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중국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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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중국이 서방세계 나라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회라고 생각한다. 1949년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됐고, 비록 1980년 이후 개혁·개방을 통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마오쩌둥주의를 지도 이념으로 하는 공산당의 지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 사회의 토대는 1949년 혁명을 통해 형성됐고, 그 이후로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중국 사회가 질적으로 탈바꿈한 적은 없다. 이런 이유로 1949년 혁명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오늘날 중국 사회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된다.
혁명의 전사(前史)
중국 현대사의 권위자 중 한 명인 모리스 마이스너는 이렇게 썼다. “근대 중국의 혁명사는, 19세기 중반 실패로 끝났던 그리스도교 농민반란으로 시작되어 20세기 중반 마르크스주의자가 이끈 농민혁명의 성공으로 그 정점을 장식한다.” 중국 근현대사의 두 분수령이었던 ‘태평천국의 난’과 1949년 혁명의 공통점을 지적한 이 문장은 날카로운 통찰을 품고 있긴 하지만, 자칫 1925~27년 중국 노동자 혁명을 과소평가할 수 있다.
1925년 5·30 사건[상하이 조차지에서 경찰이 발포해 시위대 십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서도 노동자 투쟁이 분출했다. 1927년 3월에는 노동자들이 상하이를 실질적으로 통제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공합작을 유지하라는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지침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장제스의 쿠데타에 대비하지 못했다. 결국 혁명은 유산됐다.
스탈린은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고 광저우, 하이펑, 루펑 등지에서 준비되지 않은 봉기를 일으키라고 지시해 수많은 노동자들을 죽게 만들었다.
그 여파인 1927~30년의 백색공포로 도시 노동조합과 학생조직은 궤멸되다시피 했고, 농촌에서는 무자비한 살육으로 농민협회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토지개혁도 되돌려졌다.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국민당 장제스는 권력 장악에 가장 큰 걸림돌은 당시 전쟁 중이었던 일본이 아니라, 공산당이라고 봤다. 그래서 그는 중국의 하북 지역을 넘겨주는 당고협정(塘沽協定)을 일본 제국주의와 체결하고는, 국민당 전력(戰力)을 남쪽으로 집중시켜 공산당을 섬멸하려 했다.
공산당은 ‘대장정’을 거쳐 산시-간쑤-닝샤 자치구의 변방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도 시인했듯이, 중국공산당이 이 지역을 ‘선택’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1927~30년의 노동자 투쟁 패배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로 말미암아, 도시 노동자들에 기반을 둔 조직과 노동자 계급의 혁명 가능성은 현실에서 사라졌다.
결국 1940년대에는 국민당과 공산당 두 세력이 중원의 패권을 두고 경쟁했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고위관료와 군장성, 대자본을 기반으로 하는 부르주아 정당이었고, 공산당은 변방의 옌안을 중심으로 그 지역 농민에 기반을 둔 정당이 돼 있었다.
1940년대에 중국의 이곳저곳을 둘러본 다음 미국 전쟁정보국(OWI)에 정보를 제공했던 그레이엄 펙은 “중국과 같은 사회에서 혁명은 기본적이며 매우 자연스러운 삶의 요소”라고 지적했다. 오랜 내전과 일본 제국주의 지배로 대중의 삶은 파탄났다. 1945년 일본 패망 후에도 사태는 오히려 더 악화됐다.
국민당 정부는 항일전쟁 기간에 국가 경제를 독점하기 위해 화폐 발행을 늘렸고, 이것은 살인적인 인플레를 유발했다. 1948년 옥수수 1소두(小斗)의 가격이 2월에는 12만 위안이었지만 10월에는 1천2백만 위안으로 올랐다. 1937년 물가지수를 100으로 했을 때 1947년 말에는 1천30만으로, 1948년 말에는 2억 8천7백만(!)으로 급등했다.
상하이에는 실업자가 30만 명이나 있었으며, 매일 6천 명의 피난민이 유입됐다. 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는 투기꾼을 단속하는 조처를 취했지만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던 큰손들은 건드리지 못했다.
1949년 혁명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중국에서는 국민당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것처럼 보였다. 당시 국민당 정부군은 4백30만 명이었고, 일본군 1백만 명이 남긴 무기를 전부 차지했으며, 인구 3억 명 이상의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은 1945년 이래로 3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했다.
반면 인민해방군은 병력이 1백20만 명이었고, 군사력도 훨씬 뒤쳐져 있었으며, 외부의 원조도 없었다. 인민해방군이 장악한 지역의 인구는 1억 3천만 명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장제스는 3개월 내에 중국공산당을 섬멸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정반대로 3년 뒤에 국민당 세력이 철저히 붕괴됐다.
인민해방군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신념에 의해 움직였지만, 국민당 군대는 강제 징집병으로 이뤄져 있어서 위협으로만 대열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국민당 장교들은 목숨을 유지하는 것에만 매달렸으며, 지휘관들은 부대원들의 급료와 식량을 착복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
1949년 혁명의 과정은 본질적으로 국민당 군대와 인민해방군이라는 두 정규군 사이의 전쟁이었다. 도시 노동자와 농민은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국가 경제의 파탄과 빈부격차의 확대, 국민당의 무능으로 인해 이들 대다수 중국인들은 끔찍한 혼란에서 벗어나는 길은 공산당이 승리하는 것밖에 없다고 여겼다.
1949년 혁명은 도시 출신 지식인들이 지휘한 농민 군대가 옛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일본과 서방 제국주의 권력을 축출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의 토대를 놓은 진정한 혁명이었다. 그렇지만 이 혁명은 노동자 대중의 자력 해방을 의미하는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었다. 찰리 호어는 이렇게 지적했다.
“1949년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의 마지막 결정적인 국면에서 미미한 구실을 했다. 상하이에서 20년 전에 장제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떤 주요한 파업이나 도시 봉기도 홍군[인민해방군]에게 길을 닦아 준 바가 없었다.”
공산당은 도시 가까이에 진격하자 이런 명령을 내렸다. “생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과 종업원들은 일을 계속하고 영업은 평상시처럼 돌아가게 하라. … 국민당 관리들과 경찰관들은 자기 직무에 그대로 남아, 인민해방군과 인민 정부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마오쩌둥 체제의 등장
1949년 혁명으로 중국 농촌에서는 지주 계급이 사라졌다. 그러나 혁명의 진정한 수혜자는 농민이 아니라 공산당 관료였다.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추진하면서 전통적인 착취 구조를 일소하는 대신 농민들을 당과 국가에 직접 예속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1949년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유교적 가족 제도에 억눌려 있던 수천만 여성의 해방을 목표로 한 혼인법이 공표됐다. 혼인법은 수세기 동안 자행돼 온 아동 혼인을 금지하고, 최소 결혼 연령을 남자 20세, 여자 18세로 정했고, 축첩과 유아 살해도 금지했다. 이혼은 간단한 쌍방간 동의로 가능했고, 이혼에서 여성의 이익이 우선적으로 보호받았다.
하지만 1950~53년의 질풍노도 같은 분위기가 지나가자 가정 생활은 다시 전통적인 질서를 회복했고, 남녀 평등은 실현되지 못했다. 봉건적 가부장제와 온갖 악폐들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당의 권위가 차지했다. 당은 사생활과 가정사에 깊숙이 개입했고, 배우자 선택에 정치적 기준과 출신 계급을 제시했으며, 부부간 불화의 조정에도 나섰다.
마오쩌둥과 그 후예들은 1949년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 혁명에서 노동자 대중의 자력 해방이 없었어도, 공산당이 노동자 계급에 기반을 둔 정당이 아니었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 사상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의 존재가 바로 혁명계급의 존재를 증명하는 충분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했지, 중국공산당처럼 의식이 존재를 결정한다고 보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낙후한 국가를 물려받은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미국과 대만의 장제스 세력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압력과 경쟁하기 위해 경제 발전을 빨리 이뤄야 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 관료와 공장 경영자 그리고 군부 지도자들은 빈약한 자원으로 공업 기반을 건설하기 위해 생산과 소비 그리고 인간의 기본 욕구조차 자본축적이라는 목표에 종속되도록 했다. 또한 이들은 불가피하게 노동자·농민과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됐고, 그 결과 하나의 집단적 계급을 이루게 됐다.
1949년 혁명 이후 벌어진 소련과의 갈등, 인민공사 건설, 대약진운동 등 급변하던 정책들은 바로 신중국 건설 과정에서 마오쩌둥이 직면한 모순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대중의 자력 해방은 조금치도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