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니다”란 무슨 뜻인가?:
제국주의는 무엇이고 그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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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는 중고등학교 교과서 서술과 달리,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다. 요즘 국제 뉴스를 대강 훑어봐도 알 수 있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아프가니스탄에 가장 강력한 재래식 폭탄을 투하하라고 명령하고, 대규모 병력을 증파하려 한다.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미국과 중국 등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공공연하게 경쟁하며 지역 내 갈등을 키우고 있다. 8월 21일 미국과 한국이 대규모 연합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에 돌입하자 중국 측은 이를 의식한 듯 실탄 훈련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따라서 오늘날 제국주의에 맞선 운동은 노동자 운동에서 핵심적인 과제로 제기돼야 한다.
혁명적 패배주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제국주의에 저항한 과거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 1백 년 전 제국주의 전쟁인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레닌은 노동계급이 계급투쟁이라는 무기를 이용해 자국 지배계급의 제국주의적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제국주의 전쟁을 지배자들에 맞선 피지배자들의 혁명과 내전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려면 노동자들은 자국 정부의 패배를 바라야 한다. 이 점에서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결국 노동계급은 계급투쟁 자체를 주저하게 될 것이다. 계급투쟁이 자국의 전쟁 수행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 노선은 양대 제국주의 진영 중 어느 한 쪽이 승리하는 게 더 진보라는 차악론이 아니었다. 레닌은 이렇게 주장했다. “오늘날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이런저런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들을 편들지 않아야 하며, 교전국들의 부르주아지들을 ‘모두 악당’으로 규정해야 하고, 모든 나라의 제국주의 부르주아지가 패배하기를 바라야 한다.”
역사는 레닌의 노선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끔찍한 전쟁은, 시간이 갈수록 참전국들 안에서 국민적 단결을 촉진하기보다는 오히려 계급 분단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노동자들은 전선에서 목숨을 잃거나 후방에서 정부의 내핍 강요에 시달려야 했다. 마침내 그 불만이 전쟁 말기에 유럽에서 노동자 혁명을 촉발시켰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았고, 이듬해 독일에서도 해군 수병 반란으로 시작된 노동자 혁명이 일어나 황제(빌헬름2세)가 타도됐다.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모두에서 혁명이 제국주의 전쟁을 끝낸 것이었다.
국제사회주의경향의 모토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의 종전은 동서간 냉전으로 이어졌다. 냉전 하에서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를 경쟁적으로 늘리는 등 광기 어린 경쟁을 벌였다. 많은 사람들은 냉전을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결로 여겼다. 냉전이 가하는 압력 속에서 당시 서구 좌파들은 두 방향으로 이끌렸다. 서방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소련을 (일부 좌파의 경우 심지어 소련 핵무기까지) 옹호하든지, 아니면 그 반대로 소련에 반대해 서방 진영과 자국 지배계급을 (일부는 심지어 자국의 핵무기까지) 지지했다.
그러나 당시 소수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상식에 물음을 던졌다. 1947년 팔레스타인 출신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토니 클리프(본명은 이가엘 글룩슈타인, 1917~2000)는 소련과 동유럽 사회의 본질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변형태인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했다. 즉, 동구권은 서방 자본주의와 형태만 달랐지 본질은 같은 사회였다.
국가자본주의론에 비춰 보면 냉전은 그 성격이 전혀 달라진다. 서로 다른 사회체제 간의 갈등이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갈등이었다.
미국처럼 소련도 제국주의 국가였다. 소련 지배 관료들은 자국의 자본 축적 필요에 따라 동유럽 경제를 지배했고, 국내에서는 소수민족들을 억압했다. 소련 지배자들은 동유럽 지배를 위해 탱크로 동유럽 노동자 운동(특히 1956년 헝가리 혁명)을 잔인하게 짓밟았고,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군사 강점을 위한 침략 전쟁을 벌였다.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에 근거해 건설된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은 냉전에 맞서서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사회주의”라는 모토를 내놓았다. 동·서 양 진영 중 어느 하나를 따르지 않고, 제국주의 체제 전체에 반대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구호였다. 그리고 이 구호는 냉전 하에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지키는 데 일조했다.
박노자 교수(이하 직함과 존칭은 모두 생략)는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니다”가 일종의 “중립”론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이 구호는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 노선을 당시 상황에 맞게 계승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제1차세계대전 초기에 레닌이 내놓은 “혁명적 패배주의” 노선은 “중립”론이 아니었다.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노동자들이 러시아 지배계급에 맞서 싸우고, 독일에서는 독일 노동자들이 독일 지배계급에 맞서 싸우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토니 클리프는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니다”라는 구호에서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순서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구의 혁명적 좌파는 미국 제국주의와 그 동맹인 자국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게 우선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제사회주의경향은 소련 지배자들을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서구에서 미국 제국주의에 일관되게 반대할 수 있었다. 또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견지하며,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고무하려고 노력했다.
옛 소련 태생으로 18세 때까지 소련에서 산 박노자는 그 순서를 거꾸로 해야 했을 것이다. 즉, “모스크바도 워싱턴도 아니다.” 그러나 박노자는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경쟁을 벌이는 세계 체제로 이해하지 않고 서방만을 제국주의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래서 ‘워싱턴만 아니다’라며 옛 소련과 스탈린주의의 변호론자가 돼 버렸다.
박노자를 비롯한 일부 좌파들은 냉전 당시 소련은 미국에 견줘 “열세”였고 본질적으로 방어적이었다며 변호한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 당시 제정 러시아도 독일에 견줘 열세였고,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도 미국에 견줘 열세였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나 군국주의 일본 모두 제국주의 국가였다. 제국주의 국가들 각각의 상대적 힘의 우열을 따지기 전에, 제국주의 체제 하에서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필연적으로 이해관계의 충돌을 겪는다는 점을 봐야 한다.
소련 지배자들은 미국과의 냉전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려고 이집트 나세르 정권 같은 제3세계 민족주의 정권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박노자는 ‘소련의 제3세계 연대’를 매우 긍정적으로 본다. 그러나 이것이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의 반제국주의 운동에 끼친 부정적 효과는 외면한다.
1940~60년대 소련의 영향을 받은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등지의 공산당들은 아랍 민족주의 정권으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자 운동을 건설하지 않고, 오히려 민족주의 정권과 그 운동 속으로 용해되는 길을 택했다.
진영 논리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아시아에서 특히 주요 자본주의 강대국들의 경쟁이 격화하고 있다. 한 쪽은 여전히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이 있고 반대쪽에는 미국이 있어, 일각에서는 신냉전의 도래라고 얘기한다. 게다가 한반도에서는 제국주의간 경쟁의 영향 속에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진보·좌파에게 진영 논리나 차악론에 빠질 수 있는 유혹을 제기한다. 그러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유혹과 압력에 저항하고, 다른 대안을 노동계급에 제시해야 한다. 즉, 워싱턴도 베이징도 아니라, 노동계급의 자력해방과 국제 연대라는 대안 말이다. 이것이 레닌의 혁명적 국제주의 노선을 오늘날 진정 계승하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