추가 세원을 만들지는 않는다. 소득세 비과세·감면 등을 모두 폐지하고, 유류세 감면 조처 등 노동자들의 소득 보전용 세제 혜택도 폐지한다. 지자체가 지급하는 각종 수당도 모두 폐지한다. 2021년 30만 원으로 시작해 2028년 50만~65만 원까지 늘린다는 계획이다. 연소득 4700만 원을 기준으로 그 아래층은 내는 돈보다 받는 돈이 많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랩2050 안은 기업주와 부자들에게 추가 증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장 온건한 안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상대적 고소득 노동자들의 부담을 대폭 늘려 저소득 노동자와 청년 실업자들을 지원하는 안이다.
랩2050 연구보고서가 스스로 밝힌 적용 사례를 보면, 그 효과는 모순적이다.
① 두 명의 미취학 자녀를 둔 연소득 1억 원의 외벌이 가구,
② 중학생 자녀 하나를 둔 연소득 9000만 원의 맞벌이 가구,
③ 기초연금 수급자인 부모를 둔 연봉 3500만 원의 청년 가구,
④ 기초생활보호 대상자인 2인(모자) 가구,
⑤ 연소득 5000만 원의 청년 1인 가구.
앞의 세 경우 세금 부담보다 기본소득으로 받는 돈이 각각 353만 원, 314만 원, 168만 원 더 많다. 아동수당이나 기초연금보다 기본소득 액수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 기초생활보호 대상자 가구는 추가 소득이 0원이다. 마지막 경우는 41만 원 손해를 본다. 얼핏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익을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기초생활보호 대상자들에게는 나아지는 게 전혀 없어, 오히려 사회 취약계층을 배제하는 제도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지자체가 지급하는 각종 지원이 삭감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 열악해질 가능성도 있다.
①~③의 경우도 늘어나는 소득이 과장된 면이 있다. 가구별로 계산했기 때문이다. ①의 경우 4인 가구로 나누면 1인당 월 7만 3500원가량 되는데, 이는 이재명 지사의 안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 정도라도 도움은 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10만 원씩 지급하는 아동수당을 30만 원으로 인상하는 것과 비교해 더 나을 것도 없다. 기본소득 도입으로 사회 취약계층이 배제될 위험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세번째 경우도 기초연금을 현재 25만 원에서 40만 원가량으로 인상하는 게 더 도움이 된다.
랩2050의 재원 마련 계산은 다른 기본소득안에 비해 매우 세밀하고 복잡한데, 그럼으로써 보통의 노동자들은 전문적인 논의에서 배제되는 효과도 낼 듯하다.
넷째, 기타 안으로 두 가지만 언급하겠다. 또 다른 기본소득 전도사로 불리는 유승희 전 민주당 의원의 안은 이재명 안과 랩2050 안 사이에 있다. 매달 10만~30만 원씩 지급하는 안인데, 소득세 비과세·감면 폐지, 토지보유세, 디지털세 등 다양한 세원을 추가하는 안이다. 유승희 전 의원은 2018년 국회에서 기본소득 연구 발주를 주도해 한국정치학회의 보고를 받았다. 당시 연구 책임자는 박홍규 고려대 교수인데 강남훈 교수의 아이디어를 대폭 수용한 안을 제시한 바 있다.12
한편, 6월 11일 MBC 〈100분 토론〉에는 오세훈이 출연해 박기성 교수와 함께 ‘안심소득제’라는 것을 기본소득과 비슷하지만 다른 대안이라고 내놨는데, 재원마련 방안이 아예 없어 사실상 사기에 가깝다. 안심소득제는 밀턴 프리드먼이 제안한 ‘음의 소득세’를 변형한 것이다. 하지만, 박기성 교수가 2017년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 기준 소득은(5000만 원) 있는데 재원 마련 방안이 없다.13 오세훈은 〈100분 토론〉 당시 기준 소득을 6000만 원이라고 제시했는데, 재원은 ‘앞으로 늘어날 복지 재정으로 충당하면 된다’는 터무니없는 답변을 내놨다.
기본소득과 기존 사회복지, 그리고 기본소득의 모순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에게’ 지급되지만, 복지가 아예 없는 상태에서 도입되는 것은 아니므로, 모든 사람이 전보다 나은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아동이나 노인, 장애인 등 노동시장 바깥에 있는 사회 취약계층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지원하는 정책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아동수당, 기초노령연금, 장애수당을 지급하고 있고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사람들에게는 생계급여를 지급하고 있다. 물론 그 액수가 형편없는 수준이라서 개선이 시급하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이들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기 위해 제안된 것은 아니다.14 인도나, 나미비아 등지에서 실시한 기본소득 실험의 결과를 보면, 기본소득 도입으로 취약계층이 혜택을 본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것은 기존 복지수준이 워낙 열악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취약계층의 소득을 늘리는 데 초점을 맞춰 기본소득을 제안하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사회보험에 가입돼 있는 노동자들도 고려 대상은 아니다. 앞서 살펴본 기본소득안들에서 보듯, 오히려 이들은 ‘특권층’으로 인식돼 증세의 주된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필리프 판 파레이스는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 – 기본소득에 대한 철학적 옹호》에서 ‘고용지대’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했다. 실업률이 높은 경제 내에서 일자리를 갖는 것 자체가 특권이며, 따라서 이에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이다.15
기본소득의 핵심 타겟층은 그동안 복지 급여에서 배제돼 온 사람들, 즉 경제활동인구 중 사회보험과 공적부조 어느 것으로부터도 지원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다. 취업 경력이 없어 사회보험에 가입할 수 없었거나, 특수고용 노동자들처럼 법적으로 피고용 상태를 인정받지 못해 사회보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해당된다. 이들은 노동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공적부조의 대상도 되지 못한다. 기본소득론자들은 기존 복지제도가 이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이 사각지대는 새 고용 형태와 함께 생겨난 면이 있지만 애당초 고용 형태 변화가 단지 기술발전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규제 완화의 일환(비정규직법 제정 등)이었다는 점을 봐야 한다. 이런 조처들은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복지를 줄이고 사회보험 진입 장벽을 만들어, 복지 비용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노동자들 사이에 경쟁과 분열을 조장해 임금 등 노동조건을 공격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예컨대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상당수는 신산업 종사자들도 아니고 실제 사용자도 존재하지만, 정부가 규제를 완화해 사용자들이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노동자성 인정 문제를 두고 수십 년 동안 싸우고 있는 이유다. 이런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문제를 내버려 두고 기본소득으로 뒷받침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은 문제다. 이들에게는 최저생계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실업급여, 건강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복지 비용을 삭감하려는 지배자들의 공격이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집중된 것은 아니다. 지배자들은 자신들에게 더는 이윤을 가져다줄 수 없는 사람들의 복지를 삭감하는 데에서는 더욱 가차없었다. 노인이나 장애인들이 대표적 희생자들이다.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쓴 지난 40여 년 동안 많은 나라에서 연금 삭감 공격이 벌어지고 노동자들이 이에 맞서 싸웠다. 갈수록 심사 조건이 까다로워지고 무엇보다 지원 자체가 삭감돼 장애인들의 처지도 악화됐다. 이를 두고 복지국가가 완전히 해체될 것처럼 과장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들은 이미 필요한 지원을 받고 있다는 식으로 제쳐 버려서도 안 될 것이다.
이런 경험이 한국의 노인과 장애인 복지에는 해당되지는 않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한국의 경우 후발 산업국가로서 지난 30여 년 동안 경제 성장과 함께 복지의 양 자체는 점차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도입 초기부터 세계적 추세인 신자유주의적 조처들과 결합돼 수급 조건이 까다롭고 수급액도 작아 실질적인 생계 대책이 되지 못하는 제도들이 도입됐다. 국민연금, 기초연금, 장애수당 등이 그렇다. 따라서 기본소득 도입이 이들에게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도 매우 중요하게 따져 봐야 한다.
서구에서 시행된 여러 기본소득 시범사업 결과를 보면, 그 효과가 단순히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부 시범사업들에서는 소득 증가와 함께 노동과 자립 의욕을 높이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런 곳들은 대개 기존에 복지가 거의 또는 전혀 없던 경우였다. 이런 실험 결과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게 인기 있고 빈곤 감소 효과가 있다는 사실 말고 알려 주는 바가 거의 없다.
알래스카나 이란처럼 천연자원 판매에서 얻는 재원을 활용한 경우는 다른 나라들에 확대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핀란드와 캐나다에서 실시된 기본소득 시범사업은 주로 기본소득의 ‘노동 유인 효과’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애당초 실업자의 처지보다 정부와 기업주들의 관심사를 반영한 것으로, 기존 실업수당 때문에 수급자들이 구직 노력을 게을리한다는 보수적인 평가에서 출발한 것이다.
호황기에는 비교적 후하게 운용되던 실업수당이 신자유주의 조처들로 갈수록 받기가 까다로워져, 이제는 형편없는 일자리에라도 고용되면 즉시 수급 자격이 박탈된다. 그런데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취한 이런 신자유주의 조처 때문에 오히려 수급자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않는 ‘실업의 덫’ 현상이 생겼다는 관점을 드러낸다. 그런데 기본소득은 일자리를 구해도 계속 지급되므로 일자리를 구하면 추가 소득을 얻을 수 있고 따라서 이전에 비해 구직 노력을 더 기울이지 않겠느냐는 게 주창자들의 핵심 가정이었다. 결과는 별 차이가 없었고, 시범사업은 끝났다.
기본소득 실험은 오히려 기본소득이 신자유주의 의제 – 실업자 벌주기, 저질 일자리 강요하기 – 에 의해 이용될 수도 있음을 보여 줬다. 수급액은 생계 유지에는 충분치 않아 노동자들이 저질 일자리라도 구하러 다니도록 설계됐고, 구직 활동을 하지 않던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시범사업에서 배제됐다.
영국의 ‘예술, 제조 및 상업 장려 협회’(RSA)는 2015년 스코틀랜드 4개 지자체가 실시하려던 기본소득 모델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기본소득이 도입될 경우 소득 10분위 중 최하층인 1~3분위에서 소득이 20퍼센트 감소하는 것으로 예측됐다. 장애인들의 소득이 줄어드는 곳도 있었다. 이런 손실을 막으려면 세금을 대폭 인상해야 할 텐데, 이 때문에 저소득층에 대한 편견과 낙인 효과가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16
국내에서 제안되고 있는 기본소득안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일부 수당은 남겨두고 일부 수급액은 삭감을 방지하는 등의 조처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실제 적용에서는 비슷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예컨대 기초노령연금이나 아동수당 등 현재 지급되고 있는 공적부조들은 도입된 지도 얼마 안 된 것으로, 그 액수를 훨씬 인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도 이런 필요를 인정해 장차 늘려 가겠다는 약속으로 당장의 불만을 누그러뜨려 왔다. 선거 때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인상 공약을 제시하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제안되고 있는 기본소득안들에는 노인이나 장애인들의 열악한 복지를 개선하는 방안이 담겨 있지 않다. 기본소득 도입과 함께 기초노령연금, 아동수당 등 기존 사회수당들이 통합(또는 삭감)되는 것으로 설계돼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최소한의 생계’도 유지하기 어렵다. 기초생계수당을 받던 최하층의 경우도 개선이 없거나 미미하다.17
현재 이들은 현금수당뿐 아니라 서비스 형태의 지원도 받고 있다. 노인과 아동, 장애인에 대한 돌봄 서비스는 재정 지원이 매우 적은 데다 민간 업체들에 운영이 맡겨져 매우 열악한 상태이지만 말이다. 대선 후보 시절 문재인은 이를 공공화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재정 부담을 이유로 결국 지키지 않았다.
그런데 기본소득 도입이 오히려 장차 공공서비스를 더욱 약화시키거나 개선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돼 왔다. 정부가 책임지고 양질의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기보다는 기본소득으로 민간 서비스 기관을 이용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로 우파적 기본소득론자들이 고려하는 안이기도 하다(공공서비스의 민영화·영리화).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는 2016년 7월 9일 서울 총회에서 이런 입장을 채택했다. “상대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취약하거나 소득이 낮은 사람들의 상황을 악화시킨다면, 사회 서비스들과 수급권을 기본소득으로 대체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럼에도 ‘악화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것과 개선을 요구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일부 기본소득론자들은 무상급식, 무상의료 등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재원을 어디서 마련할지는 말하지 않는다.18 기본소득 도입에 필요한 대규모 재원 마련을 위해 근로소득세도 대폭 인상해야 한다면서도, 공공서비스 개선을 위한 재원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진지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만든다.
더 나아가 가이 스탠딩은 기본소득 도입으로 정부의 돌봄 서비스 지출을 줄일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이는 기본소득 만능론이 어떤 문제를 낳을 수 있는지 보여 준다.)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돌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볼 수 있다. 기본소득은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재무부의 공공·민간 돌봄 비용 부담을 줄인다. 기본소득의 순비용을 고려할 때 이 예상 절감액은 계산에 반영돼야 한다.”19
요컨대 기본소득 도입만 원포인트로 강조하는 것은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필요한 다양한 서비스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이런 문제점을 장차 개선해 나아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 도입이 저소득층의 처지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우선, 일부 우파도 기본소득 도입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들은 주로 복지 지출을 삭감하거나 최소한 증가세를 억제하기 위해 기본소득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 복잡한 각종 수당을 하나로 통합해 최소액만 지급하고 각종 제도 운영에 필요한 인력 등 행정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일단 전 국민이 수급 대상이 되면 기본소득 액수를 인상하기 위한 정치적 동력도 확보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만만한 문제는 아니다. 기본소득 액수를 조금만 인상하려 해도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우파들은 그런 인상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일부 우파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중요한 점이 있다. 기본소득이든 기존 사회수당이든 결국 자본주의적 국가가 운영하는 제도라는 점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수익성과 이윤 논리를 우선시하고, 이를 위해 이윤의 원천인 착취를 둘러싼 기존 관계를 유지하고 그 효율을 높이는 것을 자신의 핵심 임무로 삼는다.
모든 국가가 이 일에 얼마나 충실한지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서로 앞다퉈 경제 활동 재개에 나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필수적인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덕분에 지금 각국의 코로나19 방역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되고 있다.
기본소득 제도가 도입되고 운영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국가는 그 제도가 기업 이윤에 최대한 유리하도록 영향을 끼칠 것이다. 반면 평범한 사람들이 그 과정에 실질적 영향을 끼치기는 불가능하다.
흔히 복지국가의 황금기로 알려진 전후 장기 호황기에 유럽 복지국가들에조차 복지 지출에 사용된 재원이 대부분 법인세 등 기업주들에 대한 세금이 아니라 노동계급에 부과된 세금으로 마련됐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20
지금의 계급 세력 균형이나 경제 위기의 수준을 고려하면, 기본소득 도입은 사회 취약계층에게 지급되던 복지 수준을 저하시키거나 개선을 막는 수단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상과 실제
일부 논자들이 암시하는 것처럼 ‘저질 일자리를 거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액수’의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면 기존 사회수당들을 폐지(통합)하는 게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이 스탠딩이나 금민 등은 기본소득을 통해 노동계급 사람들이 저임금 일자리를 ‘거부’할 힘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양질의 일자리를 갖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노동시장 바깥에서 살아갈 수도 있는 선택지(‘자유’)가 마련된다고 여기는 듯하다.
사람들이 극단적 빈곤에 내몰려 아무 일자리나 닥치는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는 좋은 것이다.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 있는 많은 청년들과 저임금 노동자들이 기본소득 제안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이유다. 2000년대 초 세계적으로 벌어진 대안세계화 운동에서 기본소득 제안이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관심을 끈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본소득의 액수가 얼마쯤 돼야 그 기본 취지를 충족하는 것일까? 기본소득론자들도 이 점을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아래 기본소득의 대표적 주창자들의 모호한 말을 들어 보자.
“‘기본’(basic)이라는 말은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적어도 이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극단적인 상황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금액을 의미한다. 그보다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래 의도는 완전한 경제 보장이나 풍요가 아니라 기본적인 경제 보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완전한 보장은 실현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 충분한 먹을거리와 살 곳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배움의 기회와 의료에 접근할 기회 … 모든 사람이 동등한 지위의 시민으로서 사회에 참여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자원을 가져야 한다.”(가이 스탠딩, 《일과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 기본소득》)
“기본소득은 정의상 ‘기본적 필요’ 개념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얼마나 높은 수준이어야 할까요? 사람들이 능력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고 잠시 가정해 보죠. 모든 이의 형식적 자유가 보호되어야 한다는 조건 하에서, 가장 적은 실질적 자유를 가진 사람들의 실질적 자유가 극대화 되려면, 기본소득은 지속 가능한 최고의 수준에서 정해져야 합니다. 물론 관련된 지속 가능성의 개념 안에 유인 효과와 생태 효과 양자가 포함되어야 하며, 이때 지속 가능한 기본소득의 극대화는 대안적 사회경제 체제를 평가하기 위한 간결한 기준을 제공해 줍니다.”(필리페 판 파레이스,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 기본소득에 대한 철학적 옹호》)
기본소득론자들은 때로는 ‘기본적 필요’만 충족시키는 것이라서 ‘재원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다’며 실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액수가 충분해서 저질 일자리를 거부할 수 있는 ‘해방적’ 수단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좌우 모두의 관심과 지지를 끌어내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에는 기본소득이 중도좌파 정치인들뿐 아니라 일부 우파와 자본가들에게도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기본소득이 주류 정치 무대에 오르자, 좌파적 주창자들에게는 기본소득제의 실현 가능성을 지배자들(또는 그 일부)에게 논증⋅입증하는 문제가 중요해졌다. 이후 제시된 다양한 기본소득안들은 기본소득의 취지에 공감하던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운 내용이었다.
심지어 좌파적 기본소득론자들은 기본소득 지급이 ‘근로 의욕’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려 애썼는데, 이는 그들이 말하는 ‘노동을 거부할 자유’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논리다. “제일 난감한게 … 기본소득이 노동 의욕, 현실적으로는 고용 증진, 시장노동 참여 증대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다.”(안효상, 《시대》 79호)
‘충분한’ 액수가 얼마일지는 여전히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오늘날 기본소득을 제안하는 사람들은 대개 최저생계비21가 ‘기본’이라고 여기는 듯하다.22 그러나 최저생계비는 굶어 죽지는 않을 액수이겠지만 저질 일자리를 거부할 수 있는 액수는 되지 못한다.
게다가 최저생계비 운운은 기본소득의 취지에 공감하던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정부가 저질 일자리를 거부할 ‘자유’를 일부에게 부여해 왔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실업 급여는 하한액이 최저임금의 80퍼센트가량 되는데 이는 기초생계급여의 세 곱절 정도 된다.
지배자들은 기초생계급여나 실업수당의 액수가 너무 많아서 ‘근로 의욕’을 떨어뜨린다며 호시탐탐 삭감하려 해 왔다. 그런데 최저생계비가 ‘저질 일자리를 거부할’ 기본소득이라는 가정은 지배자들의 이런 불평을 인정하는 셈이다.
기본소득론자들은 노동연계복지(워크페어, 근로장려세제23)가 사실상 기업주들의 인건비를 지원하는 정책으로, 저임금 일자리를 유지 지원하는 구실을 한다고 비판해 왔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기본소득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다. 임금노동 여부를 따지지 않으므로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기본소득론자들은 주장하지만, 최저생계비 수준의 소득만 지원하고 임금노동을 ‘강제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형식주의적인 논증일 뿐이다.
냉정하게 말해, 노동자들이 임금노동을 거부할 ‘자유’를 갖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가능하다.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저질이든, 양질이든) 착취를 거부할 수 있게 허용했다가는 자본주의 체제는 작동을 멈출 것이다.(노동계급 전체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총파업이겠지만 그것은 기존 국가를 강제로 해체시키기 위한 봉기 일보직전에 노동자 평의회를 기반으로 채택될 수 있는 전술일 것이다.)
노동거부가 공상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본소득의 효과를 과장되게 이해할 수 있고, 그 결과 매우 중요한 다른 것들(가령 고용안정, 임금 등 노동조건 방어, 기존 복지 방어 또는 개선 등)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처럼 경제 침체가 장기화됨에 따라 만성적인 대량 실업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 자체가 적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본소득을 받더라도 잠시 버틸 수 있을 뿐이고 결국 일부는 실업을 피하기 위해 저질 일자리로 내몰릴 것이다. 투쟁을 통해 노동자에게 유리하도록 노동 조건에 대한 규제가 강화돼야 하는 이유다. 우파들의 비난과 달리 최저생계비의 3~4곱절이나 되는 실업급여조차 일자리를 거부할 만큼의 액수는 되지 못한다.
계급투쟁으로부터의 탈주
1970년대 후반 이래로 지배자들은 낮아지는 수익성을 회복하려고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쥐어짰다. 사용자들은 임금인상을 억제하고 노동강도를 높이는 등의 조처를 취했다. 주요국 정부는 그런 조처가 용이하도록 고용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사회보험에 사각지대가 늘어나고, 비정규직 등 저질 일자리가 늘어나고, 해고가 쉬워지는 등 노동자들의 처지가 악화했다. 이는 사용자들이 노동자들을 경쟁시켜 노동조건을 더한층 공격하기 쉽게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이런 공격에 저항해 왔다. 물론 저항이 대체로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개혁주의 정당과 노조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던 곳에서는 기층 노동자들의 잠재력이 자기제한적으로 사용되다 보니 노동자들의 조건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투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투쟁들 중 일부는 이런 저항이 가능할 뿐 아니라 효과적으로 싸운다면 일정한 성취를 할 수 있음을 보여 준 바 있다. 유류세 인상에 맞선 프랑스 노란조끼 운동의 승리는 그 최근 사례다.
설사 당장에 괜찮은 성과를 내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저항은 필수적이다. 장기화된 데다 코로나19로 사상 초유의 충격을 받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다면 지배자들은 더한층 공세를 가할 것이다.
애당초 노동자들 중 일부가 사회보험 바깥으로 밀려나고 저임금 일자리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에 놓인 것 자체가 이런 공격에 맞서 충분히 잘 싸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따라서 이런 투쟁을 회피하거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유감스럽게도 기본소득론은 (원래 의도가 무엇이든) 그런 구실을 할 위험이 크다.
먼저 불안정 노동이 크게 늘어 노동시장 구조(와 심지어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변했다는 주장에는 약점이 많다. 지나치게 과장돼 있기 때문이다.
‘프레카리아트’로 유명한 가이 스탠딩은 2011년에 쓴 책에서 “대다수 나라에서 지난 30년 동안 임시직 노동자 비율이 가파르게 상승한 것은 통계로 확인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OECD 나라들의 경우 이는 확실히 사실이 아니다. 이들 나라에서 임시직 고용은 1980년에 9.2퍼센트였다가 2006~2007년에 12.2퍼센트로 최고치를 기록한 뒤 2013년에는 11.8퍼센트로 다시 낮아졌다.(OECD 2015)24
한국 등 신흥개발국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다. 비정규직으로 표현되는 ‘불안정 노동’ 집단은 그 내부가 매우 이질적일 뿐 아니라, 비정규직 비중이 계속 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각종 사회보험 가입률도 꾸준히 늘고 있다. 비정규직만 놓고 봐도 그렇다. 고용보험의 피보험자 수는 1996년 433만 1000명에서 2019년 1386만 4000명으로 늘었는데, 1997년 한 해를 제외하고는 전년 대비 감소를 기록한 바가 없다. 노동자들의 국민연금 가입률도 2008~2018년에 73.7퍼센트에서 85.1퍼센트로 늘었다. 같은 기간 비정규직의 가입률도 53.6퍼센트에서 63.1퍼센트로 늘었다. 전년 대비 감소한 때는 2015년 한 해뿐으로 그 폭도 1.1퍼센트포인트였다. (61.0 -〉 59.5)
불안정 노동에 대한 지나친 과장은 노동자들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
“노동자들이 고용 불안을 겪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강조점은 노동자들이 겪는 불안정성은 특정 유형(형태)의 자본주의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고용 불안을 겪는 노동자들도 사용자에 맞서 싸울 힘이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강조하려다 노동계급이 신자유주의에 맞설 힘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25
지배자들은 노동자들의 저항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서구의 경우) 이주민과 내국인을 분열시키려 한다. 또, 노동자들의 사기와 자신감을 떨어뜨리기 위해 온갖 이데올로기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그중 하나는 노동자들이 저항하려 해봐야 쓸모없다는 사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 최신 버전은 4차산업혁명론인데 고용 구조가 변하고 사회보험의 사각지대가 생기는 것은 모두 기술 발전에 따른 것으로, 거스를 수 없는 자연 현상 같은 것이라고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소득론자들은 대개 이런 생각을 많게 또는 적게나마 받아들인다. 일부는 이런 생각을 발전시켜 ‘노동 없는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다 보니 일자리 감소나 고용 구조 변화에 저항하는 것이 부질없다고 여긴다. 그것이 특히 기술발전이 낳은 변화임을 강조해 일자리를 지키고 노동조건과 사회안전망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기술발전에 역행하는 퇴행적인 시도인 것처럼 암시하기도 한다. “임금노동 일자리는 줄어드는 추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모두에게 일자리를’이라는 허구적인 얘기만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자동화·정보화가 진행되면서, 기존의 산업에서 더 이상 일자리는 창출되기 어렵다.”(녹색당, 2016년 총선공약집 중에서)
비교적 안정된 일자리가 사라진다면 이에 기초한 기존의 사회보험·공적부조 체계도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한국의 기본소득론자들은 4차산업혁명론으로 대표되는 인공지능·로봇(에 의한 일자리 대체) 담론을 급속히 수용했다.
이에 관한 한 가장 멀리 나아간 인사는 금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일 것이다. 그는 현재 사회를 ‘플랫폼 자본주의’ 혹은 ‘빅데이터 자본주의’라고 부르는데 조금 길지만 그의 주장을 인용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 시대 자본주의의 특성은 이윤원천이 더 이상 임금노동이 아니라 데이터에서 창출된 가치라는 점이다.”26
“산업자본과 플랫폼 자본의 배치는 ‘자본의 일반지성’(플랫폼) 아래로 개별 생산이 포섭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 플랫폼 자본주의를 가르는 가장 굵직한 사회적 분할은 플랫폼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사기업과 오직 플랫폼을 통해서만 사회적 삶이 가능하게 된 모든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결국 플랫폼 알고리즘의 소유자인 기업이 사회 그 자체의 주인이 된다 … 데이터가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된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 계급적 배치는 플랫폼 소유를 기준으로 1차 분할되며, 개별 생산수단의 소유를 기준으로 2차 분할된다.”27
“노동소득분배율이 낮아진 이유는 ‘지식재산생산’의 비중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지식재산소득은 고용과 전혀 연관되지 않으며 임금으로 분해되지 않는다 … 페이스북의 총수입 대비 임금비중은 11퍼센트에 불과했다. 노동자를 고용한 자본의 수익과 노동소득의 분배비율이 불변이더라도 지식재산생산의 증대는 노동소득의 GDP 비중을 줄이게 된다.”28
“디지털 전환과 함께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의 전 과정이 인공지능에 의해 통제되는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으로 바뀌고 있다.”29
엄청난 과장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과 데이터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은 구글이다. 그런데 구글은 2018년 수익 중 85퍼센트를 광고에서 얻었다. 또 다른 데이터 공룡 기업인 페이스북도 2018년 수익의 98.5퍼센트를 광고에서 얻었다.30 구글과 페이스북은 사용자들이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남기는 각종 정보를 바탕으로 개인이나 집단에 맞춤형 광고를 제공할 수 있고, 여러 기업들이 그 경로를 구입하는 식이다. 결국 광고를 구입한 기업들의 이윤 일부가(다 모으면 엄청나다) 구글과 페이스북으로 이전되는 것으로, 이윤 ‘원천’은 데이터가 아니라 광고 기업의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한 노동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미국의 주도적인 IT 기업들을 뜻하는 FAANG(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 중 위에서 언급하지 않는 나머지 세 기업의 수익 구조는 구글·페이스북과 다르다. 애플은 아이폰(62.8퍼센트), 아마존은 온라인스토어(52.8퍼센트)가 가장 큰 수익원이다. 넷플릭스는 유명 제작사들이 제작한 영상을 보려는 사람들에게서 회비를 받아 수익을 얻는다. 사실상 극장과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경우들도 데이터가 아니라 중국의 폭스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아마존에서 거래되는 각종 상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노동자들, 데이터 장비를 운영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이 이윤의 원천이다.
위에서 인용한 금민 이사의 주장은 노동자들의 저항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일 뿐 아니라 무력감을 심어 줌으로써 그 힘을 약화시킨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오늘날 자본이 더는 임금 노동에 의존하지 않으니 노동자들에게 집에 가서 기본소득이나 받으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러나 기술 진보로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나,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저항할 명분과 능력이 없게 될 것이라는 비관론은 모두 참말이 아니다.
결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가 지적했듯이, 기본소득론들이 제시하는 액수는 기본적일 뿐, 그다지 급진적이지 않다.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를 넘어 구체적 적용 사례를 보면 매우 퇴행적인 모습마저 발견된다. 기본소득 도입으로 노인, 장애인 등 사회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가 축소될 가능성이 큰데 이를 모르는 체 하기도 하고 아예 사회서비스 축소로 재정을 절약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작은 정부’를 지향하게 되는 것도 그렇다.
기본소득론자들은 기본소득 실시로 이러저러한 사회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근거는 취약하다. 최저생계비 수준의 소득 지원으로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오히려 사회 취약계층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리고, 신자유주의적 조처들과 일부 연결될 가능성이 엿보이지만 그들은 이런 문제 제기에 솔직하게 답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자본가들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데에서 후퇴해 ‘일률적 현금지원’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일자리 확충과 사회보장제도 개선 요구에 대해 기본소득이면 충분하다고 답하는 것이다.
노동의 본질이 변하고 있다는 가정은 불안정 고용과 임금 삭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나 기술 발전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와 불안정 고용의 확대는 자연스러운 것도, 불가피한 것도 아니다. 노동자들은 이런 변화 속에서도 자신들의 조건을 지키기 위해 싸울 수 있고, 또 일부는 싸우고 있다.
기본소득은 세계적 경제 침체와 신자유주의가 낳은 폐해를 해결하고자 하지만, 그 원인인 지배자들의 공격에서 눈을 돌리고, 맞서 싸우지 않으려 한다. 기본소득은 계급 불평등과 권력 구조를 문제 삼지 않는다. 현 상황에 도전하기보다 받아들이고 적응하라고 한다. 기본소득이 노동자들에게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노동자들은 일자리 보장, 임금 인상, 사회 보장 확대 등을 요구하는 경제적·정치적 투쟁에 집중해야 한다. 또한 제대로 된 실업급여, 충분한 연금과 아동수당,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등을 요구해야 한다.
전국민고용보험 vs 기본소득?
박원순 시장은 기본소득보다 전국민고용보험이 시급하다며 이재명의 기본소득안에 제동을 걸었다. 당장 실업에 빠진 사람들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재원이 한정돼 있다는 이유에서다.
재원이 한정돼 있다는 주장은 우파와 기업주들이 좋아할 만한 얘기다. 물론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말 자체는 옳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기본소득은 그런 구실을 하지 못한다. 실업이나 미취업 상태의 사람들에게는 최저생계비도 안 되는 기본소득이 아니라 온전한 생계비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박원순 시장이 지지하는 전국민고용보험이 그런 구실을 할지는 의문이다. 그의 당인 민주당은 슬쩍 얘기를 꺼냈다가 주워 담았다. 오히려 한정애 의원은 20대 국회에서 제출한 안에 비해서도 한참 후퇴한 법안을 상정했고, 정부도 특수고용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배제하는 고용보험법 개정안을 개혁이랍시고 준비하고 있다. 또, 그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한다면 기본소득에 대한 박 시장의 비판도 그저 위선에 불과하게 된다.
사실 박원순 시장도 오래전부터 기본소득을 지지하고 자신이 앞장서 구현하려 한다고 주장해 온 사람이다. 그런데 갑자기 재원 문제를 이유로 기본소득과 전국민고용보험을 대립시키는 것은 경제 침체 상황에서 겨우 1년 반 뒤에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를 의식해 좀 더 온건한(‘합리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기회주의적 처신인 듯하다.
기본소득에 대한 잘못된 비판들
일부는 재원 마련에 한계가 있으므로 저소득층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로 개혁주의 정치인들이나 복지 연구자들의 입장이다. 저소득층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중상위층 노동자들에게도 지금보다 더 많은 복지가 제공돼야 한다. 자본가 계급에게는 그렇게 할 부가 충분히 축적돼 있다. 재원을 이유로 기본소득 도입에 반대하면 결국 다른 복지를 확충하자는 요구에 불리한 부메랑이 돼 돌아올 수 있다.
일부 급진좌파가 좌파적 기본소득론과 우파적 기본소득론을 구별하지 않고 싸잡아 비판하는 것도 잘못이다. 기본소득은 단지 복지 축소와 노동유인 증대를 위한 것이라거나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를 지지하는 것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좌파적 기본소득론은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해소”(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하기 위해, 복지를 늘리고 저질 일자리를 거부할 ‘자유’를 주자는 것이다. 이런 취지 자체를 왜곡하거나 모르는 체 해서는 진지한 토론이 불가능하다.
진정한 문제는 기본소득이 그 목적을 실현하는 데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기본소득론자들이 공유하는 잘못된 가정들은 노동계급의 저항 능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반면 지배자들의 공격은 과대평가해 노동자들을 무력감에 빠뜨리는 효과를 낸다.
급진좌파는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바에 공감하면서도, 이를 진정으로 성취하려면, 노동계급이 단결해 지배자들의 공격에 맞서야 함을 주장해야 한다. 또한 진정한 ‘자유’는 노동계급 전체가 자유로워질 때에만 얻을 수 있고, 따라서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와는 근본에서 다른 운영원리를 가진 사회를 건설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점을 설득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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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론에 대해서는 〈노동자 연대〉에 연재된 ‘4차 산업혁명이 노동의 미래를 바꿀까?’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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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멀게는 16세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좌파에서 중도우파까지 폭넓은 지지를 받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기본소득 지급이 얼마나 ‘공정’한지, 사적 소유를 인정하면서도 공유부를 나누는 일이 왜 필요한지 등을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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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는 현물급여와 현금급여로도 나눌 수 있는데, 현물급여는 의료나 교육, 보육 등이 해당된다. 사회서비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물급여는 사회보험 방식을 택한 나라들도 많고 조세를 기반으로 운용한 나라들도 많다. 현금급여는 연금과 실업급여, 그리고 각종 ‘수당’들이다. 연금과 실업급여는 사회보험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고 저소득층이나 사회 취약계층의 경우 공적부조 형태로 제공된다. 1930년대에 스웨덴에서 아동수당을 현물급여로 할 것인지 현금급여로 할 것인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은 유명하다. 현물급여로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한 측은 부모를 믿을 수 없다는 이유를 핵심 근거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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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스스로를 샤를 푸리에 그룹으로 부른 것은 의미심장하다. 푸리에는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비판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착취를 최소화할 수 있는 공장에 관한 비전을 신문에 광고하고 이에 관심있는 부르주아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카페에서 평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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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벤토스는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책담, 2016)의 저자로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현 경기도지사)과 이한주(현 경기연구원장)가 공동번역해 소개한 바 있다. 라벤토스는 기본소득스페인네트워크의 대표로 가이 스탠딩, 필리페 판 파레이스 등과 함께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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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진 (2018). 기본소득은 미래 사회보장의 대안인가? 한국사회정책, 25(1), 4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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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100분 토론. 2020년 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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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상대적 박탈감? 근로의지 저하?” 청년기본소득에 대한 청년들의 오해와 진실 https://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7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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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기준 기초생계급여는 1인가구 52만 7158원, 2인가구 89만 7594원, 3인가구 116만 1173원, 4인가구 142만 4752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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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훈 (2019). 《기본소득의 경제학》. 박종철 출판사,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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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재는 2015년 한샘 명예회장 조창걸이 설립한 싱크탱크로 중도 우파 성향의 연구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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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외(2018). 기본소득제의 가능성과 입법화 방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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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성 (2017). 안심소득제의 효과. 勞動經濟論集, 40(3), 5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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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은 (2018). 기본소득에 관한 다양한 제안의 평가와 과도기적 기본소득의 제안: 청장년 근로시민 기본소득이용권. 보건사회연구 38(2), 10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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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스탠딩은 이를 “지나친 일반화”이고 “많은 일자리가 결코 특권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특정 일자리와 직업, 특히 제한적 일자리와 직업은 지대소득을 낸다고[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해 여지를 남겨뒀다. 기본소득의 옹호론자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주장에 동의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거의 예외없이 상대적 고소득 노동자에게 추가로 세금을 부과하는 데에는 아무 거리낌이 없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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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al Basic Income : reason to be cheerful or no go central?’, International Socialism Journal, 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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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당의 안은 모든 사람에게 60만 원을 지급하는 것이므로 노인, 장애인, 아동에 대한 지원이 대폭 늘어나는 효과를 내기는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토지보유세 등 부유세뿐 아니라 근로소득의 15퍼센트를 추가로 징수하고, 탄소세 등 간접세를 도입하겠다고 하는 것에서 보듯 노동계급 내의 상당부분도 추가 부담을 지도록 설계돼 있다. 당연히 이는 노동계급 내 상당수의 반발을 살 것이다. 그럴 것이 아니라 기초연금, 아동수당, 기초연금을 그만큼 인상하면 효과는 같으면서도 이토록 큰 증세가 필요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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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성 외 (2018). 《기본소득이 온다 – 분배에 대한 새로운 상상》. 사회평론아카데미,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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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al Basic Income : reason to be cheerful or no go central?’, International Socialism Journal, 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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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WAR SHAIKH (2003), Who Pays for the “Welfare” in the Welfare State? A Multicountry Study. SOCIAL RESEARCH, Vol. 70, No. 2 (Summer 2003). 53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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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 급여의 기준이 되던 ’최저생계비’는 당국의 자의적 판단을 기준으로 정해진다는 비판이 거듭돼 2015년부터는 ’기준 중위소득’을 적용하도록 법령이 개정됐다. 생계급여는 기준 중위소득의 30퍼센트(2020년 1인 가구 기준 52만 원) 이하인 사람에게 소득이 52만 원에 비해 모자라는 만큼 지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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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제안하는 완전기본소득(안)은 모든 개인에게 매달 중위소득 30퍼센트에 해당하는 현금을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는 방안이다. 현재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생계급여에 해당한다.” 김교성 외, 《기본소득이 온다 – 분배에 대한 새로운 상상》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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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장려세제는 연소득이 2000만 원 이하인(단독가구 기준) 노동자들에게 2000만 원에서 부족한 액수의 일부를 지원하는 제도인데 임금 노동을 하는 경우에만 지급한다. 이 제도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소득을 지원하는 구실을 하지만 사실상 인건비 지급 여력이 없는 기업주들이 사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그 결과 저임금 일자리를 유지하는 구실을 한다는 비판이 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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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Choonara (2019). 《Insecurity, Precarious Work and Labour Markets - Challenging the Orthodoxy》.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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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영(2017) 《오늘날 한국의 노동계급》 279~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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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민 (2020).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 지금 바로 기본소득》. 동아시아,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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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책. 143~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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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책.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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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책.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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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 Desjardins, ‘How the Tech Giants Make Their Billions’, 2019.3.29 https://www.visualcapitalist.com/how-tech-giants-make-bill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