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향과 정의연 스캔들:
위안부 운동 내 논쟁: 배·보상 문제와 ‘성노예’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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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보상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가끔 어떤 일본 사람들이 물어 봐요. ‘돈을 얼마나 받고 싶냐’고. 그럴 때는 그 사람 얼굴에 침 뱉고 싶어요. 돈을 암만 많이 받은들, 일본 전체를 다 나에게 준들, 그 문제가 해결됩니까? 내 상처가 낫습니까? 진실을 올바로 밝히고 사죄하고 배상하라는 것은 우리 인권을 살려 달라, 우리 명예라도 세워 달라는 것이지 어떤 다른 것을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이겁니다.”
이 말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고도 그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 국가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을 자칫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돈은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존엄성을 유지하며 삶을 사는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겪은 위안부 경험의 후유증 때문에 신장의 기능이 극히 약해져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강덕경 할머니(1929~1997)는 이렇게 말했다. “돈을 벌면 뭐해. 다 치료비로 들어가는걸. 어린 나이에 워낙 심하게 당해 놓으니까 힘들게 돈 벌면 병원에 다 갖다 바치고 그랬지 뭐. 그러니 지금껏 돈 한 푼 없이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이런 금전적 어려움 때문에, 1995년 일본 정부가 아시아여성국민기금을 내놓자 그 기금의 위로금 수령 여부를 놓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진통과 분열을 겪었다.
2004년 심미자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 33인은 ‘세계평화무궁화회’(이하 무궁화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당시 정대협 대표였던 윤정옥 씨를 강하게 비판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을 받는다면 자원해 나간 공창이 되는 것’이라고 공개석상에서 떠들어 댔던 일, 그것이 인권회복을 위한 발언이었나요? ...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주는 위로금을 당신들이 뭔데 공창 운운하며 우리를 두 번 울리는 것입니까.”
〈조선일보〉 등 우파 언론이나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는 이 글을 인용해 정대협을 공격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 분열했던 위안부 피해자들의 곪고 다친 심정을 기회주의적으로 이용하는 위선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정대협이 비판적으로 돌아봐야 할 문제는 분명히 있다. 예컨대 정대협은 결국 김영삼 정부를 압박해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게끔 만들었는데, 그때 아시아여성국민기금을 받은 피해자들을 배제하게 했다. 이것은 무궁화회 위안부 피해자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어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아시아여성국민기금을 내놓은 일본 정부의 의도와 별개로, 위안부 피해자들이 보상금을 수령하는 것 자체를 도덕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부적절한 태도다. 도덕주의는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실천하기 어려운 ‘올바름’이나 ‘의지’를 지나치게 내세움으로써 실제로는 위선의 효과를 내고, 사람들을 불필요하게 반목·분열하게 만들기 쉽다.
그래서 1995년 보상금 수령 문제에서 지나치게 강경하던 정대협의 태도는 2015년 합의의 결과물인 10억 엔(108억 원) 중 절반 가까이를 이미 위안부 피해자나 유족이 수령했다는 것에 대해 사실상 침묵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현재 화해·치유재단은 해산됐다. 하지만 10억 엔 중 44억 원은 피해자와 유족에게 지급돼, 합의는 폐기도 유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놓여 있다. 일본 국가의 책임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인 상태로 말이다.
이런 모호한 현실이 지난 30년간 정대협·정의연에 남아 꿋꿋하게 활동해 온 이용수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얼마나 큰 답답함과 낙담을 안겨 줬을지 이해해야 한다.
이용수 할머니가 “수요일에 학생들이 나와서 집회하지만 [아무런] 공부가 안 된다”며 수요집회를 그만 열자고 한 것은 윤미향 씨를 비롯한 운동의 대표들이 이런 좌절스런 현실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불만을 노기를 띠어 표현한 것일 수 있다.
‘성노예’ 용어가 채택된 배경
정의연의 정식 명칭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다. 오랫동안 통용되던 일본군 ‘위안부’라는 용어 대신 성노예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대협이 이 용어를 국내에서 전면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2016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이 출범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용수 할머니는 5월 14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성노예’라고 표현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위안부라는 명칭은 바꾸면 안 된다. 성노예라고 하는데, 너무 더럽고 속상하다. 윤미향한테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야 미국이 무서워한다’고 (하더라).”
이런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미 위안부 피해자들의 거부감을 고려해 정대협과 위안부 운동, 한국 정부는 성노예라는 용어 대신 일본군 ‘위안부’라는 용어를 오랫동안 사용해 왔다.
‘위안부’는 일본군이 1930년대 후반부터 문서에 직접 쓰기 시작한 명칭이다. 일본군을 위로하고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로 말이다. 그래서 ‘위안부’도 피해자들에게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는 용어다. 그러나 ‘성노예’ 용어는 이 괴로움을 더하면 더했지 덜어 주지 못한다.
‘위안부’라는 용어를 쓰는 데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 윤미향 씨는 자신의 책에서도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이 저지른 범죄의 역사적 실상을 드러내기 위해 일본군이 썼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되 인용부호를 붙여서 쓴다.”
한자권이 많은 아시아 지역 일제강점 피해국 여성 시민단체들의 연합인 아시아여성연대회의도 2004년 이런 용어법을 공식 결정한 바 있다.
반면, 성노예는 인신매매 등 다양한 형태를 포괄한다. 전시 성범죄의 경우를 일컬을 때도 성노예는 “군대에 의해 자행되는 성범죄뿐 아니라 전쟁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민간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각종 성범죄도 포함하는 단어이다.”(위키피디아)
이 때문에 성노예라는 용어 또는 전시 여성 인권 침해 문제로의 ‘확장’은 사실상 위안부 문제의 핵심적인 역사적 맥락(일본 국가의 전쟁 범죄)을 다른 문제들과 섞어 버린다. 즉, 당시 일본 국가가 주도하고 체계적으로 벌인 성범죄인지 군인 개인들이나 특정 군부대가 일탈적으로 벌인 성범죄인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실체를 드러내는 데 더 효과적이지도 않은 단어가 피해 당사자에게 더한 모욕과 괴로움만 준다면 그 명칭을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사실 이 문제는 정대협이 1993~1999년 유엔 인권소위원회에서 최초의 위안부 문제 관련 결의문을 통과시키려 개입하는 과정과 맞물렸다. 당시 유엔 위원들이 결의문의 초점을 배상(즉, 국가 범죄)에서 전시 성폭력 문제로 이동시킨 것이다.
또한 정대협은 유엔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다른 나라 여성단체들과의 협력 도모를 중시했다. 2005년 정대협 공동대표이자 정대협이 유엔에 개입할 때 참여했던 정진성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위안부 문제를 전시 하 여성 [인권] 침해 문제로 위치 짓게 된 것은 여성단체들과의 연대가 보다 범위가 넓고 지속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여성단체들과의 연대 문제가 결정적이었던 듯하다. “1992년 제1차 아시아 연대회의에서 일본 측에서 참석한 한 변호사는 한국 측에서 민족적인 문제를 거론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 압도 다수가 식민지나 점령지 여성들이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 문제가 중요하다. 이 문제를 일반적인 성범죄나 남성 일반의 문제로 넓히면 누구를 대상으로 싸우고 책임을 물을 것인지가 불분명해진다.
정대협이 유엔에서 인권 결의문을 통과시키기 위해 애쓰던 1990년대, 미국은 유엔 평화유지군 및 나토군과 함께 “보편적 인권”, “인도적 개입’을 운운하며 소말리아와 보스니아, 발칸반도에서 전쟁을 벌였다. 특히, 구 유고 슬라비아(보스니아와 발칸반도) 지역의 “성노예” 문제를 명분 삼아 잔혹한 군사 개입과 전쟁을 자행했다.
1990년대에 위안부 문제에 관한 유엔 결의문이 여러 번 나오고 2007년에는 미국 하원 의회에서도 결의문이 통과됐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직후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던 한국 외교부 장관 출신 반기문은 “합의 환영” 입장을 밝혔다.
이처럼 성노예 용어 사용 논란에는 정대협이 해 온 ‘국제 실천’의 한계가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