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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공개
신자유주의와 한국 노동계급 상태 논쟁
민중주의와 전지윤 정치 비판

목차

1부 한국 노동운동의 문제들 ― 민주노총 투쟁 평가를 둘러싸고

  • 전략적 야권연대의 바탕에 깔린 이데올로기
    민중주의란 무엇인가? _ 최일붕 [본문으로]
  • 마르크스주의 핵심 원칙,
    꿰어 맞추기와 절충으로 누더기가 되다 _ 최일붕 [본문으로]
  • 2015년 노동자 투쟁에서 민중주의 vs 계급정치 _ 김하영 [본문으로]
  • [지난해 노동자 투쟁] 우리의 예측이 어긋난 게 아니라 바램에 조금 못 미쳤을 뿐
    올해도 투쟁을 계속된다 _ 김하영 [본문으로]
  • 전지윤은 기회주의적 처신을 중단해야 한다 _ 최일붕 [본문으로]

2부 전지윤의 포퓰리즘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비판

  • 신자유주의와 노동계급의 잠재력 _ 강동훈 [본문으로]
    • 보론1: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 _ 강동훈 [본문으로]
    • 보론2: 민중주의적으로 곡해된 그람시 _ 김종환 [본문으로]
  • 민중주의 논쟁: 민중주의 정치의 문제들 _ 김문성 [본문으로]
  • 지난해 노동자 투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_ 최영준 [본문으로]
    • 보론1: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의 ‘공적연금 강화’는 어떤 내용인가? _ 장호종 [본문으로]
  • 부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한반도 주변정세 인식 _ 김영익 [본문으로]
  • 유물변증법 vs 실증주의: 전지윤의 방법 _ 최일붕 [본문으로]
    • 부록1: 진보당 당권파의 경선 부정은 없었는가? _ 김아무 [본문으로]
    • 부록2: 전지윤과 변혁재장전은 책임성과 자기인식부터 길러야 _ 김인식 [본문으로]

전략적 야권연대의 바탕에 깔린 이데올로기
민중주의란 무엇인가?[1]

최일붕

총선이 다가오자 전략적 야권연대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략적 야권연대는 ‘민중주의’를 바탕으로 한 점진적 집권 전략이다. 민중주의는 국민 가운데 한줌밖에 안 되는 반민주적·비애국적 무리를 제외한 나머지가 계급을 초월하여 단결해, 그 반동적 극소수를 권좌에서 몰아내자는 사상이자 운동이다. ‘반동적 극소수’로 지목되는 집단은 독재 잔당과 ‘공안세력’, 냉전주의자, 재벌 등이다. 민중주의자가 즐겨 내놓는 구호는 “각계각층이 단결”, “국민과 함께하는” 등이다.

민중주의는 ‘포퓰리즘’이라는 외래어의 순화어 중 하나다. 다른 순화어는 ‘대중영합주의’이다. 대중영합주의는 최상위 엘리트 계층의 정치인이 마치 자신은 엘리트층의 정치인이 아닌 양, 심지어 엘리트층에 반대하는 체하면서 대중에게 영합하는 꼼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글에서는 뉘앙스를 고려해 민중주의와 대중영합주의를 구별하기로 한다. 즉, 민중주의는 진보 성향이고, 대중영합주의는 보수 성향인 것이다.

유럽에서는 경제 위기와 긴축 재정을 틈타 우익 대중영합주의 정당이 등장해 활동하고 있다. 영국의 영국독립당(UKIP), 네덜란드의 자유당, 덴마크의 국민당 등이 그것이다. 이 당들의 핵심 정책은 이민자에 대한 인종차별로, 이 점에선 파시스트 정당과 유사하다. 그러나 우익 대중영합주의는 파시즘과 차이점이 있다. 그 차이점은 파시즘이 의회 민주주의와 모든 노동자 단체를 분쇄할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민중주의는 제3세계의 역사적 경험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글의 관심사는 우익 포퓰리즘이 아니다. ‘진보’와 민족 자주를 표방하며 활동하는 종류의 포퓰리즘이 우리의 관심사다.(‘진보적’이라는 말 자체가 이제는 민중주의를 의미하는 말이 돼 버린 듯하다.)

민중주의는 외세의 지배와, 그와 결탁한 한줌의 부패한 기득권층의 지배를 경험한 신흥국의 노동운동에서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일제 식민지, 외세(미국과 소련)에 의한 민족 분단과 전쟁, 외세(미국)가 후원한 독재 정권과 재벌의 지배 등 한국 현대사의 특성들 때문에 한국 민중과 노동계급 대중의 정서 속에는 민중주의적 경향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민중주의는 흔히 진보적 민족주의 경향을 띤다. 진보적 민족주의의 핵심 강령은 남북한 화해 협력과 궁극적 통일이다.

민중주의의 순차적 물결

민중주의 운동의 성격과 형태, 생존 능력은 시기와 조건에 따라 매우 달랐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러시아와 미국에서 민중주의 운동은 아예 농민에 기반을 뒀다. 제정 러시아의 민중주의 농민 운동은 나로드니키로 불렸고, 테러리즘 전략과 선거 전략을 결합해 추구했다.

미국의 민중주의 농민 운동은 경제 정책 ─ 특히 곡물 가격 문제와 재벌(conglomerate, 거대복합기업) 개혁 문제, 은행 규제 문제를 놓고 수립되는 ─ 에 영향을 미치려 애썼고, 민중당(이하 서양사학계에서 통용되는 인민당으로 표기)을 창립해 지역에 따라 민주당이나 공화당과 제휴했다. 1894년 철도 파업 이후, 인민당의 일부는 파업 투쟁으로 등장한 노동운동가들과 연계하고 나중엔 다른 사회주의자들과도 연계해 미국 사회당을 창당한다.

러시아와 미국의 민중주의는 제1차세계대전을 앞뒤로 해서 일어난 거대한 노동계급 투쟁, 특히 러시아 혁명과 서구 혁명에 밀려 완전히 주변화됐다.

1930년대 대불황기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 시기

민중주의의 두 번째 물결은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었다. 유럽의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민중주의는 민중전선(인민전선)이라는 가장 완성된 형태로 등장했다.

민중전선은 스탈린주의자들의 전략이다. 이 전략은, 드러내놓고 친자본주의적인 정당과 선거로 연립정부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이다.

민중전선은 선거라는 면에서 보면 흔히 성공적인 방침일 수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 정당과의 협력을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않는 한은 노동자 운동을 고무하는 효과도 낸다.

하지만 노동자 투쟁의 수위가 자본가들의 우려를 자아낼 수준으로 상승할 것 같으면 민중전선은 노동자 운동을 억압하는 효과를 낸다. 한국에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국면에서 일어난 사회보험노조와 롯데호텔 노조 파업이 NL계열의 싸늘한 냉대를 받은 것이라든지, 이듬해 단병호 위원장이 7월로 예정된 민주노총 파업을 취소한 것, 그리고 최근에 다수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총선을 의식해 새정치연합-더민주당 (일부) 의원들과 공조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바람에 현장조합원들은 동원 해제 상태에 있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 민중주의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 아르헨티나 후안 페론의 집권 초기처럼 꽤 성공을 거둔 경우도 있다. 페론은 주요 기업을 국유화하고, 노동자에게 복지 혜택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는 강압적으로 노동조합을 국가에 통합시켰고,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찬양하면서, 파시스트 전범들의 아르헨티나 이주를 환영하는 등 모순투성이 정책들을 펼쳤다.

한편, 멕시코의 라사로 카르데나스는 집권 중이던 1938년 멕시코혁명당을 설립해, 멕시코 혁명(1910~1920)의 유산을 이어받는 정당임을 표방했고, 집권당으로서 트로츠키의 망명을 허용하는 등 매우 좌파적인 자세를 취했다. 트로츠키의 망명은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같은 국가들도 거부하고 있었다.

라사로 카르데나스의 아들 콰우테목 카르데나스는 1988년 당(멕시코혁명당의 후신인 제도혁명당)을 탈당해 야당인 새로운 민중주의 정당 민주혁명당 PRD를 설립했는데, 이 당은 이후 멕시코판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됐다.

1949년부터 1979년까지

민중주의가 가장 성공적이던 시기는 민족 해방 혁명이 성공을 거두던 시기였다. 중국 혁명부터 쿠바 혁명과 베트남 혁명을 거쳐 니카라과 혁명과 이란 혁명에 이르는 1949년부터 1979년까지가 그랬다.[2]

이 혁명들에서 노동계급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던 건 이란 혁명밖에 없었다. 이란 혁명에서도 민중주의는 초기에 노동자 운동을 자극했지만, 노동자 운동이 ‘쇼라’라는 민주적 노동자 권력 기관을 창출하며 이슬람 성직자(물라)들의 주도권을 침해하는 듯하자, 물라들은 노동운동을 억제하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아예 분쇄하는 지경으로까지 나아갔다.

1994년부터 지금까지

1994년 멕시코 치아파스 주에서 봉기한 사파티스타는 최근의 민중주의 물결의 효시를 나타낸다. 사파티스타는 혁명적인 민중주의 세력이었다. 같은 해 남아공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이하 ANC)가 선거로 집권한 것도 민중주의의 쇄도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동시에, 그 이후 20여 년간의 ANC 집권은 혁명적인 종류의 민중주의조차 그 계급 협력주의로 인해 결국에는 개혁주의의 성격을 띠게 됨을 잘 보여 준다.

2013년에 작고한 베네수엘라 전 대통령 우고 차베스와 현 볼리비아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도 최근 민중주의 물결의 일부라 할 수 있고, 스페인 포데모스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 포데모스의 주요 간부들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등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근거한 민중주의를 지지한다.

오큐파이(점거하라) 운동도 민중주의의 최근 사례다. 미국 오클랜드의 오큐파이는 달랐지만 말이다. 거기서는 부두 노동자 등 조직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오큐파이 운동이 벌어졌다.

노동자 운동 안의 민중주의

한국 민중주의의 대표적 사례는 ‘자민통’ 계열(이하 자민통계), 참여연대 등 진보적 NGO들 그리고 정의당 등이다. 물론 정의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기도 하다. 스탈린주의 운동인 자민통계는 좌파적 민족주의 경향의 일부 ─ 핵심적 일부 ─ 이지만, 좌파적 민족주의자가 모두 자민통계인 것은 아니다.[3]

민주노총 내 국민파·전국회의·중앙파 등도 민중주의적 경향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민중주의적 경향을 띤다.

노동운동 내의 민중주의는 남아공이나 브라질, 멕시코 등의 다른 신흥공업국에서처럼 중간계급과 ─ 때로는 지배계급 일부와도 ─ 계급 연합을 추구하는 경향을 말한다. 물론 노동계급은 중간계급의 일부를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중간계급 가운데 특히 영세 소농이나 영세 노점상, 철거민, 빈민 등은 노동계급의 적이 아니다. 그들은 흔히 노동자의 가족일 뿐 아니라, 그들의 일부는 얼마 전까지 노동자였다가 실직한 사람이거나 경기가 좋아지면 다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족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작은 사업을 운영하는 처지이기가 쉽다.

그러나 중간계급은 노동계급이 아니다. 전통적 중간계급의 전형은 소자영업자인데, 이들은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자본가 구실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게서 임금을 받는 노동자 구실을 하는 이중적 처지에 있다. 스스로 자산을 소유하므로 자본가들에게 동질성을 느낄 수도 있지만 스스로 일하므로 노동계급에게 동질성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런 모순 때문에 구 중간계급은 양대 계급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유동적이다. 오락가락과 유동성이 중간계급의 핵심 특징이다.

중간계급에는 이른바 ‘신중간계급’이 포함된다. 이 집단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등장했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자본가가 직접 사업장을 운영하고 노동자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기업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자본가는 자기 대신 사업장을 운영할 특별한 임금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사업장 내에 경영직·관리직 등 관료층이 형성됐다.

이 관료층의 최상층은 자본가 계급과 뒤섞이게 된다. 반면 관료층의 최하층은 겉보기로는 노동계급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이 계층에는 매우 모순된 처지에 있는 각양각색의 인자들이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창출하고 체제를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산적 구실을 하기도 하고, 노동자들을 더 심하게 쥐어짜고 단속하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계급투쟁이 일어나면 이 집단도 양대 계급 중 어느 한쪽으로 이끌린다. 노동자 투쟁이 강력할수록 이 계층 하층의 일부 사람들은 노동자 편으로 이끌릴 가능성이 커진다. 엥겔스는 1848년 혁명 중에 프랑스 “중간계급이 견해가 엄청나게 자주 바뀐다”면서 이렇게 썼다:

“프티부르주아지는 중재자 구실을 하며 비참한 역할을 했다. … 그들과 임시정부는 몹시 갈팡질팡했다. 만사가 조용하면 할수록 정부와 프티부르주아지는 대 부르주아지 쪽으로 더욱 기울었다. 반면 상황이 격동하면 격동할수록 그들은 노동자 편을 들었다.”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의 관계 문제가 진정한 쟁점이다

지배계급이 자본주의 경제 위기의 대가를 노동계급에 떠넘기는 과정에서 중간계급의 일자리도 불안정해지고 복지 혜택도 감축된다. 게다가 노동자의 이웃 주민으로서 그들의 환경도 파괴를 당한다. 그래서 중간계급의 일부도 자본주의의 일부 효과들에 적개심을 품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중간계급 사람들은 개인주의적 해결책을 찾는 경향이 강하다: 승진, 창업, 귀농,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에서 그냥 뿔뿔이 낙오하기 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간계급은 반자본주의적 운동이 미칠 일부 영향에 대해서는 두려워하거나 우려한다. 왜냐하면 경제 위기 상황 속에서는 노동계급의 이익과 중간계급의 이익이 일부 상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임금이 상승한다거나, 노동조건 악화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 이뤄진다거나 하는 개혁이 자영업 계층에는 불리한 조건이 된다. 그래서 중간계급은 보수적이기가 쉽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이 중간계급의 더 많은 부분을 끌어당길 방안은 계급투쟁 역량과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려면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급 이해관계를 확고하게 추구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중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태도가 확연하게 준별되며 심지어 충돌한다. 민중주의자는 노동계급의 고유한 이해관계를 고집하지 말고 중간계급의 이해관계와 조율하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노동운동 안팎의 민중주의자들은 지난해 봄 전면에 불거진 공무원연금 방어 문제를 회피하고 대신에 그 문제를 공적연금 강화 문제로 치환하려 했다.

결국 민중주의자는 계급투쟁과 노동계급 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민중주의자는 계급투쟁과 노동계급 투쟁이 부각되고 노동계급이 운동을 주도하면 민중이 내적으로 분열될 것이고, 운동 쪽으로 포섭될 잠재력이 있는 다른 사회세력을 내치는 효과를 낼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기우일 뿐이다. 오히려 노동계급이 민중 운동에서 주도권을 발휘할수록 민중도 더 강력해질 수 있다. 중간계급으로서는 사회적 권력과 집단적 힘과 규율을 갖춘 동맹을 갖게 된 셈이니까 말이다.

오히려 민중주의적 방식이야말로 민중을 이루는 계급들의 상이한 이해관계 때문에 결국엔 민중을 단결시키지 못할 것이다. 민중주의자가 그리는 단결한 민중이라는 이미지는 이상화된 것일 뿐이다.

이 소책자에 실린 김하영의 글 ‘2015년 노동자 투쟁에서 민중주의 vs 계급정치’는 노조운동가들 민중주의의 이러한 약점을 잘 보여 준다.

민중주의냐, 노동자주의냐?

민중주의는 경제 위기에 직면해서도 민중 운동이 계급투쟁으로 분화되지 못한 낮은 단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노동계급 측에서 말한다면, 노동계급 의식 발전의 초보적 국면을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2015년 말~2016년 초 몇 달 새 벌어진 민중총궐기는 박근혜 하에서 노동계급과 민중이 자신감 수준을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좋은 징조로 볼 수 있다. 아직은 그 수준이 파업 투쟁으로 자본주의 이윤 자체를 공격할 의지 수준으로는 상승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동시에,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소심함 때문에 파업 투쟁의 대용품으로 가두 항의가 활용됐다는 한계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이 모순을 봐야 한다. 전자를 보지 못하고 후자만 본다면 노동운동이 침체하고 있다는 그릇된 인상을 얻을 것이다. 후자를 보지 못하고 전자만 본다면 민중주의(그리고 그 계급 협력주의의 논리적 귀결인 개혁주의)에 대해 무방비 상태에 놓일 것이다.

사실, 한국의 노동운동가들은 노동조합 쟁점들을 다룰 땐 흔히 ‘노동자주의적으로’(즉,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의 전통에 따라) 사고하고, 사회적·국가적 쟁점들을 다룰 땐 민중주의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민중을 이루는 다른 사회계급들과 최소공배수적으로 계급 이해관계를 융합한다는 발상에 해당한다. 가령 공무원연금과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듯한 부문에서 활동하는 노동운동가들 가운데는 공적연금 강화라는 민중주의자들의 대안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다.

민중주의적 노동운동가들은 또한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에 민주노총 총파업을 직결시키는 방안을 원천적으로 배제했다. 총파업은 노동자들에 의한 계급 고유의 투쟁 방법이다.

사실, 자민통계는 지난해 초부터 민중총궐기를 추진했지만, 상반기 내내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4월 말 선제 파업과 이후의 공무원연금 투쟁 때문에 그 안(案)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무원연금 투쟁이 패배하고 7월 15일 민주노총 2차 파업이 존재감 없이 끝나자 민중총궐기안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자민통계뿐 아니라 국민파, 중앙파 간부들도 이제 “사회적 고립 자초할 총파업 얘기 그만하고 국민적 지지를 받을” 싸움을 하자며 민중총궐기를 강력히 제안했다. 이들의 생각을 잘 대변한 한 민중주의적 논평은 이렇게 주장한다:

“공무원연금 개악 등을 거치면서 민주노총의 줄어든 동력, 사회적 고립, 정파적 사분오열, 산업과 기업에 따른 부문주의는 거듭 드러났다. ‘노조 지도부가 국회 일정에 매달리며 계속 파업을 미루면서 동력이 사라졌다’는 좌파의 전통적 비판도 한상균 지도부의 1, 2차 선제파업을 거치면서 근거가 희미해졌다. … 파업의 동력이 충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노조 지도자들이] 계속 회피하며 그것을 사그라들게 만들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 민주노총의 부족한 동력과 사회적 고립을 볼 때 이 투쟁[민주노총 총파업]은 처음부터 승산이 높지 않았다.”

오히려 민중총궐기로 “저들[지배자들]이 결코 ‘진보당’으로 상징되는 저항운동의 뿌리를 제거하지 못했고, 여전히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2차 민중총궐기를 위한 토론에서도 민중주의자들은 ‘살인 진압 규탄과 민주주의 문제를 부각해 민주세력을 모아 내는 외연 확대를 기조로 범국민대회로 열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특히 ‘노동개혁’ 반대를 부각시키면 시민단체와 종교계 등의 참가가 어렵다며 민주노총에 기조 변경을 강력히(그러나 헛되이) 요구했다.

혁명적 오솔길

그런데 대다수 노동운동가들이 노조 쟁점들은 노동조합주의적으로 사고하고(때로 전투적일지라도), 더 폭넓은 정치 문제는 민중주의적으로 사고하는 식의 의식을 갖는 경향은 정치 투쟁과 경제투쟁의 역할 분담과 비슷하다.

그래서 이 과정에서 개혁주의 정당이 성장하기 쉽다. 개혁주의 정당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형식적 원리에 순응해, 노조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직접적 생활조건의 문제들을 다루고 개혁주의 정치인들은 개혁 입법 활동을 하는 식의 분업을 당연시한다.

이는 극히 이례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정치 운동에 노동자들의 경제적 힘(특히 파업 투쟁으로부터 나오는)을 사용하는 것을 선택 사항에서 배제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에 민주노총 파업이 동원되는 게 어불성설로 취급되는 분위기를 설명해 준다.

이런 정서가 보편화되면 범좌파 개혁정당이 대세가 된다. 그러나 경제 위기와 지정학적 위기라는 이중의 위기로 가느다랗게나마 급진적 조류가 노동계급과 청년·학생 속에 형성될 수 있다.

특히, 노동자들이 민중주의를 학습한 효과로서 계급 의식이 향상될 수 있음도 알아야 한다. 이 점은 엥겔스가 미국 인민당의 일부 투사들이 철도 파업 투사들과 만나며 사회주의 운동을 구축하기 시작하는 것을 흐뭇하게 보며 지적한 점이기도 하다.

민중주의의 진화 속에서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적 조류에게도 기회가 있는 것이다. 〈노동자 연대〉 신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민중주의의 일정한 진보성을 인정하면서도, 위에서 인용한 논평가처럼 기회주의적으로 그에 끌리지 말고 그보다 더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전망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목차로 돌아가기]

[1] 2016년 3월 2일에 발행된 〈노동자 연대〉 168호에 처음 실린 글이다. [본문으로]

[2] 중국 혁명에 대해서는 〈노동자 연대〉 168호에 실린 이정구의 ‘1949년 중국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었나?’를 보라. [본문으로]

[3] 자민통계의 민중주의적 성격은 〈노동자 연대〉 168호에 실린 김인식의 글 ‘민중연합당 창당에 부쳐’를, 정의당의 민중주의적 성격은 장호종의 글 ‘정의당 총선 공약 분석: 노동자와 중소기업, 두 마리 토끼 좇기’를 보라. [본문으로]

마르크스주의 핵심 원칙,
꿰어 맞추기와 절충으로 누더기가 되다[1]

최일붕

지난호에서 나는 ‘민중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2]에서 이렇게 썼다:

“자민통계뿐 아니라 국민파, 중앙파 간부들도 이제 ‘사회적 고립 자초할 총파업 얘기 그만하고 국민적 지지를 받을’ 싸움을 하자며 민중총궐기를 강력히 제안했다. 이들의 생각을 잘 대변한 한 민중주의적 논평은 이렇게 주장한다:

“‘공무원연금 개악 등을 거치면서 민주노총의 줄어든 동력, 사회적 고립, 정파적 사분오열, 산업과 기업에 따른 부문주의는 거듭 드러났다. ‘노조 지도부가 국회 일정에 매달리며 계속 파업을 미루면서 동력이 사라졌다’는 좌파의 전통적 비판도 한상균 지도부의 1, 2차 선제파업을 거치면서 근거가 희미해졌다. … 파업의 동력이 충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노조 지도자들이] 계속 회피하며 그것을 사그라들게 만들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 민주노총의 부족한 동력과 사회적 고립을 볼 때 이 투쟁[민주노총 총파업]은 처음부터 승산이 높지 않았다.’

“오히려 민중총궐기로 ‘저들[지배자들]이 결코 ‘진보당’으로 상징되는 저항운동의 뿌리를 제거하지 못했고, 여전히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2차 민중총궐기를 위한 토론에서도 민중주의자들은 ‘살인 진압 규탄과 민주주의 문제를 부각해 민주세력을 모아 내는 외연 확대를 기조로 범국민대회로 열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특히 ‘노동개혁’ 반대를 부각시키면 시민단체와 종교계 등의 참가가 어렵다며 민주노총에 기조 변경을 강력히(그러나 헛되이) 요구했다.

“[중략]

“〈노동자 연대〉 신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민중주의의 일정한 진보성을 인정하면서도, 위에서 인용한 논평가처럼 기회주의적으로 그에 끌리지 말고 그보다 더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전망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재인용된 논평가(이하 전지윤)가 필자와 노동자연대 단체 자체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3] 위 인용문을 쓰던 때 내가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한때 같은 단체에 있었던 사람들끼리 언쟁한다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쓰라린 심정이 묻어나는 볼멘소리까지 하면서 실명 인용을 하지 않았다고 항변을 했으므로 실명 토론을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전지윤은 2년 전[2014년 초] 우리 단체를 탈퇴하던 때부터 견지해 오던 정세 인식을 본질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논쟁 때 내가 그에게 제기했던 문제들도 고스란히 그대로다. 그 문제들은 전지윤이 과거와 현재의 한국 노동운동을 이렇게 대조할 때 잘 드러난다:

“이 나라 노동운동의 한 절정이었던 97년 노동법 개악 반대 파업은 사실 안기부법 개악 반대 파업이기도 했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를 통해서 노동계급의 눈귀를 막고 손발을 묶어서 밥그릇을 빼앗으려 했다. 당시 조직 노동운동은 전체 노동계급을 위해 이런 공격에 맞설 자신감과 투쟁력을 보여 줬다.

“하지만 지금 조직 노동운동은 노동개악 법안을 가까스로 막고 있는 처지이며, 테러방지법 통과는 막지 못한 상황이다. 굴복으로 마무리될 게 뻔한 민주당의 ‘무제한 토론’을 쳐다보는 우리의 가슴은 갑갑하기만 했다.

“조직 노동자들의 경제적 조건과 요구가 중요하고 우선이라는 협소한 관점을 넘어서야 한다. 이 체제가 만들어내는 모든 모순과 부조리, 불의에 맞서서 부문을 넘어선 전체 노동계급이 ‘무제한 투쟁’을 벌이는 미래를 향한 우리의 꿈은 꺾일 수 없을 것이다.”

위 인용문과 관련해서만도 적어도 다섯 가지 쟁점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1996~97년 민주노총 전면파업에 참가한 노조 지도자들과 평조합원들이 정말로 진지하게 안기부법 개악도 반대했다면 내가 그때나 지금이나 민중주의 문제를 갖고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나라 노동자들은 머리 왼쪽으로는 전투적 노동조합 운동 사상을 갖고 있고, 머리 오른쪽으로는 민중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 나는 이게 극복 불가능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구 노동자들도 머리 왼쪽은 먹고 사는 문제들에 관한 생각으로 차 있고, 오른쪽은 사회민주주의(요즘은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의 사회개혁 이슈들로 차 있다. 내 생각에 정치와 경제의 분리로 불리는 이 현상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관련 있는 듯하다.

둘째, 한국 노동자들의 민중주의 정치가 서구 노동자들의 사회민주주의 정치보다 좀 더 좌파적이고 투쟁적이라는 점이다. 전지윤은 이 나라의 노동계급과 그 운동의 상황에 맞지도 않는 일부 신(新)마르크스주의 이론들을 절충해,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을 조직 노동계급으로 환원하는 문제점을 지녔다는 둥 노동계급을 생산 과정에 현재 포함된 부분만으로 보았다는 둥 하는 주장을 한다. 이 글은 그런 ‘최신’ 유행을 놓고 토론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지금 여기’의 경험들에 관해 내가 아래에서 논술하는 바만으로도 전지윤의 주장이 현실과 실천 모두에 부합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나는 위 인용문의 전지윤 주장과 달리 20년 전의 한국 노동자들에 비해 지금의 한국 노동자들이 약화됐다거나 “사회적 고립”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지윤의 관찰은 단순한 인상에 불과하다. 백보 양보해 이 인상이 정확한 것이라손 쳐도, 영국 전교조(NUT) 조합원이자 사회주의노동자당(이하 SWP) 중앙위원이었던 고(故) 던컨 핼러스가 종파주의를 경계하며 한 말이 적절한 충고일 것이다. “작업장 투쟁이 아주 침체된 퇴조기에조차 노동조합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는 것은 종파적 태도이다. 투쟁이 가장 침체된 시점에서도 노동조합은 계급투쟁과 미약하나마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점에서 [개혁주의 정당들]은 그 상대도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해당 노조 지도자들이 온건하다 못해 보수 수구적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여전히 참말이다.

넷째, 나는 안기부법에 반대하는 것은 정치적이고 노동개혁에 반대하는 것은 “경제적 조건과 요구”를 둘러싼 투쟁(경제투쟁 또는 산업투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개혁을 강요하는 것이 정부라는 점에서도, 또 노동자들이 싸워야 하는 대상이 정부와 집권 여당과 의회 기구들이라는 점에서도, 그리고 이 저항이 성공하려면 노동자들이 계급 전체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점에서도 노동개혁 반대 투쟁은 정치투쟁이다.

다섯째, 전지윤의 꿈인 “부문을 넘어선 전체 노동계급이 ‘무제한 투쟁’을 벌이는 미래”는 우리의 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혁명적이거나 어느 정도 혁명적인 상황이다. 그런 상황이 시작되는 것은 노동계급의 일부분이나 다른 천대받는 사람들의 일부분에서다. 이를 건너뛰고 통속적 의미의 ‘정치적’ 요구와 ‘정치투쟁’을 물신화하는 것은 초좌파적 선전종파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

한국 노동계급의 상태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전망

이런 물음들을 염두에 두고 전지윤의 정세관을 살펴보자. 그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의 ‘종북’ 마녀사냥과 진보당 탄압 때문에 노동계급은 자력으로는 전진할 수 없다. 특히 조직 노동자들은 “사회적 고립”을 면치 못하고 있다.(그는 “조직 노동운동[이]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다”고 여러 글에서 강조한다.) 그런데도 우리 단체는 “노동계급의 귀환”을 “10년 가까이”[후주1] 마치 메시아 기다리듯이 헛되이 학수고대해 왔다고 한다. 전지윤은 이 상황을 돌파하려면 서로 연계된 두 가지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노동자뿐 아니라 광범한 민중이 대중적 민주주의 운동을 일으켜야 하고, 다른 하나는 민중연합당을 엄호해 진보정당을 재건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주도력(헤게모니)을 말하는 건 비현실적이다. 특히 이 지점에서 그가 “민중주의에 끌리”게 된다.

먼저, 한국 사회의 계급 구조와 근래 20년간의 사회운동 속에서 농민이 상당한 구실을 하는 것처럼 과장하는 것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농민에 대한 자민통계의 민중주의적 개념은 그 조류 출신자인 민경우 씨가 날카롭게 비판한 바 있다.) 빈민도 한국 사회 계급 구조 속에서 소수이고, 그나마 그들의 적지 않은 부분은 노동계급에 속하거나 이와 뒤섞인다. 아무튼 지난호 기사에서 나는 노동계급이 중간계급을 적대해선 안 되지만, 계급간 구분을 흐려 버려서는 안 되고, 그들의 모호한 민중주의 정치에 이끌려서도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전지윤은 지배계급의 일부와 동맹하는 것만 민중주의이지, 중간계급(들)과 동맹하는 건 민중주의가 아닌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민중주의의 핵심은 도시와 농촌의 중간계급(과의 동맹)이다.

노동계급은 실은 이미 귀환했다. 도대체 박근혜 취임 이래 지난 3년간 가장 치열하게 싸운 게 민중 가운데 누군가? 농민인가, 빈민인가? 물론 2013년 중엽에는 청·장년들도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에 항의하며 싸웠고, 2014년과 2015년의 중엽에는 청년·학생들도 세월호 참사에 항의했다. 하지만 박근혜의 공격이 집중됐고, 가시적 성과 면에서는 방어에 실패했지만 줄곧 치열하게 저항한 건 노동계급, 특히 민주노총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이었다: 전교조, 철도, 케이블통신, 삼성전자서비스, 택배, 건설, 조선, 공무원, 공공, 보건, 홈플러스 등등.

무엇보다 민중총궐기는 본질적으로는 노동자 투쟁이었다. 여기서 잠깐 내 기사를 인용하고자 한다. 전지윤이 내가 민중주의와 민중총궐기를 평가절하한 것으로 오해하는 듯해서다. 아래 인용문에서 보듯이 나는 민중총궐기를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부분 회복되는 징후로 보았다.

“[민중주의는] 노동계급 의식 발전의 초보적 국면을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지난 몇 달 새 벌어진 민중총궐기는 박근혜 하에서 노동계급과 민중이 자신감 수준을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좋은 징조로 볼 수 있다. 아직은 그 수준이 파업 투쟁으로 자본주의 이윤 자체를 공격할 의지 수준으로는 상승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동시에,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소심함 때문에 파업 투쟁의 대용품으로 가두 항의가 활용됐다는 한계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이 모순을 봐야 한다. 전자를 보지 못하고 후자만 본다면 노동운동이 침체하고 있다는 그릇된 인상을 얻을 것이다. 후자를 보지 못하고 전자만 본다면 민중주의(그리고 그 계급 협력주의의 논리적 귀결인 개혁주의)에 대해 무방비 상태에 놓일 것이다.”

민중총궐기의 압도적 주력부대가 노동자였다. 사회적 구성 면에서 민중총궐기는 노동자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노총이 조직했다. 매년 11월 13일 직전에 열리는 전국노동자대회를 민중총궐기 형식으로 치러 약간의 농민과 빈민이 좀 더 붙은 것이다. 청년·학생과 진보·좌파 단체 회원 등은 언제나 노동자 집회에 동참해 왔다. 2차, 3차, 4차 민중총궐기의 구성도 압도적으로 조직 노동자들이었고, 이 점에서 이 운동들도 사실상 노동조합이 동원한 것이다. 총궐기의 요구들을 보아도 대부분(전부는 아니다) 노동계급의 요구로, 이 점에서도 궐기는 노동계급적이었다.

민중총궐기들은 또한 노동자들의 앞선 활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산업 현장에서의 선동과 썩 흡족하지는 못했어도 크고 작은 여러 노조들의 파업들이 누적돼 온 결과가 노동자대회를 계기로 거리 항의로 나타났다고 봐야 한다. 노조 지도자들이 파업 소명에는 부담을 느꼈어도 거리 항의로 소명하는 데는 그래도 용기를 보였는데, 이에 조합원들도 파업보다는 좀 덜 부담감을 느끼며 응답한 것으로 봐야 한다.

마치 우리 단체가 이 일련의 민중총궐기들을 평가절하하기라도 한 양 오해한 채, 전지윤은 민중총궐기야말로 박근혜의 ‘노동개혁’ 공세를 막고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당연한 말이다. 기본적으로 ‘민중’이 아니라 노동자들(특히 조직된)의 운동이었던 덕분이다. 하지만 그랬기에 2차 궐기부터는 급속히 규모가 줄었다. 정부의 탄압도 한몫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노동개혁’ 법안들이 총선 전 국회에서 통과되기 어려울 것 같다는 관측 때문이었다. 그리고 총선을 의식한 여야 정치인들의 몸 사림도 고려해야 하고, 공천을 둘러싸고 육두문자가 오가는 집권당의 분열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한편, 전지윤이 자민통계가 다 조직한 것처럼 착각하는 총궐기 운동이 왜 테러방지법은 막지 못했을까? 특히 자민통계가 우려할 만한 쟁점인데도 말이다. 노동자들의 관심사가 노동개악에 집중됐기에 테러방지법은 안타깝게도 결국 통과됐던 것이다. 그리고 훨씬 더 폭넓고 대규모로 민중의 지지를 받았던 세월호 참사 항의가 당면 목표 성취에 미달하며 좌절을 겪어 온 이유도 비슷하다. 곧, 한국 같은 제3세계 출신 신흥국의 조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이슈가 아닌 경우에는 흔히 민중주의자들이 지도하도록 맡겨 놓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호 기사에서 이 점을 지적했는데, 이것이 내가 민중주의에 관해 그 기사를 쓴 이유다.

〈파이낸셜 타임스〉나 〈뉴욕 타임스〉 같은 세계 유수의 자본가 언론들의 보도를 보아도 시사적이다. 그들은 1차 민중총궐기가 크게 일어났을 때 “민주노총 노동자들의 시위”라며 우려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한편, 세월호 참사에 관해서는 항의 운동보다는 참사 자체와 정부의 구조 난맥상과 실책들에 초점을 맞추어 보도했다.

민중총궐기 얘기가 나온 김에 집회 준비 과정에서 전지윤이 보인 실천 자체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사회주의자인 우리는 노동자들의 가두 항의 운동인 민중총궐기를 지지하면서 그것이 자본가들의 이윤에 타격을 가하는 파업이라는 투쟁 형태와 결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결합에 따른 시너지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거리 항의를 당연히 지지하는 한편, 그것이 대중 파업과 결합되기를 염원했다. 이게 애써 반대 받을 일인가? 역사적으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Street’(가두 시위)와 ‘Strike’(파업)를 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설사 후자의 가능성이 크지 않은 상황에서도 혁명가라면 파업 찬반 논쟁에서 애써 반대론자들의 손을 들어 주지 않을진대, 당시는 노동개악 반대를 위해 파업할 태세가 돼 있다고 노조 지도자들이 각종 집회 연단에서 공언을 한 상황이었다.

‘변혁’주의자를 자처함에도 어처구니없게 전지윤은 노조 지도자들에게 파업 촉구하는 것을 아예 반대했다. 조직 노동운동이 “사회적 고립”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위 “[조직 노동자 운동의] 사회적 고립” 명제는 전지윤의 여러 글에서 되풀이되는 주제이지만, 그 자신이 참석한 민중총궐기 준비 회의에서 벌어진 논쟁 속에서, 특히 2차 민중총궐기 기조와 개최 방식을 두고 벌어졌던 논쟁 속에서 그 수동적·추수적(追隨: 꽁무니 좇기)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났다. 일부 자민통계 참석자들은 2차 민중총궐기의 명칭과 기조를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중총궐기라는 명칭 대신에 범국민대회나 백남기 농민 살인진압으로 명칭을 바꿔 민주주의적 쟁점을 부각시키자는 것이었고, 그에 따라 대회 기조도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노동자연대 측은 집회 명칭을 변경해야 할 불가피성을 인정한다 해도 집회 기조에 노동개악 문제가 핵심적으로 포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핵심 주최 측인 민주노총이 12월 5일로 2차 민중총궐기를 잡은 것도 그때쯤 노동개악 법안의 국회 통과와 그에 반대한 파업을 염두에 둔 계획이므로 사회단체들은 그것을 지지하고 엄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전지윤은 시민들이 폭넓게 참가할 수 있도록 집회의 명칭을 변경하고 노동 문제보다는 민주주의 문제를 부각시켜 집회 기조를 톤다운 시키자는 일부 자민통계의 주장에 동의했다. 노동자 요구와 투쟁을 앞세우는 것이 별 도움이 안 되고 어차피 민주노총 총파업은 가능하지도 않다고도 덧붙였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계획돼 있고 노동개악이 본궤도에 오를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내놓은 이런 제안이 민중주의적이 아니면 무엇인가?

민주노총 측은 노동개악 문제를 부차화하자는 일부 자민통계의 주장을 선뜻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논쟁에 끼어들지도 않았다. 결국 논쟁이 이어지면서 결론이 나지 않자 추후 공동집행위원장 회의에서 다시 논의하자고 했다. 이후 열린 공동집행위원장 회의에서 자민통계는 대다수 참석자들에게 용인될 만한 타협안을 내놓았다. ‘1부 집회 총궐기대회, 2부 집회 범국민대회’라는 안이었다.

1차 민중총궐기 후인 2015년 11월 27일 전지윤은 그의 블로그에서 이렇게 논평했다:

“1차 총궐기는 오랜 분열과 갈등을 넘어서 노동·농민·빈민 대중조직과 주요 사회운동단체들의 결집을 성공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외연 확장의 가능성까지 보여 줬다. 이것이 계속 확대·발전한다면 박근혜 정부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은 분명하다. … 그래서 집요하게 ‘불법·폭력·종북’을 부각하며 시민사회 진영과 중간층이 민중진영과 거리를 두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먼저 노동·농민·빈민 대중조직과 사회운동단체들의 결집이 단단히 유지되고 기층과 지역으로 더 깊숙이 뻗어나가는 것이다. … 민중운동 진영을 시민사회 진영, 중간층과 분리·고립시키려는 노림수를 잊지 말아야 한다. … 이런 방향[민중의 단결]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한다는 틀 속에서 ‘2차 총궐기의 기조로 평화집회를 내세울 것이냐 말 것이냐, 민중총궐기인가 시민대행진인가’가 고민돼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의 노동자 파업 촉구를 지지하기를 냉담하게 거절할 만큼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불신하는 전지윤의 정세 인식에서는 자연히 계급이 해체되고 계급 동맹인 ‘민중’이 매우 중요해진다. 특히, 민중총궐기 전후로 보여 준 그의 실천이 민중주의가 아니면 뭔가.

‘무슨 무슨 주의’라는 말을 남발하지 말라고 그가 내게 또 쏘아붙이겠지만 그에게 반문하고 싶다. 전지윤은 사람들이 그를 아무리 자주 ‘마르크스주의자’, ‘(개혁주의자가 아닌) 변혁주의자’라고 불러도 반발하지 않을 것이다. 또, 누가 문재인을 자유주의자라고 불러도 그에게 이의 제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예는 무수히 많을 것이다. 즉, ‘무슨 무슨 주의’ 하지 말라고 할 때는 실은 라벨 붙이기 자체보다는 자기가 느끼기에 부정적 어감을 지닌 특정 라벨이 동의하기 어렵게 붙여지는 것에 반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라는 말 좀 하지 말라고 요구하기보다 그 용어가 특정 대상에게 정확하게 적용된 것인지를 따지는 게 토론에 도움이 된다. 가령 전지윤은 자기가 “결코 ‘공무원연금 개악을 수용하고, 민주노총 총파업에 반대하며, 민주당과 전략적 야권연대 등 계급협력을 추진하자’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그는 순도 백 퍼센트 민중주의자가 아니다. 그래서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나는 그를 조심스럽게 “이들[민주노총 내 민중주의자들]의 생각을 잘 대변한 한 민중주의적 논평”을 한 사람, 또 “기회주의적으로 그[민중주의]에 끌리”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특히 문맥과 맥락을 고려해 읽어 보면, 2차 민중총궐기를 앞두고 벌어진 민주노총 총파업 가능성/필요성 논쟁에서 그가 일부 자민통계(특히 민중연합당계)와 공조했던 사실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진보정당들에 대한 차별화된 편견

전지윤은 우리가 정의당에는 우호적인 데 반해 민중연합당에는 별로 우호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또한 내가 노동자 운동이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투쟁 수위를 보여 주지 못하는 원인을 자민통계의 민중주의 탓으로 돌린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나는 자민통계만이 민중주의적이라고 하지 않았고, 자민통계만이 민주노총에 파업 촉구하기를 거절했다고 하지 않았다:

“한국 민중주의의 대표적 사례는 ‘자민통’ 계열(이하 자민통계), 참여연대 등 진보적 NGO들 그리고 정의당 등이다. … 민주노총 내 국민파·전국회의·중앙파 등도 민중주의적 경향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민중주의적 경향을 띤다. … 자민통계뿐 아니라 국민파, 중앙파 간부들도 이제 ‘사회적 고립 자초할 총파업 얘기 그만하고 국민적 지지를 받을’ 싸움을 하자며 민중총궐기를 강력히 제안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리는 정의당과 민중연합당 모두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제공하는 입장이다. 둘 다 개혁주의 전략을 추구하고 있지만,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핵심 기반으로 삼는 진보·좌파 정당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둘은 사회적 기반이 조금 다르다. 정의당은 추가적으로 진보·좌파 지식인 기반도 있다.

한편 민중연합당은 장차 중소 자본가 계급 소수의 지지와 북한 관료의 (미온적) 지지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선 자민통계가 국가 탄압을 받고 있으므로 그 계파들은 대부분 중소 자본가 계급 일부의 지지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자민통계가 또한 지금 단일 정당을 건설하지 못했으므로, 민중연합당은 북한 관료의 확실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 국가가 존속하고 자민통계의 역사적 전통이 폐기되지 않는 한, 자민통계가 북한 통치자들의 지지를 받길 원한다는 점과 남한 자본가 계급 일부와 동맹한다는 전략을 추구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 전통은 그것이 확립된 역사적 조건이 크게 바뀌지 않는 한 쉽게 폐기되지 않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가 공공연한 동성애자에게 주교 서품을 주는 것으로 전통이 바뀌려면 아마 기존 사회의 전면 변혁이 요구될 것이다.

전지윤은 자민통계가 혹심한 탄압을 받고 있는데 무슨 계급 연합이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민중전선(민중주의의 최고 형태)은 공산당이 ‘부르주아’(드러내놓고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정당과 전략적 동맹을 하는 것으로, 해당 부르주아 정당이 실제로 부르주아지에 기반을 뒀느냐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공산당이 정식으로 연립정부에 참여하느냐 여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1936년 스페인 민중전선 정부의 등장 과정에서 공산당이 급진당(당명과 달리 자유주의적 친자본주의 정당이었다)과 동맹 맺은 것을 비판하면서 트로츠키는 급진당이 “스페인 부르주아지의 그림자”라고 표현했다. 스페인 부르주아지가 당시 스페인 사회에선 중간계급이었던 데다 매우 약체인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 공산당은 프랑스 민중전선 정부에 정식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어도 민중전선 정부와 그 구성 정당들에 의해 동참 세력으로 대우받았고, 자신도 그렇게 처신해야 했다.

트로츠키는 또한 러시아 혁명을 돌아보는 자리에서 설사 러시아에 부르주아지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해도 멘셰비키는 부르주아지를 “창조해 냈을 것”이라고 재치 있게 멘셰비키의 계급 협력주의를 비꼰 적이 있다.

우리가 정의당과 민중연합당 또는 더 일반으로 자민통계를 차별한다는 전지윤의 비판은 근거 없는 주장이다. 우리 신문 기사 가운데는 정의당의 핵심 리더들인 노회찬·심상정과 그 당의 주요 정치인들인 김종대 씨와 조성주 씨에게 매우 비판적인 글들이 포함돼 있다. 물론 정의당에 입당한 양경규 전 공공연맹 위원장 등 노동정치연대 소속 친노동운동가들에게는 우리가 더 우호적인 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다. 좌파 노동단체가 정의당의 상이한 계파에 대해 이런 상대적 친화성(무비판적인 건 아니다)을 드러내는 게 무슨 문제인가?

물론 전지윤의 불만처럼, 우리가 민중연합당에 특별히 우호적이지는 않다. 자민통계가 민중연합당의 창건 문제를 놓고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고, 따라서 민중연합당이 진보당의 후신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괜시리 나머지 자민통계 계파들에 오해나 반감을 주지 않겠다는 배려도 있다. 물론 전지윤의 관측대로 우리는 2012년 진보당 내 경선에서 당권파의 부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전지윤은 여전히 당권파의 경선 부정은 없었다는 확증 편향을 갖고 있지만 이 문제로 그와 다시 논쟁하는 건 아무 독자에게도 도움이 될 성싶지 않다. 혹시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2013년 1월 초 노동변호사인 노동자연대 회원이 패널 자격으로 연단에 선 전(全) 회원 토론회에서 전지윤의 주장을 “믿음에 불과한 것”이라고 부르며 반증을 제기한 발제문을 〈노동자 연대〉 웹사이트에서 찾아 읽어 볼 수 있다.[4]

어쨌든 우리가 정의당보다 자민통계를 경원시한다는 전지윤의 주장은 참말이 아니다. 자민통계의 리더급 인사 J모 동지와 H모 원로는 우리가 소위 NL-PD 갈등과 정파간 갈등에 최대한 공정하려 애쓴다고 인정한 바 있다. 우리는 지난해 9월 〈노동자 연대〉 신문을 통해 자민통계도 포함되는 일종의 선거용 진보·좌파 빅텐트를 공개 제안했고, 그 뒤 자민통계 리더급 인사들이 우리와의 면담을 요청해 우리측 담당자가 그들과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고, 그 직후 민주노총도 이와 비슷한 선거연합정당 안(案)을 진보·좌파 정치조직들에 제안했다.(아쉽게도 민주노총의 제안 시점은 다소 뒤늦은 편이어서, 이미 선거 준비에 들어간 주요 정당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울산 북구와 동구의 예비경선에서도 우리는 북구의 경우 자민통계 후보를, 동구의 경우에는 노동당 후보인 이갑용 전 민주노총 위원장을 응원했다.

오히려 우리가 보기에 전지윤이야말로 편견(편향)을 갖고 있다. 정의당에 대해서는 비판 일변도이고, 민중연합당에 대해서는 아첨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태도 말이다. 혹시 이런 편향된 시각에서 보면 우리 단체가 정의당에는 친화적인 반면 민중연합당에는 부정적이라고 인지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편향은 위에서 다룬 그의 정세 인식(진보당 재건 안 되면 노동운동의 돌파구가 열리지 않는다는)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기본적으로 진보·좌파 성향 단체나 운동, 개인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말보다는 실천이 우선 고려돼야 한다. 둘째, 사안에 따라 다르다(따라서 전술적이다). 우리를 포함해 어느 한 단체나 개인, 운동이 언제나 올바른 입장을 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셋째, 그들이 표방하는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종파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다.

공무원연금 투쟁에 대한 추상적 선전종파주의

전지윤은 공무원연금도 지켜야 했고 공적연금 강화도 지지했어야 한다고 절충적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맥락 속에서 문제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레닌이 좋아한 헤겔의 말대로 “진리는 구체적이다.” 공적연금 강화가 집회 슬로건으로서 강요됐을 때 그에 불가피하게 타협해야 했지만, 전술은 슬로건과 다르다. 공적연금 강화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박근혜 정부의 공무원연금 공격부터 좌절시켜야 했다. 당장에 공격이 들어오고 있는 판에 그것을 반대하고 막을 생각은 중요하지 않은 양 일축하고 둘 다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식은 개혁주의 노조 지도자들로 하여금 곤경을 면하게 해 줄 뿐이다. 공무원연금 방어 문제가 이슈인 지난해 봄 상황에서 공적연금 운운한 것은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연막이었을 뿐이다. 어떻게 좌파적 공무원 조합원들이 이충재의 책략과 이충재 등 개혁주의 관료의 영향력에 도전할 수 있도록 돕느냐가 중요했다.

공무원노조원인 전지윤 그룹 회원은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투쟁 초기인 2014년에 쓴 두 기사에서 공무원연금 문제를 놓고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국민연금, 기초연금 문제와 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추상적으로는 옳은 주장이었을지 몰라도, 정부가 공무원연금 개악을 통해 공적연금과 공공부문에 대한 전반적 공격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으므로 당면 전술은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여야 했다. 글의 논조는 국민연금, 기초연금 문제를 결합시키지 않으면 공무원연금 투쟁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당면한 공무원연금 삭감 공격을 막아야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 전반에 대한 개선 논의도 훨씬 쉬워질 수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는 노동자연대가 발의했던 ‘대타협기구 탈퇴와 민주노총 총파업 일정에 동참하기’ 연서명, ‘이충재 사퇴’ 연서명 등 여러 연서명에 참가하지도, 호응해 주지도 않았다. 공무원노조 좌파에 속한 활동가들은 대체로 이 연서명에 호응했던 것에 비춰 보면, 공무원노조원으로서 그 회원이 진지하게 연금 방어와 이충재 반대를 했다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

전지윤도 2014년 12월부터 2015년 5월까지, 특히 지난해 4월 24일 민주노총 파업부터 5월까지 투쟁이 한창이던 때 공무원연금 투쟁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시기는 전교조 연가 투쟁과 이충재 공무원노조 집행부의 배신이 교차한 결정적 시기였는데도 말이다. 겨우 하나 발견할 수 있는 글로 전지윤 자신이 쓴 짧은 기사가 있다. 거기서 그는 대타협기구 탈퇴 촉구가 부질없는 짓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노동운동 내 좌파들도 주로 ‘지도부는 협상테이블에서 나오라’는 비판에 주력했지, 다른 방향과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6월 8일에 쓴 글은 투쟁을 돌아보는 논평 글인데, 거기서 전지윤은 “현장에서 잘 싸우기 위해서도 대안과 방향이 분명해야 하고 우호적 여론과 연대가 필요하다”면서, “한국의 공적연금 지출과 사회임금 비중을 대폭 늘리기 위한 투쟁이 건설되면서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가 그 투쟁의 일부가 됐다면.” 하고 아쉬워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전지윤의 추상적 선전을 앞세운 종파주의가 잘 드러난다. 그가 다루는 상황은 진보·좌파 정당이나 급진좌파 연합이 각각 당 강령이나 행동강령 작성을 놓고 토론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아니다. 업종별이나 산업별로 조직되는 노동조합과, 정치적 견해를 기초로 하는 정당은 질적으로 다르다. 노동조합, 그것도 그 한 부분이 자기에게 고유한 쟁점(공무원연금 삭감 위험)을 놓고 적들의 집중포화를 받는, 실로 눈앞에 닥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상적인 강령(공적연금과 사회임금 인상 요구와 결합되는)에 비추어 보자면 현 공무원노조 좌파 활동가들의 연금 삭감 반대는 “우호적 여론과 연대”를 얻기 어렵다’는 식의 회색주의자 같은 태도는 추상적 종파주의의 발로일 뿐이다. 종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투쟁에는 관여하지 —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 않으면서, 이상론적이어서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데 여념이 없다.”(던컨 핼러스) 또, 트로츠키는 이렇게 지적했다. “마르크스주의 서클로 존재하는 동안 노동자 운동에 대해 추상적으로 접근하는 습성을 몸에 익히고, 체질화한 행동반경을 시간이 지나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종파주의자로 고착된다. 그들은 세계를 자기가 선생으로 있는 커다란 학교로 여긴다.”

전지윤이 다양한 반(反)SWP 이론을 갖다 쓰고 있으므로 나도 전지윤과 비슷한 입장을 취한 영국 종파주의자들의 사례를 하나 들어 보겠다. 영국에서 2011년 11월 2백50만 명이 참가한 사상 최대의 공공부문 파업이 벌어졌다. 그 핵심 요구는 공공부문 노동자 연금 삭감 반대였다. 그때 일부 좌파는 그 투쟁이 ‘공공부문 노동자들만의 경제주의적·부문적 요구를 내놓아, 긴축재정 전체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파업 건설에 거리를 뒀다. 그들의 영향력은 전무했다. 전지윤 그룹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지난해 4월 말과 5월 전지윤측 블로그의 글들은 공무원연금 방어 투쟁 대신에 세월호 참사 문제에 집중됐다. 물론 세월호 참사 항의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우리 단체 자체뿐 아니라 대다수 학생 회원들도 학업 등 만사를 제쳐 두고 그 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전지윤이 이 문제에 견줘 공무원 투쟁의 비중을 낮춰 잡은 건 그가 전술 문제에서 약점을 보이는 것뿐 아니라 조직 노동자 투쟁에는 큰 의욕을 보이지 않는 것의 반영인 듯하다. 심지어 패배가 뻔할 것 같은 투쟁이라고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동료들과 전투를 함께 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전략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꽤 있다.(전술과 전략의 관계는 기계적이지 않다.) 치열한 전투는 곁에 비켜서서 구경한 후, 나중에 논평이나 하는 태도는 수동성과 대중 추수의 표현일 뿐이다.

전지윤은 나 또는 우리 단체가 최저임금 문제를 무시한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데, 김하영 동지가 앞의 글[5]에서 분명히 밝힌 바대로 우리는 그 요구를 분명히 지지했(한)다. 이 경우에도 문제는 구체적 맥락이다. 지난해 내내 민주노총 내 민중주의자들은 ‘공무원연금 지키는 문제보다 최저임금 1만 원이 광범한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다’, ‘최저임금 인상 문제로 연석회의를 여니 순식간에 시민사회단체 2백여 곳이 서명을 했다’, ‘노동개악 반대보다 비정규직 문제를 부각시켜야 “대중적” 지지를 얻는다’ 등등의 민중주의적 주장을 공공연히 펴고 있었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노총 좌파들도 이런 생각을 공유하거나 아니면 그에 타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압도적이고 주된 부문들이 공공과 민간의 대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일진대, 이들이 당장 자신들을 겨눈 박근혜와 사용자들의 칼날에 저항해야, 이들보다 빈약하게 조직됐거나 아예 조직되지 못한 노동자들도 그 저항에 고무돼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현 시기 계급 의식의 불균등성을 고려하지 않고 전지윤처럼 하나마나 한 소리, 곧 “단결 투쟁을 통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의 조건을 개선하자”는 것은 비정규직 폐지 투쟁 또는 비정규직 차별 폐지 투쟁들의 전술 목표이지, 그 전술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은 아닌 것이다.

전지윤이 잘못된 양자택일을 피하려 하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변증법에 못 미치면 중도(中道)를 걷는 것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개혁과 혁명이 둘 다 필요하다는 당연한 주장은 개혁주의자와 날카롭게 논쟁할 때엔 쓸모없는 공문구가 된다. 왜냐하면 개혁주의란 그 정의상 혁명의 가능성 그리고/또는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1890년대에 이런 사상의 유명한 대변자 베른슈타인과 논쟁한 로자 룩셈부르크는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고 첨예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이와 비슷하게도, 혁명적 상황에서 아래로부터 노동자 권력이 생성되고 있을 경우, 총선이나 새 의회 같은 개혁 조처들이 때로 혁명적 세력을 고립시키기 위한 지배자들의 책략으로 제안될 수도 있다. 이때 둘 다 의미 있다는 식은 중간주의적 두길보기일 뿐이다.

관조적·추수적 ‘분석과 예측’

전지윤은 지도부든 현장조합원이든, 어느 연맹 위원장이든 아무도 투쟁성을 발휘하지 않았는데, 왜 특히 자주파와 한상균 지도부 탓을 하냐고 우리에게 반문한다. 그러나 이는 오해다. 우리는 온건한 지도자들을 더 비판했고, 한상균 지도부에 대해 종종 다룬 것은 전지윤과 달리 우리가 한상균 지도부를 함께 배출한 다른 민주노총 좌파들과 토론했기 때문이다. 그들과 나눈 대화들이 〈노동자 연대〉 신문 지면의 주요 소재였다. 왜 좌파들의 정치가 쟁점이었나? 대체로 민주노총 좌파들은 민중주의자들이 개혁주의적 노조 지도자들의 파업 회피를 비호하는 문제를 회피했다. 좀 더 급진적인 좌파들도 노조 지도자들을 압박하는 문제를 회피한 채(쓸데없는 일이라고 보아), ‘아래로부터의 총파업’ 촉발 시도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좌파는 정치적 경쟁자들의 핵심적 약점을 극복할 수 없었다. 경쟁자들이 민중주의적 논리를 앞세워 부담스런 파업 투쟁 방식을 극구 회피하는 것에 효과적으로 도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트로츠키가 1930년대 초 히틀러의 집권 위험이 넘실거리던 독일에서 사회민주당과 공산당 가운데 공산당에 호소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나치의 등장을 막으려면 공산당이 초좌파적 종파주의 노선을 버리고 공동전선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럴 가망성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의 당시 글을 읽다 보면 그의 탄식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그럼에도 그는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당시 트로츠키가 독일 공산당에 개입하면서 했던 것처럼, 정세 인식은 관조적인 자세로 해서는 안 된다. “이론은 회색이지만, 생명나무는 늘 푸른색”인 것이다.

혁명가들에게 낙관이란 난관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난관을 직시하면서도, 그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한 가닥 가능성과 기회를 볼 줄 아는 것을 뜻한다. 아예 가능성과 기회가 없다면, 그람시가 무솔리니의 감옥에서 곱씹은 로맹 롤랑의 말, “지성의 비관론과 의지의 낙관론”이 우리에게도 좌우명이 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비관적 정세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왜 특별히 노동계급만 싸울 자신이 없어야 하는지 설명이 안 된다. 특히,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파업을 소명할 자신은 없어도 거리 항의를 소명할 자신은 있다.

그리고 자발성은 “기계적 자발성”이 아니다. 이 말을 한 그람시는 인간 행위주체가 작용(활동)함으로써 자발성이 작용한다는 뜻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세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는 객관적 조건도 실제로는 어느 정도 인간적인 객관성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백보 양보해 조직 노동계급의 현재 사기와 투쟁할 자신이 설사 많지 않다고 해도 진정한 혁명가라면 그의 능동적·변혁적 세계관에 따라, 그저 조직 노동자 운동 바깥에서 단지 이데올로기 투쟁(선전·선동)만 할 게 아니라 그 운동 안에서 조직하고 논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초기 결과를 객관적 조건들에 포함시켜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존 몰리뉴가 ‘마르크스주의는 결정론적인가?’라는 훌륭한 논문(《인터내셔널 소셜리즘》 68호, 1995년 가을)에서 말한 아래 구절 가운데 내가 굵은 글자체로 처리한 부분에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어느 한도 안에서 개별 사회주의자 투사든 혁명적 당이든 계급투쟁의 수위를 주어진 것으로, 즉 그 개인이나 그 당의 의지와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여겨야 한다.” 노동계급의 조직 상태와 의식 수준을 분석할 때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그 조직의 역할을 처음에 고려하지 않고 시작하는 것은 어느 한도 안에서이다! 이 “어느 한도”는 매우 작은 부분으로, 실제로 해 봐야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노동운동의 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측정하려면 혁명가들의 일상적 운동 관여와 그 효과의 일상적 측정이 필수적이다. 실험과 실험 결과의 평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전지윤의 분석에는 이 실험이 빠져 있다. 물론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일에 매달리려 한다면 그저 의지만 앞세운다는 비판을 받아도 쌀 것이다. 그러나 1차 민중총궐기 10개월 남짓 전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직선으로 한상균을 뽑은 것은 조합원 다수가 싸울 의지를 보여 준 것으로 두루 풀이되는 일이었다. 4월 말 파업이 예정대로 벌어진 직후 민주노총 좌파 활동가들은 그럭저럭 만족을 나타냈다. 첫술에 배부르랴 하는 현실감각을 모두 공유했던 평가였다. 7월 파업은 그 전에 공무원연금 방어에 실패하면서 동력이 없어 흐지부지됐다. 하지만 총궐기 두 달 전쯤 열린 민주노총 단위노조 대표자회의에서는 그 직전 이뤄진 노사정 합의에 반발한 대표자 다수가 즉각적인 파업안에 찬동할 태세였다. 결국 회의 끝 무렵 대표자들은 파업 일정을 확정했다. 그래서 실제로 9월 23일 파업이 벌어졌다. 이런 정서들이 투쟁 의지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고차원의 기준에 비춰 우리의 ‘분석과 예측’이 너무 낙관적이었다는 것인가?

지난해 여름 우리는, 1996년 연말 파업을 상기시키며 노조 지도자들의 소명 없이도 극소수인 자기들만의 노력으로 현장에서 파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하던 일부 좌파들의 계획이야말로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관조적이지 않았다. 지나친 낙관론의 문제를 부각시키기보다는 지도자들에게 아래로부터 압박을 가할 필요성을 강조하며 그들과 토론했던 것이다.

레닌이 좋아한 나폴레옹 말처럼 “길고 짧은 건 대어 보아야 안다.” 분석과 예측 문제로 환원될 일이 아니라 가능성이라는 틈새를 보고 몸을 던져야 하는 문제였다. 미디어 논평가·평론가·분석가 등처럼 파업의 확률이나 따지면서 회색빛 ‘분석’과 ‘예측’이나 내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도박을 걸어야 한다. 때로는 확률론적 기대값이 낮은 일에도 기꺼이 뛰어들 수 있어야 한다. 실로 변혁적 따라서 능동적 세계관을 가진 사회주의 신문 편집자라면 작더라도 없지는 않은 파업 가능성을 앞두고 1면 헤드라인을 달 때, 관조적으로 ‘민주노총, 과연 파업할까?’ 하는 식으로 달지 않을 것이다. ‘민주노총은 파업에 돌입하라!’ 하고 달 것이다.

전지윤은 우리가 ‘다른 많은 노조 좌파들처럼 좌파적 노조 지도자들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좌절되자 한상균을 포함한 그들(과 자주파)에게 비난을 퍼부으며 부정직하게 자신의 그릇된 분석과 예측을 가리고 시선을 딴 데로 돌리려 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기회주의자가 아닌 우리는 노조 관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갖고 있다. 기회주의적으로 그들 탓을 하며 도마뱀 꼬리 자르기를 하는 게 아니다. 노조 지도자들도 자신의 조직을 지키고 지도자로서의 전망을 유지하려면 그들도 싸워야 한다는 객관적 필요성을 갖고 있다. 이 필요성 때문에 사회주의들이 좌파적 노조 지도자와 제휴할 수 있다. 전지윤은 시종일관 결과론적 논증을 펴며 우리의 분석과 예측이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가 분파주의적 분파 조직화 활동으로 단체의 개입 능력을 떨어뜨리던 때 일어난 철도 파업에 대해서도 당시에 이런 주장을 폈다. 한마디로 철도 파업은 우리의 기대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노동자 파업이 흔히 승승장구하면 무엇 때문에 룩셈부르크는 노동자 혁명이 계속되는 패배 끝에 마침내 찾아오는 최종 승리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일반화를 했고, 또 무엇 때문에 그람시는 진지전을 제1차세계대전을 표상한 (피 말리는 인내를 요구하는) 참호전에 빗댔을까?

맺으며

전지윤은 “[최일붕의] 글쓰기 스타일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다”며 이렇게 꼬집었다. “구체적 논거와 인용은 부족한 반면, 자신의 박학다식과 역사적 사례들을 과시적으로 나열하며 어려운 용어와 온갖 ‘~주의’를 남발하는 것이 읽기는 힘들면서 알찬 토론에는 별 도움 안 되는 것 같다.”

먼저, 나는 박학다식하지 않다. 따라서 내가 박학다식을 과시했다면 그것은 젠체하기에 불과한 것일 게다. 이 점에 유의하겠다. 충고 고맙다.

역사적 사례들 얘기는 조금 다른 얘기다. 전지윤이나 나나 마르크스주의에 찬동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방법인 역사유물론을 받아들인다는 뜻일 게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례는 많이 알고 많이 들수록 좋다. 오히려 역사에 대해서도 나는 박학다식하지 못해 아쉽다. 트로츠키가 혁명적 당을 “노동계급의 기억”이라고 했거늘 거의 2백 년에 가까운 그 역사(게다가 전 세계적이다!)로부터 더 많이 배웠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회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주의’ 문제는 위에서 언급했지만, 여기서도 매우 간단히 언급할 게 있다. 아마 내가 전지윤의 분파 투쟁 때 진보당 당권파의 경선부정 사실을 부정한 그를 ‘확증편향’, ‘음모론’, ‘실증주의’ 등으로 비판한 게 마음에 많이 남은 것 같다. 이번에 그가 근래 쓴 글들을 보니 변한 게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후주2]

전지윤은 왜 탈퇴했나? 그가 집단 탈퇴를 정당화할 때마다 그에게 반문하고 싶은 게 있다. 도대체 40여 명의 중앙 상근·시간제 활동가, 특히 그 가운데 전지윤 자신이 몇 년간 이끈 18명의 신문사 기자·사진기자·편집디자이너·프로그래머 가운데 왜 단 한 명도 전지윤을 지지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그를 따라 탈퇴한 사람들 대부분은 몇 개월 뒤 그와 또 결별했다. 아마도 그의 분파는 세계 최단명 조직이었을 것이다.

이에 전지윤은 맨날 하는 상투적인 변명밖에 늘어놓을 게 없다. “2014년에 내가 노동자연대에서 이탈하기 직전에 있었던 것은 토론으로 보기 힘들었다. 일방적으로 징계를 당한 상황에서, 예컨대 한 토론회에서 나를 비판하는 29명의 발언 속에 지지 발언 1명이 허용되는 식이었[다.]”

이런 식의 주장이 그의 특기다. 반쯤의 진실 말하기. 두 달 동안 그가 패널로 연단에서 발제를 할 수 있었던 전(全) 회원 토론회가 세 번이었고, 그때마다 그는 정확히 연단 전체 시간의 절반을 보장받았다. 또, 그와 그의 분파 성원들의 글은 여러 차례 발간된 토론용 자료집들에 무제한 실릴 수 있었다. 그가 결코 까먹지 않고 언급하는 “29 : 1”은 2백50명 가까운 회원들이 청중으로 참석한 가운데 그의 분파 성원들은 많아야 10여 명밖에 안 됐고, 그나마 기가 죽어 선착순 발언을 앞두고 우물쭈물했기 때문이다. 징계는 경고에 그쳐 징계와 비(非)징계 사이의 것이었는데, 함께 의논하고 협의해서 만든 규칙을 어겨 놓고 단체 내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실은 무제한적 개인 자유를 주장하는 것으로, 그의 자기 중심주의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그가 중앙 간부들과 활동가들 가운데 단 한 명도 포섭하지 못한 건 분파 논쟁 때 충격적으로 드러난 그의 부정직과 기회주의 때문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를 체험한 회원들은 전지윤이 다음과 같이 말해도 단순한 위선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내가 노동자연대 동지들의 주장에서 여전히 많은 부분을 공감·지지하며, 언제든 협력할 생각이 있으며, 무엇보다 그 동지들의 투쟁과 연대에 대한 헌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쪼록 내실있고 동지적인 토론을 통해서 이 나라 노동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고민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기회주의’로 말하자면, 특히 탈퇴 후 그가 전통이 다른 개인이나 그룹을 포섭하려 할 때 국가자본주의론도 재고할 태세인 것을 보면(북한 사회와 한 민족을 이루는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일관된 원칙 없이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이로운 쪽으로 행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론은 흥정 대상이 아니다.

[목차로 돌아가기]

[1] 2016년 3월 16일에 발행된 〈노동자 연대〉 169호에 처음 실린 글이다. [본문으로]

[2] 〈노동자 연대〉 168호에 실린 글로 본 소책자에 실려 있다. [본문으로]

[3] 전지윤, ‘예측이 어긋나면 스스로의 분석부터 돌아봐야’, 2016년 3월 9일 [본문으로]

[4] 〈노동자 연대〉 웹사이트, ‘진보당 부정 경선에 대하여’ [본문으로]

[5] 〈노동자 연대〉 168호에 실린 ‘2015년 노동자 투쟁에서 민중주의 vs 계급정치’를 가리킨다. 본 소책자에 실려 있다. [본문으로]

후주

[후주1] 노동자 투쟁 동참에 대한 강조는 사실 2009년 초 다함께(노동자연대의 옛 이름) 대의원협의회에서 구체적 결정문으로 채택됐다. 하지만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기 어려운 몇 가지 단체 사정 때문에 2013년 여름쯤에야 실천으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전지윤이 신노선에 반기를 들었다. 그의 분파 활동은 다함께의 진보당 탈당과 노동운동 개입 강화를 위한 독자적 활동 강화에 대한 반발의 산물로 볼 수 있다. [본문으로]

[후주2]여기에다 그 사이에 수집한 다양한 반SWP 이론들을 이리저리 조합하고 절충한 컬렉션을 추구했던 모양이다. 그 이론들은 단지 SWP만이 아닌 여러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논박된 것들이다. 가령 굴리엘모 카르케디와 앤드류 클리먼, 마이클 로버츠 등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을 논증하고 실증하는 여러 논저들을 출간했다. 한편 이미 오래전에 리즈 보걸은 페데리치류(流)의 사회재생산 이론을, 헤스터 아이젠슈타인은 양성 분리론적(급진적) 여성주의를 논파했다. 레닌주의를 기괴하게 비틀어 놓은 것은, 게오르크 루카치의 헝가리인 제자인 타마쉬 크라우스가 몇 년 전에 쓴 저작이 1년여 전 영어로 번역됨으로써 간접적으로 논박된 셈이다. [본문으로]

2015년 노동자 투쟁에서 민중주의 vs 계급정치[1]

김하영

우리 나라 운동에서 전통적으로 강력한 민중주의는 “각계·각층”의 동맹을 중시하고, 노동자들이 계급 고유의 이해관계를 내세우는 것을 그런 동맹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자연히 노동계급 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런 사상은 노동계급이 약화됐고 따라서 예전 같은 방식으로 싸울 수 없다고 여기는, 매우 다양한 경향들과 잘 맞물린다. ‘민주노총은 조직률이 매우 낮아 계급 대표성이 없는 데다 대공장·공공부문 조합원이 다수이므로, 조합원들의 요구를 앞세웠다가는 지배자들의 귀족노조 고립 프레임에 말려든다’는 주장도 그중 하나다. 박근혜 정부를 “독재 회귀” 심지어 “파시즘”이라고 보는 것도 계급을 가로지르는 동맹을 정당화하는 근거다.

이런 민중주의가 2015년 투쟁에 미친 좋지 않은 영향을 잘 보여 준 대표적 사례가 공무원연금 개악에 대한 태도였다. 노동운동 안에는 공무원연금 방어를 꺼리는 견해가 광범하게 퍼져 있었다. ‘민주노총이 그런 걸 방어해서 지지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노동자연대를 비롯한 일부 좌파들의 주장으로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가 4·24 총파업의 주요 요구로 포함됐지만, 많은 단체와 활동가들은 그것을 ‘공적연금 강화’로 대체하거나, ‘최저임금 1만 원’ 같은 요구를 제기하는 데 강조점을 뒀다. 이것은 자기 조합원들의 조건보다 미조직 노동자들과 전국민의 조건을 더 배려함으로써 국민적(또는 민중의) 지지를 얻겠다는 민중주의적 발상이었다.

물론 ‘공적연금 강화’나 ‘최저임금 1만 원’은 중요한 요구다. 노동자연대는 이 요구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공무원연금 개악을 ‘노동자들에게 고통 전가하기’ 공격의 최전선으로 삼고 있었고, 이를 지렛대로 노동시장 구조 개악 같은 더 광범한 공격을 추진하려는 상황에서, 공무원연금 개악 문제를 사실상 회피하는 태도는 2015년 노동자 투쟁에서 심각한 약점으로 작용했다. 결국 공무원노조 이충재 집행부와 연금행동 정용건 집행위원장 등의 ‘공적연금 강화’론은 공무원연금 개악을 사실상 용인하는 배신으로 나타났고, 이는 상반기 노동자 투쟁이 하락세로 돌아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에 그들은 공무원연금 삭감분을 국민연금 강화에 사용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합의라며 정당화했는데, 국민연금 강화는 공수표에 불과하다는 우리의 경고가 결국 옳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2015년 말에 〈매일노동뉴스〉는 “공무원연금 삭감분을 공적연금 강화에 사용하겠다는 전제로 ‘더 내고 덜 받는’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을 얻어 낸 정부는 이후 모르쇠로 일관했다”며 정부의 태도를 “먹튀”라고 요약하고 2015년 노동뉴스 16위로 뽑았다.

민중주의의 논리는 공공부문 정상화나 노동시장 구조 개악에 반대하는 운동에도 적용됐다. 공공부문 노동조합 운동 안에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를 내세워서는 안 되고 ‘공공적’, 즉 국민적 요구에 헌신해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다. 이런 노선의 대표 주자 중 한 명인 철도노조 김영훈 위원장은 청년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임금피크제를 수용했다. 5월 말 공무원연금 개악 이후 상반기 노동자 투쟁의 상승세가 꺾였다면, 주요 공공기관들의 임금피크제 협상과 수용은 9~10월 공공부문 투쟁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노동시장 구조 개악 문제에서는 사실상 비정규직 관련 쟁점만 부각하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노동운동의 다수 지도자들이 이 쟁점으로는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고 그래서 더민주당 등 주류 야당과도 협력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규직·조직 노동자들에게 해당하는 쟁점은 지키고자 아등바등할수록 노동시장 이중구조화 또는 노동계급의 분절화를 악화시켜 노동운동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뿐’이라는 생각도 널리 퍼져 있다. 가령, ‘쉬운 해고? 비정규직은 이미 손쉽게 해고되고 있다. 통상임금 정상화? 비정규직에겐 그림의 떡일 뿐이다’는 식의 주장들을 흔히 듣다 보면, 조건 악화에 맞선 싸움이 정당한지 헛갈릴 지경이다. “조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쌓아 온 임금과 고용조건 지키기에 연연하는 ‘반대 투쟁, 저지 투쟁’을 할수록 고립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은 노동운동 우파부터 좌파까지 공유하고 있다.

민중의 호민관

어떤 사람들은 이런 주장에 ‘민중의 호민관’, ‘조직 노동자만이 아닌 계급 전체를 위한 투쟁’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정서는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선의에도 불구하고) 정작 나타나는 효과는 투쟁에 나설 잠재력이 있는 조직 노동자들의 동원을 회피하는 것임을 날카롭게 직시해야 한다. 조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투쟁을 전투적으로 벌이면서 다른 노동자 부문의 투쟁을 고무해야 ‘민중의 호민관’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중주의자들은 조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조건 방어를 위해 나서는 것 자체를 해롭다고 보기 때문에, 사실상 민주노총의 총파업 성사에 큰 열의가 없었다. 그들은 그 대신에 ‘민주노총이 제대로 되지도 않는 총파업을 하기보다 전략 변화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들 자신의 투쟁과 이를 통한 의식과 조직의 성장 대신 ‘위로부터의’ 개혁을 제안하는 셈이다.

계급 정치를 일관되게 추구하지 않은 다른 대표적 사례는 총파업을 민중총궐기로 대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민중총궐기가 중요한 전진이긴 했지만 그보다 더 나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민통 계열은 2015년 초부터 11월 민중대회를 적극 추진했고, 이를 세력 회복과 총선으로 가는 디딤돌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한상균 집행부도 7월 이후 민주노총 내에서 총파업 회의론이 강화되면서 점점 더 민중총궐기에 의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2015년 초 민주노총 임원 선거 직후에는 한상균 위원장을 비롯한 신임 임원진이 ‘총파업 투쟁’을 가장 주되게 표방했기 때문에 조합원들의 지지를 얻고 당선했다는 점을 자타가 인정했다. 그래서 선거에서 ‘준비된 투쟁’을 주장했던 상대편(국민파-중앙파-전국회의 연합선본)도 초기 몇 달 동안은 총파업을 공공연히 반대하지 못했다. 그러다 공무원연금 개악 이후, 4·24 총파업을 전후해 상승하던 기세가 꺾이고 7·15 파업이 급조돼 미미한 수준에 그치자, 총파업이 효과 없고 소모적이라는 종래의 주장이 확산됐다.

총파업 할 역량이 안 된다거나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주장의 근저에는 총파업 같은 전통적 투쟁 방법이 이제 낡았다는 생각도 깔려 있었다. 가령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김태현 연구위원은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외쳤지만 위력적이지는 않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민주노총의 투쟁 형태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전투적 투쟁이 비정규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끌어올리는 선도차 역할을 담당했던 … 그 시절의 향수에 기반하고 있다. …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자본이 초국적화되고 고용이 분절되며 파편화된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전투적 투쟁이 쉽게 전면화되기는 어렵다.” 민주노총이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총파업 투쟁을 외치기보다 비정규직 조직화와 비정규직 투쟁의 근거지 구실을 전략적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직력 약화, 법제도적 제약, 비정규직 노조의 취약성 등으로 파업이 가능한 조직들이 제한돼 있다는 것도 총파업이 불가능한 이유로 언급되는 요인들이다.

사회적 연대

그러면서 흔히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 하나는 범국민적 또는 ‘사회적 연대’ 투쟁이다. 1~2년 전부터 사용되는 “국민파업”이라는 용어도 비슷한 맥락에서 등장했다. 이런 투쟁은 ‘파업이 가능한 노동자+파업이 불가능한 비정규·미조직 노동자+농민+빈민+자영업자+학생+여성 등등’이 모두 광범하게 연대한다는 점에 의미를 두지만, 계급의 경계와 파업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든다는 문제점도 동시에 안고 있다. 노동계급의 결정적 중요성은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인 공장, 병원, 학교, 교통·통신 체계 등을 멈출 수 있는 집단적 힘을 가졌다는 데 있다. 자영업자나 학생 몇만 명이 일을 안 하거나 수업에 안 들어간다고 해서 이런 효과를 내지는 못하며, 또한 노동자들 역시 집단적으로 행동하지 않고는 이런 효과를 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투쟁이 “정치” 투쟁(반박근혜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경제” 투쟁보다 우월하고, 노동자 일부가 아니라 전체, 더 나아가 민중까지 포괄하는 투쟁이므로 민주노총만의 총파업보다 우월하다고 여긴다. 지난해 있었던 세 차례의 총파업보다 11월 14일 민중총궐기가 훨씬 더 위력적이지 않았느냐면서 말이다. 그러나 지난해 초부터 노동시장 구조 개악에 맞선 투쟁의 시동을 걸고, 노사정 야합에 항의한 9·23 총파업 같은 투쟁들이 있었기에 11월 14일까지 분위기가 뜨면서 민중총궐기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조직됐던 것이다. 오히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총궐기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총파업으로 나아가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 뒤에도 가두 시위에만 힘을 실은 결과 노동자 투쟁은 더 이룰 수도 있었던 전진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전진해야 박근혜의 ‘노동개혁’을 막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민중총궐기와 직결시켜 총파업을 조직했다면 어땠을까? 노동계급이 경제적·집단적인 힘을 사용해 실질적인 파업에 돌입했다면, 이윤을 위협하는 위력을 발휘하면서 박근혜의 노동시장 구조 개악 추진에 확실한 제동을 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박근혜를 한 방 먹이고 싶은 더 광범한 대중의 지지를 얻었을 수 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노동자들 자신이 계급투쟁의 역량을 십분 발휘했을 때 연대도 확대되고 중간계급들의 지지도 확보할 수 있다. 국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수준으로 노동자들이 투쟁 수위를 낮춰야 연대가 확대되는 게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2013년 철도 파업 당시 ‘필공’ 파업을 해 국민에게 불편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철도파업이 지지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철도 노동자들이 굳건히 장기간의 파업을 이어갔기 때문에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물론 필공이 아닌 전면 파업을 했더라면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 이 글은 저자가 지난해 노동자 운동을 돌아보며 2016년 노동자연대 대의원협의회에 제출한 장문의 보고서의 적은 일부분이므로 서론과 결론이 없음을 독자는 감안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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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6년 3월 2일에 발행된 〈노동자 연대〉 168호에 처음 실린 글이다.[본문으로]

지난해 노동자 투쟁
우리의 예측이 어긋난 게 아니라 바램에 조금 못 미쳤을 뿐

올해도 투쟁은 계속된다[1]

김하영

전지윤 씨는(이하 존칭 생략) 노동자연대를 비판하는 글을 써, 노동자연대가 지난해 노동자 투쟁이 자신들의 예측대로 되지 않자 “[누가 또는 무엇이] 투쟁을 망쳤다”는 식으로 “핑계거리와 희생양”을 찾고 있다고 주장했다.[2] 그러나 전지윤에게는 (그의 대전제를 무너뜨리는)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는 지난해 노동자 투쟁이 결코 망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해 노동자들은 박근혜에 맞서 꽤 저항을 했다. 연초부터 민주노총이 노동개악에 맞선 투쟁에 시동을 걸면서 몇 차례 하루 파업을 했고, 연말에 대규모 노동자대회 겸 민중총궐기를 했다.

전지윤은 마치 우리가 민중총궐기를 (그것이 총파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깎아내린 듯이 왜곡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최일붕은 ‘민중주의란 무엇인가?’에서 “지난 몇 달 새 벌어진 민중총궐기는 박근혜 하에서 노동계급과 민중이 자신감 수준을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좋은 징조”라고 했다. 이와 함께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소심함 때문에 파업 투쟁의 대용품으로 가두 항의가 활용됐다는 한계도 지닌다”고 했다. 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이것은 민중총궐기의 성공만을 거의 일면적으로 강조하면서 민주노총 총파업은 “처음부터 승산이 높지 않았다”고 한 전지윤의 접근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거의’라고 말한 이유는 “시민사회, 종교계의 동참[이] 외연 확대이면서 동시에 우리 편을 통제하는 양날의 칼이었다”는 등의 “아쉬움과 부족함”을 말하기 때문인데, 노동계급 고유의 투쟁 방법으로 자본가들의 이윤에 타격을 주지 못한 것은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다.) 전지윤은 노동자연대의 입장이 마치 자신의 일면적 평가의 거울 이미지인 것처럼 오해하면서, 심지어 “이것[총궐기]이 총파업을 회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면 박근혜 정부는 그런 후퇴를 반겼어야 한다”는 억지 주장을 폈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민중이 자신감 수준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을 반길 자본주의 정부가 어디 있겠는가. 전지윤이 모순의 한 측면에 의도적으로 눈 감고 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뒤에서 보겠지만, 전지윤은 일면적 사고 때문에 번번이 노동자연대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총파업에 대한 공정한 평가

실제 지난해 노동자 투쟁이 전개된 양상을 봐도 민주노총 총파업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었던 양 일축해 버리는 것은 터무니없다. 전지윤은 “민주노총 지도부는 세 차례가 넘는 총파업을 선언했지만 실질적인 파업은 잘 실행되지도 확대되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지도부가 파업을 호소했는데도 노동자들이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그는 “민주노총의 줄어든 [투쟁]동력, 사회적 고립, 정파적 사분오열, 산업과 기업에 따른 부문주의” 등을 이유로 꼽는다.

그러나 우선 지적할 것은, 4·24와 9·23 같은 파업이 결코 의미 없었던 게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4·24 총파업에는 20만 조합원이 참가했고 파업 집회에는 전국적으로 6만 4천 명가량(민주노총 통계)이 참석했다. 당시 파업 집회 참가 인원은 11월 민중총궐기에 참가한 조합원 수(7만 명, 민주노총 통계)와 큰 차이가 없었다. 또, 9·23 총파업은 규모는 작았지만 노사정 야합에 맞서 즉각적인 항의를 표명했다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 이런 총파업 투쟁들이 없었다면 11월 민중총궐기가 대규모로 치러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민중총궐기 참가자의 압도 다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이었다. 전지윤은 “민주노총의 줄어든 [투쟁] 동력”을 문제로 꼽았지만, 민중총궐기는 주로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투쟁 동력에 의존했던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우려했을 민중총궐기의 파장과 잠재력도 상당 부분 이로부터 나올 수 있었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이 민주노총 총파업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민주노총 한상균 집행부도 ‘규모가 총파업이란 명명에 부합하는지’, ‘파업 이외의 단체행동 비중이 높았던 점’ 등을 돌아본 바 있다(2016년 정기대의원대회). 그러나 지도부는 “몇 차례나 총파업 지침을 내”리며 “불을 붙”였지만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파업 태세가 충분치 않”아 “불이 타오르지 않”았다는 전지윤의 평가는 매우 일면적이고, 동역학과 변화에 주목하지 않으며, 별 근거도 없다.

‘결과를 놓고 볼 때 어쨌든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지 않은 거 아니냐’는 식의 평가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는지에 관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정서는 2014년 말 ‘박근혜의 노동개악에 맞선 총파업’을 공약으로 내건 좌파이자 소수파인 한상균 후보조를 신임 임원진으로 선택한 것, 2015년 초 신임 위원장이 된 한상균이 호소한 총파업 찬반 투표에 높은 찬성률(84.4퍼센트)로 응답한 것을 통해 어느 정도 드러났다. 즉, 박근혜 정부 3년차를 맞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투쟁하는 지도부를 원했고, 지도부가 파업 지침을 내리면 응할 의사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어느 정도 좌절된 과정에서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구실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전지윤은 “한상균 지도부가 지난해 몇 차례나 총파업 지침을 내린 것이 과연 총파업을 억누른 것인지, 그런 파업 호소에도 왜 실질적인 파업이 벌어지지 않은 것인지” 설명하라고 했다.

이에 관해 언급하기 전에 용어를 좀 명확하게 해 두고자 한다. 우리는 (전지윤과 달리) ‘민주노총 지도부’와 ‘한상균 집행부’가 지칭하는 바를 대개 구분해서 사용해 왔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중집 성원들(특히 주요 산별연맹 대표)이 포함된 것으로, ‘한상균 집행부’는 한상균 신임 임원진(위·수·사)과 사무총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말이다.(사무총국 실장급 가운데도 위·수·사와 임기를 같이 하는 정무직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파업에 관해 단일한 입장이었다고 할 수 없다. 민주노총 지도부 안에는 총파업을 둘러싸고 입장 차이가 상존했다. 한상균 신임 임원진이 총파업 건설에 가장 열의가 있었고 나머지 지도자들 사이에는 온도 차가 있었다. 이것은 단지 ‘정파’ 문제도 아니었다. ‘좌파’로 분류되는 전규석 금속노조 위원장과 조상수 공공운수노조 위원장도 총파업에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거나 난색을 표명하는 입장이었다. 상당수 산별연맹 위원장들은 적어도 상반기에는 공공연히 총파업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보이코트했다. 민주노총 중집에서 총파업이 결정돼도 자신의 산별연맹으로 돌아가 그것을 축소 또는 좌절시켰다. 여느 산별연맹보다 규모가 크고 힘이 센 대규모 단위노조 위원장들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민주노총이 몇 차례 총파업 지침을 내렸다 해서 민주노총 지도부 구성원들이 모두 총파업을 지지했고 그 지침에 따라 행동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얘기다.

이경훈 전 현대차 지부장은 매우 두드러진 사례로, 그는 파업 찬반투표에서 찬성을 밝힌 자신의 조합원들의 의사를 거슬러 4·24 총파업 불참을 선언했다. 그것이 “억지 파업”이라면서 말이다. 이것은 총파업에 초를 치는 행위였다. 이충재 전 공무원노조 위원장은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가 주요 요구 중 하나였던 4·24 총파업이 끝난 직후, 공무원연금 개악에 합의해 버림으로써 뒤통수를 쳤다.

전지윤은 노동자연대가 “지난해 투쟁을 돌아보며 이[이경훈, 이충재, 정의당 지도부 등]에 대한 비판을 강조했다면 이해할 만한 일이었을” 텐데 “의아스럽게도 비판의 화살은 주로 민주노총 지도부와 ‘자주파’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는 난데없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지난해 투쟁을 돌아보는 노동자연대의 글들을 읽어 보거나 우리의 실천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십중팔구 이렇게 이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주된 것과 부차적인 것을 구분할 줄 알기에, 투쟁에 찬물을 끼얹고 배신한 노조 지도자들과 그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노조 지도자들의 문제를 다루는 데서 경중을 매길 줄 안다.

우리가 안타깝게 여기며 비판했던 것은, 한상균 신임 임원진이 이경훈의 “억지 파업” 주장을 즉각 공개 반박하고 현대차 조합원들에게 민주노총의 지침을 따르라고 호소하기보다 그를 ‘보듬고’ 가려 했다는 점이다. 파업 지침 불이행을 단호히 비판하고 집단폭행 사태에 대한 강력한 징계를 추진함으로써 전열과 조합원 사기를 유지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한상균 집행부는 이충재의 배신에 대해서도 공적연금 강화 논리에 혼란을 겪으며 우왕좌왕했다.

전국회의로 말하자면, 중앙은 적어도 상반기에는 총파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전국회의 소속인 주요 단위노조 위원장들이 꼭 총파업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 이경훈 징계 문제에서 중요한 키를 쥐고 있었던 울산지역의 전국회의 경향은 이경훈 징계를 반대했다. 이충재가 배신했을 때 공무원노조 내 전국회의 경향인 중집 성원들은 이충재를 사퇴시키고 새로운 투쟁 지도부 세우기를 꺼렸다. 7월 즈음 전국회의 중앙은 ‘준비되지 않은 총파업’에 대한 ‘피로 확산’ 같은 얘기를 꺼내고 있었고, 안타깝게도 한상균 신임 임원진도 하반기를 준비하며 총파업에 대한 자신감을 상당히 잃고 있었다. 주로 공무원연금 삭감에 대한 저항이 좌절된 것의 후유증이었다.

좌파 노조 지도부와의 제휴 전술에 대한 이해 부족

이런 주장에 대해 전지윤은 노동자연대가 “기층 노동자들은 자신감이 높[은데]” 지도부가 문제였다고 본다며 다시금 자신의 일면적 시각 속에 우리의 주장을 욱여넣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2014~15년 노동자연대의 노동조합 전술은 기층 노동자들이 불만은 많지만 스스로 파업에 나설 만큼 자신감이 높지는 않다는 데 기초하고 있었다. 대신 노동자들은 지도부가 투쟁을 잘 해주기를 바라며 의탁하려 했다. 이런 인식 속에서 우리는 민주노총 임원 선거에 참여해 좌파 지도부 세우기에 일조했다. 파업 지침을 내리도록 좌파 지도부에 촉구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전지윤이 오해하듯이 우리가 좌파 지도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장 조합원들의 자신감이다. 우리는 민주노총 좌파 활동가들이 좌파 지도부가 총파업 지침을 내리도록 지지·압박하고 그 지침을 이용해 기층에서 투쟁을 실질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현장 조합원들의 자신감을 높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현장 조합원들이 스스로 파업에 나설 만큼 자신감이 높지 않을 때 지도부의 파업 지침은 노동자들이 행동에 나설 유리한 조건을 제공할 수 있다. 일종의 우산인 셈이다. 그리고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은 의식 변화를 경험하고 자신감을 높일 수 있다.

이에 전지윤은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총연맹만이 아니라 산별, 연맹, 지부까지 모두 진정한 좌파 지도부로 교체되고, 그래서 파업 지침이 어디서도 막히지 않고 내려갈 때만 총파업이 가능해진다는 말이 된다.” 그의 일면적이고 기계적인 이해가 어디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노동자연대의 전술은 관료체제가 단일해지는 상황은커녕 그 균열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었다. 좌파 지도자의 등장은 관료체제에 균열을 가져오고 사회주의자들은 그에 따른 관료체제의 통제력 약화를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온건한 지도자들도 어쩔 수 없이 총파업을 지지하는 시늉을 하게 하거나 적어도 우파적 영향력을 관철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지난해 민주노총 내 일부에서 일시적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민주노총 신임 임원진은 노동조합 관료 전체의 규범에 순응하는 쪽으로 기울었고, 다른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한 배를 탔다는 생각 때문에 관료 기구 내에 풍파 일으키기를 꺼렸다. 그래서 다른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총파업을 은근히 보이코트하거나 심지어 노골적으로 찬물을 끼얹었을 때도 그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았고, 현장 조합원들이 그들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독려하는 방법을 취하지도 않았다. 분명 한상균 위원장은 총파업 조직에 열의가 있었고 재수감을 마다 않을 크나큰 용기가 있었다. 하지만 총파업을 현실화시키려면 다른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둘러싸인 소수파 지도자라는 한계를 극복할 대안이 있어야 했다.

이런 난점은 민주노총 신임 임원진만의 것은 아니었다. 가장 안타깝게도 좌파들의 문제도 있었다. 노동자연대는 지난해 초에 “현재 기층의 활력이 충분하지 않고, 현장 활동가층이 두텁지 못한 데다 사기도 좋지 않아 어려움이 적잖다”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다음과 같은 과제를 제시한 바 있다. “좌파 지도부의 등장은 투쟁에 좋은 출발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열쇠는 현장 조합원들에게 있다. 좌파 지도자는 매우 훌륭한 투사일지라도 노동조합 관료 전체의 규범에 순응하라는 엄청난 압력을 받는다는 점을 좌파 활동가들은 알아야 한다. 좌파 활동가들의 독립적인 네트워크가 있어야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독자적인 투쟁도 해 나갈 수 있다. 좌파 활동가들은 근시안적이거나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현장 노동자들의 활동과 조직을 발전시키는 것에 주안점을 두면서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그러나 좌파단체들이 협력해 ‘좌파 활동가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일부 좌파들은 좌파 지도부가 세워졌는데 왜 좌파 활동가들이 이로부터 독립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하냐며 이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현장 강화’는 좌파들이 집행부를 잡지 못하는 시기에나 강조될 일이고, 좌파가 집행부를 잡았으니 그것을 떠받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인식이 강한 듯했다. 사실, 좌파 활동가들이 (상대적) 우파 지도부 하에서 ‘현장 조직’을 구축하다가 그에 기반해 집행부를 잡고 나면 모두 ‘위’로 올라가는 바람에 현장에 공백이 빚어지는 현상을 그동안 대규모 단위노조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단결은 어떻게 가능한가?

위와 같은 평가를 하는 것은 누구를 희생양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고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이해하기 위해서다. 반면 전지윤은 민중총궐기를 통해 노동운동의 난점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고 보는 듯하다. 민주노총 총파업은 “처음부터 승산이 높지 않았”는데, “1, 2차 총궐기 등을 거치면서 상황[이] 약간 달라[졌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민중총궐기를 통해 “정파적 차이를 넘어서 단결”했다며 큰 의의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것은 ‘통진당 세력을 배제하지 않는 진보통합’에 대한 그의 고유의 관심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 내에서 총파업을 둘러싸고 입장 차이가 상존했던 것은 앞에서 살펴봤듯이 “정파적 사분오열”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사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민중총궐기에 관해서는 일치된 견해를 가졌다면, 그것은 ‘총파업은 못 한다’는 것을 둘러싼 ‘단결’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민중총궐기 이후 “민주노총 3차 파업”의 “규모와 위력이 커지는 변화를 보였다”는 전지윤의 주장은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의 과장이다. 오히려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민중총궐기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총파업을 하겠다’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보는 게 현실에 더 부합할 것이다. 민중총궐기 직후 민주노총과 산하 노조들에 대한 압수수색, 한상균 위원장 체포 위협 속에서도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파업을 결정하지 않았다. 12월 16일 총파업은 완성차 3사가 참가하긴 했지만 주야2시간의 형식적 파업에 그쳤다. 1월 25일 정오를 기해 들어가기로 한 “무기한 총파업” 결정은 사실상 이행되지 않았다.

민중총궐기라는 형식이 일반으로 총파업에 비해 단결 강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이윤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자기 고유의 힘을 발휘했을 때 노동계급 내부의 분열을 극복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중간계급과 청년·학생 그리고 미조직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도 받을 수 있다.

반면 전지윤은 “자기 조합원들의 조건과 경제적 요구에 따라서 칸막이화되고 각개 약진·격파 당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현재의 문제”인데, 노동자연대가 “자기[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조건”과 “경제적 요구”를 너무 강조하는 것은 문제라고 비판한다. 이래 가지고는 현재 노동운동의 약점을 극복할 수 없다면서 말이다. 우선, 노동자연대는 민주노총 총파업이 세월호 참사 같은 전 사회적 쟁점을 다뤄야 한다고 항상 주장해 왔음을 환기하고자 한다. 공무원연금이나 노동법 같은 문제는 그 자체로 정권의 생사여탈을 좌우할 만한 정치적 이슈이기도 하다. 우리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더 불이익을 줄 쟁점들에 맞서서도 자신들의 조직된 힘을 사용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자신의 조건이나 경제적 요구를 위해 싸우는 것이 곧 칸막이 위험을 가져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싸워서 자신의 조건을 지키지 못한 노동자들은 다른 노동자들의 문제에 연대하고 나설 자신감이 생길 수 없다. 자신의 투쟁을 전투적으로 벌이면서 다른 노동자 부문의 투쟁을 고무하고 연대해야 노동계급의 단결이 강화될 수 있다. 전지윤은 조직 노동자들 자신의 요구들을 양보하거나, 요구들 가운데 민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만 내세워야 “사회적 고립”을 극복할 수 있다는 노동운동 내 널리 퍼진 경향에 타협하고 있다. 그는 (다른 글에서) 특정 부문의 요구가 아니라 “더 넓은 사회적 지지와 연대를 불러 올 요구들이 앞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지윤은 모른 체하지만, 비정규직 2법 저지, 최저임금 대폭 인상, 공적연금 강화 등은 노동계가 더민주당이나 시민단체들도 지지해 줄 것이라고 믿는 요구들이다. 지난호 내 글[3]에서 밝혔듯이, 물론 우리도 “이 요구들을 지지했다.” 문제는 이 요구들을 지지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대신 잘 조직된 부위의 노동조건을 겨냥해 퍼붓는 정부의 공격들을 외면하는 것이다.

이처럼 조직 노동자들의 부문적 요구를 당당하게 밝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면, 박근혜의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 전술에 결코 단결로 맞설 수 없다. 계급동맹을 추구하는 개혁주의자들은 조직 노동자들이 ‘계급 이기주의적’ 요구나 투쟁을 자제해야 중간계급과 청년·학생 그리고 미조직·비정규직과의 “단결”을 강화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혁명적 사회주의자라면 마땅히 다른 모델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노동자 계급이 농민과 맺은 관계에서 찾을 수 있는데, 당시 노동자 계급은 그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오직 노동자 권력(소비에트)만이 농민에게 평화와 빵을 보장해 줄 수 있음을 입증함으로써 농민을 자기 편으로 이끌 수 있었다.

전지윤은 노동운동을 진단하면서 민주노총의 동력 축소, 조직 노동자들의 사회적 고립, 정파 분열과 부문주의 비판 같은 이런저런 유행을 수용하고 있다. 이런 진단들은 흔히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계급론이나 가치론에 대한 이견과 닿아 있고, 사회 변혁 주체로서 노동계급에 대한 회의로 연결된다. 전지윤의 핵심 문제의식 하나도 계급투쟁과 그 주체에 대한 인식을 “생산과정을 넘어서” 생활과 소비 영역으로, “노동자를 넘어서” 자본주의에서 갈취당하는 모든 사람들로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노동자들이 생산 지점에서 벌이는 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편협한 인식이라도 되는 양 비판한다. 그러나 그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져 보고 싶다.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누가 이윤의 원천인 잉여가치를 만드는가, 그것을 되찾을 힘은 누구에게 있는가?

마르크스가 왜 체제 변혁적 노동운동을 위해 《자본론》을 썼는지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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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6년 3월 16일에 발행된 〈노동자 연대〉 169호에 처음 실린 글이다. [본문으로]

[2] 전지윤, ‘예측이 어긋나면 스스로의 분석부터 돌아봐야’, 2016년 3월 9일 [본문으로]

[3] 〈노동자 연대〉 168호에 실린 ‘2015년 노동자 투쟁에서 민중주의 vs 계급정치’를 가르킨다. 본 소책자에 실려 있다. [본문으로]

전지윤은 기회주의적 처신을 중단해야 한다[1]

최일붕

민중주의에 관해 설명했던 원래 내 글은 공개 논쟁을 유도할 목적으로 쓴 게 아니고, 특히 전지윤을 주로 겨냥한 것도 아닌데, 그가 제 발이 저렸는지 몰라도 공격하는 바람에 그와 논쟁을 해야 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에서 레닌이 민중주의자들(나로드니키)과 논쟁해야 했고, 남아공 사회주의자들이 지금까지도 민중주의자들인 아프리카민족회의-공산당-코사투노조관료 삼각동맹과 논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이해가 간다.

대체로 우리 단체는 엔간해서는 종파주의자들과 논쟁하지 않는다. 종파는 ― 소종파든 좀 덜 소규모인 종파든 ― 그 정의상 있으나 마나 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파는 흔히 기회주의적이기도 해서, 매우 중요한 몇몇 이슈들에서 때로 개혁주의자들의 입지를 강화해 주기도 한다. 가령 조직 노동자 운동이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으므로 미조직 노동자와 더 폭넓은 ‘민중’의 지지를 받아야 ‘고립’을 면할 수 있다는 전지윤의 주장은 민중주의자들의 개혁주의적 주장과 일치한다. 특히, 그의 ‘민중총궐기 평가와 2016년 전망’이라는 글에서 이 주장이 잘 드러난다:

“그런데 이런 개악[노동개악]을 막아낼 힘을 가진 조직 노동운동은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었다. 조직된 노동자와 나머지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를 만들어 온 지배자들이 이제 그것을 이용해 노동자들을 이간질했다. 조직된 노동운동의 현장 동력은 그동안 이런 공격을 저지하기에 충분치 못한 상황이었다. …

“정부의 탄압은 크게 두 가지를 노렸다. 먼저 기층 민중운동 단체들이 고립을 넘어서 더 넓은 외연 확장을 이루지 못하도록 차단하려 했다. 더불어 기층 민중운동 단체들 사이에 다시 틈을 벌려서 분열을 일으키고 단결을 가로막으려 했다. ‘불법·폭력·종북’을 부각하며 시민사회 진영과 중간층이 민중진영과 거리를 두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

“민중총궐기의 성과를 이어서 세월호 진실 규명, 교과서 국정화 반대, 일본군 ‘위안부’ 합의 폐기, 백남기 쾌유 기원과 책임자 처벌 등을 위한 투쟁들을 서로 연결, 결합시키고 힘을 모아서 더 큰 투쟁을 건설하려는 노력도 계속돼야 한다. …

“민중총궐기의 경험과 성과와 이번에 구성된 투쟁과 연대의 네트워크가 이어져야 한다. 진보진영이 공동의 요구를 중심으로 단결하며, 기층에서 주장하고 토론하며 더 광범한 대중을 견인하면서 투쟁을 건설해나간다는 방향을 중심축으로 삼고, 이에 따라 다양한 투쟁과 총선 등이 배치돼야지 그 역이 돼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먼저 노동·농민·빈민 대중조직과 사회운동단체들의 결집이 단단히 유지되고 기층과 지역으로 더 깊숙이 뻗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노동자 민중 운동의 단결력과 투쟁력을 키워 나가야 한다.”

그 글에서 노동계급과 특히 조직 노동계급의 역할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다. 그리고 노동자 연대보다 민중 연대가 선차적일뿐더러 더 중요하다. “시민사회 진영과 중간층”도 꽤 중요한 세력으로 취급된다.

민중 연대는 단순한 전망이 아니라 전략으로 제시되고 있다. 전망과 달리 전략은 선택이고 계획이다. 전지윤은 민중총궐기를 둘러싼 제(諸) 민중단체 연석회의에서 혁명가들의 민주노총 총파업 주장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는 불가피하지 않았으므로 선택이었고, 자민통계의 대안을 지지했으므로 혁명가들의 계획을 대신하는 계획이었다.

이에 전지윤은 내가 비판하는 그의 입장이 “[자신이] 그동안 써 온 글과 … 정반대의 태도”라며 마치 내가 허수아비 때리기를 했다는 듯이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연석회의 석상에서 총파업 촉구를 거부한 것은 그 자신이 블로그 등에서 한 주장과 모순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논리적 귀결이다. 위 인용문(특히 그 앞부분)만 해도 노동자들의 파업 잠재력에 대한 그의 불신을 보여 준다. 또한 첫 민중총궐기 두 달 전부터 “민주노총 1,2차 파업은 … 동력의 아쉬움을 확인하는 과정”(2015.9.15)이라고 야박하게 또 일면적으로 평가했다. 무엇보다도 “파업 선언이나 노조 지도부에 대한 압박만으로는 파업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2016.2.4)고 쓴 것은 그가 총파업 촉구를 지지하지 않은 나름의 이유를 든 것이다.

한편 그는 내 반론 속의 일부 표현, 특히 민주노총에 총파업 촉구하는 것을 그가 “냉담”하게 “거절”했다는 문구를 문제 삼는다. 말꼬리 물고 늘어져 관심을 딴 데로 돌리는 속임수에도 대응해야겠다. ‘냉담’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대상에 흥미나 관심을 보이지 않음’이고, ‘거절’의 정의는 ‘요구, 제안, 선물, 부탁 따위를 받아들이지 않고 물리침’이다. 그가 민주노총 총파업에 흥미나 관심을 보였고, 사회주의자들의 민주노총 총파업 요구·제안을 받아들였나? 주어진 전략·전술 선택지 가운데 그가 한 대안적 선택, 대안적 계획이 본질적인 문제다.

전지윤이 분석의 일관성과 그에 기반한 실천을 지향한다면, 그리고 정말로 논쟁으로 생산적 결과를 얻기를 바란다면 자신이 한 말을 부인하기보다는 그 주장을 떳떳하게 밝히면서 논쟁해야 할 것이다.

전지윤이 빈말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는 자기 지지자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고자 노동자연대의 운동 기여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운동에 기여”한다는 것은 개입(단순한 선전·선동을 넘어선 실질적 개입을 말한다)의 능력과 개입 사실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개입 능력과 개입 사실이 모두 있는 단체의 ‘예측과 분석’이 전지윤 주장대로 틀렸다면, 그 영향은 우리 단체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 운동 자체에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전지윤의 두 가지 말, 즉 우리 단체의 운동 기여론과 우리의 분석·예측 오류론은 서로 모순된다. 그래서 그가 가식적인 말을 하며 사람을 조종하려 한다는 불평을 그의 한때 지지자들이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지윤 자신의 ‘분석과 예측’을 살펴보자. 거리 항의가 크게 벌어지자 갑자기 자기의 ‘분석과 예측’이 옳았다는 도취감에 빠진 듯하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 거리 항의를 경원시했나? 세월호 참사 항의에 우리 단체는 관련 기구 공동집행위원장 자격으로 참가할 수 있었고, 우리 대학생 회원들도 매우 능동적이고 열성적으로 대학생 연합 시위를 공동 조직했다. 학생 회원들은 심지어 국정교과서 문제를 놓고도 ‘언론빨’을 탈 만큼 두드러졌다. 분파 활동 이래 ‘거리(street)’와 ‘파업(strike)’을 대립시킨 건 오히려 전지윤 자신이었다. 그는 철도 파업 건설에 실로 몰입을 해도 모자랄 만큼 역량과 습관(관성)과 적성이 치우쳐 있던 소속 단체의 막대기 구부리기를 방해했다. 탈퇴 이후로도 노동계급(특히 조직된)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쓰레기 분석들과 그런 상태를 장기적 추세로 성격 규정하는 해외의 쓰레기 이론들을 수집하는 데 열을 올렸다.

물론 공무원연금 투쟁은 끝났고, 패배했다. 그러나 전지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어떤 투쟁이 패배하면 그 투쟁에 가장 헌신적이고 열의 있게 뛰어든 좌파는 분석과 예측이 잘못됐다는 비판을 받아야 하나? 2008년 촛불 운동의 패배를 예측하지 못한 우리 단체의 분석은 잘못됐다고 비판받을 일이었던가? 2000년대 중엽 반전 운동이 노무현의 이라크 파병을 막지 못했다고 해서 반전 운동에 의욕적이었던 우리 같은 단체들은 운동이 ‘패배’했고 우리의 ‘예측’이 잘못됐다고 평가해야 했나?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은 패배했나? 그리고 우리의 분석과 예측은 어땠나?

이런 식의 물음 자체가 천박하다.(그리고 실증주의적 사고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지난해에 한정해 말하자면, 좌파라면 아쉬움이 전혀 없을 수 없다. 수감중인 한상균 위원장과 민주노총 신임 집행부조차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노동개혁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예측과 분석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조금치도 사리에 맞지 않는다.

2016년 3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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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6년 3월 22일 〈노동자 연대〉 웹사이트에 처음 실린 글이다. [본문으로]

신자유주의와 노동계급의 잠재력

강동훈

전지윤 씨(이하 존칭 생략)는 지난해 노동운동을 평가하면서 ‘부문적 요구가 아니라 계급 전체의 요구를 내놓아야 한다’, ‘민주주의를 주요 요구로 부각해야 한다’는 등의 입장을 내놓으며 조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전진시키려 내놓은 노동자연대의 전술을 비판했다.

전지윤이 이런 입장을 나름 체계적으로 뒷받침하려고 시도한 글이 ‘신자유주의와 노동운동 새로운 투쟁의 도약을 위해’[1]이다.(아래에서 페이지만 표시한 인용은 모두 이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전지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주장과 달리) 신자유주의는 자유경쟁 자본주의, 독점 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 단계를 이은 새로운 자본주의 단계이다. 신자유주의 단계에서 지배계급은 노동운동에 대한 대대적 공격, 노동 유연화, 자본의 시공간적 재배치와 강탈적 축적, 금융화, 경찰국가화 등으로 새롭게 이윤율을 끌어올렸다.

(2)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서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은 “좀 덜 뺏길 수 있었”지만(89쪽), 결과적으로 조직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 사이의 격차는 더 커졌고 분절화됐다.

(3) 노동자들이 분절화된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부문적 요구를 내세운 투쟁은 무의미하거나 해롭다. 노동조합은 본질상 노동자의 부문적 요구를 내세우는 기구이기 때문에 노동운동 발전의 “족쇄”가 됐다. 노동현장(작업장) 투쟁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노동운동을 ‘협소화’하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 “자본축적 과정에서 자산과 공동체를 강탈당한 사람들”(123쪽)로까지 “주체의 확장”(120쪽)을 해야 한다.

전지윤이 주장하는 핵심 요지는 ‘노동조합이 노동운동의 족쇄가 됐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한계가 있다는 수준의 비판을 넘어 족쇄라고 규정하는 것은 노동현장에서의 노동자 투쟁을 중시하고 노동조합을 중요한 노동자 투쟁 조직으로 보며 이 운동에 개입하려고 해 온 마르크스주의 전통으로부터의 완전한 일탈이다. 물론 전지윤은 마르크스·엥겔스·레닌·룩셈부르크·그람시[2] 등에게서 한두 문장을 아전인수 식으로 인용하며 이를 마르크스주의라고 포장하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분석, 역사적 경험을 완전히 무시한 주장일 뿐이다.

그리고 노동현장에서의 투쟁과 노동조합을 무시(혹은 부차화)하는 전지윤은 “노동계급 중심성의 재해석”(120쪽)을 말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온갖 다양한 형태로 빼앗기는 사람들로까지 사회변혁의 주체를 확장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결국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노동계급 중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지윤은 노동자연대가 이전 시대와 신자유주의 시대의 연속성을 강조한다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노동자연대가] 신자유주의적 변화 이전의 분석, 주체 설정, 전략과 전술 등을 대체로 고수하는 것으로 연결됐다. ……

노동자연대도 이런 입장에 따라 거의 10년 가까이 ‘조직 노동자들이 여전히 가장 중요하며 그들의 작업장에서 파업, 점거 같은 방식으로 대대적 투쟁에 나서는 일이 곧 벌어질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작업장이 여전히 저항의 중심’이라며, 이런 투쟁의 부활을 ‘[노동]계급의 귀환’이라고 불렀다.(57~58쪽)

즉, 전지윤은 노동자연대가 노동현장에서의 저항을 중시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변화 이전의 분석, 주체 설정, 전략·전술을 고수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결국 그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노동현장에서의 투쟁이 중심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지윤과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적 변화가 아무리 새롭다고 하더라도(따라서 설사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라 하더라도) 노동현장에서의 투쟁이 중심적이라고 생각한다. 노동계급 중심성과 노동현장에서 투쟁의 중요성은 임금노동자에 의존해 이윤을 생산해야만 한다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고전적 자유경쟁 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로, 그리고 다시 국가자본주의로 변해 왔지만, 이 중요성이 변한 적은 없다.

물론 특정 정세에서 노동현장 투쟁에 전술적 강조점을 둘 것인지는 판단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연대는 노동현장에서 노동자 투쟁의 중요성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지만, 2000년대 초반에는 반전운동 건설에 전술적 강조점을 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전술적 판단의 근거와 자본주의가 현재 어떤 단계인지는 직접 연관되지는 않는다. 전술은 특정 정세에 대한 구체적 판단에 따르는 것이지, 장기적인 자본주의의 변화와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지윤의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한 가지 더 지적해야 할 점은, 설사 전지윤의 주장 (1), (2)가 참이더라도 (3)까지 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영국에서는 안정적 형태의 임금노동과 더불어 대량 실업이, 그리고 훨씬 더 불안정하고 비공식적인 형태의 노동이 공존했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는 (전지윤도 인정하겠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주의는 19세기의 자본주의와 닮았으며 19세기의 자본주의로 회귀한 듯한 면도 있다.

그런데 19세기에는 이처럼 안정적인 임금노동과 불안정 노동이 공존했음에도 매우 투쟁적인 노동자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한 운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안정적인 임금 노동자들이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을 조직해서 그들의 처지를 자신들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 영국의 항만 노동자들이 정확히 그러한 사례다. 19세기에 영국 항만 노동자들은 전형적인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이었지만 20세기에는 전형적인 조직 노동자들로 변모했다.[3]

즉, 노동의 불안정성이 커지고, 조직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 사이에 격차가 커졌더라도, 가능한 모든 노동자들을 노조에 가입시키고 임금과 고용조건을 개선해 조직 노동자들을 포함한 노동계급 전체의 임금과 노동조건 수준을 끌어올리자는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다.(따라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러저러한 논의나 노동의 유연화·분절화 등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부차적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는 이 책에 실린 ‘[보론1]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새로운 단계?’를 보시오.)

그러나 이런 대안이야말로 전지윤이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일 게다. 전지윤이 2014년 3월 노동자연대를 탈퇴한 핵심 이유가 조직 노동자 운동에 대한 개입 강화 정책에 반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지윤은 노조의 부문주의적 한계를 (불균형하게) 강조하며 이를 노조가 노동운동의 족쇄가 된 근거로 제시하는데, 이 주장에 따르면 결국 노조는 단지 신자유주의 시대뿐 아니라 자본주의에서는 언제나 노동운동의 족쇄라고 주장하는 셈이 된다.

노동의 분절화

전지윤은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라고 주장하면서 그 주요 특징 하나로 ‘노동의 유연화’를 언급한다. 한국에서도 신자유주의 시대에 “외주화, 사내하청, 임시직, 파트타임, 이주 노동력의 도입 등이 대대적으로 추진”됐고(80쪽), 원청기업이 하청업체로 일을 넘기고, 다시 하청업체가 재하청을 주면서 “노동시장이 끝없이 분절되고 격차가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88쪽)는 것이다. 그의 글에서 노동의 유연화, 불안정성, 분절화를 다룬 부분은 꽤 긴데, 사실 이 부분에서 전지윤은 좌파와 노동운동 사이에 널리 퍼진 ‘상식’, 즉 노동계급이 분절화돼서 싸우기 힘들어졌다는 주장을 반복할 뿐, 그의 독창적 분석은 거의 없다.

우선, 전지윤은 노동의 불안정화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는 노동자연대의 주장을 알고 있을 텐데도, 이에 대한 언급이나 별다른 분석을 시도하기보다는 다양한 통계로서 현상을 묘사할 뿐이다. 예를 들어 김유선의 비정규직 통계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넘어간다. “‘비정규직 비율은 2007년 3월 55.8%를 정점으로 2015년 3월에는 44.6%로 8년 사이 11.2%포인트 감소’했다. 하지만 정부 통계가 사내하청과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으로,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자영업자로 잘못 분류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비정규직 규모는 50%를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결국 한국 전체 노동자 중 비정규직의 비율은 50퍼센트를 조금 넘는 수준에서 굳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87쪽) 비정규직 비율이 줄어드는 추세(또는 일정 수준을 유지하는 추세)는 분명 자신의 주장에 반하는 것인데도 이를 따로 분석하려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게다가 비정규직으로 뭉뚱그려진 노동자들의 처지가 동일한 것도 아니다. 상용직이지만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 학교비정규직처럼 계약직이지만 매년 계약이 갱신될 것이 거의 분명한 노동자 등이 비정규직 통계에 포함된다. 이런 노동자들의 경우, 고용 불안정보다 저임금과 차별이 중요한 쟁점이 된다. 또한 상당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상시 업무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 등도 봐야 한다. 그래서 ‘상시 고용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주요한 의제로 떠오르는 것이다.

둘째, 전지윤은 좌파와 노동운동 속에 널리 퍼진 ‘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계급 내의 격차만 확대한다’는 주장도 거듭 반복한다. “노조 조직률이 대규모 사업장에서 특히 높다는 점을 볼 때 노조 유무가 더 주된 변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민주노조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좀 더 많은 것을 얻어 낼 수 있었고, 신자유주의 공세에서도 좀 덜 뺏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속에서 역설적으로 노동자들 사이의 분절과 격차는 더 확대돼 왔다.”(89쪽)

이렇게 인식하는 전지윤이 ‘정규직의 양보로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해 격차를 줄이자’는 ‘사회연대전략’으로 이끌리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는 “조직 노동자들에게 단기적·부문적으로 조금 손해라고 하더라도 장기적·전체적인 계급이익을 위해 연대와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128쪽) 전지윤이 “진정성의 정치”(128쪽)라고 부르는 이런 주장은 장기적인 ‘계급 형성’을 위해 정규직 노동자들이 국가·기업주에 양보해 단기적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사회연대전략’과 차이가 없다. 그는 ‘사회연대전략’이 “단결과 투쟁이 아니라 양보와 투쟁 회피 차원에서 제기”[4]되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 투쟁을 제기하는 자신의 주장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회연대전략’ 지지자들도 민주노총이 ‘보험료 인상, 노동자 세금 인상으로 보편적 복지 확대’를 ‘공세적’으로 제기하며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점을 볼 때, 전지윤의 반박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여기서 전지윤도 ‘사회연대전략’을 주장하는 개혁주의자들과 똑같은 함정에 빠진다. 그가 보기에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는 투쟁에 나서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전체 노동계급의 이해를 위한 투쟁에 나설 수 있느냐는 점 말이다.

셋째, 전지윤과 마찬가지로 ‘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계급 내의 격차만 확대할 뿐’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급진좌파의 일부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반면, 비정규직·미조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에는 적극 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전지윤은 이런 방식도 거부한다. “정규직의 연대를 기대하기 힘든 조건에서 비정규직이 조직화를 하고 투쟁에 나서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갈수록 단결과 투쟁보다는 ‘정규직 자리로 올라가는 좁은 길 위에서 경쟁’이 현실적 선택이 됐다”(98쪽)면서 말이다. 이런 주장은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정규직의 연대가 없으면 비정규직 투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한 주장이다.

물론 전지윤은 새로운 노동자 부문이 조직되고 투쟁에 나서면서 노동운동에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지난한 투쟁을 버텨내며 노조 인정 등을 통해 노사관계의 제도 안으로 들어온 노동자들도 곧 빠르게 민주노조 운동 속에 만연한 여러 가지 관행과 타성에 젖어 들곤 했다”며 그 의미를 깎아내린다.(107쪽)

이처럼 비정규직 조직화에도 부정적인 태도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노동조합 운동과 노동현장에서의 투쟁이 효과가 없거나 심지어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는 전지윤의 인식과 연결돼 있다.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의 족쇄?

전지윤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계급이 분절화돼 있기 때문에, 임금 인상 같은 특정 부문의 요구를 내세우며 싸우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심지어 해롭다고 본다. 그 본질상 부문주의적 조직인 노동조합도 노동자 사이의 격차를 키워 오히려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킨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정규직 노동자든 비정규직 노동자든 노동조합을 만들어 자신의 요구를 내세우며 싸우는 것에 부정적이다.

우선, 전지윤은 노동계급의 힘을 ‘구조적 힘’(파업 등으로 노동현장에서 갖는 힘)과 ‘연합적 힘’(연대)으로 구분하고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연합적 힘’과 연결되지 않는 ‘구조적 힘’은 매우 제한적인 효과만을 내거나, 심지어 역효과를 내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 파업으로 임금 인상의 경제적 효과를 얻는 경우에도, ‘비정규직을 외면하고 자기 밥그릇만 챙긴다’는 이간질 속에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정치적 역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118쪽, 강조는 인용자)

마찬가지로 전지윤은 이렇게도 주장한다. “조직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정당한 이해와 고유한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는 것이 낳는 경제적 성과만을 봐서는 안 된다. 정치적 쟁점이나 비정규직의 투쟁과 요구를 외면한 채, 자신들의 요구만 앞세운 그런 투쟁이 낳을 정치적 효과를 같이 봐야 한다.”(127쪽)

다시 말해, 전지윤은 파업의 효과가 ‘경제적 효과’뿐인 것처럼 보면서, 지지와 연대를 받지 않는 파업은 오히려 역효과만 낸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전국에서 정규직 노동조합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내세우며 파업을 벌이면 굉장히 커다란 정치적 역효과만 낳는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전지윤의 말과 달리 파업은 단지 경제적 이득을 얻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물론 파업은 흔히 노동자들이 임금과 노동조건을 향상시키려고 시작된다. 하지만 파업을 하다 보면 연대감과 집단의 자부심이 높아지고, 이것이 처음에 들고 나왔던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향상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인한 온갖 고통을 참아내면서 뜨거운 동지애를 발휘하고, 기업주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된다. 나아가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고용주와 주변 동료만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 전체와 노동자 계급 전체를 생각하도록 가르치고, 국가의 본질에 대해 눈뜨게 만든다.

따라서 전지윤의 주장과 달리 노동자들이 설사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향상만을 위해 파업을 하더라도 노동자들의 의식과 조직 발전이라는 결과를 남긴다. 이 때문에 엥겔스와 레닌은 “파업은 [계급]전쟁의 학교”라고 주장해 온 것이다. 물론 노동자들이 자기 고유의 요구뿐 아니라 정치적 쟁점이나 자신들보다 처지가 열악한 노동자들의 요구까지 내세우며 싸울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수준으로까지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높아지기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이 자신의 요구를 가지고 파업에 나서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게다가 전지윤은 조직 노동자들이 ‘구조적 힘’(파업)을 발휘함으로써 미조직 노동자들과 다양한 민중의 ‘연합적 힘’을 강화한다는 ‘노동계급 헤게모니’와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파업은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저렇게 투쟁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미조직 노동자나 여러 민중의 지지를 얻어 내는 구심이 될 수 있다.

둘째, 이처럼 파업 자체가 갖는 효과를 무시하는 전지윤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파업이 점점 어려워지고 효과도 별로 없다는 주장도 한다.

특히 오늘날 ‘연합적 힘’은 갈수록 더 중요해지고 있다. 파업 등 노동계급의 ‘구조적 힘’을 봉쇄하거나 약화시키려는 지배계급의 대비와 노하우가 꽤나 축적돼 있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은 파업에 나서기 힘들도록 제도적 장벽을 쌓아 왔다.

파업이 시작되면 그 파괴력이 최소화되도록 온갖 장치를 마련해 왔다. 또 파업에 대비해 물량을 비축하거나, 대체 생산을 통해 시간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다. 지배계급은 오랜 경험 속에서 배우며 이런 수단들을 발전시켜 왔다.(117쪽)

지배자들이 파업을 막기 위해 “오랜 경험 속에서 배우며” 이러저러한 수단을 동원하는 게 신자유주의 시대만의 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전지윤은 위의 주장과 정반대되는 주장도 한다. “적기생산방식과 하청체계 등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가 이런 ‘구조적 힘’[파업]을 오히려 더 강하게 한 측면도 지적한다. 재고를 최소화한 상태에서 비교적 소규모 하청부품업체 노동자들의 파업이 원청업체의 전국적 생산망 자체를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이다.”(111쪽)

이런 모순되고 어설프게 절충적인 서술은 전지윤 식 글쓰기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의 글 내용의 전체 방향은 파업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강조하는 데 있다.

셋째, 이처럼 부문의 이익을 위한 파업은 “역효과”를 낸다고 주장하는 전지윤은 노동조합의 필요성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나아간다.

그동안 살펴봤듯이 이것은 ‘전략의 부재’ 때문이기보다는, 노동조합의 한계와 틀 안에서 투쟁해 온 전략의 결과로 봐야 한다. …… 노동운동의 발전과 노동자들의 삶의 질 개선을 가져오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던 노동조합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서, 그 반대의 효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112쪽, 강조는 인용자)

마찬가지로, 전지윤은 바로 이 인용문에 붙인 각주에서는, “마치 자본주의가 인류의 생산력 발전에 큰 기여를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족쇄로 변화하는 것처럼 이것은 ‘역사의 변증법’이라 할 만하다”라고까지 말하면서 노동조합이 노동운동 발전의 족쇄가 됐다고 주장한다.(112쪽 각주 203)

즉, 전체 계급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는 부문적 투쟁은 물론이고, 노동자의 일부만 단결시키는 조직인 노동조합(아무리 큰 노조도 전체 노동자를 포괄하지는 못하므로) 자체가 역효과를 내고 운동의 족쇄가 될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경제 위기가 지속되면서, 체제 내에서 노동조건의 개선을 추구하는 노동조합 운동의 한계는 더욱 두드러졌고, 노동자들의 분열과 개인주의는 커졌다. 노동계급 내에서 분절은 대기업 정규직, 대기업 직접고용 비정규직, 간접고용 비정규직, 파견 비정규직, 부품 외주업체 정규직, 이주 노동자 등 더 세분화돼 갔다. 그럴수록 단결은 더 어려워졌고, 단체행동의 효과는 줄어들었다.”(98쪽)

전지윤이 “역사의 변증법” 운운하는 것을 보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서야 노조가 운동의 족쇄가 됐다고 보는 듯하다. 실제로 전지윤은 “2차 대전 이후 서유럽에서 계급투쟁의 ‘상승기’나, 이 나라에서 87년 이후 민주노조 운동의 전성기에 조직 노동자들의 파업과 작업장 투쟁이 중요했던 것은 사실”(122쪽)이라고 말한다.[5]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계급의 분절화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건대, 전지윤은 장기호황기 노동계급은 균일한 집단이었던 것처럼 보는 듯하다. 그러나 언제든 노동계급은 임금이나 노동조건 등이 균일할 수 없다. 그리고 지배자들은 언제나 이런 차이를 노동계급을 이간질해 각개격파하려는 데 사용한다.

또, 그가 장기호황기에 포드주의나 케인스주의가 말하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고(지배자들의 공세가 약했다고) 보는 것도 착각이다. “[장기호황기에 미국에서] 자본이 노동자의 몫을 유지하는 원칙을 감수하였다거나, 생활비와 생산성 상승에 보조를 맞추어 임금이 증가하는 것을 제한하려는 필사적인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투자와 소비 또는 임금과 이윤을 어떻게 분할할 것인가에 대한 스웨덴에서와 같이 일반화된 ‘사회계약’과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6]

이런 점에서 보면, 전지윤의 다음 주장은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노조가 운동의 족쇄가 됐고, 부문적 요구를 위한 투쟁은 역효과를 낸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박이다. “[장기호황기라는] 이 예외적 시기를 제외하고는 자본주의의 발전은 항상 불안정성과 노동조건에 대한 가혹한 공격을 수반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19세기와 20세기를 수놓은 주요한 노동자 투쟁 물결의 배경이었다. 노동자들은 안정적 조건 덕분에 노조를 만든 게 아니라 불안정하고 열악한 조건에 분노해서 투쟁에 나섰고, 안정성과 조건 개선은 투쟁이 낳은 성과였다.”(110쪽)

전지윤의 주장처럼 19세기와 20세기에 노동계급은 대체로 불안정하고 노동조건을 가혹하게 공격받았지만 대규모 투쟁을 벌였다. 19세기와 20세기에도 투쟁 수준이 낮은 시기에는 노동계급이 더는 싸울 수 없다는 주장이 유행했다. 어떤 사람은 노조로 조직된 상층 노동자들이 부유하고 안락한 삶에 빠져 더는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봤고, 다른 사람들은 열악한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을 보며 그들은 너무 불안정하고 분열돼서 싸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은 결국 분출했고, 당연히 이것은 노동조합을 통한 대규모 조직화와 파업 등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왜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노동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싸울 수 없고, 싸우면 안 된다는 것인가? 전지윤이 노동계급의 분절화와 지배자들의 공격을 이유로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조합이 족쇄가 됐다고 보는 것이라면 이는 사실상 자본주의 시대에는 언제나 노동조합이 족쇄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다른 한편, 전지윤은 노동조합을 운동의 족쇄로 보는 자신의 주장을 마르크스주의로 포장하기 위해, 마르크스가 쓴 《임금, 가격, 이윤》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한다.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은 현존 제도가 빚어낸 결과를 반대하는 유격전에만 자신을 국한하고 이와 동시에 현존 제도가 변화하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조직된 힘을 노동자 계급의 종국적 해방을 위한, 말하자면 임금 제도의 궁극적 철폐를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실패한다.”

그러나 이 문구를 노동조합과 부문적 요구를 내세운 투쟁을 부정하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맥락에서 완전히 떼어 낸 인용으로, 오히려 마르크스의 주장에 대한 왜곡이다. 마르크스는 임금 인상 투쟁(부문적 요구)과 노동조합을 무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임금 인상 투쟁을 무시하는 존 웨스턴 같은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려고 《임금, 가격, 이윤》을 썼다.

전지윤의 주장과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이 부문적 요구를 내세우며 투쟁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조합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이 조직과 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을 돕고, 이렇게 발전시킨 힘과 자신감으로 전체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투쟁에 나서게 돕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타도로까지 나아가도록 촉진하려 한다. 그리고 전체 계급의 이익을 앞세우고 자본주의 타도로까지 노동계급의 의식과 힘이 발전하도록 하는 과제를 (신디컬리즘처럼) 노동조합에 맡겨 두지도 않는다. 이런 구실은 주되게 혁명가들과 혁명정당의 과제다. 그런데 전지윤의 글에는 혁명가들의 과제는 나타나지 않는다.

넷째, 이처럼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내세우며 벌이는 투쟁 속에서 의식과 조직, 자신감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전지윤은 노동자들이 어떻게 전체 계급의 이익을 위한 투쟁에 나설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고 보는가?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높이고, 단결시키는 ‘요구’를 내세우면 된다는 것이다. “부문과 업종을 넘어서 모든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되고 연대를 가능케 할, 나아가 더 넓은 사회적 지지와 연대를 불러올 요구들이 앞세워져야 한다.”(119쪽)[7]

그러면서 전지윤은 자기 나름으로 대안을 내놓는다. “세월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부자 증세와 복지 확대, 노동구조 개악 반대, 한미일 군사동맹 구축 반대, 핵발전 폐기 등 부문을 넘어선 공동의 요구들을 세워 나가는 것이 이런 연대 건설을 위해서도 효과적일 것이다.”(119쪽)

이처럼 부문적 요구가 아니라 계급 전체의 이해를 나타내는 요구를 잘 내놓으면 된다는 주장을 보자면, 전지윤은 강령 물신주의에 빠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요구(그리고 강령)에 무슨 마법적 힘이 있는 게 아니다. 문제는 노동자들을 어떻게 하면 높은 수준의 요구를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도록 도울 것인지이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이를 위해 부분적 요구를 위한 투쟁이나 개개의 노동자 그룹의 부분적 투쟁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예를 들어, 코민테른은 국유화 같은 그럴듯한 요구로 당면하고 부문적인 노동자 투쟁을 외면한 개혁주의·중간주의 정당과, 부문적 요구를 제기하는 것은 모두 개혁주의라고 비판하며 노동조합과 의회에 개입하기를 꺼리는 초좌파들을 이렇게 비판했다.

노동자계급은 현재 모든 자본주의국에서 수많은 가공할 만한 재해로 인해 고통받고 있으므로 그들을 억누르고 있는 그 모든 하중, 비 오듯 쏟아지고 있는 돌더미에 대한 투쟁을, 탁상공론식으로 고안된 하나의 과녁에 집중시킨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반대로 중요한 것은 대중의 모든 요구를 혁명적 투쟁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인데, 이러한 혁명적 투쟁이 서로 결합하여 비로소 사회혁명의 강력한 흐름을 이루는 것이다. ……

부분적 요구를 위한 투쟁이나 개개의 노동자그룹의 부분적 투쟁이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전반적 투쟁으로 확대되어 감에 따라 공산당의 슬로건도 또한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고, 일반화되어 마침내 직접적인 적의 타도를 호소하는 슬로건에 이른다.[8](강조는 원문)

마찬가지로, “부문적 요구를 내세울 때 제기되는 모든 이의나 이와 같은 부문적 투쟁을 모두 싸잡아 개량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개개의 공산주의 그룹이 노동조합 참가나 의회주의를 이용하는 데 대해 반대하는 것에서 드러난 것과 마찬가지로 혁명적 행동의 생생한 조건들을 파악할 능력을 결여하는 데서 비롯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단지 프롤레타리아를 향해 최종목표를 호소하는 일이 아니라 실천적 투쟁을 고양시켜 가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투쟁만이 프롤레타리아를 최종목표를 위한 투쟁으로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9]

노동자들의 부문적 요구를 혁명적 투쟁의 출발점으로 삼고 이런 실천적 투쟁을 고양시키는 것은 무시하면서, 자신의 머릿속에서 “탁상공론식”으로 선택한 요구들을 내세우거나 이를 덧붙이는 데 집착하는(바로 이것이 종파주의다) 전지윤은 이런 비판을 새겨들어야 한다.

다른 한편,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전지윤은 그 대안으로 이런 제안을 한다. “이런 요구들을 중심으로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의 모든 단체와 정파들을 포괄하고 함께 투쟁할 수 있는 다양한 공동전선이 만들어져야 한다. 선거와 의회정치에 대한 공동대응기구도 포함해서 말이다.”(119쪽)

모든 요구를 모으고, “모든 단체와 정파들을 포괄”하는 공동전선은 사실 자민통계가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상설연대체’론과 흡사하다.

다섯째, 전지윤은 노동조합을 운동의 족쇄라고 보아,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를 확대하는 방법은 노동조합 외부에서만 올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노동조합 관료들을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이는 노동조합 관료들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억누르는 논리에 면죄부를 주거거나 사실상 그것을 추종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말 물어야 할 것은 왜 노동자들은 노조 지도부가 타협하지 못하도록 압박하면서 신자유주의 공세를 막아 설 자신감과 투지를 발휘하지 못했을까여야 한다. 어떤 조건과 전략이 이런 실패를 낳은 것인가? 그것은 노동조합을 통한 투쟁과 타협을 제도화시킨 틀 속에서 권익 향상을 추구한 노동조합주의적 대응과 전략이 낳은 실패였다.(78쪽)

즉,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틀 속에 갇힌” 노동조합주의적 대응을 한 게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주의적 틀에 갇혀 있다고 해서, 지도부의 배신이나 투쟁 억압이 면죄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럴수록 혁명가들과 좌파 활동가들은 노조 관료들을 비판하며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을 일구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전지윤은 사회주의자들의 모색과 실험을 도매금으로 일축한다. “그동안 제시돼 온 많은 대안들 또한 기본적으로 그 전략의 틀 안에서 제기돼 왔다. 그 틀 안에서 조직 형식을 바꾸거나, 새로운 기구와 제도·규칙을 도입하는 수준에 그치면서, 일부 개선을 낳긴 했지만 같은 한계에 부딪혀 왔다. 좌파 지도부 세우기, 좌파 지도부를 통해 투쟁 호소하기, 지역중심적 산별노조론, 직선제 도입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이 같은 관점과 틀을 넘어서는 방향[이다.]”(113쪽) 그리고 혁명가들과 좌파 활동가들이 보수적 노조 관료들의 힘을 축소하고 현장 노동자들의 힘을 확대하려 한 시도들을 모두 노동조합의 “관점과 틀”에 갇힌 부질없는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

전지윤의 이런 관점은 노동조합 안에서는 투쟁을 확대할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다 보니 그는 노조 관료들의 투쟁 회피 논리를 변호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예를 들어, 전지윤은 ‘2013년 말 철도 파업 국면에서 전면파업은 가능했을까?’ 하고 질문을 던지고서는 5가지 조건이 충족돼야만 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첫째, 민주노총이 연대파업으로 자신들을 도와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했다. 둘째, 불법파업으로 갔을 때도 지금의 전폭적인 여론 지지가 유지될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 했다. 셋째, 전면파업이 결국 승리해서 손배가압류와 징계, 해고 등을 당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 분명해야 했다. 넷째, 전면파업이 결국 박근혜 정부로 하여금 민영화 정책을 포기하게 만들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다섯째, 전면파업으로 갔을 때 지금 파업 대오의 이탈이 벌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필수유지인력들이 대부분 파업에 동참할 거라는 것이 분명해야 했다.[10]

‘전면파업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활동가들과 조합원들의 사기를 북돋고 그 가능성을 확대하려 애쓰기는커녕, 파업 쟁대위에서 노조 관료들이 전투적 활동가들을 억제하려고 내놓는 논리를 그대로 추종하며 적극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여섯째, 이처럼 노동현장에서의 파업 투쟁, 노동조합의 의미를 폄하하고, 다양한 요구를 내세우는 ‘공동전선’을 강조하는 전지윤은 “노동계급 중심성의 재해석과 주체의 확장”(120쪽)이라는 미명하에 노동계급 중심성을 사실상 포기한다.

자신의 글 전체에서 노동계급의 “끝없는 분절화”를 묘사하는 데 치중하던 전지윤은 글 말미에는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한다. “한국 노동운동이 신자유주의 공세를 막는 데 성공하지 못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노동계급을 해체시키고, 그 힘을 빼앗았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노동계급은 해체된 것이 아니라 내부 구성이 변화한 것이다.”(111쪽) 이처럼 모순적인 주장을 하나 쓱 집어넣지만 노동계급이 파업처럼 자신의 고유의 힘을 사용하는 것에는 극구 부정적이다.

앞서 봤듯이, 전지윤은 ‘연합적 힘’의 지원을 받지 않는 ‘구조적 힘’은 역효과만 낸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노동계급 중에서도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부분을 배타적으로 강조”(120쪽)해서는 안 되고 미조직 노동자를 무시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노동계급을 사회변혁의 주체로 보는 것은 노동자들이 단지 빼앗기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 이윤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의존해야만 하며, 따라서 노동자들은 집단적으로 행동할 경우 자본가에 대항할 힘이 있다. 반면, 자본주의 착취 관계의 바깥에 놓인 사람들, 예컨대 실업자나 비공식 부문 종사자 등은 노동자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여 있지만 착취받는 노동자들에 비하면 훨씬 힘이 약하다. 마르크스주의는 불안정한 미조직 노동자들까지 조직해 더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현장에서 자본가에 맞서 집단적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추구하지, 전지윤처럼 ‘노동현장에서의 투쟁은 중요하지 않다’거나 “노동조합이라는 조직 형식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124쪽)는 식으로 노동계급의 고유한 힘을 사용하는 것을 무시하지 않는다.

전지윤은 미조직 노동자를 강조하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사회변혁의 “주체를 확장”해야 한다며 “자본축적 과정에서 자산과 공동체를 강탈당한 사람들에게도 시선을 넓혀야 한다”(123쪽)고 주장한다. “용산 개발 속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철거민, 밀양송전탑 건설 과정에서 자기 땅에서 쫓겨난 원주민, 강정해군기지 건설 속에서 환경과 공동체가 파괴당한 주민 등”(123쪽)[11]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결국 사회 변혁의 주체가 노동계급이 아니라 네그리·하트가 말한 ‘다중’이나 민중주의자들이 말하는 ‘민중’이라고 보는 셈이다.[12]

사실 전지윤이 조직 노동자와 노동현장에서의 파업 같은 노동계급 고유의 투쟁 방식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순간, 노동계급 중심성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마치며

2013년 말~2014년 정세와 그 시기 전술들을 둘러싼 논쟁과 분열처럼 보였던 것이 이제는 분명 마르크스주의 원칙에 대한 이견과 갈등으로 드러났다.

전지윤이 자신의 원칙을 숨기고 노동자연대에서 활동해 온 것인지, 아니면 탈퇴와 탈퇴 후 자신의 활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실용적으로 이론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후자의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아무튼 현재 전지윤의 모습은 ‘노동계급의 고유한 투쟁 방식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민중주의자, 자신이 선택한 괜찮은 요구를 모든 노동자 투쟁에 끼워 넣으며 가르치려는 선전주의 종파주의자의 모습이지, 결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기는 힘들다.

[목차로 돌아가기]

[1] 전지윤, ‘신자유주의와 노동운동 새로운 투쟁의 도약을 위해’, 《다른 세계를 향한 정치적 혁신》, 변혁재장전(준), 2016. [본문으로]

[2] 그람시에 대한 아전인수 식 인용에 대해서는 이 책에 실린 ‘[보론2] 민중주의적으로 곡해된 그람시’를 참고하시오. [본문으로]

[3] 캘리니코스, 알렉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의미’, 《마르크스21》 11호, 책갈피, 2011, 80~81쪽. [본문으로]

[4] 전지윤, ‘7차 노동운동 세미나’. [본문으로]

[5] 앞서 봤듯이, 노동자연대를 “신자유주의적 변화 이전의 분석, 주체 설정, 전략과 전술 등을 대체로 고수”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본문으로]

[6] 로버트 브레너·마크 글릭, ‘조절접근: 이론과 역사’, 《사회경제평론》 5호, 1992, 220쪽. [본문으로]

[7] 앞서 살펴봤듯이, “조직 노동자들에게 단기적·부문적으로 조금 손해라고 하더라도 장기적·전체적인 계급이익을 위해 연대와 투쟁에 나서야 한다”(128쪽)는 주장과 결합돼, 결국 ‘노동계급의 이익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민중주의자들이나 ‘정규직이 나서서 양보해야 한다’는 ‘사회연대전략’과 별 차이 없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본문으로]

[8] 코민테른, ‘전술에 관한 테제’, 《코민테른 자료선집》 1권, 동녘, 1989, 351~352쪽. [본문으로]

[9] 같은 글, 353쪽. [본문으로]

[10] 전지윤, ‘6차 노동운동 세미나’를 참고하시오. [본문으로]

[11] 전지윤은 데이비드 하비를 따라 ‘강탈을 통한 축적’을 신자유주의의 특징으로 강조한다. [본문으로]

[12] 노파심에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빼앗기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을 지지한다는 것과 이들에게 사회변혁의 주도력이 있다고 보는 것은 별개 문제다. [본문으로]

보론1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

강동훈

전지윤은 노동자연대가 신자유주의 시대를 고전적 자유경쟁 자본주의, 독점 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와는 다른, 자본주의의 새로운 발전 단계로 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1]

물론 우리는 자본주의의 연속성만을 보는 것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사회는 변하기 마련이고 우리는 이론을 계속 발전시켜 현실을 따라잡을 수 있어야 한다. 사회 변동에 맞춰서 우리의 이론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교조주의자가 된다면, 이론적 명료함이 떨어지게 되고 이는 운동에 효과적으로 개입하기가 어려워진다는 문제를 낳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룰 때 주의할 점은 우파뿐 아니라 좌파들 사이에서도 유행하는 인상론적 분석을 좇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한 논의로 들어가기 전에 장기호황기에 대한 전지윤의 언급에서 짚고 넘어 갈 점이 있다. 전지윤은 장기호황을 ‘상시무기경제’로 설명하는 노동자연대를 “군비 투자라는 한 가지 요인으로 그것[장기호황]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좀 단순했다”(60쪽)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로버트 브레너를 따라 “2차 대전 이후 장기호황은 군비투자만이 아니라 전쟁 자체가 낳은 과잉자본의 대대적 파괴, 종전 직후 전투적 노동운동에 대한 진압, 혁신기술의 도입과 생산비 절감, 독일과 일본 등에서 새로운 자본축적 기반의 확대 등에 대한 종합적 분석을 더 발전시켜야 할 문제로 보인다”고 주장한다.(60쪽, 각주 45)

여기에서도 전지윤이 상시무기경제 이론을 피상적으로 이해해 왔다는 점이 드러난다. 노동자연대는 브레너가 언급한 요인들을 무시한 적이 없다.[2] 상시무기경제 이론은 전쟁과 불황으로 인한 자본의 대대적 파괴, 혁신 기술,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 독일과 일본에서의 새로운 자본축적 등이 장기호황의 일부 요인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런 점들이 전후에 급속하게 자본축적을 재개시키는 일부 요인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장기호황기의 주된 특징은 그전 시대와 달리 주기적 공황이 찾아오지 않았다(1940년대 말의 일시적 침체를 예외로 하면)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 영국 등이 무기 생산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은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시무기경제 이론은 단순하기는커녕, 장기호황의 주된 측면을 설명하려는 이론인 것이다.

다시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한 논의로 돌아오자. 전지윤은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라는 증거로 1980년대 초부터 회복되기 시작한 이윤율을 근거로 들고, 신자유주의의 주요 특징으로는 “노동운동에 대한 대대적 공격과 착취율 강화, 산업 구조조정과 노동의 유연화, 시공간적 재배치와 강탈적 축적, 금융화와 신제국주의, 이데올로기 공세와 경찰국가화”를 제시한다.(65쪽)[3]

우선, 이윤율 문제를 살펴보자. 전지윤은 1980~90년대에 이윤율이 올랐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이윤율이 장기호황 때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근거로 신자유주의 시기를 ‘장기 위기’나 불황으로 보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비판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본주의가 이윤율 저하 경향을 일부 상쇄하며 회복·팽창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65쪽)

전지윤도 인정하듯이, 노동자연대가 1980년대의 이윤율 상승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연대도 이 시기에 착취율 강화를 통해 이윤율이 일부 올랐음을 인정한다. 결국 쟁점은 이 시기 이윤율 상승을 어떤 맥락 속에서 볼 것인지이다.

이 점에서 장기호황기의 이윤율과 신자유주의 시대 이윤율의 비교는 중요하다. 장기호황기에는 높은 이윤율 덕분에 전 세계 주요 경제가 모두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반면, 신자유주의 시기에는 그 팽창기라 할 만한 시기에도 주요 경제들이 위기에 빠졌다. 미국은 1990년대 초와 2000년대 초에 심각한 위기에 빠졌고, 일본은 1990년대 이후로 20년 넘게 성장하지 못했다. 유럽도 1990년대에 심각한 정체 상태였고, 라틴아메리카는 1980년대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했다. 1990년대 초에 소련(미국 경제의 3분의 1에서 절반 정도 규모로 추정됐던)이 붕괴했고 그 후 심각하게 경제 규모가 축소됐다. 이렇게 불안정하며, 파편적으로 성장과 침체가 벌어진 시기를 두고 새로운 “회복·팽창”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 시대의 성장이 이렇게 불안정하다는 것은 오히려 이전 시기와의 연속성 속에서 각국 지배자들이 이윤율을 끌어올리는 이러저러한 시도를 했다는 것(특히 착취율 상승)을 보여 주는 증거 아닌가.[4]

둘째, 신자유주의 시기를 “장기적인 과잉 축적과 수익성의 위기 시기”(알렉스 캘리니코스의 표현대로)로 본다고 해서, 이를 ‘만성적인 침체기’로 보는 것은 아니며, 특정 지역(예를 들어 중국)에서 역동적인 성장이 벌어지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 분명해진 이윤율 위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여전히 침체로 치닫는 강력한 경향을 띠는 한편으로, 각국 지배자들이 경쟁적으로 자국 자본을 재조직하고 새로운 지역으로 진출하려고 함에 따라 역동적인 성장을 보이기도 했다. 즉, 침체와 역동성이 공존했다.”[5](강조는 추나라 자신)

셋째, 전지윤은 주로 중국을 염두에 두고 자본의 “시공간적 재배치”를 얘기한다. 물론 중국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급속히 성장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중국 인구는 모든 선진국을 합친 것보다 거의 3억 명이나 많지만 중국의 산출량은 선진국 전체의 5분의 1도 안 되며 수출은 10분의 1 정도다.”[6]

게다가 전지윤은 신자유주의적 성장을 유발한 다른 요인들과 중국으로의 자본 재배치를 유기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혹은 설명을 시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1980년대에 중국은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지만, 중국에 대한 해외직접투자(FDI)는 미미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적 “회복·팽창”기에 중국으로의 “시공간적 재배치”는 큰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전지윤이 신자유주의적 축적 방식이 한계에 부딪힌 시대라고 보는 2000년대에도 중국은 여전히 급속하게 성장했다. 신자유주의를 새로운 자본주의 ‘단계’라고 주장하려면 그 특징을 단순히 열거하는 게 아니라 이 요소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자본주의를 “회복·팽창”시켰는지 설명해야 한다.

넷째, 전지윤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성장 요인으로 금융화를 얘기한다. 브레튼우즈 체제(즉, 달러의 금태환 체제)의 붕괴가 금융을 급속히 키웠다고 말하며 금융 팽창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묘사’하지만, 그러나 왜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본이 금융부문으로 몰려들었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윤율과 금융의 팽창을 연결해 생각하면, 실물부문의 취약성 때문에 금융부문으로 자금이 몰렸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따라서 전지윤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성장 요인으로 언급한 금융화는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취약성을 드러내 준다. 이처럼 처음부터 불안정하고 취약했던 신자유주의 시기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로 부르기에는 부족하다.

또, 전지윤은 미국에서 금융부문이 차지하는 이윤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증가한 것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금융화가 자본주의 체제의 동역학 자체를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라는 측면만 강조하는 것은 부족했다. 이런 변화는 단기적 이윤만을 앞세우는 자본주의의 속성과 투기적 성격을 분명히 더 심각한 수준으로 발전시켰다.”(72쪽) 여기서 전지윤의 절충주의적 서술이 다시 나타난다. 전지윤은 딱 부러지게 금융화로 동역학이 바뀌었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쪽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두는 것이다.

다른 한편, 전지윤은 신자유주의가 ‘부채의 시대’라고 지적하면서 노동자들도 부채와 신용의 노예가 됐다고 말한다. 그래서 “주택 마련 등에 들어간 과도한 부채는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을 압박하는 작용도 한다. 파업이 길어질수록 노동자들은 돌아오는 이자지급과 카드할부금, 채무 상환 날짜의 압박에 더 크게 시달린다. 적당한 타협으로 빨리 파업을 끝내길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된다.”(73쪽) 전지윤은 이런 상황이 파업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이 쉽게 빚을 낼 수 없던 시대에는 장기간의 파업이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았다는 말인가? 게다가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자들이 더 손쉽게 빚을 질 수 있게 됐으므로 장기 파업을 더 잘 견딜 수 있게 됐다고는 왜 말할 수 없는가? 이처럼 금융화를 서술한 부분을 보면, 전지윤이 좌파들 사이에서도 퍼진 ‘상식’(금융화로 자본주의 동역학이 바뀌었고 노동자들은 싸우지 않거나 싸우기 힘들어졌다 등)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섯째, 전지윤은 데이비드 하비를 따라 신자유주의의 주요 특징으로 ‘강탈을 통한 축적’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가장 간단한 반박은 ‘강탈을 통한 축적’은 신자유주의 시대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전 시기에 걸친 특징이라는 점이다. 고전적 자본주의 시기의 ‘시초 축적’은 말할 것도 없고, 독점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 시기에도 세계 곳곳에서 강탈은 자행됐다.

또, 전지윤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다음과 같이 달라진 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공공서비스와 공공부문에 대한 민영화야말로 강탈적 축적의 대표적인 사례다. 시장과 경쟁의 논리가 더욱 전면화되면서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피해를 겪게 됐다.”(70쪽) 물론 민영화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줬다. 그러나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민영화가 이윤율을 끌어올리고 자본 축적을 돕느냐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 부문을 약탈함으로써 축적을 위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민영화는 이런 효과를 내지 못한다. [7]

전지윤이 ‘강탈을 통한 축적’을 그냥 끌어다 쓰고 있는 행태는 분명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다. 사회변혁의 주체를 노동계급에서 다양한 형태로 빼앗기는(강탈당하는) 사람들로까지 ‘확장’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전지윤은 신자유주의에 대해 좌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여러 특징들을 나열하며 묘사할 뿐 이것을 일관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목차로 돌아가기]

[1] 전지윤은 노동자연대가 “신자유주의적 변화를 과장하는 편향에 대한 이해할 수 있는 감정적 반발”(57쪽), “노동자·민중의 사기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우려”(59쪽) 때문에 신자유주의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하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이런 비난은 전지윤이 십수 년간 주요 간부로 활동하면서도 노동자연대의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얼마나 피상적으로 이해해 왔는지를 드러내는 것이거나, 의도적으로 폄하하며 비난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전지윤의 비난과 달리, 노동자연대와 국제사회주의 경향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변화와 그 변화가 의미하는 바를 진지하게 분석해 왔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노동계급과 노동시장의 변화, 생산의 세계화와 다국적기업의 확대, 금융부문 팽창, 국가와 기업의 관계, 국가 간의 관계와 제국주의 질서의 변화 등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는 것이 그 사례다. [본문으로]

[2] 예를 들어, 하먼, 크리스, 《좀비 자본주의》, 책갈피, 2012, 216~217쪽을 참고하시오. [본문으로]

[3] 이것은 대부분 데이비드 맥넬리에게서 따온 것이다. [본문으로]

[4]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국가 개입 수준이 계속 높게 유지됐다는 점(그리고 낭비적 생산 영역 등에서도 이전 시대의 추세가 이어졌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1920년대 말부터 1945년까지 진행된 자본주의의 변화가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역전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추나라, 조셉, ‘현 위기에 대한 제대로 된 마르크스주의적 해설을 위하여’, 《마르크스21》 13호, 책갈피, 2012, 113쪽. [본문으로]

[5] 같은 글, 114~115쪽. [본문으로]

[6] 같은 글, 107쪽. [본문으로]

[7] 하먼, 크리스, ‘신자유주의의 진정한 성격’, 《21세기 대공황과 마르크스주의》, 책갈피, 2009, 108쪽. [본문으로]

보론2

민중주의적으로 곡해된 그람시

김종환

전지윤은 조직노동자들이 “단기적·부문적으로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장기적·전체적인 계급이익을 위해” “청년실업자, 여성, 이주민 등에게 더 절실한 요구와 투쟁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고 썼다.[1]

안토니오 그람시의 경험과 통찰은 돌아 볼 가치가 있다. 20세기 초의 이탈리아 지배계급도 자동차 회사인 피아트의 고숙련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양보를 하면서, 그것을 이용해 나머지 노동자들과 이간질하려 했다.

그람시는 “피아트의 숙련 노동자들이 경영진의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더 빈곤한 노동자 대중에게 특권 계급으로 보일 것”을 우려했다. 언론은 “한 달에 7,000리라에 달하는 이들의 높은 봉급을 부각시키면서 기술직 종사자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맹렬한 캠페인을 전개했다”

하지만 피아트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앞세우기보다는, 더 열악한 노동자들의 요구를 지지하고 투쟁에 연대하는 것을 우선했다. 그러자 “적어도 공장 내에서는 좀더 등급이 높은 기술직 노동 종사자 때문에 덜 숙련된 노동자들이 손해를 입는다는 식의 착취 의식이나 특권 의식이 소멸했다. 이러한 행동들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전위는 전위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다. 이것이 토리노에서 공산당이 발전할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진정성의 정치’에 입각한 투쟁과 연대이다.

1. 그람시의 집필 취지 왜곡

위 내용 중 인용은 모두 그람시가 1926년에 쓴 ‘남부 문제에 관하여’에서 따온 것이다. 그 글에서 그람시는 당시 이탈리아 자본주의 지배 질서의 특징, 즉 산업화된 북부와 상대적으로 저개발된 남부로 나뉘어 있고 지배자들이 그런 격차를 이용해 노동자와 농민을 이간질하는 문제를 다룬다. 그람시 주장의 핵심은, 남부 농민을 대변한다고 자임하지만 실제로는 지주와 연결된 ‘남부주의자’들이든, 남부 농민들의 빈곤을 묵인하는 대가로 양보를 얻어내려는 북부의 개혁주의자들이든 모두 농민 해방을 가져다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농민은 자신들의 열망과 요구를 중앙집중적으로 표현할 능력이 없으므로 북부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적 운동으로 농민 대중을 지도해 이탈리아 전역에 노동자 국가를 건설하는 것만이 농민에게 실질적 해방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그람시는 또 다른 글인 ‘리용 테제’에서도 ‘노동자가 농민을 획득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그 방식은 노동자들이 생산에서 차지하는 지위에서 비롯하는 힘을 활용해 공장에서 노동자위원회를 구성하고, 그것을 본받아 농민위원회가 수립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람시는 농민과 중간계급 지식인을 노동계급과 대등한 수준의 동맹자로 여기지도 않았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노농동맹이라는 용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크리스 하먼, 《곡해되지 않은 그람시》, 노동자연대)

이처럼 ‘노동자들이 어떻게 나머지 민중(농민, 중간계급 지식인 등)에게 헤게모니를 발휘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놓고 씨름하며 노동자들이 고유의 경제적 힘을 사용하는 것을 중시한 그람시를, 전지윤은 완전히 반대의 맥락, 곧 ‘민중주의적 저항이 더 옳다’고 주장하는 데 끌어 쓰고 있다. 그람시가 글을 쓴 취지를 정면으로 거스른다는 점에서 부정직한 인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왜곡은 “볼셰비키적 당 건설”을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제시한 그람시를, 혁명과 관계 없는 개혁주의자로 왜곡한 이탈리아 공산당의 타락을 답습하는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이 이렇게 그람시를 곡해하는 흔한 패턴과 그에 대한 크리스 하먼의 반박은 《곡해되지 않은 그람시》(노동자연대, 2012)를 보라.)

2. 투쟁의 주역을 양보의 주역으로 바꾸다

이제 전지윤이 인용한 각각의 내용을 따져 보자. 먼저, 전지윤이 그람시를 인용하며 그린 다음과 같은 상황은 우리도 바라 마지않는다.

“적어도 공장 내에서는 좀더 등급이 높은 기술직 노동 종사자 때문에 덜 숙련된 노동자들이 손해를 입는다는 식의 착취 의식이나 특권 의식이 소멸했다. 이러한 행동들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전위는 전위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다. 이것이 토리노에서 공산당이 발전할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

관건은 어떻게 그런 상황에 이를 것이냐는 것이다. 노동자연대는 지배자들의 공세에 직면한 조직 노동자들로서는 자신의 요구를 위해 싸우면서 자신감을 키우고 그럼으로써 처지가 더 열악한 노동자나 민중의 투쟁에 연대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전지윤은 조직노동자들의 요구와 더 열악한 노동자들의 요구를 대립시키면서 “(조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앞세우기보다는, 더 열악한 노동자들의 요구를 지지하고 투쟁에 연대하는 것을 우선”해야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지윤이 불러낸 그람시는 과연 그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는가? 위 문장만 보면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람시의 원문을 보면 놀랍지 않게도 답은 완전한 ‘아니오’다.

전지윤의 인용 방식은 심각한 왜곡을 낳았다. 다음 문단을 다시 보자.

그람시는 “피아트의 숙련 노동자들이 경영진의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더 빈곤한 노동자 대중에게 특권 계급으로 보일 것”을 우려했다. 언론은 “한 달에 7,000리라에 달하는 이들의 높은 봉급을 부각시키면서 기술직 종사자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맹렬한 캠페인을 전개했다”

원문을 보면 봉급이 “7,000리라에 달하는 이들”은 “피아트의 숙련 노동자”가 아니다. 두 문장은 별개의 사례를 설명하는 문단들에서 각각 따온 문장들이고 두 문장 사이에는 원고지 2매 정도의 글이 있다. 별도의 설명 없이 나란히 제시할 수 있는 문장들이 아닌 것이다!

위 문장들은 모두 그람시가 남부주의자들의 주장(‘남부 농민은 북부 노동자들과 처지가 너무 달라서 단결할 수 없다’)을 반박하려고 1920년 무렵 토리노 노동자들의 높은 정치 의식을 묘사하면서 두 가지 사례를 제시하는 부분의 일부다.

1919~20년 이탈리아는 ‘붉은 2년’이라 불릴 만한 부분적인 혁명 상황을 겪는다. 개혁주의·중간주의자들이 이끄는 노동총연맹(CGL)과 이탈리아사회당(PSI)이 노동자들의 전투성을 꺾으려고 ‘혁명 추진 여부를 묻는 전 조합원 총투표’를 실시해서 부결을 유도할 정도였다.(지도부는 후진적 조합원들에 기대어 41:59 정도로 부결시켰다.) 반면에 그람시는 공장평의회 운동을 발전시켜 ‘이중 권력’을 준비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그람시는 북서부 산업도시 토리노에서 피아트 자동차 공장의 숙련 육체 노동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 노동자들은 이탈리아 전체 노동계급의 선진 부위에 속했다.

당시 그람시는 봉급이 7,000리라에 달하는 기술직들이 사용자에 맞서 투쟁을 벌일 때 피아트의 숙련 육체 노동자들이 평소 악감정을 느끼던 기술직(숙련 육체 노동자들보다 처지가 낫다)의 투쟁에 연대한 것을 “상당한 수준의 정치적 성숙과 능력에 도달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높이 샀다. 또한 그 숙련 육체 노동자들은 자신들보다 처지가 더 열악한 잡역부의 투쟁에도 연대했다. ‘봉급 7,000 리라’ 묘사는 이를 설명하는 와중에 썼다.

전체적으로 그람시는 기술직이든 잡역부든 숙련 육체 노동자들의 연대에 힘입어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이런 경험이 쌓여서 숙련 육체 노동자들이 기술직과 잡역부 등에게서 전위로 인정받게 됐다고 썼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잘 조직된 숙련 육체 노동자들이 손해를 감수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그러니 “피아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앞세우기보다는…”이라는 전지윤의 주장은 난데없는 것이다.[2] 오히려 부분적인 혁명 상황에 이르렀을 만큼 투쟁이 활발한 조건에서 노동자들의 의식이 고양된 덕분에 그런 연대 투쟁이 가능했다고 보는 게 정확한 해석일 것이다. 즉, 이 상황은 노동자연대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3. 구체적 맥락 삭제하기

그러면, 그람시가 “피아트의 숙련 노동자들이 경영진의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더 빈곤한 노동자 대중에게 특권 계급으로 보일 것”이라고 쓴 것은 대체 어떤 맥락이었는가?

앞서 말했듯이 당시 이탈리아는 위기가 극심했기 때문에 당시 피아트 경영진은 노동자들을 상대로 꼼수를 부렸다. 노동자들에게 공장 경영에 참여하라고 했다(공장의 ‘협동조합화’). 아니나 다를까, 당시 이탈리아사회당의 개혁주의자들은 이 제안을 환영했다. 그러나 그람시가 편집자였던 〈신질서〉는 이것이 피아트 노동자들을 “부르주아 국가의 부속물로 만들려는 것”이라고 보고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람시는 당시 이탈리아의 구체적 상황을 분석하며 지배계급이 제안한 일종의 ‘노동자 자율경영’이 사실은 함정이라고 폭로하면서, 투쟁하는 전위로서 구실을 다하자고 노동자들에게 말한 것이다. 지당한 말이다. (조합원 자녀 우선 채용 요구나 신입사원부터 임금을 깎자는 등 일부 조직 노동자 운동 내 실용주의적 요구나 타협에는 반대해 온 노동자연대에게는 새삼스러운 교훈도 아니다.)

그러나 전지윤은 구체적 사회 상황, 지배자들의 모순, 노동계급의 주·객관적 조건, 요구의 성격, 이 모든 것을 추상한 채 마치 조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하면 지배자들의 포섭 전략에 놀아나는 것이고, 반대로 자신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부차화해야만 계급의 전위로 인정받을 수 있는 양 쓰고 있다. 당시 이탈리아 지배자들이 제시한 ‘양보’의 내용을 독자들이 읽으면 오늘날 한국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숨긴 듯하다. 실로 그람시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따져 물을 노릇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박근혜가 조직 노동자 운동의 저항을 제압해 전체 노동계급에게 고통을 전가하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요구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히 내걸고 방어에 나서는 것, 즉 전체 전쟁의 최전선에서 공격을 저지하는 것이야말로 전체 노동계급의 이익을 지키는 데서 전위로서의 구실을 자임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람시의 뜻을 한국에서 제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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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지윤, 《다른 세계를 향한 정치적 혁신》 p128~129. [본문으로]

[2] 그람시 권위자 Quintin Hoare의 영어 번역본과, 전지윤이 참고한 국역본(김종법 역)을 대조한 결과 국역자가 영어 단어 technician과 skilled worker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 “기술직”을 혼용하면서 생긴 전지윤의 의도치 않은 실수라고 믿고 싶다. [본문으로]

민중주의 논쟁
민중주의 정치의 문제들

김문성

전지윤 씨(이하 존칭 생략)가 3월 25일 노동자연대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글(“노동운동의 요구와 방향을 좁히지 말아야 한다”, 이하 ‘재반론’)을 썼다.

먼저 독자들이 전지윤의 토론 방식을 알아두는 게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의 논지 전개 방식은 여러 요인에 관한 피상적 관찰과 ‘나열’이다. 그는 핵심 주장과 그것이 비판받을 것에 대비한 알리바이형 주장을 나란히 나열해 놓는다. 그래서 그의 논술 방식을 잘 모르는 논쟁 상대는 그를 비판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는 ‘왜 이걸 강조하냐’는 반문에 늘 ‘나는 다른 점도 지적했는데, 그 비판은 부당하다’는 식으로 반박하니 말이다.

이러니 이번 논쟁에서도 ‘나는 총파업을 지지했는데, 왜 민중주의라고 하느냐’는 식으로 항변하는 것이 낯설지가 않다. 그런데 논쟁의 맥락에서 보면, 오히려 그의 ‘재반론’은 글 제목 “노동운동의 요구와 방향을 좁히지 말아야 한다”부터 민중주의적 방향을 잘 드러낸다. 민중주의는 피억압 대중(계급들)의 여러 요구들을 더하는 ‘민중연합’ 방식으로 운동을 건설하면서 노동계급 고유의 요구와 투쟁 방식을 협소한 것으로 취급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운동에서 (이해관계·역량 모두에서) 유일한 반자본주의 계급인 노동계급이 차지하는 결정적·배타적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계급 고유의 요구와 투쟁 방식을 선택하면, 민중적 단결이 깨지거나 노동계급이 고립될 것이라는 주장도 민중주의의 오래된 도식이었다.

노동자연대가 전지윤의 지난해 노동자 투쟁 평가에서 문제 삼은 것이 바로 이런 사고 방식이었기 때문에, 전지윤의 답변은 자신이 노동자연대와 무엇을 차이로 긋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음을 드러낸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이 차이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단연 으뜸 원칙인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원칙에서 그가 멀어졌음을 보여 준다. 아울러 동어반복, 맥락 없이 문구만 떼어 내서 반박하기 등으로 본질적 쟁점을 흐리며 불리함을 감추는 그의 논쟁 방식이 무지보다는 의도적 논쟁술에 가까움도 보여 준다.

1) 노동계급의 핵심적 중요성에 관해[1]

전지윤은 이번 반론에서도 자신이 작업장 투쟁(strike)과 거리 투쟁(street)을 대립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작업장 투쟁과 대립시켜 거리 투쟁의 가능성을 높이 보고 ‘내 예측이 맞았다’고 자랑한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굳이 노동자연대의 ‘파업 호소’를 딱 집어서 비판을 집중했을까? 그는 심지어 파업이 아니라 총궐기가 “노동개혁”의 국회 통과를 막아낸 결정적 요인이었다고까지 주장했는데 말이다.

정부는 총궐기에 대해 히스테리를 일으켰고, 민주노총 1,2차 총파업 때를 넘어선 지난 3년간 어느 때보다 압도적 탄압으로 막으려 했다. … 이 정권이 그토록 매달린 노동개악법 통과가 아직까지 안 된 것은 4차까지 이어진 총궐기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총궐기 건설에 협력한 모든 단체와 아직도 누워계신 백남기 님 등 수많은 평범한 참가자들이 여기에 기여한 것이다.[2]

제도정치에서 강제추방 당하고 야권연대에서도 배제된 자주파가 지난해의 구체적 상황에서 자의반타의반으로 주력한 것은 오히려 기층에서 총궐기 등 투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총궐기 건설에 가장 열심히 앞장선 것은 바로 자주파였다. 한상균 지도부의 총파업 호소에도 자주파 성향 노조들이 상대적으로 더 호응했다.[3]

아직 … 자신감과 투쟁 수위가 높아지진 않고 있으며 단지 노조관료들이 투쟁을 가로막고 있는 게 아니란 점도 직시해야 한다.[4] 이것은 단지 작업장 투쟁만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니다.[5]

오히려 인용한 단락들을 조합하면, 민중총궐기는 지난해 노동자 투쟁의 맥락 속에서 설명되지 않고 있다. 즉, 노동자 투쟁의 성과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정도면 ‘[전지윤이] 자민통계가 다 조직한 것처럼 착각한다’는 최일붕의 비판이 “근거 없는 왜곡”이라고 흥분하는 것은 좀 심한 게 아닐까. 이런 태도는 건설적 논쟁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그는 자기 주장이 ‘노동계급은 자력으로는 전진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보는 것도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글 여러 곳에서 이를 강조한다.

노동운동의 발전과 노동자들의 삶의 질 개선을 가져오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던 노동조합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서, 그 반대의 효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6]

결국 한국의 노동운동은 지금,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활력을 회복하지 못하며 투쟁으로 성취한 자신들의 조건을 지키기에 급급해 있다.간간히 새롭게 등장하는 투쟁과 활력들은 이런 상황을 역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7]

하지만 지금 조직된 노동운동은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다.[8] ‘자기들 밥그릇만 챙기는 그들만의 노동운동’이라는 공격에 효과적으로 맞서지 못해 왔기 때문이다.[9]

굳이 직접적으로 논쟁하는 글이 아니라도 “신자유주의와 노동운동”[10]처럼 그가 비중을 실어 쓴 글이 있고, 그 글이 여러 혼란 속에서도 선명하게 주장하는 바가 있는데도, ‘내가 언제 그런 주장을 했느냐’ 반문하는 것은 무슨 심리인지 잘 모르겠다. 정성들여 내놓은 자기 주장을 왜 스스로 부인하는 것일까? 파업을 경시했다는 주장이 ‘왜곡’이기는커녕, 그는 노동계급의 객관적 힘이나 투쟁 능력 자체에 (따라서 파업 방식의 투쟁에도) 회의를 표하는 주장들을 반복한다. 고립돼서 ‘자력으로 전진할 수 없는’ 노동운동은 오직 외부의 “연합적 힘”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많은 급진좌파들은 … ‘조직된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힘을 발휘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이런 입장은 노동계급과 함께 자본주의의 모순에 저항하기 마련인 피억압 민중,미조직 청년,실업자 등과 노동계급을 불필요하게 구분하려 하곤 한다.가장 협소하게는 개별 노동조합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둘러싼 투쟁에 매몰되는 경향마저 있다.[11]

노동계급의‘구조적 힘’은‘연합적 힘’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 파업 등 노동계급의‘구조적 힘’을 봉쇄하거나 약화시키려는 지배계급의 대비 노하우가 꽤나 축적돼 있기 때문이다.… ‘연합적 힘’과 연결되지 않는‘구조적 힘’은 매우 제한적인 효과만을 내거나,심지어 역효과를 내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12]

노동운동의 발전과 노동자들의 삶의 질 개선을 가져오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던 노동조합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서,그 반대의 효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13]

마치 자본주의가 인류의 생산력 발전에 큰 기여를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족쇄로 변화하는 것처럼 이것은 ‘역사적 변증법’이라 할 만하다.[14]

그는 생산현장에 기반한 노동계급의 처지와 나머지 피억압 사회계급의 처지를 구분하는 것의 중요성을 기각하더니, 노동계급의 주도력(헤게모니)을 부정하며, 급기야는 그 힘을 발휘해 온 전통적인 조직 방식까지 문제 삼는다. 비록 잠재적일지라도 자본주의의 객관적 구조가 부여하는 힘을 노동계급이 발휘할 수 없다고 본다면, 아마도 최상의 저항 형식은 광범한 피해 민중의 연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자연대는 피억압 민중의 자력해방투쟁을 지지하고 그러한 사회적 연대를 유보 없이 지지하지만, 그런 연대를 누가 어떤 힘으로 이끌 것이냐의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다.

노동계급의 힘을 억제하려는 “지배계급의 대비와 노하우”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을 인종·민족·성 등으로 이간질해 단결을 어렵게 하기, 직장폐쇄, 구사대·경찰·군대 투입 등으로 직접 탄압하기, 파업 불가 작업장·업무를 지정해 합법 파업을 원천 봉쇄하거나 대체근로를 합법화하기, 파업 손실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하기 등의 파업 무력화 방법들은 진작부터 여러 나라에 있어 왔다. 사회의 객관적 구조에서 나오는 노동계급의 “구조적 힘”은 지배계급의 봉쇄 조처보다 앞서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이 파업으로 이윤 생산을 멈춰 자본가들과 국가에 결정적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것은 이윤의 원천이 임금노동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른 피억압 집단이 가지지 못한 노동계급 고유의 잠재력이고 객관적인 것이다. 즉, “지배계급의 대비와 노하우”는 노동계급의 구조적 힘에 후행하는 요소다. 따라서 지배계급의 봉쇄 조처로 노동계급의 “구조적 힘”이 발휘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치나 세력 관계, 자신감의 문제이지 ‘구조적 힘 자체의 약화’ 때문은 아니다. 그러므로 전지윤이 오늘날 노동운동의 어려움을 여러 곳에서 묘사하는 것은 피상적 관찰이지 이론적·원리적 분석은 아니다.

노동계급의 귀환? 역귀환?

노동계급의 힘 문제를 다루는 전지윤의 방식 전반은 피상적이고 비역사적이다. 그가 칼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한 부분을 직접 살펴보자.

노동운동의 발전과 노동자들의 삶의 질 개선을 가져오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던 노동조합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서,그 반대의 효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마르크스는 노동조합 운동이 실패하기 쉬운 이유를 좀 더 일반적으로 지적했다.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은 현존 제도가 빚어낸 결과를 반대하는 유격전에만 자신을 국한하고 이와 동시에 현존 제도가 변화하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자신의 조직된 힘을 노동자 계급의 종국적 해방을 위한,말하자면 임금 제도의 궁극적 철폐를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실패한다.” (칼 마르크스, 《임금, 가격, 이윤》)[15]

그는 오늘날 노동운동에서 노동조합이 ‘족쇄’로 변했다고 주장하면서 1백50년 전에 마르크스가 이를 “일반적으로 지적”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진술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성립되는 것인지 나는 도통 잘 모르겠다. 아니면, 이미 마르크스의 생존 시절부터 노동조합은 족쇄가 돼 오늘날까지 왔다는 뜻일까. 어찌 됐든 1백50년 넘는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적 경험마저 무시하는 대담함에 경의를 보낼 뿐이다. 이런 서술 방식이야말로 역사를 신비화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부정직한 논쟁 방식은 더 있다. 아래 인용 단락을 보라. 그는 애초에 ‘최저임금 1만 원’ 요구 강조에 민중주의적 함의가 있다는 노동자연대의 비판에 주류 정당들은 결코 지지할 수 없는 요구라고 반박했는데, 더민주당 등이 총선 공약에 포함시키고 나자, 2주 만에 말을 싹 바꿔버렸다.

[3월 9일] 최저임금 1만 원 요구는 노동계급의 가장 열악한 부문을 위한 명백한 노동계급의 요구이지 ‘중간계급이나 전국민적 요구’가 아니다. 이게 ‘계급을 초월한 전국민적’ 요구라면 왜 주류정당들이 이 요구를 한사코 반대하거나 대변하지 않는지 설명되지 않는다.[16]

[3월 25일] [최저임금 1만 원, 공적연금 강화, 비정규직 관련 요구 등] … 민주당이나 시민단체가 지지하는 요구를 내세우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고, 지지하지 않는 요구를 내세우는 것이 더 나은 일인가?[17]

나는 적어도 이렇게 부정직하게 논쟁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누가 이런 사람들의 정치적 주장을 신뢰하겠는가. 이런 맥락 없는 인용이 낳은 모순, 말바꾸기에 대한 그의 답이 무엇이든 그가 (사회운동의 중심으로의) “노동계급의 귀환”이라는 노동자연대의 전망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노동계급의 힘, 헤게모니의 약화가 객관적 변화 때문인지, 세력균형의 문제인지 딱부러지게 다루지는 않는다. 그러니 그 자신도 대안을 도출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노조관료로부터 독립적인 현장조합원들의 행동과 네트워크 건설은 특정한 조건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아직 그것이 가능할 정도로 자신감과 투쟁 수위가 높아지진 않고 있으며[18]

사려 깊은 주장인 듯 보이지만 분위기 또는 상황을 바꿀 “특정한 조건”이 도대체 무엇인지 어느 곳에서도 딱부러지게 밝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공허하다.[19] 어쨌거나 일련의 주장들을 조합해 볼 때, 그는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의 단결, 사회적 연대가 잘 돼야 노동운동도 잘 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운동, 정당에 대한 전지윤의 전망은 이와 연결돼 있을 것이다.

능동적 좌파라면, 전지윤처럼 노동자 운동의 요구만 보고 냉담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나름으로 설정한 “정치”적(“전체적”)인 요구를 걸지 않으면 무의미하고 패배하기 십상일 뿐이라거나 초보적 권리를 위해서라도 노동조합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노동자들에게 ‘훗, 당신은 엉뚱한 길로 가는 겁니다’ 식으로 냉소하지는 않을 것이다.[20]

어쨌거나 그가 왜 노동자연대더러 “노동계급의 귀환”이라는 헛된 꿈을 꾸지 말라고 하는지 이제는 더 명확해진다. 사실, ‘귀환한 노동계급은 어디에 있느냐’는 그의 항변은 그가 노동자연대 회원일 때부터 계속 던진 질문이다. 정작 그는 그 귀환을 촉진하기 위한 활동에 별 열의를 보이지 않았고, 그것을 강조하는 방침에 반발하다가 단체 내 호응이 없자 단체를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는 노동자연대와의 정치적 차이를 급속히 발전시켜 왔다.[21]

그가 운동주의자들처럼 ‘운동들의 운동’으로서 위계 없는 운동들의 연대와 요구들의 나열을 강조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동계급 운동이 힘을 얻을 “특정한 조건”으로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지닌) 계급들을 단결시키는 데서 일반 민주주의 문제가 핵심이라고 보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2) 민주주의의 계급적 성격

사회변혁에서 노동계급의 중심적 구실을 부정하는 전지윤은 여러 피억압 집단의 공통점으로 “민주주의”를 강조한다. 이것이 현재 (특히 박근혜 정부 아래서) 피억압 민중 전체의 공통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요구들이야말로 “전체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지지를 받는 요구”인 것이다. 그런데 그가 ‘민주주의’ 요구라고 열거하는 것은 진보당 강제 해산, 총궐기 탄압, 테러방지법 제정 등 민주적 권리 문제들이다. 그는 민주주의의 계급적 성격을 또한 민주적 권리와 국가 형태로서의 민주주의를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민주적 권리를 침해하는 공격을 “민주주의 파괴”와 동일시하는 개념적 혼란을 보인다.

1차 총궐기 참가자들에게 엄청난 폭력을 가해서 반발과 충돌을 유도한 다음, 그것을 빌미삼아 탄압과 민주주의 파괴를 정당화하려는 시나리오를 짜놓았던 것 … 원래 기획 … 테러방지법, 복면금지법, 집회·시위 불허 등을 쏟아내고 있다. 자신들이 추진하는 정책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지배계급 내 박근혜 분파의 민주주의 파괴 의지는 너무나 노골적이다. … 지배계급은 조급함뿐 아니라 두려움이 커질 때 민주주의를 거추장스러워하는 법이다.[22]

테러방지법 폐기는 중요한 계급적 요구다. 민주주의의 제약으로 가장 고통 받는 게 노동계급이기 때문이다.[23]

[총궐기 직후] 공안탄압 광풍이 몰아치는 상황에서도 ‘민주주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을 [노동자연대는] ‘톤다운’이라고 비판[했다] … 노동계급이 노동조건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앞장서 싸우는 게 중요한 상황에서 말이다.[24]

이런 강조는 생뚱맞다. 박근혜의 민주적 권리 훼손에 반대하지 않는 좌파는 없기 때문이다. 쟁점은 그런 공격의 성격, 그것에 맞서는 운동의 핵심 동력 문제다. 그런데도 전지윤이 민주주의 ‘쟁점’이 중요하다고 새삼 강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그가 노동계급의 결정적 중요성을 기각하는 맥락, 그의 민주주의 개념, 그의 박근혜 정부 성격 규정 등이 서로 연결돼 있다고 본다.

‘국가 형태’라는 측면에서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배(자기 통치)’를 뜻하므로, 노동자 민주주의는 노동자 권력을 의미한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관계가 각 계급마다 다르다는 뜻이다. 역사에서 민주주의 투쟁(또는 혁명)은 거듭 분화했고, 역사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지배가 대체로 확립된 19세기 중반 이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장조차 핵심 동력은 노동계급과 좌파였다.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은 사회주의 혁명으로서만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음이 입증돼 왔다.

한국에서도 1987년 6월 말 대통령 직선제 개헌 약속으로 정권 획득의 공정한 기회를 얻어냈다고 판단한 자유주의 야당들이 소심한 투쟁마저 멈춘 반면, 이미 민중항쟁의 주요 구성원이던 노동자들은 울산을 시작으로 7월부터 노동현장 민주주의(노동조합 결성뿐 아니라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도 목적으로 하는)를 쟁취하려는 투쟁에 나섰다(‘7~9월 노동자대투쟁’). 이는 6월 민중항쟁을 지지하거나 참가한 세력(계급)들 사이에서 쟁취하고자 한 민주주의의 사회적 내용이 서로 달랐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물론 이런 모순을 절충하려는 시도는 늘 있어 왔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 칼 카우츠키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논평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지지하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반대한다고 했다. 즉, 그때까지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으로 불리던 카우츠키가 정작 러시아 혁명에는 반대를 표명한 것이다. 그래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에서 어느 계급의 민주주의인지를 물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노동계급에 대해서는 부르주아 독재이듯, 노동자 권력이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민주주의지만, 방금 막 타도돼 아직 잔존한 구 지배계급인 자본가들에게는 독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곧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분리하는 카우츠키의 민주주의 개념은 계급을 초월한 ‘일반 민주주의’ 체제(그 자신의 말로는 ‘인민의 국가’)가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카우츠키 민주주의관의 핵심은 민주주의의 색깔, 즉 계급적 성격을 지워 버린 데에 있다.[25] 이는 마르크스주의를 기회주의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사회주의(노동자 민주주의)란 단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점진적 확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부르주아지에게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위험하지 않다고 아첨하는 것이다. 이런 기회주의 때문에 현실에서 일반 민주주의 개념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형식적·절차적 측면을 물신화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것이 개념상 서로 다른 계급들에게 형식적(기회의) 평등을 제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주의로 갈 수 있다는 베른슈타인주의와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26] 카우츠키의 이 개념을 계승한 것이 스탈린주의의 인민민주주의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요컨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지배 체제 안에 노동계급 민주주의의 요소들(표현과 결사의 자유, 임금과 복지 향상)이 제한적으로 허용된 국가 형태로, 사회적 내용상 부르주아 독재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이 실질적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이용해 노동자의 해방을 이룰 수는 없다. 지배계급은 이런 부분적 권리 허용을 통해 노동계급의 저항을 제도화해서 관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통치의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이점을 누릴 수 있다. 기왕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도입한 곳에서 자본가들이 이 국가 형태의 장점들을 쉽게 버리기 힘든 이유다.

결국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에게 형식적인 절차상의 (그것도 매우 한정된) ‘기회의 평등’을 제공할 뿐이다. 임금, 복지, 노동조건 같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진전을 그 자체로 보장하지도 않는다. 물론 형식적 권리를 이용해 노동계급은 임금과 노동조건 향상 투쟁을 전개할 수 있고 의회에 정치적 대표자들을 보낼 수도 있다. 이것은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와 비교하면 명백한 진보다. 가령 표현과 결사의 자유는 노동계급이 자주적으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싸우고 노동조합과 정당을 조직하며 정치사상을 발전시키는 데에 필수적인 권리다. 그러나 노동계급에게 필수적 권리라는 것과 그것이 언제나 단연 중요한 “계급적 요구”라고 규정하는 것은 다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파시즘 등에 맞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것은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에 제한적으로 포함된 노동자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방어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예를 들어 스페인 혁명에서처럼 파시스트에 맞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방어한답시고 노동자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억압한 것이 왜 반혁명적이고 재앙적인 전략이 됐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전지윤이 박근혜 정부에 맞서 민중 전체의 단결을 강조하는, 지배계급 중 각별히 반동적인 소수(냉전주의자들, 독재정권 계승자들, 재벌과 금융자본 등)에 대항해 사회의 나머지 계급이 대등하게 연합하자는 민중주의 전략과 잘 어울리게 된 것은 그의 민주주의 개념에서 계급적 기초가 실종돼 있는 것과 관계 있다.

대다수 민중주의자들은 좌파일지라도 자신들이 ‘일반 민주주의를 대표함으로써 사회 전체를 대변하는 반면, 노동자 투쟁은 자신들의 협소한 이익을 위해 파업하는 것이므로 부분을 대표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박근혜의 우파적 공세가 경제·안보 위기, 특히 경제 위기에 대응해 기업주들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것임을 이해한다면, 바로 그 기업주들의 이윤에 직격탄을 날릴 수 있는 노동계급의 주도성과 파업의 힘을 부차화시켜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오류를 피하려면 민주적 권리들과 정치체제(국가 형태)로서의 민주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전지윤처럼 그 둘을 구분하지 않으면 박근혜의 위협이 ‘일반 민주주의’(사실상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하는 것처럼 과장된 인상을 받거나 혼란과 동요를 느낄 우려가 크다.(그가 주로 박근혜와 우파의 ‘말’을 주로 인용해 이런 과장을 증명하려는 것도 이와 관계 있다.)

그 점에서 노동자들이 개별 노동현장에서 투쟁으로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측면을 무시한 그가 절차적 민주주의는 “계급적 요구”라며 강조하는 것은 시사적이다. 전지윤의 접근법과 달리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마지못해 제한적으로 허용해 “사회권”이라고 부르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일부 기본 요소들, 즉 노동현장에서 기업주에 맞서 획득한 노동과정의 부분적 자율성, 임금과 복지의 향상 등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문제를 경시해서는 결코 안 된다.

위기 상황에서 사회적 갈등이 첨예할 때는 지배계급이 민주적 권리를 공격하기도 한다. 1980년대 대처가 이끈 영국 보수당 정부가 노조의 파업권을 약화시킨 것이나 9·11 테러 이후 미국판 테러방지법인 ‘애국법’이 제정돼 민주적 권리를 약화시킨 것이 그 사례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영국과 미국의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가 본질적으로 훼손된 것은 아니다.

강성 우파 정부

박근혜 정부가 강성 우파 정권이고 경제·안보 위기 속에서 특정한 민주적 권리들을 공격하고 있지만, 오늘날 한국의 정치체제(국가 형태) 자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다.(물론 사악하고 매우 우파적인 정부가 이끌고 있지만 말이다.) 파시즘의 도래나 유신 체제로의 회귀라는 식의 성격 규정은 과학적 분석이 아니다.

예를 들어, 박근혜는 “노동개혁”을 관철하려고 한국노총 관료들을 끌어들여 노사정 타협이라는 외피를 쓰려고 애썼다.(오늘날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상응하는 유력한 개혁주의 중 하나가 사회적 합의주의다.) 1차 민중총궐기에 소요죄를 적용하겠다는 식으로 정부가 온갖 협박을 다했지만,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집회들은 광화문, 시청광장 등지에서 여전히 개최되고 있다. 전교조 법외노조화 공격 등 박근혜의 공격은 여러 차례 법원에서 제동이 걸렸다. 해산된 진보당의 일부가 어느 정도 당세를 일부 회복하면서 민중연합당으로 재기해 합법적으로 총선에 출마한 것도 그런 사례다. 박근혜가 여권 내 정적이나 야당들을 선거에서 심판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나 그것이 새누리당 공천 내분으로 이어지는 걸 보면, 유신 체제로 회귀하고 있다는 식의 분석은 전혀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의 성격 문제는 노동운동 전략·전술 수립에서 중요하다. 박근혜 정부의 반동적 성격 때문에 모든 피억압 민중의 권리가 공통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과장하면, 전지윤처럼 노동운동이 민주주의 요구를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박근혜의 민주적 권리 탄압이 노리는 바가 “노동개혁”(착취 강화)을 위해 대체로 노동운동과 좌파를 위축시키는 것이라면, “노동개혁” 반대를 부각하는 게 전혀 문제가 안 되고 오히려 1~4차 민중총궐기에서도 “노동개혁”에 반대하는 조직 노동자들이 압도 다수인 점도 설명 가능하다. 오히려 노동운동의 동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이 당면해 공격받는 쟁점인 “노동개혁” 쟁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옳다.

민주주의가 의제통합적 기능을 한다고 보는 전지윤은 그것의 중심에 종북몰이 문제를 놓는다. “박근혜에게 종북몰이는 ‘절대반지’와 같았다. 박근혜의 등장도, 기반도, 당선도, 통치도, 위기 탈출도 ‘종북’을 빼면 설명되지 않는다.”[27] 전지윤에게 “종북 몰이”는 박근혜의 “민주주의 파괴”와 동의어인 듯하다. 또한 그가 “13만 명”이나 모인 1차 총궐기의 가장 큰 공헌자를 자민통계로 판단했음을 감안할 때, 그에게 자민통계 방어는 일반 민주주의 방어와 거의 같은 것임도 짐작할 수 있다.

전지윤은 3년 전 진보당 내 경기동부의 “내란음모” 탄압 사건에서 자민통계에 대해 어떠한 비판적 언급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는데, 이와 관련한 논쟁은 그의 노동자연대 탈퇴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당시 사건 초기에 경기동부 리더들이 이른바 ‘5월 RO 회합이 없었다’고 했다가 나중에 말을 바꾸고 탄압 방어 연대체에서 사과까지 했는데도, 이를 거짓말로 볼 수 없다고 변호할 정도로 균형을 잃은 무비판적 방어론을 펼쳤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노동자연대가 그런 무비판적 방어론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노동자연대가 종북몰이에 기회주의적으로 타협이라도 한 것인양 주장하고 다닌다.

그러나 노동자연대는 당시 기관지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 진보당을 방어했을 뿐 아니라, 최영준 운영위원이 진보당 방어를 위해 결성한 연대체인 공안탄압대책위원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김인식 운영위원은 진보당 해산 재판(헌법재판소)에 출석해 피고 측 증인으로 증언했다. 노동자연대의 비판적 방어론이야말로 모종의 친북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흔쾌히 민주적 권리 방어를 위해 결집시킬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을 왜곡하는 전지윤의 부정직함의 다른 편에는 기회주의가 있다. 그는 탄압에 직면한 단체에 대한 어떤 비판도 ‘정의롭지 않다’고 강변했다. 사실 그가 자민통계의 사상을 지지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당시 그는 무비판적 방어를 해야 하는 이유로, 친북 사상은 인기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사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사상의 자유 탄압에 반대한다’는 노동자연대의 비판적 방어론은 오히려 자민통계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종북몰이에 힘을 실어 준다는 것이었다. 대단히 도덕적인 것 같지만, 이는 오히려 ‘친북 사상은 보호받을 수 없다’는 대중의 후진적 정서에 영합(추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노동자연대 회원들 다수는 전지윤의 기-승-전-종북몰이’식 정세 분석에도 동의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기회주의를 함축하는 그의 무비판적 자민통계 변호론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이처럼 전지윤의 기회주의는 때로는 초좌파적(수동적 좌익주의/선전종파주의)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개혁주의와의 타협으로 나타난다. 레닌은 이 둘을 각각 “좌익/우익 기회주의”라고 불러서 그 기회주의적 본질을 정확히 지적했다.

3) 정의당과 민중연합당

전지윤은 “노동자연대가 정의당에는 상대적으로 우호적 태도를 보인다”고 주장한다. ”정의당은 현재, 노동자연대가 그토록 문제 삼는 ‘민중주의’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계급연합적 성격의 진보정당”인데도 그렇다는 것이다.[28]

이 주장은 좀 우스꽝스럽다. 전지윤이 우호적으로 대하는 민중연합당이야말로 (당 명칭은 물론이고) 스탈린주의 고유의 민중전선 전략을 강력하게 고수해 왔기 때문이다. 대략 2010년 이후 지금의 자민통계, 정의당 지도자들 모두 민주당 세력과의 연립정부를 추구해 왔다. 더 우월한 세력에 힘입어 참여당을 진보대통합 과정에 먼저 끌어들인 것도 자민통계 지도부였고, 과거 진보신당을 왕따시키면서 민주당과의 독점적 야권연대를 맺으려 했던 것도 그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지도자들 중 누가 당시의 행동들을 반성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런데도 전지윤은 ‘조건상 계급연합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상황 논리로 이들을 변호한다.

자주파는 현재 민주당과의 동맹 등 ‘계급 연합 정치’를 기본적 지향대로 온전히 추구할 조건에 처해 있지 못하다. ‘종북’ 불똥이 튈까 봐 겁먹은 민주당과 심지어 정의당까지도 자주파를 ‘왕따’시키는 판[29]

사정이 그렇다고 정치적 책임이 면제되는 것일까? 상황 논리를 펴는 것을 보면, 전지윤도 차마 자민통계의 본래 전략까지는 변호하기 어려운가 보다.[30] 이렇게 보면, 그가 정의당을 문제 삼는 것이 정말 그 당의 “민중주의”인 건지 의심스럽다.

그래서 그가 정의당에 대해 지지가 거의 없는 비판 일색인 것은 정의당의 사회민주주의를 스탈린주의보다 더 우파로 판단하기 때문인 듯하다. 특정한 정치운동을 판단할 때는 계급 기반과 강령, 계급 갈등 속에서의 실천 등을 종합해서 봐야 하는데, 그는 이데올로기를 더 선차적으로 보는 것이다.[31] 그가 정의당을 개혁주의로 지칭하는 것은 여러 번 봤지만, 자민통계를 그렇게 부르는 건 못 봤다.

정의당은 주류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한다. 이 사회민주주의는 제2차세계대전 후 확립된 “현대 사회민주주의”다. 이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나 독일 사민당의 고데스베르크 강령으로 상징되는데, 그 특징들은 이전보다 더 공공연하게 ‘계급에서 국민으로, 혁명 거부, 냉전에서 서방 편들기’ 등을 내세우는 것이었다.(이런 요소들이 맥락상 서로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반공적 사회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지향점은 심상정 정의당 대표의 언행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를 변호할 급진좌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종북몰이를 “민주주의 파괴”로 과장해 이해하고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혁명적 비판과 대중의 합리적 문제제기까지 싸잡아 ‘기회주의’로 모는 것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아부처럼 들린다. 오늘날 노동자 대중이나 진보적 대중, 청년들이 북한을 ‘가난하고 실패한 제3세계 독재국가’ 같은 이미지로 보는 것은 단지 반공주의 세뇌 때문이 아니다. 역설이게도, 민중연합당 창당이 가능했다는 점이 종북몰이에 운동(대중)이 크게 위축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32] 그러므로 스탈린주의의 인기 없음은 정치적 내용의 문제를 포함해 봐야지, 탄압의 효과로만 일면화해선 안 된다. 이런 태도를 보면, 동유럽 혁명과 소련 해체 이후에도 국가자본주의론에 입각한 혁명적 좌파조차 별 성장을 하지 못한 것에 그가 좌절해 스탈린주의와 동맹해서라도 ‘급진좌파’를 강화해야 한다고 성급하게 보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정의당 비례 국회의원 후보 선출에서 노동자연대가 지지한 양경규 후보가 종북몰이에 타협했다고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비판했는데, 내가 뭐라고 답할 수는 없겠다. 다만, 전지윤이 이미 2년 전 노동·정치·연대가 출범할 때 “북한에 대한 자주적 태도”를 정강으로 삼은 것마저 ‘종북몰이에 대한 굴복’인 듯이 비판했었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그것은 그가 노동운동의 나머지가 스탈린주의와 동맹해야 함을 염두에 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점 때문에도 진보정치 세력의 민중주의(‘진보적’ 계급연합이나 전략적 야권연대)에 대해서도 일관성 있게 비판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건 노동자연대지, 전지윤이 아니다. 노동자연대는 자민통계와 사민주의 경향 모두에 대해 그 점을 비판해 왔다. 반면, 전지윤은 2014년 7월 재·보선에서 옛 진보당 의원들이 야권 단일화를 위해 줄사퇴를 할 때는 정작 침묵했다.

야권연대/연립정부/민중전선

야권연대에 대한 노동자연대의 비판은 혁명적이고 좌파적이다. ‘선거 실리를 위해 정당이 정체성 없이 야합하고 있다’고만 비판하는 것은 그 목적이 달라서 그렇지, 새누리당과 〈조선일보〉도 하는 비판(표현)이다. 노동자연대는 오히려 야권연대와 후보 단일화가 단기적 선거 실리를 줄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과의 후보 단일화, 더 나아가 전략적 야권연대는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임을 안다. 특히 그러한 노선을 이끈 지도자들은 부르주아 일부와의 동맹 유지를 위해 노동자들이 고유의 방식으로 기업주들에게 타격을 주며 독립적으로 싸우는 것을 꺼리고 말리며 억제한다. 그럴수록 운동은 약해지게 돼 있다. 그 때문에 운동은 분열하고 노동자들의 사기가 떨어지기 십상이다. 오로지 대중투쟁만이 진정한 변화(개혁, 변혁 등)를 쟁취할 수 있는데 말이다. 따라서 개혁주의든 스탈린주의든 민중주의적으로 야권연대를 추진하는 것의 문제점은 바로 계급투쟁에 해롭다는 것에 있다.

물론 스탈린주의와 시회민주주의의 ‘야권연대’(연립정부 추구를 포함해)는 형태가 비슷할지라도 역사적으로 보면, 그 의미와 투쟁에 미치는 효과에서 구별된다. 개혁주의적 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 부르주아 정부에 장관으로 들어가는 문제는 1백 년이 넘은 일이다. 1899년 프랑스에서 밀랑의 입각으로 불거진 논쟁은 이듬해 제2인터내셔널 대회로 이어졌다. 이를 반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와 달리 칼 카우츠키 등은 내각 참여를 지지했다. 이후 제1차세계대전 중인 1916년 영국 노동당도 거국내각에 참여했다. 개혁주의 운동으로서 사회민주주의는 부르주아 국가의 상층부에 진입해 개혁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노동조합 운동의 상층 전임 지도자들을 매개로 운동과 연관을 맺지만 기층에서 운동을 건설하는 방식보다는 선거에 맞춰져 있는 상층의 당기구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평당원 대다수는 선거 운동 지지 수준의 수동적 상태에 머문다.

반면, 스탈린주의 정당은 노동운동의 상층뿐 아니라 기층에까지 기반을 구축한다. 그런 만큼 운동에 미치는 영향력은 (1930년대 유럽이나 1980년대 후반 한국에서 누린 것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사민주의 정당보다는 더 크다. 1936년 봄에 집권한 프랑스 민중전선 내각에는 가장 세력이 큰 공산당이 참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공산당은 노동자들의 어마어마한 5~6월 파업 물결을 잠재우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공산당들이 이런 반혁명적 정책을 채택한 것은 소련의 지정학적 전략과 국제적 수준에서 민중전선 정책이 연결돼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소련 당국은 나치 독일이 소련을 향해 동쪽으로 진격할 수 없도록 반대편인 서쪽에서 독일을 압박해 줄 동맹 세력을 영국, 프랑스, 미국의 제국주의 지배계급 안에서 찾으려 했다. 그래서 유럽 공산당들은 반파시즘 민중전선을 통해 자국의 지배자들에게 공산당들이 혁명을 추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동맹을 위해 이를 막을 태세까지 돼 있음을 보여 주고자 했다. 전지윤이 정의당보다 자민통계가 더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은 대중운동에서의 그들의 영향력과 비중 때문인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스탈린주의의 민중전선 전략이 더 위험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지윤이 정의당만 개혁주의로 취급하면서 자민통계를 편애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거나, 자신의 편견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적 외면일 뿐이다.

노동자연대가 정의당에 더 큰 관심을 가지는 건 정의당의 부상이 지난해 노동자 투쟁의 부분적 회복 속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타이트하게 사상적 통일과 조직적 일사불란함을 추구하는 스탈린주의 정당보다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좌파가 개입할 여지가 더 크기도 하다. 따라서 노동운동 전체의 전투성 회복을 위해서도 성장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개입해 그 안의 좌파를 지지하고 필요할 때는 동맹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좌파적 종파주의라면, 개혁주의 정당의 우경화를 손뼉치며 기뻐할 것이다. 폭로 거리가 생겼다고 말이다.

균형감은 구체적 맥락에서 나온다

한편, 노동자연대는 필요할 경우 구체적 맥락 속에서 특정 정치 경향이나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지지·비판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또한 공개적이고 일관된 기준으로 임해 왔기 때문에 그 판단 자체에 대해 논쟁을 한 적은 있어도 정파적 ‘편파’라는 비판은 받은 적이 없다.

예를 들면, 노동자연대는 민주노총 안에서 진보·좌파 정당 다원주의를 정치 방침으로 지지해 왔다. 진보·좌파 정당들을 지지 대상으로 하되, 특정 정당 지지 문제로 불필요하게 단결을 해치지 말자는 것이다.

이번 총선 민주노총 전략 후보 선출을 위한 울산 동구·북구 단일화 과정에서도 노동자연대는 선거구별로 상대적 좌파성을 따져 각각 노동당 이갑용 후보(동구)와 자민통계 무소속 윤종오 후보(북구)를 지지했다. 경선 결과가 노동자연대의 바람대로 다 된 건 아니지만, 우리는 새누리당에 맞서 동구와 북구에서 선출된 민주노총 전략후보들을 아무 유보 없이 지지했다.

지난해 노동당과 정의당의 통합 논쟁 때도 노동자연대는 (과거의 관계와 상관 없이) 공개적으로 노동당 내 통합 반대파를 지지했다. 가맹했던 노동·정치·연대와는 정의당과의 통합 문제에 대한 차이를 정직하고 동지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고 탈퇴했지만, 이들이 이미 통합 정의당에 합류한 뒤에는 당내 좌파인 그들이 정의당의 대표 의원이 되기를 바라고 공개 지지했다. (한편, 녹색당이 진보·좌파 정당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다룰 일도 거의 없었다.)

반면, 전지윤의 블로그 글 수백 개를 뒤져 봐도 그는 옛 진보당 방어와 정의당 비판 말고는 노동당 등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그런 그가 노동자연대의 ‘정의당 편애’를 증명한답시고 노동당, 녹색당을 우리가 별로 다루지 않았다고 비판한 것은 얄팍한 수작이다. 아마 이번에도 이간을 노린 것일 텐데, 그 정당들이 그 정도로 옹졸할 것 같지는 않아서 그다지 효과는 없을 듯하다.

4) 어떤 조직이 필요한가

노동계급 대중에게 혁명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만이 자본주의 지배의 구조물들을 해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만 수백만, 수천만 명의 노동자들이 자기 쇄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적 정당이 지금처럼 극소수일 필연적 이유는 없겠으나 혁명적 시기에 가서야 비로소 대중정당으로 성장해 혁명적 노동자 운동을 권력으로 이끌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은 당연히 기존에 개혁주의를 지지했던 수백만 대중을 설득하는 데 달려 있다. 혁명가들이 활동적 능동성을 유지하면서도 지난한 시간을 견디며 끈기 있게 헌신하는 것을 덕목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개혁주의 운동과의 공동전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개혁주의를 지배계급의 음모나 개혁주의 지도자 일당의 책략 따위로만 보는 관점으로는 이런 과업을 수행할 수 없다. 모종의 마술적 슬로건이 운동의 약점을 극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환상 따위가 그럴 수 없음도 마찬가지다.

또한 혁명가들의 공동전선은 전지윤의 “공동전선 정치”와 달리 혁명적 독자성(조직과 정치 모든 면에서)을 전제로 한다. 이 점에서 그의 ‘주체 없는 단결론’을 살펴봐야 한다. 그는 노동자들이 부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며 일종의 ‘대동단결론’을 편다. 그는 ‘정파 간 갈등’과 ‘운동 전체를 대변하는 것’을 대비시키는데, 정파라는 것이 (그것이 옳든 그르든) 운동 또는 계급 전체의 이익을 어떻게 보냐에 따라서 형성되고 나뉜다는 현실을 볼 때, 정파 갈등 그 자체를 문제 삼는 듯한 그의 단결론이 현실에서 존재하는 차이를 흐리거나 덮는 일종의 ‘대동단결론’임을 알 수 있다.[33] 노동계급과 민중의 차이를 무시하려는 전지윤이 정치적 차이들마저 덮자는 식의 단결론에 매진하는 것에서 또한 그가 이론·정치·강령을 사실은 별로 중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동단결론’에서도 ‘그가 관찰하는 객관적 환경에는 주체성이 없다’는 최일붕의 비판이 그대로 확인된다. 이는 그가 상정하는 정치조직이 결국은 범좌파 연합 정당일 것임을 그리고 혁명적 독자성에 대해 계속해서 부정할 것임을 일러 준다. 일련의 논의들을 내 나름으로 종합하면, ‘기회주의적 운동주의’로 부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런 정치로 그가 건설하는 조직은 어떤 모양이 될까. 이제 막 시작한 그 조직을 사실상 유일하게 대표하는 전지윤의 정치와 전략·전술을 볼 때, 그 조직은 혁명적 강령에서 시작해 단단한 소수가 끈기 있게 노동자 투쟁에 개입하며 전투적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조직이 아닐 것이다. 자신들이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그것을 위해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고 어느 계급의 힘에 기대야 하는지를 치열하게 토론하며 헌신적으로 현실의 운동에 개입주의적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운동들은 결국 국가를 상대해야 하므로 그것의 정치적 표현체가 필요한데, 전지윤의 논리적 귀결은 그 형식이 범좌파 연합 정당일 것임을 보여 준다. 이조차도 건설 과정, 운영 과정에서 전지윤 조직이 영향을 미치려면 기층에서 조직을 건설해야 할 텐데, 지향하는 바 자체가 그렇지 않으니 결국은 운동 상층 지도자들을 향해 타협과 절충, 운동 내 명망 쌓기가 그의 조직이 추구하는 가치가 될 것이다.

이미 ‘운동들의 운동’을 추구한다며 이론과 강령 상의 절충과 타협이 혁명적 강령을 대신하고 있다. 운동의 다수파에 얹혀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거나, 지지자들이 강령 확립을 위해 헌신하기보다 마치 서클처럼 그저 토론만 하면서 전지윤에게 재정이나 대어 주는 것이 건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전지윤의 레닌주의 비판은 그 자신의 행보를 사후에 정당화하기 위함일 뿐이다. 2013~14년에 그는 지도부의 일원이었으면서 레닌주의 지향 조직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방식으로 비민주적으로 행동하다가 노동자연대 회원 다수에게, 심지어 자신이 직접 이끌던 단체 편집부의 기자들에게까지 배척받게 됐다. 이후 자신의 창피한 정치적 패배를 가리려고 노동자연대가 비민주적이고, 레닌주의적 민주집중제가 문제인 것처럼 바꿔치기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시 문제는 계급에게서, 또 동료들의 경험에서 배우기를 거부한 전지윤의 비민주성이었다.

레닌주의 조직 원리인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는 오직 현실에 개입하는 정당을 주체로 설정할 때만 의미가 있다. 이 당은 노동계급의 일부지만 혁명적 사상으로 구별되는 일부로서 계급의 여러 부분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 따라서 이런 경험들은 단체 안에서 민주적으로 토론돼야 한다. 그러나 민주적 토론은 집단적 실천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계급의 다양한 경험에서 배우면서 최적의 실천 지침을 끌어내려면 민주적 토론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민주적 토론은 다수결, 집단적 실천, 중앙집중주의와 배치되지 않는다. 따라서 레닌주의 정치조직의 민주적 집중주의는 국민의 다수인 노동계급의 이익을 배반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주류 정치, 당원과 지지자들 다수의 이익을 지도자들이 거스르곤 하는 개혁주의 정당들과 비교할 때, 오히려 더 민주적인 징표인 것이다.

물론 집중적 실천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변론이 설득력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협업(협업의 체계화가 조직이다)의 힘이듯이, 사태에 영향을 미치려는 혁명가들은 조직적(집단적) 실천을 해야 한다. 진지한 실천가가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려 하듯이, 단체의 결정과 실천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은 능동적으로 개입해 상황을 바꾸려는 혁명가들의 미덕이다. 전지윤은 이런 과정을 마치 ‘개인성의 굴종’처럼 묘사하지만, 오직 운동 위에서 굽어다 보는 개인만이 ‘집단적 실천 속에서 서로 배우기’를 그렇게 이해할 것이다.[34]

마치며: 기회주의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전지윤은 여러 면에서 말을 실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하다. 그 점에서 “딱지붙이기”에 대한 그의 항변이 흥미롭다.

딱지를 붙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토론과 비판이 가능하다고 본다. 실제 내가 쓴 지난번 반박 글에는 이런 딱지 붙이기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동지에게는 그것이 벗어나기 어려운 하나의 습관이 돼 버린 것 같다.[35]

자신은 ‘~주의’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으니 “딱지 붙이기”를 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딱지 없는 딱지 붙이기’가 습관인지, 책략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하나만 지적하고자 한다. 그동안 노동자연대의 실천과 주장을 왜곡해 곳곳에서 황당한 딱지를 붙이며 운동 내 신용을 떨어뜨리려 애써 온 것은 전지윤 본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그는 최일붕의 비판이 자신을 지지하지 못하도록 회원들을 압박하는 거라는 식으로 말한다. 2년 전 단체 내 논쟁에서도, 최근 반박 글에서도, 우리 단체의 활동가들과 평회원들을 독자적 사고도 없는 꼭두각시처럼 취급하던 그가 ‘알파고’가 인간의 창조성을 따라잡을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면, 말을 잃을 지경이다.

그는 ‘2년 전 조직 내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도 40명이나 자신을 지지해 함께 탈퇴했다’고 강변한다. 자신의 분파가 “최단명 조직”이 된 것은 분파를 3개월 만 운영하게 한 규약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미안하지만, “최단명 조직”은 공식 분파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종합적 진실을 말하자면, 당시 그의 분파원 다수는 그가 제기한 핵심 쟁점인 진보당 방어 문제 등에서 전지윤을 거의 지지하지 않았다. 더욱 우스운 것은 단체의 대의원협의회에 영향을 미치겠다고 결성한 분파의 구성원들 상당수가 대의원 선출(출마/투표)에 참가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랬냐 하면, 단체 회원들 다수에게 전지윤의 주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지지를 못 받았기 때문이다. 단체의 운영위원이라는 프리미엄이 하나도 통하지 않은 것은 그의 위선과 음모적 조직 방식, 주장의 얄팍함을 회원들이 파악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안팎의 압박 속에서 그 분파는 자중지란 끝에 분열했다. 그래서 전지윤은 탈퇴(선언)에 이름을 올릴 사람들을 새로 모집해야 했다. 그래서 이미 실천 활동을 그만둔 사람, 회비도 납부하지 않던 사람, 그래서 이미 탈퇴 처리가 된 사람들까지 긁어 모아 40명 가까운 명단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건 조직도 아니다. 그래서 정작 그가 탈퇴 후 꾸린 조직은 40명짜리가 아니라 열 명짜리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최단명”으로 감정적 논쟁 끝에 분열한 것이다. 이래 놓고 40명을 무슨 조직이었던 것처럼, 자기 지지자처럼 꾸며대는 건 놀랍다.[37]

그가 노동자연대 지도부 출신임을 내세워 노동자연대를 비판하는 것이 호사가들의 관심을 끌지는 모르겠다. 노동자연대의 이런저런 급진적 비판에 마음을 상하거나 불쾌해 한 소수에게서 SNS 상에서 호의를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담컨대, 그런 옹졸함과 얄팍함, 교활함, 기회주의로는 갈수록 야만적으로 되는 자본주의에 맞설 단호한 대중 운동을 건설하거나 이끌 수 없다. 전지윤과의 논쟁은, 지금껏 그랬듯이, 이런저런 작은 실수들은 있을지언정 크게 보아 노동자연대가 개척하려는 길이 옳았음을 보여 준다.

[목차로 돌아가기]

[1] 여기서는 노동자 투쟁 전술이나 노동계급의 약화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세부적으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최영준과 강동훈의 글을 보라. [본문으로]

[2] “예측이 어긋나면 스스로의 분석부터 돌아봐야 ”, 2016년 3월 9일 . [본문으로]

[3] 앞의 글. [본문으로]

[4] 전지윤의 노조 무용론이 노조관료주의에 대한 변호론으로 쓰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전지윤의 입장은 이미 그런 효과를 내고 있다. 좌익기회주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5] “노동운동의 요구와 방향을 좁히지 말아야 한다” , 2016년 3월 25일. [본문으로]

[6] “신자유주의와 노동운동”, 2015년 10월 21~28일. 이하 모든 인용문의 굵은 강조 표시는 김문성이 한 것이다. [본문으로]

[7] 앞의 글. [본문으로]

[8] 그가 “사회적 고립 ”이 주는 영향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사태를 판단할 때, ‘여론 ’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논의에서 이런 특징이 반복해 나올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 저항 행동 이전의 여론은 지배계급이 지배하기 일쑤이므로 이는 매우 수동적인 접근법이고, 전망에서 비관적으로 되기 쉽다. [본문으로]

[9] “노동시장의 ‘헬조선’화를 다같이 막아내자”, 2015년 9월 15일. [본문으로]

[10] 이 논문에 대한 논평은 강동훈의 글을 보라. [본문으로]

[11] “신자유주의와 노동운동”, 2015년 10월 21~28일. [본문으로]

[12] 앞의 글. [본문으로]

[13] 앞의 글. [본문으로]

[14] 앞의 글. 바로 위 인용문인 “노동운동의 … 시작한 것이다. ”의 각주에 달린 설명이다. [본문으로]

[15] 앞의 글. 마르크스는 노동조합의 양면성을 두루 지적했지만, 노동조합을 무용하다고 결론내린 바 없다. [본문으로]

[16] “예측이 어긋나면 스스로의 분석부터 돌아봐야 ”, 2016년 3월 9일 . [본문으로]

[17] “노동운동의 요구와 방향을 좁히지 말아야 한다” , 2016년 3월 25일. [본문으로]

[18] 앞의 글. [본문으로]

[19] 이 “특정한 조건”이 강동훈의 글에서 언급한 철도파업의 승리 조건 다섯 가지 같은 것이라면, 그에게 실천적 대안은 정말 기대 난망이다. [본문으로]

[20] 이런 식의 논리를 일반화하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위한 투쟁도 부문주의(개인들의 이익)일 뿐이니, 지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본문으로]

[21] 이는 노동계급의 자력해방 원칙에서 멀어졌고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현실화시키도록 개입할 응집력 있는 정당을 건설하자는 레닌주의를 버리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포기한 사람들이 대체로 레닌주의를 문제 삼는 것을 보면, 이는 레닌주의야말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에 부합하는 간접 증거로 삼을 만하다. [본문으로]

[22] “손을 잡고 탄압을 이겨내며 다시 분노의 총결집을 이뤄내자” , 2015년 11월 27일 . 그가 총궐기 당일부터 이후의 탄압 과정을 음모론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라. 우파의 음모대로 사태가 진행될 것 같으면, 애초에 왜 그들은 총궐기가 성공적으로 성사되는 것을 막지 않았을까? [본문으로]

[23] “노동운동의 요구와 방향을 좁히지 말아야 한다” , 2016년 3월 25일. [본문으로]

[24] 앞의 글. [본문으로]

[25]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그 안에 노동자들의 민주적 권리를 일부 포용한다 해도 노동자 민주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반면 노동자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폐지를 의미하므로 그 역시 계급을 초월한 민주주의 체제일 수가 없다. [본문으로]

[26] 실제로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은 독립사회민주당을 함께 지도했고 이 당의 다수가 독일공산당으로 합류할 때 함께 사회민주당으로 돌아갔다. [본문으로]

[27] “쓰러진 진보당을 일으켜 세우며 함께 민주주의를 지켜내자” , 2014년 12월 21일 . [본문으로]

[28] “노동운동의 요구와 방향을 좁히지 말아야 한다” , 2016년 3월 25일. [본문으로]

[29] “예측이 어긋나면 스스로의 분석부터 돌아봐야 ”, 2016년 3월 9일. [본문으로]

[30] 실제로는 경기 성남중원에서 예비후보로 출마했던 진보당 김미희 전 의원도 ‘야권단일화 ’를 위해 본선에 등록하지 않고 불출마했다. [본문으로]

[31] 그래서 이런 이데올로기 ’주의 ’는 흔히 개혁주의 노동운동에 종파적이기 쉽다. 다르게 ‘선전(종파)주의 ’라고도 부를 수 있다. 전지윤은 흔히 담론을 실재보다 앞세운다. 그가 박근혜 정부의 “민주주의 파괴 의지 ”를 입증하는 논거들은 모두 정부 요인들의 ‘말 ’이다. [본문으로]

[32] 개혁주의 상층 지도자들은 위축감이 있는 듯하다. [본문으로]

[33] 공교롭게도 운동 내 확고한 다수파일 때 자민통계가 흔히 펴 온 주장이 이런 류의 ‘대동단결론 ’이다. [본문으로]

[34] 계급의 경험에서 배우기를 거부하는 그가, 다음을 노동운동의 약점 극복 대안이라고 내놓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사회적 고립과 분열로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낮아 파업이 불가능하다면서, 단기적 희생을 해서라도 전체 민중을 대표하는 슬로건을 걸고는 싸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자체로 모순이기도 하지만, 그가 노동자들의 현실보다는 지도자가 임의로 설정한 목표에 대중이 따라야 한다는 식이다. 앞서 지적했듯, 여론을 중시하며 대세 추수식 전술관과 이런 엘리트주의의 결합은 흥미롭다. [본문으로]

[35] “노동운동의 요구와 방향을 좁히지 말아야 한다” , 2016년 3월 25일. [본문으로]

[36] “더 늦기 전에 함께 반성하며 이 고통을 끝냅시다 ”, 2014년 11월 25일. [본문으로]

[37] 알파고도 조직의 구성원 수 계산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목표도, 공유하는 것도 거의 없는 느슨하고 일시적인 연락망 정도를 ‘조직 ’으로 본다면, 실은 전지윤이 자기를 떠받들 사람들을 조직하는 것 말고는 능동적 협력체로서의 조직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본문으로]

전지윤의 ‘노동운동의 요구와 방향을 좁히지 말아야 한다’에 답하며
지난해 노동자 투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최영준

전지윤 씨(이하 존칭 생략)는 ‘노동운동의 요구와 방향을 좁히지 말아야 한다’[1]에서 최일붕과 김하영의 비판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 채 ‘벽창호’처럼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한다. 아마도 일부 사실을 과장하고, 나머지 사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기회주의와 일면적 사고방식 탓인 듯하다. 특히, 자기 주장을 합리화하려고 일부 사실을 슬쩍 비틀고 왜곡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전지윤은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낮아 지난해 민주노총 총파업은 사실상 불가능했다면서, 노동자연대가 근거 없는 낙관에 기초해 허망하게 노동개악 저지 총파업에 주력했음을 인정하라고 촉구했다.

이 같은 주장들을 보면, 2년 전 그가 우리 단체를 탈퇴한 핵심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조직노동자운동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진 전지윤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이탈해 민중주의로 더욱 나아가고 있다.

지난해 노동자들은 싸울 자신감이 없었는가

전지윤은 “과연 지난해 조직 노동자들이 파업 호소만 하면 싸울 자신감과 준비가 돼 있었던가?” 하고 묻는다. 애초부터 총파업은 불가능했다는 것을 전제한 질문이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조직노동운동은 여러 굴곡 속에서도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했고, 2014년 말 민주노총 첫 직선 위원장으로 한상균 좌파 집행부를 당선시켜 박근혜 정부의 파상공세를 막아야 한다는 바람을 표현했다. 이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파업에 나설 만큼 자신감이 높지는 않지만, 적어도 지도부가 단호하게 파업을 호소하면 이에 응해 파업에 나설 수도 있음을 보여 준 것이었다.

실제로 지난해 노동자들은 정부의 노동개악 추진에 맞서 상당한 저항을 했다. 박근혜 집권 직후 상황에 비춰 보면, 노동자들의 저항 수준과 태세는 꽤나 전진했다. 비록 하루 행동에 한정됐지만 4·24 파업과 9·23 파업은 의미가 있었다. 4·24 선제파업은 중앙파·국민파 지도부의 비협조 속에서도 전국적으로 27만 명(민주노총 통계)이 참가해 선방했고, 노동개악 저지 투쟁의 가능성을 보여 줬다. 9·23 파업은 규모는 작았지만 노사정 야합에 맞선 긴급 항의였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했다. 언론들도 “노사정위, 정부·자본 대변 도구 ‘최악의 야합’”이라며 민주노총의 투쟁을 비중 있게 다뤘다.

11월 14일 민중총궐기는 박근혜 집권 이후의 최대 규모 시위로,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진보·좌파 단체가 주된 동력이었다. 노동자들은 거리시위로 상당한 저항을 보여 줬다. 물론 노동계급 고유의 힘(파업)을 발휘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도 있었다.

전지윤은 최일붕·김하영이 “지난해 투쟁에 대한 평가를 자신들의 예측에 끼워 맞추고 있다”고 말했지만, 골방에 앉아 자신이 만든 규정에 현실을 욱여넣고 있는 것은 바로 전지윤 자신이다.

노동자 투쟁에 대한 전지윤의 회의는 “사회적 고립”과 “줄어든 동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피상적 인상에 기초해 있다. 그래서 그는 “20년 전의 한국 노동자들에 비해 지금의 한국 노동자들이 약화됐다거나 ‘사회적 고립’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최일붕의 주장이 “당혹스러운 말”이라고 했다.

20년 전이라면, 1997년 총파업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민주노총 파업 지지율이 80%에 달하던 때이다. ‘이미 귀환한 노동계급’을 못 알아 본 나로서는 당혹스러운 말이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최일붕 동지가 “확률론적 기대값이 낮은 일”에도 “도박을 걸어야 한다”고 말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전지윤이 말하는 1997년과 비교했을 때 오늘날 한국 노동자들의 힘도 여전히 강력하다. 당시보다 노동자 규모는 더 늘었고 이들이 산업 현장에서 미칠 힘은 그만큼 더 커졌다. 1997년 IMF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강화로 노동계급 내부가 분절화되어 힘이 약화됐다는 주장이 유행이지만, 그 상징으로 꼽히는 비정규직의 증가는 그만큼 자본가들이 이 노동자들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이들의 투쟁 잠재력도 더 커진다는 것을 뜻한다.

조직 면에서 보자면, 1997년에 비해 노조 조직률은 약간 낮아졌지만 조합원 규모 자체는 40만 명 넘게 늘었다. 민주노총 조합원 수도 10만 명 가까이 늘었다. 그동안 공공부문, 서비스업, 비정규직 등에서 새롭게 노조를 조직하고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이 많아진 것이다.

전지윤의 주장처럼 조직노동자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는 것도 아니다. 2013년 말에 ‘노동귀족’, ‘철밥통’이라고 비난받던 철도 노동자들이 23일간 최장기 파업을 벌이며 박근혜 정부를 위협하자, 투쟁에 대한 지지가 광범하게 일었다. 철도 민영화 반대 여론은 70퍼센트를 웃돌았다. 지난해 민주노총의 4·24 총파업에는 1천여 개의 시민·사회·노동단체들이 지지를 표명했다. 1997년과 마찬가지로 조직노동자들이 노동계급 고유의 방식으로 제 힘을 보여 주면, 광범한 지지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전지윤은 ‘때로 확률론적 기대가 낮은 일에도 도박을 걸어볼 줄도 알아야 한다’는 날카로운 지적을 제멋대로 뜯어붙여 우스꽝스럽게 만들었지만, 정말이지 최일붕의 지적처럼 혁명가라면 “평론가들처럼 그저 파업의 확률이나 따지”고 있지 말고 능동적으로 뛰어들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지난해 노동자 투쟁이 우리 혁명가들의 바람만큼 다 잘 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계급투쟁 수준은 박근혜 정부와 사용자들에 타격을 미쳐 노동개악을 철회시키는 수준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결국 임금 삭감과 쉬운 해고를 위한 양대지침이 발표됐고, 공무원연금 투쟁에서 패배하기도 했다.

문제의 핵심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파업 회피에 있었다. 주요 산별·노조 지도자들은 총파업을 은근히 보이콧하거나 하반기 총파업 계획을 거듭 연기시키는 구실을 했다. 4·24 파업을 ‘억지 파업’이라고 비난하며 재를 뿌린 이경훈이나, 공무원연금 개악에 배신적 야합을 한 이충재는 가장 심각한 문제를 빚었다.

아쉽게도 한상균 집행부는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물론 전지윤의 고약한 왜곡과 달리 노동자연대는 ‘한상균 지도부가 총파업을 억눌렀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오히려 우리는 한상균 위원장이 총파업을 조직하고자 했고 구속도 마다하지 않고 투쟁하려 했다는 점을 높이 샀다. 그럼에도 한상균 집행부는 파업을 방해·회피하는 다른 노조 지도자들을 공개 비판하고 기층 조합원들을 향해 투쟁을 호소하기보다 점차 ‘노조 관료들의 질서’에 순응해 갔다. 우리가 이런 약점을 비판했던 것은 그 활동가들과 대화하면서 투쟁의 전진을 모색해 나가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전지윤은 “영향력이 막강”한 노조 지도자들이 다 문제였다면 파업은 애초에 가능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민주노총 좌파 지도부의 등장으로 노조 지도자들 사이에 균열을 내고, 이를 이용해 기층에서 투쟁을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활동가들이 좌파 지도부가 총파업 지침을 내리도록 지지·압박하고 그 지침을 이용해 기층에서 투쟁을 실질적으로 조직하며 현장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말이다. 한상균 집행부의 등장, 4·24 총파업의 순조로운 결정, 9·23 총파업의 신속한 결정 등이 이를 방증한다.

전지윤처럼 이를 위한 노력은 방기한 채 어차피 총파업은 불가능하다고 숙명적으로 본다면, 이경훈이나 이충재에 대한 비판은 해서 뭐하겠는가. 이들 지도부가 파업을 호소했어도 어차피 조합원들은 따를 의사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전지윤 같은 입장은 주요 노조 지도자들의 투쟁 회피에 면죄부를 줄 뿐이다. 그것은 또 지도부의 투쟁 호소를 이용해 작업장에서 투쟁을 건설하려는 혁명가들의 노력도 무망한 일로 만들어 버린다. 전지윤이 공무원연금 투쟁 때 이충재의 배신 행위를 비판하고 독립적으로 투쟁을 건설하려 한 ‘사수넷’의 노력에 지지를 제공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노동자 투쟁에 대한 전지윤의 관조적·회의적 평가는 조직노동자들의 투쟁 잠재력에 대한 그의 더 깊은 회의를 반영한다. 그는 최근 ‘신자유주의와 노동운동’이라는 논문을 통해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조직노동자들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표명했다.(자세한 논의는 강동훈의 글을 보라. ― 편집자)

그가 그 글에서 제안한 “진정성의 정치”는 조직노동자들이 자신의 경제적 요구를 앞세우지 말고 “전체 계급의 이익”을 위해 나서라는 것이다. 심지어 이를 위해 조직노동자운동이 “단기적 부분적으로 조금 손해를 감수”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런 주장은 예를 들어 공무원연금에서 일정 손해를 감수하고 좀 더 열악한 조건의 국민연금을 강화하는 데 헌신해야 한다는 개혁주의자들의 논리에 한 귀퉁이를 열어 주는 듯하다.

무엇보다 전지윤은 이제 좌파가 조직노동자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미조직 청년, 실업자, 자영업자, 여성이 투쟁의 주역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알파요 오메가인 노동계급 중심성에서 이탈하는 것이고, 그가 추구하는 민중주의에 맞게 ‘이론’을 수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맥락 없는 갖다붙이기 식의 전지윤의 억지를 방지하기 위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노동계급 중심성은 차별받는 사람들 스스로의 투쟁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차별과 천대를 없애려면 자본주의 이윤을 타격할 고유한 능력이 있는 노동계급의 힘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총파업과 민중총궐기를 대립시키다

전지윤은 지난해 총파업과 민중총궐기를 대비시켜 전자는 실패했고 후자는 대성공을 거뒀다는 식으로 주장한다.(4월 5일치 글에서는 뉘앙스를 바꾸어 둘이 결합된 효과에 대해 얘기했다. 이런 식의 부정직이 그를 도무지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총파업이 아니라 총궐기가, 조직노동자가 아니라 각계각층의 민중이 투쟁의 원동력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10만여 명이 모인 민중총궐기의 대다수이자 주축은 조직노동자들이었고 이는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회복되고 있음을 보여 줬다. 더구나 민중총궐기는 어느 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4·24, 9·23 등의 민주노총 총파업과 여타 많은 쟁의들(삼성전자서비스, 학교비정규직, 택배, 통신 등등)이 누적된 결과였다. 그래서 최일붕은 “민중총궐기는 본질적으로 노동자 투쟁이었다”고 강조한 것이다.

실제 민중총궐기투쟁본부에서 조사한 민중총궐기 참가자 구성만 봐도 압도적으로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들이었다. 2차 민중총궐기로 가면 그 비율은 더 커진다.(당시 참가자 통계는 민중총궐기투쟁본부 집행위 회의에서 보고된 바 있다.) 민중총궐기의 핵심 요구도 대체로 노동계급의 쟁점들이었다. 한상균 위원장이 구속됐고 민주노총 간부들이 여럿 구속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민중총궐기를 1차부터 4차 대회까지 모두 민주노총이 주도했다는 것은 농민과 빈민 단체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아마도 전지윤은 민중총궐기가 조직 노동자 중심적 집회였음을 강조하는 게 ‘민중’을 가린다고 여겨 민중주의자들처럼 불편했던 모양이다.

한편, 전지윤은 마치 최일붕과 김하영이 자신의 비판을 의식해 은근슬쩍 말을 바꿔 민중총궐기의 의의를 사주고 있다고 왜곡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노동자연대는 이미 지난해에 민중총궐기의 성공이 노동자들의 자신감 회복을 보여 주는 좋은 징조라고 봤다(2015년 12월 23일, ‘이렇게 생각한다 ― 경제 위기와 구조조정 고통 전가 위해 강행하는 노동개악’). 동시에 노조 지도자들이 거리시위로 파업을 대체한 문제점도 지적했다. 이런 ‘모순’에 대해 전지윤은 예의 말꼬리 붙잡기 식 대응이나 하고 있을 뿐이다.

총궐기에 관한 전지윤의 핵심 물음 하나는 “과연 총궐기가 총파업을 피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냐”는 점이다. 만약 그랬다면 박근혜가 좋아했을 텐데 오히려 탄압을 퍼붓지 않았느냐면서 말이다. 전지윤은 진보당 마녀사냥에 대해서도 똑같은 논리를 댔는데, 정부의 탄압이 있어야 투쟁이 위력이 있는 것이고 바로 그곳에 운동이 집중해야 한다는 식의 분석은 조야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민중총궐기 구상은 총파업이 아닌 다른 무엇을 찾아보자는 제기로부터 출발했다. 자민통 계열은 지난해 초부터 ‘총파업이 아닌’ 민중총궐기를 제안했다. 이들은 총·대선을 앞두고 2015년 민중총궐기를 통해 자신들의 전략적 프로젝트(하나의 전선, 하나의 진보정당)를 구현하려 했다. 그래서 한국진보연대는 민중총궐기투쟁본부 활동 목표에 ‘상설연대체’ 건설과 ‘진보대통합’을 넣고 싶어 했다. 이를 통해 전략적 야권연대를 추진하고 싶어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총궐기는 지난해 상반기까지 전혀 이슈가 되지 못했다. 한상균 위원장이 후보자 시절부터 11월 총파업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던 데다가, 민주노총 집행부가 4월 선제파업과 상반기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투쟁을 강조해 민중총궐기에 거의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무원연금 투쟁이 패배하고 7월 15일 민주노총 2차 총파업이 규모나 행동 면에서 초라하게 끝나자 민중총궐기 주장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파업이 아니라 국민적 지지를 받는 싸움을 하자’는 민중주의 주장이 민주노총 지도부 내 다수의 호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 노조 지도자들은 파업 명령에 부담을 느껴 민중총궐기를 파업 대체물로 삼고자 했다. 하루일지라도 불황기에 생산에 차질을 주는 파업을 조직하는 것보다 주말 집회에 조합원들을 동원하는 것이 훨씬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물론 1차 민중총궐기는 그 자체로 정치적 의미가 상당했다. 또, 민주노총 총파업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잠재력도 있었다. 그래서 노동자연대도 민중총궐기 성사를 위해 초기부터 총궐기투쟁본부에 중앙과 지역 차원에서 적극 참여했다.

혁명적 좌파에게는 ‘스트리트’(민중총궐기)와 ‘스트라이크’(민주노총 총파업) 모두 중요하다. 그럼에도 노동개악을 저지하려면 ‘스트라이크’ 성사가 더욱 중요했다.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궐기의 기세를 모아 총파업으로 나아가겠다고 공언한 바도 있었다.

2차 민중총궐기 기조 논쟁은 바로 이 속에서 벌어졌다. 당시는 1차 민중총궐기 이후 정부의 탄압이 거세던 때였다. 정부는 이를 통해 12월 노동개악을 밀어붙이고자 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민주노총이 예정대로 총파업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노동개악 추진에 제동을 걸 수 있고, 백남기 농민 살인진압·민주노총 침탈·한상균 위원장 체포 협박 등 탄압에도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었다.

그런데 일부 자민통 활동가들은 정부의 탄압을 약화시키기 위해 시민단체, 종교계 등을 끌어들여야 하고, 이를 위해 백남기 농민 살인진압 등 민주주의 문제로 대회 기조를 변경하자고 제안했다. 더 온건한 ‘중간층’(자민통 측의 표현이다)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민주주의 요구를 앞세우자는 주장이었다.

집회 기조에서 노동개악 문제를 부차화하고 민주주의를 부각시키는 것은 투쟁을 전진시키는 제안이 아니었다. 이를 두고 최일붕이 집회 기조의 “톤다운”이라고 비판한 것은 정당하다. (그런데 전지윤은 이런 운동 내 쟁점은 모두 외면한 채 당시의 “톤다운” 비판이 중태에 빠진 백남기 농민을 외면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오해한다. 소박한 도덕론이 사회운동 분석을 압도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나는 더 많은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은 지지하지만 집회 기조에 노동개악 저지가 핵심적으로 포함돼야 하고,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결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지윤은 ‘노동개악 반대’ 요구를 부차화하는 민중주의자들의 주장을 지지했다. 그는 총궐기투쟁본부 안에서 전혀 비중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지만 자민통의 주장을 지지해 준 유일한 좌파였다. 그는 1차 민중총궐기를 단순 찬양하며 “어차피 민주노총 총파업은 가능하지도 않다”고도 말했다. 전지윤은 사실상 총파업과 민중총궐기를 대립시키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즉, 민주노총 파업은 불가능하고 ‘사회적 고립’만 자초할 수 있으니 민중총궐기를 잘 해보자는 식이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논쟁의 구체적 맥락에서 노조 지도자들에게 파업을 촉구한 나의 주장에 대한 반대이자 거부였다. 따라서 최일붕이 “전지윤은 노조 지도자들에게 파업 촉구하는 것을 아예 반대했다”거나 “총파업 촉구를 거부”했다고 쓴 것은 왜곡이 아니다.

그런데도 전지윤은 자신이 그런 말을 언제 했느냐며 펄쩍 뛰며 딱 잡아뗀다. 아마도 전지윤이 이 글을 본다면, 십중팔구 또다시 자신이 몇 년 전에(!) 쓴 다른 글에서 민주노총 총파업 지지 문구를 내밀며 ‘언제 그랬냐’고 따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맥락과 관계없이 부분적 사실들, 말들만 나열해 조합한다면, 레닌을 의회주의자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꽤 어려운 일은 되겠지만 말이다.)

좌파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건설 노력이 무의미한가?

전지윤은 2014~15년 노동자연대가 ‘기층 노동자들이 불만은 많지만 스스로 파업에 나설 만큼 자신감이 높지는 않다’는 분석에 기초해 내놓은 좌파 노조 지도부와의 제휴 전술과 좌파 활동가들의 독립적인 네트워크 제안을 여전히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전지윤은 이렇게 묻는다.

자주파, 국민파, 중앙파에 현장파, 전지윤까지 다 민중주의적이거나 거기에 순응하는 상황에서 “좌파 활동가들의 독립적인 네트워크”에는 누가 들어갈 수 있으며 과연 만들 수 있는 것인가?

우선 전지윤은 노동자연대가 한상균 집행부를 민주노총 총파업 지침을 무력화하거나 비협조적이었던 산별·연맹 지도자들과 마찬가지 취급을 하는 듯이 곡해하고 있다. 이는 한상균 집행부 당선에 일역할을 한 노동자연대와 한상균 집행부를 이간질하려는 속셈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동자연대는 현장조합원과 노조 지도부를 구분하면서도 노조 지도자들 사이의 좌우 차이를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노동자연대는 한상균 집행부가 “소수파 지도자라는 한계”를 극복하려면 노동조합 관료 전체의 규범에 순응해선 안 되고 총파업을 회피하는 지도자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현장조합원들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위원장은 선거운동 때와 취임 초기에는 그럴 것도 같아 보였다.

그러나 지도부에게 촉구하는 것만으로는 당연히 부족하다. 그래서 노동자연대는 좌파 활동가들의 독립적인 네트워크가 있어야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독자적인 투쟁도 해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전지윤은 좌파 활동가들의 독립적인 네트워크는 누구와 함께할 것이며, 과연 만들 수 있는 것이냐고 따진다. 2014년 한상균 집행부 당선과 지난해 총파업 국면에서는 ‘좌파 활동가들의 네트워크’가 필요했고, 실제로 가능했다. 민주노총 선거가 끝난 후 한상균 후보의 선거운동에 동참했던 좌파 단체들(노동전선, 변혁당, 노동자연대 등)은 향후 민주노총 총파업을 효과적으로 건설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고 이때 좌파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건설 필요성이 공감을 얻었다. 하지만 김하영이 지적한 것처럼, 아쉽게도 일부 좌파들은 좌파 집행부가 세워진 후에 이를 떠받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이 때문에 좌파 단체들이 협력해 ‘좌파 활동가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전지윤은 노동운동 내 세력들(“자주파, 국민파, 중앙파에 현장파”)이 민주노총 투쟁 전술에서 마치 동일한 입장을 가진 듯 서술한다. 그러나 민주노총 총파업에 대한 각 정파의 입장은 암묵적 보이코트부터 적극 지지까지 상이한 입장이었다. 좌파 활동가 네트워크에 참가할 조건은 적어도 민주노총 총파업 건설에 대한 적극적인 동의 여부여야 하지 않겠는가. 민주노총 조직 노동자 투쟁 자체에 회의를 품은 전지윤이 이에 해당하는 자격은 당연히 없다.

물론 전지윤은 결국 이런 시도가 실패했으니 애초 안 될 일이었다고 숙명론적으로 말하겠지만, 좌파 활동가들이 이와 같은 문제들을 둘러싸고 진지한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것은 결코 무가치한 일이 아니다.

전지윤은 이와 같은 노동운동 내 중요한 전술 문제에 대한 관심과 지식은 없이, “노조관료로부터 독립적인 현장조합원들의 행동과 네트워크 건설” 노력은 “특정한 조건에서 가능하다”는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 좌파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건설과 현장조합원 운동을 터무니없이 등치시키면서 말이다. 노동자연대는 현재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전투성이 현장조합원 운동을 건설할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과장된 인식을 결코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 현장조합원 운동이 가능한 시기가 아니라고 해서 현장 노동자들의 활동과 투쟁을 강화할 수단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노조 좌파 지도부와의 제휴나 좌파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는 바로 이를 위한 전술로 제시한 것이다. 현장조합원 운동의 원칙(아직 전략이 아니다)을 지금 조건에 맞춰 응용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지난해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투쟁에서 노동자연대가 발의해 조직한 현장 활동가들의 네트워크인 ‘사수넷’이 비슷한 시도였고 나름 성과가 있었다.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를 막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충재에게 책임을 물어 물러나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었다. 이 자가 뻔뻔하게 위원장 직을 유지했다면 공무원 노동자들의 사기는 더 크게 떨어졌을 것이다.

이와 같이, 노조 안에서 소수일지라도 좌파와 전투적 활동가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처럼 계급투쟁 수준이 높은 곳에서조차 이는 마찬가지다. 그리스 사회주의자인 니코스 루도스는 2009년 말 그리스 총파업의 시작은 교사노조의 한 특정 지부의 파업이었고, 곧이어 교사노조 지도부가 전국적 3시간 파업을 선언했다고 했다. 이 과정에 개입한 소수의 전투적 활동가들이 있었고, 파업이 확산되면서 산업마다 작업장마다 불균등하게 벌어진 것도 이 파업을 조직하려는 “노동자 2~3명이 작업장에 있느냐 없느냐가 그 차이를 낳은 주요 요인이었다.” 즉, 계급투쟁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이고 그 투쟁은 “자동으로 일어난 일도, 순전히 자발성에 의해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노동자 연대〉 149호)

사회주의자라면 노동자들의 낮은 자신감 수준이 문제라는 한마디 말로 노동운동의 여러 전술과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외면해선 안 된다.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력과 자신감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능동적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아마도 전지윤은 조직노동자 운동과 조직(노동조합) 자체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높아 사회주의자들의 이 같은 노력이 부질없다고 볼 것이지만 말이다.

기회주의자의 맥락 없는 단순 사실 나열

전지윤은 노동자연대에 “최저임금 1만 원, 공적연금 강화, 비정규직 관련 요구는 덜 중요한 요구인가” 하고 묻는다. 우리 단체가 마치 대기업 정규직의 경제적 요구만을 “특별히 더 계급적인 요구”로 격상시키고 있다고 왜곡해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 주려는 것이 아니라면(실제로 그런 목적도 있어 보인다), 이는 완전히 부적절한 물음이다. 노동자연대는 이 요구들의 중요성을 기각하거나 깎아내린 바가 없다.

그런데 혁명적 좌파라면 어떤 요구가 일반적으로 좋다고 말하는 것을 넘어, 그 요구가 어떤 시점에 어떤 방식으로 제기됐고 투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봐야 한다. 아무리 좋은 요구도 특정한 구체적 맥락에서는 투쟁에 장애가 되는 부적절한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지윤은 바로 이 점에서 극도의 무능과 무지를 보여 준다. 기회주의자답게 그는 지난해 투쟁의 요구를 둘러싸고 제기된 주요 세력들 사이의 논쟁을 물타기 하고 있다. 공적연금 강화 요구는 대표적 사례다. 지난해 박근혜 정부는 공무원연금 개악을 관철하기 위해 공무원 노동자들을 “철밥통”이라고 비난하며 나머지 노동자들과 야비한 이간질을 시도했다. 국민연금과의 형평성 운운하며 ‘공적연금 강화’를 위해 공무원들이 양보하라고 압박을 가한 것이다. 따라서 노동운동 진영의 효과적인 당면 투쟁 전술은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실제로 공무원노조가 서울시내 로터리에 건 일부 현수막에는 공무원연금 삭감 반대가 구호로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공무원노조 이충재 집행부와 개혁주의자들은 공무원연금 개악을 분명히 반대하지 않았다. 이충재 집행부는 ‘공적연금 강화’ 요구를 공무원연금 양보와 맞바꾸기 위한 ‘알리바이’로 사용했다. 특히, 국민대타협기구 안에서 추상적인 공적연금 강화 약속을 받아내는 대가로 공무원연금을 내주는 배신을 저질렀다.

‘공적연금 강화 국민행동’에 참가한 대다수 개혁주의 단체들도 공적연금 강화를 위해 공무원·교사들의 양보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공무원·교사들이 ‘철밥통’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적연금 강화’를 전면에 내세워 ‘국민적’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훈계했다. 심지어 일부는 ‘공무원연금 사수는 계급이기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공적연금 강화는 ‘공무원연금을 양보하라’는 코드명과 같았다.

이런 구체적인 상황에서 전지윤과 그 그룹에 속한 공무원회원(이하 공무원A)은 공무원연금과 공적연금(국민연금, 기초연금) 요구의 결합을 강조했다. 이런 추상적인 주장으로는 연금 전투에서 이충재 집행부의 배신적 행위에 제동을 걸 수 없다. ‘공적연금 강화’가 “무슨 문제냐”며 그저 좋은 것으로 치부한다면 이충재의 배신적 타협도 ‘공적연금 강화’ 약속을 받았으니 하나 얻어왔다고 봐야 공정한 평가 아니겠는가. 이런 관점이라면 ‘합의 파기’를 내걸고 지도부에 반기를 들 수 있을까? 하물며 그런 조합원들의 반발을 조직해 이충재를 불신임하도록 하는 게 가능할까?

그래서 최일붕이 전지윤과 공무원A가 “진지하게 연금 방어와 이충재 반대를 했다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전지윤은 최일붕이 자신과 공무원A를 매도했다며 반발했고 공무원A가 “공무원연금 개악과 이충재 지도부의 후퇴에 반대하는 여러 글을 쓰고 온갖 집회에 참가하고 조합원들의 대거 참가를 조직해 온 것을 깡그리 무시”했다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과거에 썼던 4편의 글을 링크해 뒀다.

하지만 링크해 둔 글 4편을 읽어 보니, 놀랍게도 이충재 집행부에 대해 단 한마디도 비판적 언급이 없다. 이 중 가장 마지막 글이 쓰여진 2014년 11월에 이미 이충재 집행부는 ‘공적연금 강화’를 강조하며 양보로 기울기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이들은 당시 ‘공적연금 강화’ 요구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간파하지 못했던 탓인지, 정의당의 노골적인 양보 주장에 대해서는 비판했지만 공적연금 강화 논리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이들이 둔감해서 당시까지는 그 위험을 잘 몰랐다고 치자. 그러나 전지윤과 공무원A는 이충재가 배신적 합의를 하고 이로 인해 노동조합 내 좌파적 활동가들과 전투적 조합원들 사이에 논란이 일 때조차 단 한 편의 비판적 논평도 내지 않았다. 전지윤이 말한 “이충재 지도부의 후퇴에 반대하는 여러 글”은 도대체 언제 썼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전지윤은 사람들이 자신이 링크로 걸어 둔 글을 읽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이런 식의 거짓말을 하는 걸까? 심지어 노동자연대가 주도적 역할을 한 여러 연서명(3월 25일자 ‘공무원연금 개악을 강행추진하는 박근혜 정부에 맞서 총력투쟁 태세를 구축하자’, 5월 12일자 ‘이충재 위원장과 김성광 사무처장은 현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 등을 공무원A에게 “제안도 하지 않”아서 참가하지 않았다며 우리가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처럼 주장한다.

일단 공무원A는 누가 떠먹여 주지 않으면 연서명에도 참가하지 못한다는 얘기인가? 우리는 의도적으로 그를 배제한 게 아니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노조 게시판 등에 공개적으로 연서명 제안서를 여러 차례 올렸기에 당연히 적극적인 활동가라면 답을 해 올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각각 77명과 1백22명의 활동가들이 이를 보고 연서명에 동참했다. 만약 공무원A가 연서명에 관해 듣지 못했다면, 이는 그가 이충재 집행부의 배신 행위에 맞서 항의를 건설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공무원A가 “온갖 집회”에 참가하고 조합원 조직을 열심히 했다는 전지윤의 형식적 주장도 무의미한 사실 나열일 뿐이다. 이충재와 그를 지지했던 소위 ‘혁신모임’ 간부들도 온갖 집회에 참가했고 노조가 호소한 집회에 조합원을 대거 조직했다. 하지만 이들이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와 이충재의 배신 행위에 반대해 적극 나서서 활동했는가? 전지윤 식의 형식적 사실 나열은 전혀 진실을 보여 주지 않는다. 진지한 좌파 활동가라면, 운동의 방향을 효과적으로 제시하고 그를 위해 애썼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최저임금 1만 원과 비정규직 2법 반대 문제도 구체적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이 요구를 지지하는 것은 전혀 쟁점이 아니다. 노동자연대도 이 요구를 당연히 지지한다. 문제는 이 요구만을 앞세움으로써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의 조건에 대한 사용자들의 공격을 외면하거나 부차화하는 것이다.

예컨대, 민주노총 내 국민파를 비롯한 여러 민중주의자들은 4.24 총파업에서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등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을 불편해 했다. 대신 그들은 최저임금 인상을 가장 중요한 요구로 부각시키려 했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립서비스로 ‘최저임금 인상’을 언급하고 새정치연합이 의욕적으로 달려들자, 최저임금 요구가 후자와 국민의 호응을 얻기 수월하다고 본 것이다.

노동운동 내 온건파들은 비정규직 2법 저지를 압도적으로 강조하면서, 주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겨냥한 통상임금 축소, 노동시간 연장 개악도 부차화하려 했다.

요컨대, ‘조직노동자들의 요구를 내세우지 말고 계급을 초월한 국민적(민중적) 지지를 끌어낼 요구를 강조해야 한다’는 주장에 맞서는 것이 개혁주의와의 투쟁 문제의 핵심이었다. 전지윤은 자신이 공무원연금 개악도 반대했고 민주노총 총파업도 지지했고 정의당도 비판했는데 ‘왜 내가 민중주의자냐’ 하고 항변하지만, 앞서 살펴봤듯이 최저임금, 공적연금 등에 대한 그의 기회주의적 태도는 그가 민중주의에 더한층 깊숙이 타협하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그가 ‘좋은 요구를 내거는 게 왜 문제냐’고 반복하는 데는, 추상적 접근법의 고질적 약점이 근저에 깔려 있다. 전후 맥락도 없이 여러 사실을 단순 나열하는 전지윤은 운동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사태를 분석하고 전술을 구사하려는 혁명가들의 노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레닌은 구체적 증거나 구체적 근거를 얘기하지 않고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얘기했다. 전지윤과 우리는 ‘구체성’의 의미 자체를 달리하는 것이다.

“정치적 요구”가 결합돼야 투쟁이 확대될 수 있는가

전지윤은 계급투쟁 수준이 지지부진하다며 “부문과 업종을 넘어서 모든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되고 연대를 가능케 할, 나아가 더 넓은 사회적 지지와 연대를 불러올 요구”를 채택해야 운동이 전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노동개악 저지와 같은 노동계급의 요구뿐 아니라 백남기 농민 살인진압, 테러방지법 같은 민주주의 요구를 결합시키고 부각시켜야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전지윤의 주장은 모순적이다.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설 자신감도 없다고 진단하면서, 그들더러 자기 조건 방어를 넘어 정치적 요구를 함께 내걸라니 말이다. 눈앞의 공격에 맞서 자기 조건을 지키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더 넓은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강력히 싸울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노동자들이 “더 넓은 정치적 요구”를 내걸면 자동으로 투쟁이 더한층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순진한 착각이다. 예컨대, 2013년 말 철도 파업 때도 전지윤은 진보당 방어와 같은 민주주의 요구를 결합해 “정치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철도 파업은 전국적 초점으로 떠올라 이미 정치적 계급투쟁의 양상을 띠었다. 더구나 철도 파업이 그토록 수많은 지지를 받으며 정부 정책을 위협했는데도 승리하지 못한 것은, 진보당 방어를 요구로 내걸지 못해서가 아니라 노조 지도부가 필공파업으로 투쟁을 제한하고 이에 효과적으로 맞설 혁명가들의 조직이 현장에 구축되지 못했던 탓이었다.

철도 파업 당시 진보당 방어와 같은 민주주의 투쟁을 강조한 전지윤의 주장이 당시에 지닌 구체적 함의는 사회주의자들이 철도 파업에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지금도 전지윤은 이런 주장을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는데, 노동자연대가 “지난해 내내 ‘노동개악 반대’에 관심사를 집중”한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테러방지법, 백남기 농민 살인 진압과 같은 민주주의 문제도 중요한 ‘계급적’ 요구인데,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관련된 노동개악 저지에 집중한 것은 ‘협소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우선, 정치투쟁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보여 준다. 전지윤은 마르크스주의를 소련 국정교과서를 통해 잘못 배운 1980년대 좌익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정치투쟁을 이해하는 듯하다. 당시에 우리는 ‘경제투쟁을 정치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레닌의 개념을 오해해, 경제투쟁에 정치적 요구를 결합시켜야 운동이 전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레닌에게 정치투쟁이냐 경제투쟁이냐의 차이는 단순히 요구가 정부를 향한 것이냐 특정 기업 또는 특정 산업을 향한 것이냐 하는 차이보다는 요구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차이였다. 마르크스와 레닌에게 정치투쟁은 계급 전체의 운동이다. 한 부문의 경제투쟁이 부문을 뛰어넘어 노동계급 전체의 투쟁으로 발전하면 그것은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부문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요구를 갖고 시기를 집중해 동시 파업을 벌이고 공동의 항의 집회를 한다면 사실상 정치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노동개악 저지는 노동자들의 경제적 조건을 방어하는 투쟁이지만, 동시에 정부 정책에 맞선다는 점에서도 정치적 투쟁이었다. 지난해 내내 박근혜와 지배자들이 그토록 강조하며 밀어붙인 사안이 바로 노동개악이고 박근혜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의 핵심을 이룬 것도 노동개악 저지 투쟁이다. 즉, 노동개악은 자본주의 하의 양 계급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전투를 벌인 사안으로 그 자체로 단연 가장 중요한 정치적 투쟁이었다. 뿐만 아니라 노동개악이 노동계급 전체의 조건을 악화시키는 공격이므로 노동계급 전체의 이해관계가 달린 사안이기도 하다.(이런 의미에서도 정치적 쟁점이다.)

사회주의적 좌파라면 지난해 계급투쟁에서 노동개악 저지를 다른 요구들보다 우선성을 부여해 집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 전투를 효과적으로 벌이기 위해 조직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도 분명히 옹호하며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을 고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노동운동 내에서 상당히 큰 난점이 발생했다. 박근혜가 노동계급을 이간질하기 위해 공격을 퍼붓는 상황에서 조직 노동자들에 대한 방어를 꺼리는 태도가 상당히 만연했다. 노동자연대가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보다 공적연금 강화를 앞세운 입장을 비판하고, 조직노동자들의 요구는 외면하면서 그 대신 최저임금 등의 요구를 내세우자는 주장을 비판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었다. 즉, 우리는 당면 투쟁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자들을 비판했다!

따라서 전지윤이 “부문을 넘어 넓은 사회적 지지를 받는 요구나 투쟁”을 주장하는 것이 왜 문제냐고 거듭 반문하는 것은 구체적 상황을 외면한 지독히 추상적인 인식이고, 노동자연대가 민중주의의 문제점이라고 비판한 것을 전지윤 자신이 수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전지윤이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운동이 “조직노동자들이 부문의 조건과 요구에 따라서 칸막이화되고 각개 약진·격파 당하는 상황”이고 “사회적 고립”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에 조직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는 것은 효과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보는 데서 드러난다.

여기에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끌어다 “‘노동자들은 박해받는 소수 종교와 탄압받는 학생들을 위해서 자기 일처럼 투쟁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렇지 않다는 좌파들을 비판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아전인수다. 노동자연대가 원칙과 실천의 지침으로 견지하는 노동계급 중심성은 노동계급은 천대받는 사람들의 요구를 지지하고 이들을 위해 투쟁에 나설 수 있을 뿐 아니라 천대와 차별을 끝장낼 힘을 가진 유일한 세력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문제는 그 잠재력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나날의 피 말리는 투쟁 속에서 승리와 패배를 모두 겪으며 단련된다. 전지윤이 경멸하는 부문적이고 협소한 요구(노동시간, 노동강도, 수당, 전환배치 등)를 쟁취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투쟁과 파업 행동 속에서만 노동자들의 의식과 자신감은 성장할 수 있고, 소수는 자본주의 자체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전지윤은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은 계급투쟁이 아니라고까지 주장한다. “단일 공장의 노동자들이나 단일 산업 부문의 노동자들이 그들의 고용주에 대항해서 투쟁을 벌인다면 이것은 계급투쟁인가?”라고 묻고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그러나 엥겔스가 말한 계급투쟁의 세 차원 또는 양상에는 정치적 계급투쟁과 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뿐 아니라 경제적 계급투쟁도 분명히 포함된다.

김하영이 지적하듯, 경제적 요구와 투쟁을 폄하하는 이 같은 주장은 “투쟁에 나설 잠재력이 있는 조직 노동자들의 동원을 회피하는 것[이]다. 조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투쟁을 전투적으로 벌이면서 다른 노동자 부문의 투쟁을 고무해야 ‘민중의 호민관’ 구실을 할 수 있다.”

2013년 철도 노동자들이 박근혜 퇴진을 내걸거나 (전지윤이 당시 부르짖은) 진보당 방어와 같은 민주적 권리를 요구하며 투쟁하지 않았지만 ‘민중의 호민관’ 구실을 했던 것은 박근혜를 잠시 위기에 몰아넣을 정도의 힘을 보여 줌으로써 민중에게 박근혜에 맞설 자신감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철도 노동자들은 철도 공공성과 자신들의 노동조건 모두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에 최일붕이 명명했듯이 정치적 경제투쟁으로서, 온전한 정치투쟁(계급 전반의 투쟁)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이 당면한 공격을 저지하는 투쟁을 잘 벌인다면 박근혜의 위기를 심화시켜 소외되고 천대받는 수많은 사람들의 투쟁을 고무할 수 있다. 노동자연대가 조직노동자들의 구실을 강조하고 주목하는 것은 바로 정권과 자본가들을 위기에 빠뜨릴 능력이 있는 유일한 사회집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연대는 조직노동자들이 자신의 조건을 관념적으로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실제로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잘 싸우도록 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잠재력을 더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라 본다. 이를 두고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불신’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뻔한 것도 잘못 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사실, 전지윤은 자신의 분석을 조직노동자들의 잠재력에 대한 심각한 회의와 불신으로까지 발전시킨 나머지, 생산 현장에서 이윤에 타격을 주는 파업과 같은 투쟁을 확대하고 발전시키는 문제에 관심이 없는데도 노동계급의 잠재력 운운하는 것은 위선 아닌가?

다시 한번 전지윤에게 김하영이 던진 질문인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누가 이윤의 원천인 잉여가치를 만드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최일붕이 말한 대로 ‘노동개혁’ 반대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래지 않아 재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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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고 인용한 것은 ‘노동운동의 요구와 방향을 좁히지 말아야 한다’와 이 글에 전지윤이 링크를 걸어 둔 글들과 변혁재장전 블로그에 있는 ‘신자유주의와 노동운동’ 등 몇 가지 논문들이다. [본문으로]

보론1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의 ‘공적연금 강화’는 어떤 내용인가?

장호종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이하 연금행동)은 2014~15년 공무원연금 개악 과정에서 ‘공적연금 강화’ 요구를 강조한 대표적인 연대체다. 2015년 5월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현 더민주당)은 사상 최대의 공무원연금 개악안에 ‘공적연금 강화를 위한 사회적 논의기구’를 설치하겠다는 문구를 포함시켜 합의안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합의안이 청와대 등의 반발로 무산될 듯하자 연금행동은 합의 파기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공적연금 강화’ 약속을 이행하라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고, 공무원연금 삭감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이 없었다. 연금행동 리더들이 순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공무원연금 삭감의 대가로 공적연금 강화 약속을 받은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훗날 사회적 논의기구의 운영 과정과 결과에서 명백히 드러났듯이 여야 모두 ‘공적연금 강화’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새정치연합과 당시 공무원노조 위원장 이충재 등 노동운동 내 일부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공적연금 강화 약속’을 투쟁에서의 후퇴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내세웠다.

정용건 집행위원장 등은 소속 단체인 공무원노조와 전교조의 공식 입장이 여전히 ‘여야 합의안 폐기’인 상황에서도 기자회견을 강행했다. 전 공무원노조 위원장 이충재의 배신은 존중됐지만 연금개악 야합에 항의하는 공무원 노동자들의 반발과 소속 단체인 노동자연대의 반대 의견은 무시됐다.

이처럼 구체적 맥락 속에서 보면 ‘공적연금 강화’ 요구는 국민(혹은 민중)의 이름으로 공무원 노동자들의 희생을 촉구하는 열쇠말 구실을 했다. ‘공적연금 강화’ 요구가 어떤 맥락에서 제기되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어떤 내용의 ‘공적연금 강화’인지도 중요하다.

연금행동은 민주노총, 참여연대 등의 제안으로 2012년 10월 ‘국민연금 바로 세우기 국민행동’으로 발족해, 2015년 3월 ‘공적연금강화 국민행동’으로 확대 재편됐다. 노동자연대(옛 다함께)도 이런 연대체의 설립 취지에 공감해 꾸준히 참가해 왔다. 연금행동은 ‘적절한 소득대체율 보장’, ‘국민연금 사각지대 해소’, ‘국가지급의무 법제화’, ‘국가재정 확충’, ‘기금의 공공복지인프라 투자, 윤리적 투자’, ‘적정수준의 보편적 기초연금 지급’ 등을 핵심 요구로 내걸고 있다.

다만, ‘적절한 소득대체율’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이를 위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 공무원연금 등 특수직역 연금은 어떻게 돼야 하는지 등 공적연금 ‘강화’의 구체적 내용을 두고 연대체 소속 단체들 사이에 이견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심지어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투쟁 속에서 조직을 확대 재편할 당시에도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를 기본 과제로 포함할지를 두고 한참 논쟁해야 했다.(노동자연대 측의 집요한 요구로 결국 포함됐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연금행동의 주요 리더들은 이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연금행동이 발행한 소책자 《우리는 행복한 노후를 꿈꿀 권리가 있다》를 보면 국민연금의 ‘적절한 소득대체율’을 50퍼센트로 제시하고 있는데(현재 40퍼센트) 평균 가입 기간이 24년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실질소득대체율은 30퍼센트밖에 안 된다. 이는 가입자 평균소득(2백만 원)을 고려해도 최저생계비(61만 7천 원)에 못 미친다. 국민연금이 노후 생계비도 안 된다는 얘기다. 소책자에서는 여기에 보편적 기초연금(소득대체율 10퍼센트)을 더하면 최저생계비를 웃도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처럼 소극적인 대안으로는 공적연금의 ‘상향 평준화’라는 목표를 일관되게 추구하기가 어렵다. 예컨대 공무원연금 개악 전에는 어지간한 교사·공무원도 2백만 원 안팎의 연금을 받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최저생계비 정도의 액수를 갖고 씨름해야 하는가.

연금행동 소속의 일부 단체와 리더들이 하향 평준화에 반대해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의 상향 평준화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공무원연금 삭감이 불가피하다고 여긴 데에는 다음의 문제가 연관돼 있었던 듯하다. 즉, 하향 평준화에는 반대하지만 중향 평준화, 즉 국민연금은 조금 인상하고 공무원연금은 조금 삭감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겼을 법하다. 이런 관점으로는 공무원연금 삭감에 일관되게 반대하기 어렵다. 하물며 그 대가로 국민연금을 일부 인상하겠다고 약속한다면 굳이 거부할 이유가 있을까?

보험료 인상에 대해서도 소속 단체들 사이의 견해가 다르다. 정부는 호시탐탐 보험료 인상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소득대체율 인상을 위해서는 보험료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고, 노동자들의 추가 부담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아예 공세적으로 보험료 인상을 목표로 삼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른바 ‘사회연대전략’인데, 정용건 집행위원장이 이런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OECD 소속 나라들을 비교해 봐도 한국 노동자들의 연금 보험료 부담은 낮은 수준이 아니다. 반면 기업주들의 부담 수준은 현격히 낮아 다른 주요 지표들과 마찬가지로 최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이들의 부담을 늘린다면 당장 연금 지급액을 대폭 늘릴 수 있다.

연금행동은 2015년 9월 발행한 소책자 개정판에 “연금액 인상에 필요한 재원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 충분히 조달할 수 있습니다” 하는 문구를 포함했는데, ‘사회적 합의’가 대체로 노동자들의 양보를 끌어내는 수단으로 활용돼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척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연금 기금의 ‘윤리적 투자’, ‘공공복지인프라 투자’도 쟁점이다. 물론 연기금을 주식이나 부동산 등에 투자해 기업주·부자 들만 배불리는 것은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윤리적인 기준을 고려한 투자”, “장기적으로 국민경제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투자라는 요구는 금방 모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연금행동 소책자에서는 국민연금 기금이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삼성이나 회사돈을 횡령한 SK, 노동자를 탄압한 이마트 주식에 투자된 것을 문제 삼는다. 그러면 현대나 GS, 혹은 노동법을 제법 잘 따르는 외국계 기업들에 투자하는 것은 괜찮은 걸까?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하려면 대기업 주식을 사야 할까, 아니면 중소기업 주식을 사야 할까? 기금 수익률을 높이려면 위험 자산에 투자해야 하는데 이는 어떻게 봐야 할까?

이런 혼란을 해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정부의 지급 보증을 의무화하고, 기금 ‘투자’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당장 필요한 노인들, 유족들, 아이들에게 충분한 연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소책자 저자들이 한편에서는 “국민연금 국가지급 의무화”(31쪽)를 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기금 고갈로 연금이 지급불능에 빠진다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19쪽) 하고 김을 빼는 것은 문제다. 그리스처럼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은 나라들에서 연금이 순식간에 반 토막 나거나 일정 기간 지급이 중지되는 것은 비교적 흔한 일이다.

좌파라면 ‘공적연금 강화’라는 거창한 구호에 주눅들어 이런 약점들을 못 본 체해서는 안 된다. 또 구체적 맥락과 내용을 따져보지도 않고 ‘공적연금 강화’라는 요구를 지지해서도 안 된다. 전지윤과 변혁재장전이 바로 이런 기회주의를 노정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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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한반도 주변정세 인식
단순한 인상들을 그나마 원칙 없이 꿰어 맞추기

김영익

좌파 블로거 전지윤 씨(이하 존칭 생략)는 다른 쟁점들에 비해 한반도 주변 정세나 제국주의 문제에 관한 글은 많이 쓰지 않았다. 사안의 중대성에 비해 글이 많지 않고 그나마도 대부분이 대체로 분석이라기보다는 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일부 대목을 보면, 과연 전지윤이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제국주의 이론과 분석을 갖고 있는지 미심쩍은 데가 있다. 예컨대 지난해 3월 사드 배치 논란에 관해 그가 쓴 글을 보면, 중국의 부상을 일면적으로 과장하는 게 두드러진다. 그는 미국을 “대장 마피아”, 중국을 “신흥 마피아”에 비유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마피아 서열이 분명할 때는 줄서기를 하면 됐는데, 지금처럼 서열이 바뀌는 듯할 때가 한국 지배계급에게 골치 아픈 일이다.”(강조는 필자) 지난해 11월에 쓴 글에서도 마찬가지 시각이 드러난다. “최근 대표적 친미동맹인 영국까지 미·중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기 시작했다.” 다른 글에서는 동아시아에서 머지않아 중국의 군사력이 미국을 앞설 것이란 미국 전략가의 과장된 분석을 별 다른 비판적 논평 없이 그대로 인용하기도 한다. 전지윤은 중국의 부상이 갖고 있는 모순과 한계를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다. 중국이 과거에 비해 부상했지만 지역 차원을 넘어 세계 차원에서 미국과 헤게모니 투쟁을 벌이는 수준으로까지 부상한 것은 아니므로, 서열 교체 조짐 언급은 과학적 분석이 아니라 인상론이다.

또 다른 글에서는 자기 주장과 모순되는 이론을 끌어오고 있다. 즉,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세계경제》(책갈피) 서평에서 “세계자본주의 중심부와 주변부 간의 불평등 교환”을 강조하며 “선진국 자본이 획득하는 초과이윤의 원천은 후진국 자본이 후진국 노동계급으로부터 전유한 잉여가치의 이전”이라는 정 교수의 분석이 오늘날 제국주의 분석에서 “현실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보고 심지어 미국과 서열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주장과는 맞지 않다. “세계자본주의에서 불평등 교환은 주변부 자본주의의 중심부 자본주의로의 진입을 봉쇄하는 기구의 하나로 작용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만한 주장에 호감을 드러내면서, 어떻게 중국이 서방 경제들과 다국적기업들과 긴밀한 경제 관계를 맺으며 지난 30년 동안 급성장해 G2로까지 거론되는 점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처럼 전지윤에게는 마르크스주의적 제국주의 이론이 사실상 부재하다 보니, 그때그때의 인상이나 다른 진보·좌파 주장들의 영향을 받아 전망이 바뀌거나, 여러 다른 이론들과 무원칙하게 절충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런 사례의 하나로, 전지윤의 글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한반도 긴장 상황에 관한 과장된 인식이다.[1] 예컨대 그는 지난해 8월 DMZ에서 일어난 남북 간 포격전을 “재앙으로 가는 치킨게임[2](강조는 필자)”에 비유했다(2015년 8월 21일). “치킨게임”이라는 말은 그 짧은 글에서 다섯 차례나 등장하며, 같은 주제의 다른 글들에서도 계속 등장한다.

그리고 전지윤은 같은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 상황이 곧바로 확전이나 전면전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아직 그렇게 높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고 정말 그러길 빈다. 하지만 몇 가지 요소들 때문에 불안감이 커지는 것이 사실이다.(강조는 필자)

이 대목을 보면, 분명 전지윤은 당시 상황이 전쟁 위기로 나아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그가 “확전이나 전면전” 가능성을 높일 요소들로 제시한 것들[3]은 대부분 해당 국가 정권의 성격과 관계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전지윤이 위의 글을 쓴 지 나흘 만에 이 사태는 8월 25일 남북 대화로 일시적으로 봉합됐다. 그러자 9월 4일 전지윤은 말을 슬쩍 바꿨다.

이번에 한반도 긴장이 급격히 고조되다가 가까스로 봉합된 것은 무조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지역의 긴장이 아직 당장의 확전이나 전면전 수준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게 다시 드러났다.(강조는 필자)

‘곧 전쟁이 일어날까 봐 불안하다’고 암시하다가 불과 2주 만에 ‘이 지역 긴장이 아직 그 정도 수준까지는 아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전쟁을 체제의 동역학이 아니라 정권의 변덕에 좌우되는 것쯤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가 현상에 얼마나 휩쓸리는지를 알 수 있다. 즉, 당시 상황을 다루면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들을 선택해 서술했는데, 진정한 분석에 기초하지 않은 이런 선택이 결국 상황을 과장되(고 따라서 그르)게 인식하도록 만든 듯하다. 대체로 전지윤의 글들을 보건대, 그는 당시 북한과 남한 지배자들이 험악한 말들을 주고받은 ‘말의 전쟁’, 그리고 이를 호들갑스럽게 다루는 언론 보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는 나흘 앞도 “예측”하지 못하는 얘기를 하게 된 셈이었다.

최근 한반도에 다시 긴장이 높아지자, 지난 2월 전지윤은 개성공단 폐쇄, 남한 우파의 호전적 언사들, 한미 연합훈련, 사드 배치 등 몇 가지 사실들을 부각시키면서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인상론적으로 서술하는 글을 내놨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2차 대전 후 한반도에서, 베트남에서, 남미에서, 중동에서 미제국과 강대국들이 해 온 짓을 보면 안심할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제국주의의 경제 제재와 봉쇄가 결국 군사적 개입으로 연결돼 온 곳은 바로 중동인데, 이라크와 시리아 등이 어떻게 지옥으로 변했던가를 떠올려 보면 소름이 끼칠 뿐이다. …

기존에 키리졸브 훈련이 가장 공세적이었던 때는 2013년 봄이었고, 그때 외국 언론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었다. … 종북몰이가 절정에 달했던, ‘내란음모 조작 사건’이 기획된 때가 바로 그 시기였다. 그때보다 더 크고 강한 훈련이 다가오는 지금, 제도정치권에는 군사훈련 중단과 평화협정에 대한 목소리조차 ‘해산’당하고 사라진 상황이다.

이처럼 단순한 인상에 기초한 인식에 따라 전지윤은 자신이 궁극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펼친다. 즉, 제국주의, 군사적 대결을 부추기는 모든 세력에 맞서는 “진보진영의 강력한 단결과 운동을 하루 빨리 건설”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당면한 운동 건설을 위해 대북 제재 반대, 사드 배치 반대 등 외에도 “평화협정 체결” 같은 평화주의적 요구를 반전평화 운동의 요구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문제에서 “정치적 차이”를 내세우거나 “선전”에 머무는 것을 비판했다. 그리고 〈노동자 연대〉가 한반도 불안정과 제국주의 문제에서 ‘노동계급의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정치가 중요하다’고 강조해 온 것을 두고도 “추상적 원칙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불평했다.

제국주의 갈등과 한반도 불안정

인상에 불과한 전지윤의 한반도 상황 인식, 특히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정치를 강조하는 건 “추상적 원칙” 반복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뭐라 답변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오늘날 한반도 불안정을 세계적 맥락, 즉 오늘날의 제국주의 체제 속에서 조망해 왔다. 한반도 불안정은 자본주의 체제 구조 변화의 불안정성에서 비롯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자본주의의 역동적 발전 과정 때문에 각국 경제력의 상대적 비중이 바뀌어 왔다. 이것은 중대한 지정학적 함의가 있다. 국제적 위계 질서의 위쪽으로 올라가려는 국가와 현재 지위를 유지하려는 국가가 경쟁적으로 힘을 과시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동안 국가 간 세력균형 변화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미국의 상대적 쇠퇴와 “나머지의 부상”, 특히 중국의 부상이라고 할 수 있다.[4]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부상하자, 미국은 이를 위협으로 느끼며 기존의 패권을 유지하려고 적극 대처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는 더욱 불안정해졌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 외에 역내 국가들이 모두 경쟁적으로 군비를 늘리고 역내 문제에 개입하려 하면서 갈등 양상은 매우 복잡해지고 있다.

한반도는 제국주의 간 갈등이 점증하는 그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 열강의 갈등 속에 한반도에서 불안정이 커져 왔다. 미국은 “아시아로 중심축 이동”을 선언하며 한미동맹을 대중국 포위 전략의 일부로 삼으려 했다. 그리고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고 압박하면서 중국을 겨냥한 군사적 대응의 명분으로 삼았다. 이런 상황이 특정한 조건과 맞물리게 되면 한반도의 긴장을 증폭시킬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이해관계 충돌과 갈등이 커지고 있지만, 단기간에 미국과 중국이 제국주의 간 전쟁으로까지 나아갈 확률은 낮다.

우선, 여전히 그들 사이에 현격한 힘의 불균형이 존재한다. 군사력, 주요 국제 기구 및 지역 기구들을 주도하는 지위 등에서 중국은 미국과 격차가 크다. 지난 수십 년간 경제가 급성장했지만, 중국의 1인당 GDP는 여전히 미국은 물론 한국에 견줘서도 현격히 낮다. 게다가 최근에는 중국 경제가 경착륙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그리고 미국도 오롯이 동아시아에만 집중할 처지가 못 된다. 중동의 전쟁과 유럽(특히 크림반도)에서 제기되는 도전 등에도 동시에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당장 동아시아에서 새로 전쟁을 벌이려 하기보다는 중국을 포위하고 견제해 우위를 계속 유지하려 한다.

이런 현실을 종합해 보면,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이 당장 전면적 군사 충돌(전쟁)을 벌일 가능성은 낮다. 그보다는 당분간 제국주의 열강 간의 긴장 고조와 일시적 이완이 갈마들 공산이 더 크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 곳곳에서 국지적 충돌 같은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질 수 있다. 이런 점은 한반도 상황에도 반영돼 왔다. 〈노동자 연대〉가 2013년 북한 3차 핵실험 정국, 지난해 8월 DMZ 갈등, 그리고 올해 초 한반도 긴장 상황을 우려하면서도 이를 실질적인 전쟁 위기로까지 보지 않았던 까닭이다.

전지윤도 한반도 긴장의 근본 원인이 미국과 중국의 제국주의 간 갈등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구체적 상황을 다룰 때는 이런 분석에 기초하는 게 아니라 현상론적 접근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긴장 상황을 실제보다 과장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전쟁 위험이 그가 호들갑스럽게 기술한 대로라면 진보·좌파는 거의 모든 것을 부차화한 채 당장 한반도 전쟁 반대 운동을 건설하는 데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의 주장이 장기적으로도 낙관론인 것은 결코 아니다. 세계 자본주의의 불안정과 모순이 지금의 불안정을 장기적으로 심각한 전쟁 위기로 발전시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의 지정학적 갈등은 1930년대 이래 최악의 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진행되고 있다. 즉, 오늘날 동아시아 불안정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내재적 모순이 매우 깊어지고 있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상황은 직선적이거나 단선적이기보다 계속 우여곡절을 겪을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오늘날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불안정을 자본주의 문제 등 근본적인 문제들과 연결시켜 접근해야 한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지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불안정을 키우는 미국과 남한 정부의 정책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한편, 제국주의 문제에 대응하는 근본적 방향에 관해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선전·선동하는 게 중요하다. 반전 운동 건설은 아직 이르다. 노동자 운동 안에서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적 정치를 강화하는 것이 중장기적 미래에 노동자 운동이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는 결정적 요소가 될 수 있다. 과거 볼셰비키가 소수임에도 카우츠키나 베른슈타인 류의 평화주의를 끈질기게 반박하며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원칙을 강조한 것이 나중에 제1차세계대전을 끝내는 데서 매우 중요한 기여였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지 않은가.[5]

평화협정 문제

레닌은 1915년에 쓴 《사회주의와 전쟁》에서 국가 간 갈등이나 전쟁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적 대응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국가 간의 전쟁을 야만적이고 잔혹하다고 항상 비난해 왔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부르주아적 평화주의자나 아나키스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들과 달리 우리는 한 나라에서 전쟁과 계급투쟁 간에 필연적 관계가 있다는 점을 안다. 즉, 우리는 계급이 사라지고 사회주의가 건설되지 않는다면 전쟁도 없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제국주의의 바탕에는 자본주의 동역학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레닌은 카우츠키와 달리 국가 간 협약이나 동맹으로는 자본주의에서 항구적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봤다. 제국주의 하에서는 기껏해야 계속되는 갈등의 휴지기 속에 짧은 평화만이 일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반제국주의 운동이 궁극으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윤 체제인 자본주의를 가장 효과적으로 마비시킬 수 있는 사회세력, 즉 노동자 계급이 중요하다. 자본가들은 거의 모든 일에서 노동자들에 의존하고, 전쟁도 예외가 아니다. 항구적 평화를 실현하려면 자본주의의 바로 이 약점을 파고들어야만 한다. 따라서 반제국주의 운동은 노동자 투쟁을 중시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발전하도록 애써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반전평화 운동 내의 쟁점을 살펴봐야 한다. 한반도 평화에 관한 진보·좌파의 논의는 대개 국가 간 외교 관계에 집중돼 있다. 그래서 많은 진보·좌파가 생각하는 한반도 평화의 핵심 요구는 평화협정 체결로 수렴되고, 6자회담이나 북·미 또는 남·북 당국 간 회담의 성사와 지속 그리고 그 안에서 한국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촉구하는 데 고민이 머물게 된다. 전지윤은 별 문제의식 없이, 무비판적으로 평화협정 요구를 지지함으로써 이런 경향의 꽁무니를 좇고 있는 것이다.

물론 평화협정에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바라는 대중의 정서가 담겨 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수많은 역사적 사례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평화협정 요구가 대중의 평화 바람을 실현할 수 없음도 봐야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평화협정 체결 같은 국가 간 외교 협상 촉구를 반전평화 운동의 요구로 채택할 때 여러 문제가 벌어질 수 있음을 안다.

우선, 평화협정 체결을 통한 항구적 평화 체제 구축은 어디까지나 환상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이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었지만, 1941년 독소 전쟁이 벌어졌다. 오늘날에도 현존 제국주의 체제가 온존하는 한, 어떤 행태의 국가 간 협정이나 약속이 맺어져도 한반도 긴장을 억제하는 효력이 항구적으로 유지되지 못한다. 미국은 중국을 겨냥해 동맹을 강화하고 군사 행동을 감행하면서 이를 정당화하려고 계속 북한을 ‘악마화’하려 할 것이다. 이것을 평화협정 문서로 억제할 수 있을까? 고(故) 리영희 선생이 2005년 9·19 공동성명 직후에 열린 한 토론회에서 미국의 약속을 조금치도 믿을 수 없다는 점을 경고한 바 있는데, 오늘날에도 귀담아야 할 지적이다. “미국이 조약을 단 한 번도 지킨 사례가 없으므로 이 사실로부터 출발해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 문제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판단의 단서를 잡아야 한다. … 북경회담 합의문이라는 종이 조각을 토대로 해서 상황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지정학적 경쟁을 벌이는 역내 국가들이 평화 정착의 주체가 되리라고 기대할 수가 없다. 엄청난 수준의 군비 경쟁을 벌이는 이 국가들은 본성상 항구적이거나 진정한 평화를 구축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다.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경쟁의 국제적 성격 탓에 국경을 벗어나 다른 국가들과 충돌하게 된다. 기업들이 국제적 경쟁에서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에 기대기 때문에, 무장한 국가들은 이 충돌에서 군사력을 동원하곤 한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한반도 주변 4대 열강 사이의 이해관계 충돌은 더 악화했다.

우리는 지난 사반세기 동안 한반도 문제를 위한 국가 간 대화 재개나 합의가 이후 새로운 긴장 고조의 전주곡이었음이 입증되는 일을 번번이 겪어 왔다.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1993~94년 한반도 위기를 막지 못했다.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이뤄졌지만 우리는 1998년 금창리 위기를 겪어야 했고,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공동 코뮤니케도 결국 2002년 2차 북핵 위기로 이어졌다. 남·북한과 4대 열강이 모두 동의했고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가장 진전된 합의라고 평가받았던 2005년 9·19 공동성명도 미국의 새 대북 금융제재 실행을 막지 못했고, 그 이듬해 북한은 처음으로 핵실험을 감행해 버렸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계속 벌어질 것이고, 그때마다 평화협정 체결 운동은 거듭되는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6자회담이 재개되든 북·미 간 직접 대화가 열리든 어떤 형태로든 국가 간 대화가 시작된다면, 평화협정 체결 운동은 정부 정책 자문, 또는 정부의 외교 정책을 지켜보는 수동적 관찰자 사이에 자리잡게 된다. 그러다가 대화에 일정 진전이 있다가도 미국의 합의 파기나 약속 불이행 또는 새로운 긴장 조성 요소가 등장해 대화 국면이 끝나면, 평화협정 체결 운동 참가자들은 실망하고 의기소침해지는 일이 거듭될 것이다.[6]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외교 관계 중심의 접근법을 기피하는 것이다.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으로”

반면 전지윤은 평화주의에 기회주의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론을 현실에 꿰어 맞추고, 겉보기로 그럴 듯하면 이 요소 저 요소 절충하거나 수정하면서 말이다. 《마르크스와 세계경제》(정성진, 책갈피) 서평에서, 전지윤은 제1차세계대전 당시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보다 트로츠키의 “평화강령”이 “실천적 타당성이 입증된 것”이었고 “‘오늘날 더 현재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는 이 책의 주장을 거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7]

당시 레닌은 계급투쟁으로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야 한다고 봤다. 즉, “현재의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키는 것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프롤레타리아 전술이다.” 그리고 계급 간 내전으로 자국 지배계급을 타도하려는 사람들은 전쟁에서 자국의 패배를 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제1차세계대전 초반에 “혁명적 패배주의” 노선과 정책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때 트로츠키는 평화주의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했다. 그리고 혁명적 패배주의는 러시아에서 혁명을 재촉할 수도 있겠지만 러시아의 패배는 독일의 승리를 전제하기 때문에 이는 유럽 프롤레타리아에게 커다란 재앙을 초래한다고 여겼다.

이에 대해 토니 클리프는 이렇게 지적했다. “트로츠키의 주장은 합리주의적이긴 하지만 변증법적 유물론인 것은 아니다. 경제적 합리주의 측면에서 보면, 혁명과 내전은 순전히 부정적이다. 이것들은 사회의 생산력을 파괴하는 직접적 충격을 가한다. 하지만 경제적 혼돈이라는 조건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제이기도 하다.”[8] 클리프는 1917년과 1918년의 군사적 패배가 러시아와 독일의 혁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혁명적 패배주의에 관한 트로츠키의 입장이 대체로 추상적이고 모호했다고 지적했다.[9]

그리고 “그 당시 레닌은 사회애국주의와 혁명적 입장 사이에서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호함을 비판하고, 이들을 혁명적 입장 편으로 견인하고자 했다. 그 당시 사태는 국제주의자와 조국 방어주의자를 점점 더 갈라놓게 만들었고, 레닌의 입장이 올바르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트로츠키는 레닌의 입장으로 기울다 결국 1917년에 볼셰비크가 됐다.”[10] 전지윤은 이것을 알지 못한 채 마치 레닌이 트로츠키의 평화강령으로 수렴된 것처럼 오해한다.

“혁명적 패배주의”에 관한 의심을 드러내면서 전지윤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 또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나 한반도에서 대규모 전쟁연습 같은 상황에서 [혁명적 패배주의가 아니라] ‘폭격의 즉각적인 중단과 전쟁 반대’ 같은 구호를 내걸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술 차원의 논의다. 선전주의자 전지윤은 전술과 강령의 차이를 모른다.

레닌은 《사회주의와 전쟁》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반전 운동 초기에 평화주의적 정서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대중의 정서는 종종 미숙한 수준의 저항, 분노 그리고 전쟁의 반동적 성격에 대한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다.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의무는 이러한 정서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정서 속에 일어나는 모든 운동과 시위에 열정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전쟁을 단순히 “거부”하거나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고 봤다. 사회주의자들은 “[항구적인] 평화가 혁명 운동이 없이도 가능하다고 대중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 전쟁의 비극적 참상은 궁극적으로 사회 내의 모든 계급갈등을 격화시킬 것이다. 이런 사태 전개 속에,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의 공포를 전쟁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돌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즉, “지속적이고 민주적인 평화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정부와 지배계급과의 내전을 지지해야 한다”고 대중을 설득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사실, 전지윤의 주장에서 얼핏 드러나는 것은 객관적 사태 전개를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꽁무니 좇기이다. 제국주의 전쟁과 군사 행동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할 대중 의식의 일반적 수준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지, 발전돼야만 하는지엔 생각이 못 미친다. 이런 식으로는 혁명적 정치 조직이 그런 운동 안에서 할 구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기회주의적으로 두리번거리기 십상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

앞서 언급했듯이,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체계적 연관을 포착해 왔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평화주의와 구별된다. 평화주의는 제국주의와 군사주의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따로 떼어내 다루는 경향이 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체제를 총체적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체제의 상이한 양상들(전쟁, 노동조건 공격, 차별들) 각각에 맞선 투쟁들에 능동적으로 개입해, 이 투쟁들을 연결시키려 애쓰고 부분적 운동들을 궁극으로 체제 전체에 맞선 일반화된 운동으로 확대하려 애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의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적 정치를 강조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 정치를 노동계급 안에서 뿌리 내리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규율 있는 정치 조직이 필요하다. 제국주의라는 야수를 쓰러뜨리기 위해 절대 부차화돼선 안 되는 이 과제는 전지윤의 주장에서 좀체 찾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목차로 돌아가기]

[1] 일부 진보·좌파들은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긴장 국면을 전쟁 위기로 오해했다. 한반도 불안정 문제를 다룰 때 제국주의 세계 체제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북한과 미국(·한국·일본) 사이의 갈등에만 주목한 나머지, 인상론에 빠져 상황을 실제보다 과장되게 이해한다. 이렇게만 보면 한반도는 거의 언제나 상시적인 전쟁 위기 상태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최근 북한 핵실험 이후 “한반도 전쟁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이다”, “2013년 봄보다 더 큰 전쟁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있다]”, “[한반도에서] 한순간의 충돌로 수십, 수백만이 참살당하는 전쟁의 참화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 일부 진보·좌파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다. 전지윤의 관찰도 이런 인상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본문으로]

[2] “치킨게임”은 차량 2대가 마주보며 돌진하다가 충돌 직전 1명이 방향을 틀어서 치킨(겁쟁이)이 되거나 아니면 양쪽이 충돌해 공멸하는 게임을 가리킨다. 국제정치학에서 “치킨게임”은 상대의 양보를 기다리며 갈 때까지 가다가 파국으로 끝나는 사례를 설명할 때 많이 사용된다. [본문으로]

[3] 전지윤이 밝힌 그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 악마화와 종북몰이를 통치의 핵심무기로 이용해 온 박근혜 정부가 집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둘째, 오바마 정부가 중국 봉쇄를 위한 북한 압박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 셋째, 한반도 긴장 고조를 재무장의 빌미로 이용하며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변신한 일본이 옆에 있다. … 넷째, 압박과 고립 속에서 벼랑 끝으로 몰린 북한 김정은 정권이 위험한 길을 택할 가능성이 높아져 왔다.” [본문으로]

[4] 더 자세한 분석은 김하영의 ‘오늘의 제국주의와 동아시아의 불안정’을 보라. [본문으로]

[5] 김종환이 쓴 ‘제1차세계대전 종전: 혁명적 노동자 운동으로 전쟁이 끝나다’를 보라. [본문으로]

[6] 또는 일부 활동가들은 국가 간 협상에 더 잘 개입하고자 정부 밖에서 조언을 주는 데 머무르지 않고 개혁주의 정부를 세우는 데 주력하거나 그런 정부에 들어가는 게 낫다고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본문으로]

[7] 그러나 같은 글에서 전지윤은 “‘혁명적 패배주의’의 정신은 이어져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는 게 그의 주특기일지라도, 실천의 관점에서는 완전히 혼동 유발 요인이다. [본문으로]

[8] Tony Cliff, Trotsky: Towards October 1879-1917, 1989, Bookmarks. [본문으로]

[9] 전지윤은 이렇게도 말한다. “1915년 치머발트 반전회의에서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는 압도적으로 부결된 반면 트로츠키의 평화강령이 채택됐었다. 사회민주당들의 전쟁 지지에 반대해서 모인 반전 사회주의자들의 국제회의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평화강령의 올바름을 입증하는가? 치머발트 회의에는 평화 요구를 지지하지만 제2인터내셔널과의 분열을 반대하는 우파가 다수였다(38명 중 19~20명). 혁명적 계급투쟁을 주장한 좌파는 8명이었다. 그리고 트로츠키를 위시한 중간파가 5~6명이었다.

전쟁의 격화와 레닌의 촉구로 1916년 4월 개최된 킨탈 회의는 치머발트 회의 결의안보다 레닌의 노선에 더 가까운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킨탈 회의의 결의안에서도 제2인터내셔널과의 결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본문으로]

[10] 이정구, ‘마르크스주의 세계경제론에 관한 대안적 논의’, 〈노동자 연대〉 [본문으로]

유물변증법 vs 실증주의: 전지윤의 방법

최일붕

전지윤은 1999년 그가 주창한 서해교전 음모론이 분쇄되고부터 진지하고 심각하게 음모론을 제안하지는 않았지만, 진상이 투명하게 알려지지 않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음모론을 암시했다. 그러다가 진보당 내 경선부정 사건을 둘러싸고 논쟁이 붙자 정말로 심각하게, 쓰라린 심정을 실어 도덕주의적으로 격렬하게 음모론을 고집했다. 그러나 차승일 기자는 음모론이 탈계급적인 엘리트 사회론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후주1] 전지윤이 ‘지배계급 대(對) 노동계급’을 근본적 적대관계로 보는 마르크스주의보다 ‘엘리트 대(對) 민중’을 근본적 적대관계로 보는 민중주의에 친화성을 보이는 까닭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글은 그의 사회관보다는 그의 방법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민중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내 글[후주2]을 비판하면서 전지윤은 ‘무슨 무슨 주의’ 하지 말고 그 대신 ‘구체적 논거와 인용’이 충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후주3] 그러면서도 모순되게 그는 역사적 사례들을 풍부하게 드는 것이 ‘과시적 나열’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민중주의가 얼마나 다양하고, 모호하고, 확실한 형태 없이 무정형적인가를 아는 데에 그러한 역사적 사례들이 도움이 되는데도 말이다.[후주4] 특히, 전지윤처럼 자신이 본질적으로 민중주의자임을 모르는 사람(비록 자민통계의 순도에는 못 미치지만)에게 그런 역사적 선례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대체로 글의 성격에 따라 ‘구체적 논거’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할 수 있다. 마르크스 《자본론》의 제1~3장은 ‘구체적 논거’가 매우 적은 반면, 제10장 이후로는 ‘구체적 논거’가 ‘과시적 나열’처럼 비쳐질 수도 있을 만큼 풍부하다. 또,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흔히 글보다 말로 실행되는 사회주의자들 자신의 전술을 다루는 담론은 ‘구체적 논거와 인용’이 부족하고 불완전할 수 있다. 그런 근거들은 주로 집단적 토론과 평가 속에서 제시된다.

‘논거’나 ‘인용’은 이유를 설명할 때 대는 증거 구실을 한다. 그러나 증거는 그 자체로 참은 아니다. 많은 증거와 사실, 인용할 말 등이 이미 언론에 보도된 것들이다.[후주5] 그리고 언론이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는 건 철든 사람이면 다 안다. 증거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이미 관점(접근법)과 가치, 태도 따위가 개입된다. 그렇게 수집된 증거나 사실은 조직돼야 한다. 이때도 ‘~주의’가 개입되는 것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주의’는 ‘체계화된 이론이나 학설’이다. 전지윤이 아무리 ‘~주의’를 남발하지 말자고 제안해도 ‘~주의’는 개재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람시는 “누구나 철학자”라고 했던 것이다.[후주6]

전지윤이 노동자 고유의 저항 방식의 실현 가능성을 평가절하하고 일면적으로 ‘민중적’ 저항 방식만을 찬양·고무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필자는 ‘구체적 논거’를 충분히 들었다.[후주7] 그러나 필자는 전지윤의 주장을 접할 때마다 구체적 논거보다 추상적 방법론에 더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와 우리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단지 증거 늘어놓기 경쟁 식으로 논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증거의 존재/부재 여부는 진정한 쟁점이 아니다. 이 점은 전지윤 자신이 처음에(2013년 말) 제기한 진보당 내 경선 문제를 훨씬 벗어나 노동계급 저항 잠재력 문제, 민주집중제 문제, 레닌주의 문제, 여성 차별/해방 문제 등등 갖가지 문제들을 제기하며 마구 사상투쟁의 전선을 확대한 데서도 드러난다.[후주8]

마찬가지로, 민중총궐기 준비회의 석상에서 전지윤이 민주노총에 총파업 촉구하기를 거절한 것, 또 박근혜 정부의 공무원연금 삭감에 반대해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공적연금 강화를 내세워 저항을 사실상 회피했던 것, 그리고 지난해 노동자 투쟁 자체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이는 것에도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가 걸려 있다.

‘~주의’, ‘~주의’ 하지 말고 그 대신 ‘구체적 논거와 인용’이 충분해야 한다는 전지윤의 주장 자체가 특정한 ‘주의’를 함축한다. 실증주의 말이다. 실증주의는 17~18세기 경험주의의 19~20세기적 후예로, 특히 20세기 전반부에는 실용주의와 융합했다.[후주9] 그러므로 경험주의와 실증주의, 실용주의라는 용어들을 교대해서 사용해도 되지만, 이 글에서는 특히 사회 탐구·조사와 관련해 많이 사용되는 실증주의라는 용어를 택하고자 한다.

물론 전지윤은 자신의 방법에 대해 한 말이 거의 없다. 방법론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실증주의자는 추상적 개념·원리나 철학에는 관심이 거의 없다. 실증주의자는 ‘사실’과 ‘증거’, 인용할 말을 수집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지윤을 체험했고 지금 그의 주장을 듣는 우리가 그의 주장의 근저에 놓인 가정들을 포착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이하에선 그런 가정들이 어떤 방법으로 연결돼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현상론(現象論: 표면에 나타나는 현상만을 근거로 한 논의)

실증주의의 첫 번째 문제는 관찰 등 경험으로 확인되는 구체적 증거가 객관적 실재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후주10] 그러나 관찰 등 감각을 통한 지각은 만인이 동의할 수 있는 기본적인 근거로 삼을 만큼 확실한 것일까? 구체적 증거는 당시의 이데올로기들과 이론들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실상 입증될 수 있는 ‘구체적’ 증거라는 생각 자체가 순진한 생각이다. 누구나 인정해야 하는 (가치 중립적인) 증거는 있을 수 없다.

‘명백한’ 사실을 기초로 지식을 획득해야 하고, 그 사실은 관찰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게 바로 실증주의이다. 사실과 증거의 (맹목적) 집착이다. 그러나 모든 사실은 해석된 사실이고, 의미가 부여된 사실이고, 어디까지나 잠정적 사실이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사실은 해석돼야 한다. 마르크스 말을 인용하면, “현상(외관)과 실재가 일치한다면 과학은 필요 없을 것이다.” 표면의 현상은 자명한 진실이 아니다. 어떤 상황도 자명하게 해석되지 않는다.

흔히 구체적 사실들과 증거들에 근거하는 것을 유물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해일 뿐이다. 유물론이 아니라 실증주의가 정확한 용어다. 유물론은 물질적 실재에 근거하는 것이다. 사실과 증거, 명제 등은 감각 경험으로 포착되는 현상이므로 객관적인 실재가 아니라 주관적인 인상이다. 현상에 집착하고 현상을 실재로 착각하면(사실, 증거, 명제 등이 실재라고 믿게 되면) 진정한 실재는 안중에 없게 된다. 실재론이 아니라 현상론이므로 실증주의는 일관된 유물론이 못 되고 어중간한 유물론이자 어중간한 관념론이 된다.[후주11]

마르크스가 실증주의를 비판한 것은 표면적 현상이 흔히 근저의 실재를 알기 어렵고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밑에서 벌어지는 일이 뭔지 알지 못한다면 상황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전지윤은 조직 노동자들에게 저항 능력이 없다는 국내외의 다양한 주장들을 절충해서 차용해 자신의 노조 무용론(“족쇄”)과[후주12] 그 대안인 민중주의를 합리화한다. 하지만 이 주장들은 한국 노동자 운동의 현실과 부합하지도 않을뿐더러 모두 현상론에 불과하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통해 논증한 핵심 사상, 즉 자본주의가 창조한 임금노동자는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점은 자본주의의 이러저러한 형태 변화나 노동계급의 구성 변화 등으로 달라지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는 생산양식을 나타내므로 강탈이나 금융화, 노동시장 분절화 등과는 추상 수준이 다른 범주다. 차라리 사회가 지금 더는 자본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가 되고 있으므로 임금노동자가 무덤 파는 사람이라는 얘기도 끝났다고 지난해 선언한 폴 메이슨이 전지윤보다 일관된 입장일 것이다.(메이슨은 스테디셀러 《혁명을 리트윗 하라》(명랑한지성, 2012)의 지은이로, 한때 트로츠키주의자였었던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언론인이다.)[후주13]

국가 탄압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진보당의 자민통계가 1년간 와신상담을 한 결과 1차 민중총궐기를 성공시켰다는 전지윤의 서술도 현상론에 불과하다. 사건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혼동하지 않고 계급투쟁을 중심에 놓는 대안적 분석이 가능하다. 결국 국가 탄압에 저항할 힘은 (현상론을 넘어) 본질적으로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물음이 쟁점이다. 우리는 계급과 계급투쟁, 노동계급 투쟁을 중심으로 한 대안적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후주14]

그 분석에 따르면, 진보당 강제 해산으로 약간은 위축됐을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전통이 강력한 다수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민중총궐기 1년 전, 직선으로 쌍용차 공장점거 지도자 한상균 후보를 선출했다. 한상균 선본은 선거운동 내내 총파업을 강조했다. 스스로 파업할 자신은 없었어도 집행부가 소명하면 그에 응할 용의가 있었던 조합원들은 낙관을 품고 1차 총파업과 메이데이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 직후 박근혜 정부는 반격을 가해 공무원연금을 삭감하는 데 성공했다. 이충재 집행부의 우파적 성향, 공무원노조 내 좌파의 거듭된 불필요한 타협과 사기저하와 사상적 혼란, 그리고 노조 인정을 받으려다 실패한 이래 그다지 사기와 자신감 수준이 높지 않았던 조합원들, 이런 상황의 개선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던 민주노총 좌파 등 주요 행위 주체들이 각각 패배에 한몫했다.

공무원노조 투쟁 패배의 직접적 여파로 사기저하가 만연했고, 7월 총파업은 거의 불발됐다. 그러나 9월 노사정 합의에 반발해 노동자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저항할 용의가 있음을 보여 주었다. 한편 한상균 신임 집행부는 5월부터 민주노총 우파들(민중주의자들)에 의해 길들여지고 타협하는 과정을 겪어 왔다. 이런 과정은 매우 첨예한 갈등을 동반했고, 그 두드러진 사례는 이충재 거취와 이경훈 징계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었다.

신임 집행부는 자신감을 급속히 잃기 시작했고, 11월 민중총궐기가 구원투수가 돼 주기를 바랐다. 결국 다양한 개혁주의자들과 자민통계의 제안으로 요구를 확대하고, 농민·빈민 조직들을 동원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그런 계획이 실제로 나타난 결과인 민중총궐기는 본질적으로 노동자 투쟁이었다. ‘민중총궐기’의 현상과 본질을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그 사건은 지배적으로 노동자(그것도 조직된) 투쟁이었고, 단순 나열된 많은 요구들 가운데서도 ‘노동개혁’ 반대가 핵심이었다.[후주15]

민중이나 다중 같은 차별화되지 않은 사회적 범주의 다원적 구성 속에서 중심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전지윤에게는 ‘빈 중심’이다.) 거의 30년 전에 일어난 6월항쟁조차 단순한 ‘민중항쟁’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이 대거 참가했던 것이다. 대학생과 청년 가운데 혁명적 좌파가 공장, 지역사회, 캠퍼스 등 기층에서 조직해 오던 것에 바탕을 두고 6월 10일 거리에서 선동을 했고, 곧이어 광범한 노동자 대중(서울에선 서비스·사무직 노동자들, 경기도와 부산, 경남의 도시들에서는 공장 노동자들)이 대거 참가했다. 당시 필자는 군포·산본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6월 10일 안양시에 나갔을 때 아예 노동자들이 안양경찰서를 포위하고 심지어 물리적 공격을 가할 태세였다.[후주16] 또, 부산도 매우 초기부터 사상공단·사하공단 노동자들이 서면에 모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6월항쟁의 후반부로 갈수록 노동자들의 참가는 늘어 6월 26일부터는 그 계급적 성격이 완연해졌다. 뿐만 아니라 7~8월 대파업도 6월항쟁의 연속으로 이해해야 한다. 룩셈부르크라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시너지 효과 상황이라고 요약했을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노동계급의 중심성을 인정하지 않고 노동자들(특히, 조직된 부분)이 다른 비노동자 민중(도시와 농촌의 하층 중간계급들과 각종 ‘강탈당한’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고립’된다고 보는 건 민중주의일 뿐이다. 전지윤은 개혁주의자들과 함께, 운동을 계급투쟁이 아니라 민중운동으로 만들고자 애쓰고 그런 이데올로기로 포장하는 다양한 민중주의자들의 일부가 돼 있다.

전지윤은 필자가 “노동자들의 관심사가 노동개악에 집중됐기에 테러방지법은 안타깝게도 결국 통과됐던 것”이라고 말한 것을 들어, 필자도 노동조합의 부문주의적 성격을 인정하는 걸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러나 필자는 노동조합의 부분주의적 한계를 전지윤처럼 일면적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필자는 노동자들이 ‘노동개혁’을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그 벅찬 일을 잘할 때야 비로소 테러방지법이든 다른 무슨 10대 요구든 붙잡고 씨름할 자신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에게 닥친 공격도 물리치지 못하는 처지에 “민중의 호민관” 되기는 언감생심인 것이다. 트로츠키는 계급의식의 “발전 속도를 앞질러서 필수적 발전 단계들을 뛰어넘으려는 성급한 기회주의적 시도”를 비판하면서 말했다. “[이런]성급한 기회주의적 시도에서 비롯한 책략이야말로 가장 위험하고 가장 나쁜 것이다.(따라서 어떤 단계도 뛰어넘으려 해서는 안 된다.)”[후주17]

내 보기로 전지윤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눈앞에 닥친 이슈들을 넘어 훨씬 더 광범한 민중의 요구들을 받아안아 민중의 지도자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 골똘한 나머지 소박한 도덕론을 강변한다. 또, 안토니오 그람시를 오해해 아전인수 격으로 인용하기도 한다.[후주18] 김종환이 이를 반박했기에 필자는 한 가지 점만을 덧붙이고자 한다. 노동운동의 역사가 오랜 선진국과 달리, 신흥국 노동조합 운동은 그람시가 ‘조합주의적(corporatist)’이라고 부른 부문적 일상투쟁의 한계를 넘어 흔히 정치적이다. 그래서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라는 말도 생겨난 것이다. 문제는 “사회운동적”이라는 말이 실상은 민중주의 정치를 가리킨다는 점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는 민중주의를 (비판적으로) 지지한다. 그러나 민중주의 정치가 사회주의 정치는 못 되므로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자 하는 데서 사회주의 정치를 구현하려 애써야 한다. 그러나 조직 노동계급이 자신의 정치(민중주의든 사회주의든)를 구현하려 할 때 노동조합 조직이라는 기존 무기를 갖고 그러기에는 부족함과 불편함이 많다. 그런 생각은 신디컬리즘의 발상이다. 볼셰비키는 러시아 혁명 직후 급속히 공산주의(당시에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동의어였다)에 우호적이 된 신디컬리스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왜 동지들은 노동조합으로 두 가지 일을 다 하려 하시는 게요?” 결국 이 물음에 제대로 답변한 신디컬리스트들(가령 나중에 트로츠키주의자가 된 피에르 모나트)은 신생 공산당에 동참해 거기서 주된 구실을 했다. 전지윤은 틀린 답변을 내놓는 사람인데, 신디컬리즘적 답변도 아니요, 사회민주주의적 답변도 아니요, 바로 민중주의적 답변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북한 사회 성격 문제나 야권연대 문제를 제외하면 스탈린주의 진영과 매우 흡사한 답변인 것이다. ‘전민항쟁’은 ‘상설연대체’가 하고 ‘합법 정당’은 제도권 안에서 민중전선 전략을 위해 일부 친자본주의 정당들과 민족 화해·협력 정책을 추진하는 좌파적 개혁주의·민중주의 전략 말이다.

전지윤의 친스탈린주의적 태도는 또 다른 면에서 실증주의와 관계가 있다. 실증주의적 방법으로는 감각으로 관찰할 수 없는 (윤리적·미적) 가치 같은 것을 전혀 알 수 없다. 따라서 그런 걸 얘기하는 것은 실증주의자의 눈에 부적절하고 엉뚱한 딴 수작일 뿐이다. 그러나 가령 진보당 내 경선부정 사실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나머지 노동자연대 회원들에게는 단순한 사실 여부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우리는 한 변호사 회원의 경험적 증거를 통해 당권파의 경선부정 사실을 입증했다. 그러나 좀 더 본질적인 문제는 당권파가 그 문제를 다룰 때 실증주의적 태도를 내세워, 극도로 무례하고 오만하고 비민주적이고 심지어 폭력을 사용하면서까지 당원과 외곽 지지자들을 대하던 방식이었다. 특히, 이것이 선진 노동자 대중에게 비쳐진 방식이 우리 단체엔 문제였다. 우리는 가맹(독자성이 허용되는 방식의 입당) 전술로서 그 당에 당원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므로, “진실과 정의” 운운하며 당을 지키는 전사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가맹 전술이 혁명가들의 조직화에 유리하지 않으면 굳이 그 전술을 고수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지윤에겐 이 모든 것이 그저 관련성 없는 문제들이었을 뿐이다.

2.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혼동

실증주의의 두 번째 문제점은 단순한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혼동한다는 것이다. 실증주의의 인과관계 개념은 사건들 사이의 상관관계일 뿐이다.[후주19] 전기 스위치를 켜면 전기가 들어오고, 스위치를 끄면 전기가 나간다고 해서 전기의 원인을 스위치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실증주의적 인과관계 개념은 사건의 표면적 현상 밑의 본질적 실재를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금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현상과 실재가 일치한다면 과학은 필요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실증주의자들인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자들의 인과적 설명이 부적절하다며 이렇게 비판했다. “그들의 뇌로 반영되는 것은 발현의 직접적 형태일 뿐이지, 발현 내부의 연관은 아닌 것이다.” 실증주의자들이 ‘구체적’ 증거에 근거해야 함을 강조한 것에 맞서 마르크스는 전혀 구체적이지 않은 범주들의 인과관계를 드러내려 애썼다. 가격은 구체적 증거이지만 가치는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이 과학임을 표방했지만, 그 의미는 실증주의자와 매우 달랐던 것이다.

실증주의자의 원인 개념은 ‘기술’(記述, 서술, 묘사)과 ‘설명’을 혼동하고 뒤섞는 것이다. 설명이 기술과 다른 점은 표면 이면에 있는 힘들과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것이다. 설명이라기보다 기술에 해당하는 사례는 전지윤이 처음에 진보당 내 경선부정을 부인하며 쓴 글이다.[후주20] 진보당 내 경선부정 논란과 분당 사태가 있고 무려 1년 반이나 지난(!) 2013년 11월 그는 진보당 당권파의 부정은 없었고 따라서 당권파가 그 상황에 아무 책임이 없었다고 하도 소리 높여 고집스럽게 주장한 나머지 다른 노동자연대 회원들과 충돌했다. 그때 그의 방식은 아주 단순 과격했다. 편향된 특정 사실들을 증거라며 잔뜩 수집해 한 보따리 털어놓으며 반론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기가 제출한 사실들을 거듭 확인하기만 했던 것이다.

당시에 필자는 전지윤의 주장을 이렇게 비판했다. “논리가 일련의 비약에 기초하고 있고, 이 비약들은 그가 진보당 당권파의 결백을 확증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그 인과관계를 설정한 것들이다. 그는 이러한 상황 전개도 결과론적으로 보아, 마치 필연적 귀결들의 연속인 것처럼 서술한다.”[후주21] 그러나 활 쏜 뒤 과녁 그리는 식의 전지윤 설명과 달리, 진보당 내 경선부정 사태의 원인이 애초에 자민통계가 참여당계와 통합한 것 때문은 아니다. 또, 경선부정이 문제가 됐을 때 당권파가 자신에겐 그 어떠한 책임도 없다는 식으로 나오지 않고 다른 식으로 나올 수도 있었다. 더구나 동아시아 정세와 북한의 상황으로 인한 국가 탄압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노·심과 결별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불리할 수도 있음을 고려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지윤은 당시의 사건들을 마치 필연적 귀결들의 연속인 것처럼 서술한다. 그래서 그의 서술을 읽어 보면, 마치 모종의 보이지 않는 힘이 통제할 수 없이 작용해 상황이 박근혜 정부의 계략(특히 종북몰이)에 유리한 쪽으로 불가피하게 전개되는 듯한 느낌을 받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사태들은 미리 예정돼 있던 게 아니다. 다른 설명이 가능하다.[후주22]

3. 객관주의(객관성을 강조하는 반면 주관성은 경시함)

실증주의의 세 번째 문제점은, 사회와 인간의 문제를 다룰 때 주관적 요소를 배제하고 객관주의적 방식으로 다룬다는 것이다.[후주23] 그래서 실증주의자는 인간의 현상, 사회의 현상을 과학적 방법으로 다 관찰하고 다 설명할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한다.(전지윤은 언론의 알파고 과장 선전을 계기로 인공지능이 마르크스 유물론이 옳음을 증명했다고 주장하는데, 다시금 그가 실증주의와 유물론을 혼동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노동자 연대〉 제170호에서 다뤘다.)

실증주의는 객관주의적이어서 소수 행위자의 개입 효과를 과소평가하므로, 예측에 대해 교만한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사회계가 자연계와 다르고, 특히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의 복잡성 때문에 실증주의적 접근법은 인간 행동을 설명하고 예측하겠다는 스스로의 공약을 지키지 못한다는 모순에 처한다.[후주24]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실증주의는 현상 이면의 본질적 실재를 간과하므로 진정한 인과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따라서 진정한 예측을 할 수 없다. 만일 실증주의자가 예측이 맞았다고 뿌듯해 한다면, 그것은 현상의 틀 안에서 그러는 것이고, 따라서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다. 그래서 실재론자 로이 바스카는 실증주의를 비판하면서, 사회과학에서 이론에 대한 합리적 확증과 기각의 기준이 예측일 수는 없고 실증주의자들이 궁극적으로는 현상을 옹호하고 변호할 수밖에 없다고 꼬집는다.[후주25]

이러한 논점은 우선, 전지윤이 마치 노동자연대 정치의 타당성의 기준이 예측(과 분석)인 것처럼 보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후주26] 그리고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현재화하기 위해 진취적으로 사고하고 진취적·능동적·변혁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노동자 운동 내에 존재하는 각종 분리와 분열, 경계 등을 이유로 노동운동은 난관이 너무 많고 그보다는 민중이 주체라며 현상을 승인하기만 하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이렇게 객관적 사태 전개를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가 있다. 바로 꽁무니 좇기(추수주의, 追隨主義)가 그것이다.[후주27]

레닌은 유물론을 실증주의자들인 당시 민중주의자들의 객관주의와 대조했다:

객관주의자는 주어진 상황의 역사적 필연성에 관해 말하는 데 반해, 유물론자는 주어진 사회·경제 구조를, 또 그 구조를 창출한 적대적 관계들을 정확하게 기술한다. 객관주의자는 일단의 주어진 사실들의 필연성을 보여 주면서 언제나 그 사실들의 변호론자가 될 위험이 있다.[후주28] 반면 유물론자는 주어진 상황의 극복할 수 없는 ‘역사적 추세들’에 관해 말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계급 모순들을 보여 주려 애쓴다. … 그리고 [노동계급이 주도력을 발휘할 잠재력이 있음을 근거로] 계급적 편파성을 견지한다.(‘나로드[민중]주의의 경제적 내용’에서)[후주29]

물론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구조 문제를 다룰 때는 마치 ‘자연사적 과정’을 다루듯이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출발점일 뿐이지) 이게 다가 아니다. 과학적 접근법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은 것이다. 특히, 노동자들의 의식과, 또한 조직된 혁명가들의 행동이 그에 미치는 효과를 판단하고 계산해야 한다.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것을 넘어, 조직된 혁명가들이 객관적 상황에 작용을 가하면 달라질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역사유물론의 법칙들이 “역사적 우연성”을 포함함을 강조했다.[후주30]

이처럼 주관성과 객관성은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객관적 상황도 주관적 행동의 영향을 일부 받는 것이다. 주관성과 객관성의 이러한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혁명적 정치조직의 개입이 할 수 있는 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전지윤이 이끄는 변혁재장전 서클처럼) 노동자 운동에 수동적이고 추수적인 자세로 접근하게 된다.[후주31] 노동계급이 성숙한 계급의식을 갖는 것은 결코 저절로 되지 않는다. 숙명론이나 기회주의를 버리고 능동적으로 ‘노동계급의 의식을 현재 수준에서 객관적으로 가능한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그저 대세를 추수할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허용된 한계 안에서 매순간 정치적 영향력을 건설해야 한다. ‘실행되지도 않을 파업 촉구는 무슨!’ 하는 식의 숙명론적·객관주의적 체념에 사로잡힐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도 안에서 가능한 성과를 내고자 애써야 한다. 정치적 지도력은 투쟁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자세로 레닌은 탐구하고 분석했던 것이다.[후주32] 루카치는 이렇게 말한다: “[레닌의] 탐구 목적은 변증법을 적용할 줄 아는 것이다. … 일반성 속에서 특수성을 발견하고 특수성 속에서 일반성을 발견할 줄 아는 것, 새로운 상황 속에서 이전의 상황 전개와의 연관성을 볼 줄 아는 것, … 역사적 필연성 속에서 활동의 모멘트를 발견하고 활동 속에서 역사적 필연성과의 연관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 그런 탐구 자세의 결실은 명확했고, 도식적이지 않았고, 기계적이지 않았고, 활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후주33]

이제 전지윤이 노동계급의 상태와 저항 잠재력을 다룰 때 드러나는 수동성과 숙명론이 실증주의와 유물변증법 중 어느 것에 가까울지는 명백할 것이다. 그리고 원칙과 이론을 (실증적 방식에 따라 수행된) 자신의 현상 분석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할 뿐인 이유도 알게 됐을 것이다. 특히, 그가 도대체 어떻게 그토록 신속하게 자신의 옛 ‘원칙’을 송두리째 버리고 온갖 불충분하고 취약한 ‘원칙’들과 부실한 이론들로 돌진했는지도 알게 됐을 것이다. 그나마 그는 (라르스 리 연재번역 건처럼) 자신이 그러한 원칙들과 이론들을 대폭 찬동하는 게 아니라고 발뺌도 한다. 그의 분파와 첨예하기 이를 데 없이 논쟁하던 2013년 말과 2014년 초 우리는 그가 이론을 자신의 기존 실천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실용주의적으로 취급한다고 비판했다. 게다가 목적은 수단을 언제나 정당화한다는 듯이 행동하며 도덕도 실용주의적으로 취급할 때는 정말 아연했다.

게다가 한술 더 떠, 이제는 (조직)노동자 주변의 ‘민중’이 먼저 움직여 (조직)노동운동이 ‘사회적 고립’을 면하게 해 줘야 비로소 (조직)노동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수 있다는 민중주의의 정수를 강조하면서도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로 착각하는 게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든다. 또한, 민중총궐기를 평가하면서 정부가 ‘시민진영’과 ‘민중진영’을 이간시키고 그다음 ‘민중진영’의 각 부분을 이간시키고 하는 따위의 분석을 하는 것은 계급적 분석이 아니다. 물론 노동계급보다 청년·학생이나 차별받는 사람들이 먼저 움직이는 경우는 현대 세계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전략과 원칙을 변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전술을 신축성 있게 운용하는 걸로 충분하다.

맺으며

지금까지 실증주의 비판을 보며 독자가 사실, 증거, 관찰, 실험 등(이 모두를 아울러 ‘경험’으로 일컫기로 하자)이 아예 무의미하다는 인상을 받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양자택일을 경계하고자 하는 노파심에서 한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마치 가치와 추상적 노동 개념을 옹호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현실 경제 분석을 할 때 가격을 배제하지 않듯이, 또한 변증법을 옹호하는 유물론자가 명제들을 조직할 때 형식논리(학)를 배제하지 않듯이, 사회 탐구와 설명을 하는 마르크스주의자는 탐구 단계든 설명 단계든 경험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출발점으로 삼는다.

하지만 경험은 현상에 대한 경험이요, 감각 경험이요, 인상이다. 본질적 실재는 직접 경험할 수 없다.(마치 가치를 직접 관찰하거나 측정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본질적 실재를 알려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사용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이를 여기서 설명할 수는 없고,[후주34] 다만 전통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전통은 1백70년에 걸친 노동계급 투쟁사와 그 안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신의 고유한 이론적 공헌과 함께 수행한 역할, 둘 다를 포함한다. 전지윤이 질주하듯이 달려간 이론들과 분석들은 이런 위대한 전통을 구현하지도, 심각하게 숙고하지도 않은 최신의 학술 유행일 뿐이다. 게다가 전지윤이 절충적으로 취합한 결과는 모자이크나 짜깁기라기보다는 내적 모순들로 가득한 누더기에 가깝다. 한결같은 기회주의의 결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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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주

[후주1] 차승일, ‘음모론과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연대〉, 제169호(2016.03.16) [본문으로]

[후주2] 최일붕, ‘민중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자 연대〉, 제168호(2016.03.02) [본문으로]

[후주3] 전지윤, ‘예측이 어긋나면 스스로의 분석부터 돌아봐야’ [본문으로]

[후주4] 최일붕, 앞서 언급한 글. [본문으로]

[후주5] 전지윤은 언론 보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이데올로기주의 경향을 드러낸다. ‘사실’로 확인되며 언론에 보도된 사건들을 ‘증거’로 너무 많이 사주기 때문이다. 가령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선진 노동자들과 새로 급진적이 된 청년·학생이 박근혜 정부 ‘종북몰이’의 실질적 영향을 받아 위축된다고 할 수 있는가? 의식이 변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종북몰이가 “절대반지”가 아니다. [본문으로]

[후주6] Antonio Gramsci,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International Publishers, 1971, CD-ROM version p. 626. [본문으로]

[후주7] 최일붕, ‘마르크스주의 핵심 원칙, 꿰어 맞추기와 절충으로 누더기가 되다’, 〈노동자 연대〉, 제169호(2016.03.16) 또한 최일붕, ‘전지윤은 기회주의적 처신을 중단해야 한다’, 〈노동자 연대〉, 제170호(2016.03.22) [본문으로]

[후주8] 이는 그가 단체 탈퇴 후 원칙을 발본적으로 재검토한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원칙을 얼마나 실용주의적으로 여기는가를 보여 줄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될 것이다. [본문으로]

[후주9] 실증주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소련의 공식 마르크스-레닌주의 안에 스며들어가 그 유기적인 일부가 됐다. 과거에 멘셰비키의 일원이었다가 스탈린 체제의 어용 철학자가 된 데보린이 그 대변인 구실을 했다. Michael Löwy, ‘Dialectics and Revolution: Trotsky, Lenin, Lukács’, in Bertell Ollman and Tony Smith (Editors), Dialectics for the New Century, Palgrave, 2008, pp 151-162. [본문으로]

[후주10] 실증주의 비판은 이기홍,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한울아카데미, 2014, 55~90쪽. [본문으로]

[후주11] 이 부분적인 관념론적 성격 때문에 레닌은 1908~09년 논적 보그다노프의 실증주의[경험비판론] 철학이 18세기 전반부 영국 성공회 주교 조지 바클리[“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 레닌은 실증주의의 분적 관념성을 지나치게 과장했다. [본문으로]

[후주12] 조직 노동자 운동은 부문주의 때문에 역사적 사명을 다했다는 게 전지윤의 진정한 입장이다. 전지윤, ‘신자유주의와 노동운동’, 2015년 10월 21~28일. 강동훈과 김문성의 글들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후주13] Paul Mason, Post Capitalism: A Guide to Our Future, Allen Lane, 2015. 메이슨은 이미 2012년작에서 신자유주의로 조직 노동계급이 원자화되고 약화됐다는 진보·좌파 일각의 오해를 공유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후주14] 김하영, 《박근혜의 ‘노동개혁’에 맞서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 노동자연대, 2015. 또한 김하영, ‘우리의 예측이 어긋난 게 아니라 바램에 조금 못 미쳤을 뿐 ― 올해도 투쟁은 계속된다’, 〈노동자 연대〉, 제169호. 김하영은 노동자연대의 조직노동자운동 팀장이다. [본문으로]

[후주15] 필자는 전지윤과는 다른 식의 설명을 매우 요약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최일붕, ‘마르크스주의 핵심 원칙, 꿰어 맞추기와 절충으로 누더기가 되다’, 〈노동자 연대〉, 제169호(2016.03.16). 물론 김하영이 전지윤을 비판하며 쓴 글이 좀 더 자세하고 평이하다. 김하영, ‘우리의 예측이 어긋난 게 아니라 바램에 조금 못 미쳤을 뿐 ― 올해도 투쟁은 계속된다’, 〈노동자 연대〉 169호(2016.03.16). 또한 김하영의 소책자를 보라. 김하영, 《박근혜의 ‘노동개혁’에 맞서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 노동자연대, 2015. [본문으로]

[후주16] 필자의 이 진술은 서중석, 《6월항쟁》(돌베개, 2011)의 서술과도 일치한다. 서중석의 책 전체에서 노동자의 6월항쟁 참여가 강조되고 있다. [본문으로]

[후주17] Leon Trotsky, The Third International After Lenin, New York, Pathfinder, 1970, p. 140. [본문으로]

[후주18] 이 주제는 김종환이 다뤘고, 이 책에서 읽어 볼 수 있다. [본문으로]

[후주19] 실증주의적 인과율 개념에 대한 비판은 이기홍, 앞서 언급한 책, 155~168쪽. [본문으로]

[후주20] 전지윤,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였는지 돌아보자’ [본문으로]

[후주21] 최일붕, ‘당신의 열심이 위험한 이유’, 2013년. 노동자연대 대의원협의회 자료집에 실림. [본문으로]

[후주22] 최일붕, ‘국정원과 박근혜 정부의 매카시즘’, 〈레프트21〉, 제112호(2013.09.28). [본문으로]

[후주23] 객관주의가 모두 유물론인 건 아니다. 가령 헤겔 사상은 객관주의적이지만 관념론이다. [본문으로]

[후주24] Thomas Houghton, “Does positivism really ‘work’ in the social sciences?”, September 26, 2011. [본문으로]

[후주25] 앤드류 콜리어, 《비판적 실재론: 로이 바스카의 과학철학》, 이기홍·최대용 옮김, 후마니타스, 2010년. [본문으로]

[후주26] 전지윤, ‘예측이 어긋나면 스스로의 분석부터 돌아봐야’ [본문으로]

[후주27] 루카치는 실증주의가 변증법과 관계가 멀 뿐 아니라 추수주의를 수반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A Defence of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Verso, 2002) pp. 45-150에 실린 논문 ‘Tailism and the Dialectic’을 보라. [본문으로]

[후주28] 전지윤은 진보당 당권파의 폭력 사용을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며 변호했다! [본문으로]

[후주29] Lenin, ‘The Economic Content of Narodism and the Criticism of it in Mr. Struve’s Book’, Collected Works, vol. 1, pp. 400-401. [본문으로]

[후주30] 루이 뒤프레,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 한밭, 1982, 221~222쪽. [본문으로]

[후주31] 민중주의자이므로 전지윤은 민중 운동에 대해선 다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본문으로]

[후주32] 루카치, 《레닌》, 녹두, 1985, 제6장. [본문으로]

[후주33] 같은 책, 102쪽. 내가 영어판과 대조해 번역을 일부 수정했다. [본문으로]

[후주34] E. V. 일렌코프,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 (연구사, 1990년)를 보라. 에발드 바실례비치 일렌코프(1924~79)는 소련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소련의 공식(신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와 부합하기보다는 비고츠키 계통이라는 이유로 심리적 괴롭힘을 당하다가 마침내 55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자살했다. [본문으로]

부록1

진보당 당권파의 경선 부정은 없었는가?

김아무(노동자연대 회원, 노동 변호사)

통합진보당은 2012년 4월 11일 제19대 총선 직후 비례대표 후보 경선 당시 대리투표로 인한 부정경선 논란에 휘말렸고 많은 당원들이 이로 인해 형사 처벌을 받았다.

위 부정경선 논란은, 부정경선을 스스로 저지른 옛 국민참여당 계열 당원들[1]이 당시 통합진보당 당권파를 겨냥해 촉발했고, 위 부정경선 논란이 당권파에 대한 종북 마녀사냥에 이용된 면도 없지 않다.

위 부정경선과 관련해 당권파가 하는 항변의 주요 내용도 ‘대대적인 부정경선을 저지른 쪽은 국민참여당 계열이지 당권파가 아니며, 국민참여당 계열이 자신들의 치부를 숨기고 당권파로부터 당권을 빼앗으려는 불순한 의도 하에 부정경선 혐의를 당권파에게 부당하게 덧씌웠고, 종국에는 당권파에 대한 종북 마녀사냥으로 이어지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권파의 위와 같은 항변이 일부 진실(국민참여당 계열의 부정경선 등)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당권파 또한 부정경선을 저질렀다는 진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당권파를 지지하는 당원들도 작업장 등에서 친분관계를 이용해 다른 당원들로부터 인증번호를 받아 대리투표를 하는 부정경선을 저질렀다.

위와 같은 대리투표는 당원들의 후진적 의식[2]을 이용해 진지한 정치적 설득 없이 단순히 친분을 이용했다는 점과 투표권자의 정치적 의사를 왜곡하고 투표권자인 당원들을 수동화하는 폐해를 필연적으로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원들의 능동적이고 정치적인 의사와 행동이 중요한 진보정당에서는 결코 허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권파가 다수인 당시 통합진보당 선거관리위원회는 위와 같은 대리투표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서도 대리투표를 통제할 수 있는 기술적 조처를 스스로 포기하고, 이를 금지하는 규정조차 전혀 마련하지 않는 등 대리투표를 사실상 방조했다.

이는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 35부가 지난 2013년 10월 7일 부정경선과 관련해 보건의료노동조합 조합원, CNP 직원 등에 대해 무죄[3]를 선고한 판결에서도 인정한 사실 중 하나이다(당시 통합진보당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 증언을 토대로 인정한 사실).

당권파 주장대로 국민참여당 계열만이 대리투표 부정경선을 저질렀다면 위 통합진보당 선거관리위원회가 왜 대리투표를 사실상 방조했겠는가? 많은 노동자들은 당권파를 지지하는 당원들이 작업장에서 휴대폰을 들고 다니면서 지인 당원들로부터 인증번호를 받아 대리투표를 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전혀 통제하지 않고 방조하는 통합진보당에 대해 실망하고 환멸을 느꼈다.

당권파도 경선 부정의 일부였다는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종북 마녀사냥에 맞선 투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노동자 민중은 그렇게 아둔하지 않다.

[목차로 돌아가기]

[1] 이들도 당시 대대적인 대리투표를 자행하여 부정경선을 저질렀다. [본문으로]

[2] 당내 경선에 대한 무관심. [본문으로]

[3] 위 판결은 2015. 5. 22. 서울고등법원에 의해 유죄로 변경됐다. [본문으로]

부록2

전지윤과 변혁재장전은 책임성과 자기인식부터 길러야

김인식

전지윤 씨(이하 존칭 생략)는 ‘노동자연대’가 ‘변혁재장전’의 ’총선 공동투쟁본부’ 참가를 가로막았다고 썼다.

우리는 총선을 앞두고 진보좌파 진영이 힘을 모으자는 취지에 공감해 조그만 힘이나마 보태고 싶었다. 그런데 민주노총을 압박해 우리의 연대체 참가조차 가로막는 노동자연대 지도부의 비동지적 태도는 어떻게든 정당화되기 어렵다. (http://rreload.tistory.com/264)

이 짤막한 두 문장은 사건의 온전한 설명이 아니라 전지윤의 의도에 맞게 취사선택되고 짜깁기된 ‘사실’들이다. 전지윤이 2년 전 단체를 탈퇴하기 직전에 벌인 5개월 여 동안의 논쟁 때 거듭 구사한 진술 방식이라 새롭지도 않다. 그래도 변혁 운동가라면 솔직해야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정치 논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변혁재장전이 애당초 민주노총으로부터 총선공투본 참여 제안 자체를 받지도 못했음을 지적하는 것이 순서이겠다. 이유는 간단했다. 민주노총 책임자가 변혁재장전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총선공투본은 총선 돌파를 위해 민주노총이 제안해 만든 노동운동과 진보·좌파의 총선 대응 연대체다. 민주노총이 2월 3일 총선공투본 구성을 위한 ‘제정당, 단체 연석회의’를 소집했다. 연석회의에 참석한 단체들이 총선공투본 구성 취지에 공감해 2월 18일 발족했다. 모두 29개 단체들이 총선공투본에 참여했다. 민주노총, 전농, 전여농, 전빈연, 빈민해방실천연대, 노동당, 정의당, 민중연합당, 녹색당, 시민혁명당, 변혁당, 노동자연대, 사회진보연대, 노동전선, 좌파노동자회, 현장노동자회, 전국회의, 한국진보연대, 민주수호공안탄압대책회의 등. 민주노총이 노동운동과 진보·좌파 운동에 이러저러하게 기여하고 있다고 인정할 만한 단체들을 사려 깊게 확인해 소집한 까닭에 총선공투본이 특정 경향이나 단체들에 배척적으로 구성됐다는 문제제기는 없었다.

반면, 변혁재장전은 극소수 개인들의 서클이다. 그나마 노동운동가들도 아니다.(노조 상근간부층에 고용된 직원은 노동운동가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니 민주노총 책임자가 그 존재를 모르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단체’에게 총선공투본 참여 단체들과 동등한 대표성을 부여하는 것은 전혀 민주적이지 못할 것이다.

대표성은 해당 단체의 사회적 기반과 영향력이나 운동에 대한 책임성을 뜻한다. 물론 꼭 단체에 소속돼 있지 않을지라도 폭넓은 지지를 받는 운동가가 있다면, 그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모종의 대표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80만 명의 조합원이 소속돼 있는 민주노총의 대표성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민주노총에는 못 미치고 또 각각 불균등하지만, 나머지 참여 단체들도 노동자 운동과 피억압자들의 운동에 일정한 책임성과 기반을 갖고 있다.

총선공투본에 참여하고 싶다면 사리를 분간하지 않는 보채기를 멈추고 노동운동 안에서 세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전지윤은 이런 기초 개념조차 없이 총선공투본에 참여하겠다고 한 것이다. 참 분별없는 짓이다. 전지윤의 분별 없음은 그가 민중총궐기투쟁본부 회의(3월 22일)에서 자신의 총선공투본 참여를 거절한 이유를 밝히라고 민주노총 측 참석자에게 요구한 것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두 연대체에 민주노총이 모두 참석하지만, 두 연대체(의 성격, 구성, 과제)는 엄연히 다르고 민주노총 책임자도 다르다. 그런데도 전지윤이 민중총궐기투쟁본부 회의에서 총선공투본 관련 일을 ‘항의’했으니 이 얼마나 분별없는 짓인가.

그런데도 전지윤은 무분별함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노동자연대가 “비동지적”으로 대하고 있다고 탓한다. 심지어 노동자연대가 민주노총을 “압박”해 변혁재장전의 가입을 막았다고까지 썼다. 민주노총이 변혁재장전의 총선공투본 참여 신청을 최종 거절(3월 22일)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연대의 총선공투본 파견자인 나에게 의견을 구했다. 나는 위에서 언급한 이유를 포함해 이유를 들어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그리고 민주노총 담당자는 그 의견을 존중했다. 전지윤은 이를 두고 노동자연대가 민주노총을 “압박한” 것이라고 말한다. 80만 조합원을 가진 민주노총이 노동자연대의 “압박”에 굴복할 조직인가. 어안이 벙벙하고 말문이 막힐 뿐이다.

한편, 변혁재장전이 총선공투본 참여를 신청한 날짜는 3월 10일이다. 그때는 이미 총선공투본이 두 차례 대표자회의를 거치며 기조와 사업 계획을 대부분 마무리지은 뒤였다. 민주노총이 ‘변혁재장전’의 총선공투본 참여 신청을 거절한 이유의 하나였다.

그런데도 전지윤은 굳이 총선공투본에 가입하려 했다. 이 무렵 총선공투본은 그 내부에서 정의당의 야권연대 방안을 놓고 논쟁이 있었다. 일부 좌파가 야권연대를 추진하는 정의당을 총선공투본에서 배제하거나 적어도 총선공투본이 정의당을 공개적으로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노동자연대는 정의당의 전략적 야권연대가 정의당에 선거적 실리를 가져다 줄 수 있겠지만, 노동계급의 적인 부르주아 야당과의 전략적 협력이 계급투쟁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총선공투본이 사실상 정의당에 투표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대중 앞에 내놓아야 한다는 일부 좌파의 ‘대정의당 세컨더리 보이콧’ 요구에 대해서는 반대했다(야권연대 문제는 총선공투본의 참여 자격 조건에 있지 않으므로).

〈노동자 연대〉에 보도됐으므로 전지윤도 이 논쟁을 모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동안 전지윤이 쓴 글들을 보면, 그의 정치 입장은 비(또는 반)정의당/친민중연합당으로 분류할 수 있다. 총선공투본에 민중연합당의 대변자가 느는 것이다.

전지윤은 노동자연대가 민중연합당에 대해서는 “지나친 잣대를 들이대는” 반면, “정의당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우호적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한다. 글쎄, 노동자연대는 두 정당 사이의 좌우 구분선이 직선적이지 않다고 본다. 어떤 쟁점들(가령 미국의 대북 군사적 위협)에서는 민중연합당이 정의당보다 좌파적이지만, 다른 어떤 쟁점들(가령 성소수자, 이주민 같은 차별 쟁점)에서는 정의당이 민중연합당보다 훨씬 더 감수성이 예민하다. 게다가 정의당 안에도 좌파들이 있고, 정의당 평당원들의 상당수는 지도부보다 좌파적이다. 그래서 노동자연대는 두 당 모두에 대해 사안별 비판적 지지 입장을 취한다.

그와 동시에, 노동자연대는 지난해 노동자 투쟁의 제한적 회복 덕분에 주류 개혁주의 정당인 정의당이 성장하는 역설에도 주목한다. 이번 선거에서도 민주노총의 선진 노동자들이 정의당을 왼쪽에서 지지하는 분위기가 포착된다.(창원성산 예비경선에서 노회찬 정의당 후보가 민주노총 후보로 당선한 것이 그 한 사례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자 계급과 그 투쟁을 상대적으로 더 중시하는 정의당의 좌파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정의당이 우경화하는 것보다야 좌경화하는 것이 노동자 운동 전체에 더 이롭기 때문이다. 반면, 전지윤은 노동자연대가 정의당(과 정의당의 좌파)을 비판하지 않는다고 핏대를 세운다.(그의 견해가 또다시 치우쳤음을 여기서는 논외로 치자.)

이쯤 되면, “진보좌파 진영이 힘을 모으자는 취지에 공감해 조그만 힘이나마 보태고 싶”었다는 전지윤의 주장이 정치적 진의를 숨긴 연막 같다고 하면 공연한 트집잡기일까?

끝으로, 전지윤의 분별 없는 보채기는 오늘날 많은 연대체들의 바람직하지 못한 관행의 허점을 교활하게 파고드는 것이다. 오늘날 상당수 연대체들이 모종의 자율주의적 방식으로 구성·운영된다. 참여 단체들의 대표성은 흔히 무시되거나 부정된다. 그리하여 참여 의사를 밝힌 단체들에 대해서는 그 지지기반이나 책임성과 관계없이 무조건 개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이를 문제 삼으면 오히려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 됐다.

자율주의적 방식의 연대체 운영의 폐단을 잘 나타내는 것이 오늘날 연대체에서 관행으로 돼 있는 합의에 의한 결정 방식이다. 물론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두 합의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를 놓고 이견이 존재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럴 때는 다수결로 결정하고 실행해야 한다. 그러나 합의에 의한 결정 방식은 소수가 한없이 붙들고 늘어지면 아무런 행동도 조직할 수 없도록 만들 위험이 있다. 그 결과 노동조합이나 다른 대중 단체들이 연대체에서 아무런 대표성을 갖지 못하게 된다.

이보다는 최소한 대중을 대표하거나 운동에 기반이 있고 책임을 지는 단체 대표들에 의한 다수결 투표가 더 민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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