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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미국과 중국 중에 선택해야 하는가?

얼마 전 주미대사 이수혁은 기자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각에서 우리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선택을 강요받는 국가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국가라는 자부심을 갖는다.”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당하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사안별로 다른 선택을 하면서 한국의 “외교적 활동 공간”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최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커지는 와중에 나왔다. 미·중 갈등이 악화됨에 따라 제국주의 진영논리도 강화되고 있다.

미국은 한국에 대중국 포위 블록에 동참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5월 31일 미국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는 중국의 군사 위협에 맞서야 한다며 이에 공동으로 대처할 파트너들의 중요성을 말했다. 구체적으로 인도, 호주, 일본, 브라질, 유럽 등과 함께 한국도 그 파트너로 지목했다.

미국 트럼프 정부는 중국을 배제한 경제 블록인 ‘경제 번영 네트워크(EPN)’의 한국 참여도 거듭 요구하고 있다. 6월 5일 미국 국무부 경제차관 키스 크라크는 한국 외교부에 미국의 EPN 참여를 공식 제의했다.

마찬가지로 중국도 한국이 중국에 불리한 쪽을 선택하지 않도록 공작한다. 최근 홍콩 국가보안법 문제에서 한국의 이해를 구하려는 중국의 시도가 그 한 사례다.

사드와 G7

사실 한국 지배자들이 처한 상황은 이수혁 대사가 말한 대로 “자부심을 느낄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은 양대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 때문에 커다란 딜레마에 깊숙이 빠져 있다.

이 점은 주요 기업인과 정부 관료들의 발언으로도 확인된다. 지난해 9월 SK그룹 회장 최태원은 “[회장이 된 지] 20년 동안에 이런 종류의 지정학적 위기라는 건 처음 맞는 것 같다” 하고 우려했다.

지난달에는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 김현종이 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자들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격화되고 있어 고민스럽다” 하고 토로했다. 노무현 정부 때 한미FTA 협상을 책임지며 미국과의 관계 강화에 앞장선 인물조차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 둘 다 패권을 다투는 제국주의 국가들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최근에 내린 선택들은 중국을 의식하면서도 여전히 한미동맹을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6월 5일 한국 외교부는 키스 크라크의 EPN 제의를 받고 “한·미 양국이 이에 대해 지속 협의해 나가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즉, EPN 참여 문제가 한·미 외교 당국의 논의 테이블 위에 정식으로 오른 것이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경찰력을 대거 투입해 성주에서 미군의 사드 장비 추가 배치를 도왔다. 대통령 문재인은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9월 G7 정상회담 초청도 받아들였다. 트럼프가 중국을 포위하려고 G7을 G11이나 G12로 확대하기 위한 일환으로 초청하는 것임을 문재인이 모를 리 없다.

이처럼 기존의 제국주의 질서 속에서 한국 지배자들이 국익(즉, 한국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선택하는 과정은 불안정을 키우는 데 일조하고 있다.

진보·좌파는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 둘 다 패권을 다투는 자본주의 강대국들이다. 전통적인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것도, 반대로 중국과의 관계를 다지는 것도 모두 불안정을 키우고 한반도를 제국주의 간 경쟁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는 선택일 뿐이다.

사드 추가 배치 문재인 정부는 미국의 대중국 견제에 협조하며 한반도 불안정에 일조하고 있다 ⓒ출처 소성리종합상황실

미·중 갈등은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대결?

주미대사 이수혁의 간담회 후 6월 5일 미국 국무부는 이렇게 밝혔다. “한국은 수십 년 전 권위주의를 버리고 민주주의를 받아들였을 때 어느 편에 설지 이미 선택했다.” 즉, 한국이 “권위주의” 중국과 “자유민주주의” 미국 사이에서 미국을 선택했다(또는 해야 한다)는 얘기다.

미국 트럼프 정부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가치의 충돌로 규정하고 자국이 민주주의의 편이라고 말해 왔다. 예컨대, 트럼프 정부는 EPN을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신뢰할 만한 국가들의 가치 동맹’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프레임은 미국의 중국 견제와 이를 위한 군사력 배치, 동맹 강화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이다.

이데올로기적 외피를 걷어 내고 보면, 미국과 중국 간의 경쟁은 제국주의적 경쟁일 뿐이다. 두 국가 모두 자본주의 강대국으로서 세계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제국주의적 경쟁 문제에서 양측의 국가 형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매우 부차적인 문제다. 미국은 대통령과 의원이 선거로 뽑히지만, 전 세계 곳곳에서 패권을 위한 전쟁을 벌인다. 제3세계에서 자국의 민주주의와 진보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미국의 개입은 재앙인 적이 많았다.

사실 미국 국내에서 경찰들이 흑인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미국 지배자들이 민주주의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미 100여 년 전에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시대에 각국의 사회 체제나 국가 형태가 무엇이냐는 전쟁의 성격과 그 전쟁에 대한 태도를 정하는 데서 매우 부차적인 쟁점임을 알았다.

대불황과 나치의 집권으로 제국주의 전쟁 위기가 높아지던 1934년에 트로츠키는 전쟁이 벌어지면 파시즘 독재에 맞서 영국·프랑스 같은 ‘민주주의’ 국가들을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렇게 반박했다.

“열강 간에 벌어지는 현대전은 민주주의 대 파시즘의 충돌이 아니라 세계 재분할을 둘러싼 두 제국주의 간의 투쟁이다. 더구나 그런 전쟁은 필연적으로 국제적 성격을 띠며, 양 진영에는 파시스트 국가(준파시스트 국가, 보나파르티즘 국가 등)와 ‘민주주의’ 국가가 모두 포함돼 있다.

“이미 수많은 문명국의 부르주아지는 국내적 위협에 직면하자 의회 민주주의 지배 체제를 지체 없이 버리고 권위주의나 독재, 보나파르티즘, 파시즘 체제로 전환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그런 상황에서, 노동자 정당이 보잘것없는 민주주의의 외피를 지킨다며 ‘자기’ 나라의 제국주의를 지지한다면 독립적 정치를 포기하고 노동자들을 국수주의적 혼란에 빠뜨려 인류를 재앙에서 구원할 유일한 요소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제국주의 전쟁은 자본가들의 지배를 위한 국가 형태의 문제보다 우선하는 문제다. ...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이렇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자본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 한 제국주의 진영의 승리인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인가?”(‘전쟁과 제4인터내셔널’, 레온 트로츠키, 1934)

1936년 트로츠키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때 일부 좌파들이 이 전쟁은 “두 독재자의 싸움”이라며 에티오피아의 승리를 지지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 그 좌파들이 전쟁을 “국가의 정치적 형태”에 의해 판단하지, 세계 제국주의 체제라는 맥락 속에서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승리는 열강의 식민 지배를 받는 아프리카 대중을 좌절케 할 것이다. 반대로 비록 전자본주의 왕정이 지배하더라도 에티오피아가 승리한다면 “그것은 억압당하는 민족의 저항 세력을 크게 고무할 것이다.”

100여 년 전 트로츠키를 비롯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분석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은 각각의 국가 형태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이든 권위주의적 일당 독재이든 제국주의 열강으로 모두 국제 노동계급의 적이다. 제국주의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적 눈속임을 비판하며, 노동계급은 두 강대국의 패권 추구를 모두 반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