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프리드먼은 왜 헬리콥터로 돈을 뿌리자고 했을까》:
기본소득으로 경제가 살아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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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세계 주요 국가들은 대규모 양적완화 정책을 펼쳐 왔다.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이 직접 시중의 채권이나 증권 등을 사 들여 통화량을 늘리는 정책을 말한다. 기준금리 인하를 통해 시중에 통화량을 늘리는 정책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각국 중앙은행이 통상적이지 않은 통화 정책으로 시중에 돈을 푼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은행과 기업들에게 돈을 푸는 정책은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세계 각국에서 양극화만 심해졌다.
《프리드먼은 왜 헬리콥터로 돈을 뿌리자고 했을까 ─ ‘모두’를 위한 양적 완화 옹호론》은 기존의 양적완화라는 “대실험”은 “실패”했다고 비판한다. 그 대안으로 “‘모두’를 위한 양적 완화”를 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책의 저자 프란시스 코폴라는 영국의 은행 등 금융권에서 일해 왔고, 금융 관련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코폴라는 양적완화의 실패 이유가 “중앙은행이 실물 경제를 직접 상대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즉, “중앙은행은 단지 은행과 금융 시장만을 상대”하고 “중소기업이나 가계를 직접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앙은행은 양적완화를 통해서 더 많은 돈을 경제에 퍼부었지만 정부는 오히려 긴축 정책을 통해서 돈을 경제에서 빼냈다.” 이 때문에 기업과 은행은 파산을 피했지만, 이들은 위험 부담을 피하기 위해 실물 경제에 투자하지 않았다. 따라서 경제는 성장하지 못했고,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그래서 코폴라는 두 가지 방향의 정책을 통해 “‘모두’를 위한 양적완화”를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사람들에게 직접 돈을 나눠 주는 것이다. 이는 기본소득을 주자는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만약 중앙은행이 직접 평범한 사람들의 계좌로 돈을 넣어 주거나 정부가 이들에게 돈을 나눠 준다면, 이들은 소비를 늘릴 것이다. 생활의 필요를 위해 상품을 구매하거나 부채를 갚아 소비 여력을 늘릴 것이라고 코폴라는 설명한다.
밀턴 프리드먼은 1930년대 대공황이 통화량 부족 때문이었다며, 위기를 타개할 최후의 수단으로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듯 사람들에게 돈을 줘야 한다고 했다. 프리드먼은 신자유주의 추진에 앞장선 우파 성향의 통화주의 경제학자로 악명이 높지만, 오늘날 코폴라와 같은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도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통화 정책을 옹호하며 프리드먼의 “헬리콥터 머니” 주장을 주목한다. 코폴라가 책 내용에서 ‘프리드먼’을 거론한 이유다.
둘째는 정부가 직접 공공투자를 늘리거나 중앙은행이 민간기업(특히 중소기업)에 투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부와 중앙은행이 직접 경기를 부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돈은 세금을 더 걷지 않더라도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중앙은행이 평범한 사람들을 지원하고 국가에 돈을 조달해 주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중에 돈을 풀면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한다. 그러나 주류 경제학자들의 우려와는 달리 지난 10년간 은행을 위한 양적완화가 추진됐지만 인플레이션은 벌어지지 않았다. 코폴라는 지금 당장 디플레이션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을 걱정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지적한다.
또 코폴라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신화는 중앙은행이 민주적 통제를 피하고자 내세우는 것일 뿐이라고 꼬집는다. 은행을 위한 양적완화와 같은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독립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는 것이다. 코폴라는 중앙은행과 정부가 함께 경제 성장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코폴라의 제안은 분명 평범한 사람들에게 재정 지원을 하는 등 노동계급의 삶을 개선하는 것을 통해 경제 위기도 끝낼 수 있다는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일 테다. 그러나 이 책의 주장에는 심각한 약점이 있다.
화폐의 본질
코폴라의 주장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현대화폐론과 많이 닮아 있다. 현대화폐론은 화폐의 가치는 결국 국가의 힘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보고, 인플레이션이나 국가의 파산을 두려워하지 말고 돈을 찍어서 재원을 충당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화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묘사하는 것일 뿐 화폐 가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지는 못한다.
마르크스는 화폐가 표현하는 가치의 본질은 인간의 노동에서 나온다고 밝힌 바 있다. “화폐는 종류가 다른 노동생산물이 실제로 서로 동등시되고, 따라서 상품으로 전환되는 교환과정의 필연적 산물이다. … 따라서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환되는 것에 발맞추어 특정상품이 화폐로 전환된다.”(《자본론》 1권 상, 김수행 옮김, 114쪽)
물론 현대의 화폐는 더는 금이나 은에 기반한 태환화폐가 아니라 국가의 권위에 기반한 불태환화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 전체에서 화폐가 표현하는 가치는 실제 생산과정에서 생산된 총 가치량(즉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국가의 발권력이라는 것도 국가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가치 생산 과정에 의해 제약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와 금융시장에서 화폐가 공급되는 만큼 생산과 수요(민간소비이든 기업의 투자이든)가 충분히 늘지 않는다면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벌어질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중요하다. 만약 화폐의 가치가 생산과 별개로 결정된다고 본다면 가치의 생산과 분배를 둘러싸고 노동자와 자본가 간에 왜 이렇게 치열한 계급 투쟁이 벌어져 왔는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화폐만 공급한다면 만사가 해결될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폴라가 자본주의 생산의 문제를 간과하는 것은 경제 위기 원인과 대안을 둘러싼 주장의 약점으로도 이어진다. 코폴라는 경제 위기가 수요 부족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케인스주의의 관점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소비를 부양하고 국가와 기업이 실제 투자를 늘리는 방향으로 화폐 투입이 이뤄지면 경제가 성장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실제 경험을 보면 정부의 지출을 통해 소비와 투자를 늘리는 방안도 경제를 성장 궤도로 올려 놓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일본은 지난 20여 년간 대규모 적자 재정 정책을 펴며 경기를 부양하려 해 왔다. (이 때문에 국가 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230퍼센트에 달한다.) 그럼에도 지난 20여 년간 일본의 경제 성장은 저조했다.
그 이유는 정부의 투자가 기업들의 이윤율을 높여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기업의 투자 의욕은 이윤율의 수준에 영향을 받는다. 투자한 돈 대비 벌어들이는 이윤인 이윤율이 높으면 기업주들은 많은 돈을 빌려 투자를 늘리겠지만 반대면 그러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 더 많은 이윤을 위한 경쟁적 축적 압력으로 기계 등에 대한 투자가 더 빠르게 늘어 왔고, 이로 인해 이윤율은 장기적으로 저하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재정 투입이든, 중앙은행의 발권력이든, 소비와 투자를 보조하는 것으로는 일시적으로 경기를 부양하거나 위기의 심화를 지연시킬 수 있을 뿐 이윤율이 저하하는 경향 자체를 되돌리지 못한다. 그래서 이윤율은 2008년 위기 이후 과거보다 더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고 이 때문에 경제의 장기 침체가 이어져 온 것이다.
현 위기의 원인은 밀튼 프리드먼이 말한 통화 부족도, 코폴라 등 케인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수요 부족도 아니다. 이것들이 위기의 현상일 수는 있지만 말이다. 위기는 생산 과정의 이윤율 저하에서 비롯했다. 정책 입안자들이 펼치는 일부 정책이 아닌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 동학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이윤율을 조금이라도 만회하려고 노동자 해고, 임금 삭감, 복지 삭감 등 노동자 착취를 강화하려 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가 계속되는 한 이런 공격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코폴라는 “‘모두’를 위한 양적완화”라는 합리적 정책이 채택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다. 이렇게 되면 체제의 근본에 존재하는 계급 갈등을 보지 못하는 약점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을 늘리기 위한 정책이 채택되게 하기 위해서도 노동계급의 운동이 전진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더불어 노동운동은 자본주의 체제의 성장이나 안정이 아닌 노동계급의 필요를 위해 생산하는 체제로의 혁명적 전환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