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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복지:
복지 확대를 위한 좌파적 대안

[편집자] ‘자본주의와 복지’ 연재의 마지막은 앞선 논의들을 정리하고 복지 확대를 위한 좌파의 대안과 주요 요구들을 다룬다.


① 무상복지가 경제 위기를 낳는다?

② 사회투자국가론과 제3의 길

③ 보편적 복지와 고전적 사회민주주의

④ 복지국가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⑤ 좌파적 대안

이 연재에서 그동안 우리는 실질적인 무상 복지를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들이 무엇인지 살펴봤다. 유럽 복지국가들과 한국에서의 경험을 근거로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실질적으로 복지를 대폭 확대하려면 일정한 수준의 물질적 조건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 자본주의가 그런 조건에 도달한 지는 오래됐다. 경제가 위기임에도 한국의 1천대 기업은 2010년 한 해에만 1백30조 원이 넘는 순이익을 냈다. 이것만으로도 최근 거론되는 무상복지를 모두 당장 시작할 수 있다.

또 이 돈이 적절히 투자되기만 한다면 공공서비스 부문과 각종 소비재 산업 부문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대폭 늘릴 수 있다. 복지 확대 요구를 두고 “미래 세대에게 빚을 지울 것”이라거나 ‘경제 위기를 불러올 것’이라고 하는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2008년 메이데이 - 복지확대를 요구하며 행진하는 노동자들 무상복지를 실현하려면 노동자들이 이 운동의 핵심세력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오히려 유럽 복지국가들에서는 복지 지출이 가장 많이 늘어나던 시기에 경제도 빠르게 성장했다. 심지어 일부 자본가들조차 보편적 복지 확대가 “최고의 장기 투자”라며 환영했다.

둘째, 그렇다고 자본가들이 복지 확대를 위한 재원을 스스로 내놓은 적은 없다. 복지 확대에 가장 관대하던 시절에조차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려 애썼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 뒤에 누린 장기 호황이 끝난 1970년대 이후 후자의 경향이 강화됐다. ‘장기 투자’는커녕 당장 일 년 앞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투자보다 수중에 자본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생존 대책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의 계급투쟁, 즉 ‘신자유주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근본적인 동력

이 과정이 단순하지는 않았다. 계급투쟁의 부침에 따라 복지 수준도 부침을 겪었다. 영국 노동자들이 커다란 패배를 겪은 1980년대에 영국의 복지 제도는 대폭 후퇴했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1990년대 중반에 정부의 공격에 맞서 기존의 복지제도를 지켜냈다. 한국에서는 노동계급이 눈을 뜬 1987년을 전후로 각종 복지 제도들이 만들어지고 안착됐다.

따라서 지금 같은 경제 위기 시대에 복지를 확대하려면 아래로부터의 강력한 노동자 투쟁이 필요하다.

셋째, 유럽 복지국가들에서 개혁주의적 노동자 정당(사회민주주의 정당)은 복지국가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하지 못한 곳에서도 노동자 투쟁이 성장하던 곳에서는(예컨대 북미 지역에서) 다양한 복지 제도들이 도입되고 확대됐다. 물론 이런 투쟁과 더불어 대중적 노동자 정당이 성장하고 집권한 유럽에서 복지 제도의 발전이 훨씬 안정적이었다.

결국 일반화하자면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집권보다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이 복지국가가 만들어지는 데 더 근본적인 동력이었다. 무엇보다 이 정당들의 성장과 집권 자체가 노동자 투쟁의 성장과 급진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또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노동자 계급의 바람과 그 투쟁의 결과를 단순히 반영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복지국가 형성기부터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노동자 투쟁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에서 집권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국가가 제공하는 보편적 복지 제도를 대대적으로 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정당들의 성장과 집권이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고무했다.

이 점에서 오늘날 진보진영 내 일부 좌파 활동가들이 민주노동당 등 개혁주의 노동자 정당의 성장과 부침에 대해(예컨대 진보대통합 논의 등에 대해)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른 한편에서 집권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경제 성장과 복지 확대의 우선 순위를 두고 끊임없이 동요했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도전하지 않으려 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에게 선택의 폭은 넓지 않았다.

오늘날 많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수용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복지국가가 만들어지던 시기에도 자본가들과의 타협을 ‘어렵게 만드는’ 노동자 투쟁을 가로막음으로써 근본적인 계급 세력 균형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점에서 진보진영 내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선거에서의 성과만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태도도 잘못이다. 민주당과의 동맹은 선거에서 일정한 성과를 내는 데는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개혁을 성취하기 위한 노동자 투쟁을 건설하는 데는 걸림돌이 될 것이다. 민주당은 말과 달리 실천에서 복지(노동자 계급의 이익)보다 경제 성장(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집권 시절뿐 아니라 지금도 민주당은 한미FTA에 일관되게 반대하지 않고 비정규직 대책에도 소극적이다.

앞서 내린 결론들에 비춰 오늘날 한국에서 복지 확대를 위한 요구는 첫째, 많은 노동자들이 그것을 실질적 개선이라고 여길 만한 것이어야 한다. 민주당과의 초계급적 동맹을 위해 진보정당들과 노동조합의 대안을 민주당이 수용할 만한 수준으로 후퇴시킨다면, 노동자들은 그것을 위해 투쟁에 나서려 하기보다는 수동적 지지에 머물 것이다. 이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복지 확대를 위한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대리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마치 엔진이 고장난 자동차처럼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되레 노동자 투쟁을 기성 정치의 논리에 종속시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둘째, 노동자들을 광범하게 단결시키는 요구를 제시해야 한다. 그 점에서 정규직 양보론을 수용하는 ‘사회연대전략’이나 노동자가 보험료·세금 인상을 수용해야 한다는 ‘건강보험하나로운동’, ‘보편적 증세론’ 등은 문제가 있다. 이런 요구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사기에 악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투쟁의 힘을 약화시킨다.

셋째, 다른 모든 거대한 사회 개혁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복지 개혁 과제를 실현하는 데서도 누가 중간계급의 지지를 끌어내는가 하는 점은 중요하다. 특히 이들의 지지 여부가 선거에서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과도적 요구

그러나 이들의 지지를 끌어내려면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하나는 이런 개혁이 자신들에게도 이익이라는 사실을 보여 줘야 한다. 기업주·부자 들에게서 재원을 마련하는 ‘보편적’ 복지 확대 요구는 이런 조건을 만족시킨다. 거꾸로 보편적 증세 같은 대책은 오히려 이들도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다른 하나는 그것이 실제로 이뤄질 수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 그러려면 단지 노동자 정당의 성장뿐 아니라 실제로 기업주·부자 들의 저항을 물리칠 힘을 가진 노동자 투쟁이 강력해져야 한다.

실현 가능하면서도 노동계급을 단결시키는 요구들은 더 광범한 계급투쟁을 고무한다. 이런 요구들을 내걸고 단결할 수 있을 때 노동자들은 훨씬 잘 싸울 수 있다.

그리고 그 투쟁이 커지고 실현가능성이 높아질수록 노동자들의 요구는 확대·발전할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모든 거대한 노동자 투쟁에서 발견된 보편적 사실이다.

일부 좌파는 최근의 복지국가 논의가 계급적 불만을 체제 내 개혁으로 수렴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런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대중에게 필요한 복지가 충분히 보장되려면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원리로 운영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기업의 이윤이 아니라 대중의 필요에 따라 생산하고 분배하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체제에서만 이런 일이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복지국가를 쟁취하려는 요구와 운동은 반자본주의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 복지 확대 요구가 부분적이나마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반자본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 속에서, 복지 확대 요구는 자본가들의 이윤 확대 요구와 충돌한다.

변혁적 좌파의 과제는 이 운동이 그런 충돌 속에서 자신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이 근본적 변혁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그 둘 사이에 가교 구실을 할 과도적 요구들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레프트21〉은 창간 당시부터(2009년) 그런 요구들이 필요하다고 제기해 왔다. 비정규직 정규직화,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보육, 기초노령연금 확대, 최저임금 인상(평균임금의 50퍼센트), 실업급여 인상, 청년실업 해소, 무상임대주택 확대 등이 그런 요구들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재원 마련 방법으로 제시돼 온 ‘부자 증세’도 필수불가결한 요구다.

최근 참여연대, 민주노총, 다함께 등 4백2개 단체가 함께 만든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연석회의’도 ‘부자 증세를 통한 복지 예산 확대’ 요구를 내걸고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이런 기구들이 기층의 운동을 성장시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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