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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0주년:
누구의,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지난 오늘, 한반도 평화를 주도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공언과는 달리 한반도의 긴장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바라는 한반도 평화를 얻기 위해 어떠한 대안이 필요할까? 답을 얻기 위해 70년 전 평범한 대중의 삶을 처참히 파괴한 한국전쟁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

미래통합당과 우파들은 한국전쟁을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해 왔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도 한국전쟁 문제에서는 미래통합당과 별 차이가 없다. 그들도 한국전쟁이 북한의 침략에 맞서 미국의 도움으로 자유를 지켜낸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2017년 미국에 가서 ‘피로 맺어진 한미동맹’을 강조한 이유다. 문재인 정부는 평화와 남북 대화를 말하지만 실천에서는 대북압박·군사훈련·무력증강에서 미국과 행동을 같이해 왔다. 최근 북한이 문재인 정부를 강경하게 비난하고 나서고 한반도 긴장이 해소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경련 회장 허창수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강철과 같은 한미동맹으로 한반도의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체제를 지켜낼 수 있었다”며 미국에 감사를 전했다. 사실 우파와 민주당 그리고 한미동맹의 틀에서 부를 쌓은 자본가들 등 한국 지배자들에게 미국은 한국 자본주의를 지키고 급속히 자본축적을 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 ‘혈맹’이다.

하지만 한국 지배자들이 그토록 고마워하는 미국이 한국전쟁 동안 저지른 일만 보더라도 한국전쟁이 자유나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문재인의 말처럼 ‘인류애’를 구현한 것이 아니라 전쟁 범죄자였다.

한국전쟁 동안 미국은 북한에 대한 무자비한 폭격을 자행했다. 이 결과 북한은 ‘달의 표면처럼’ 변했다고 할 만큼 파괴됐고 대량 학살이라 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제2차세계대전 때 태평양 전쟁 전체에 투하된 폭탄의 총량이 50만 3000톤이었는데 한국전쟁에는 63만 5000톤이 투하됐다. 여기에 3만 2000톤 이상의 네이팜탄이 더해져야 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악명 높았던 네이팜탄의 파괴적 효과는 베트남보다 한국전쟁에서 훨씬 더 강했다. 북한에 인구가 조밀한 도시와 도시 산업 시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1950년 11월 8일 70대의 B-29가 신의주에 네이팜탄 550톤을 투하해서 도시를 지도에서 지웠다고 할 만큼 불태워 버렸다. 550톤으로 한 도시를 지도에서 지울 정도였다면 3만 2000톤이 얼마나 파괴적인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또한 미군은 네이팜탄과 함께 지연 신관이 달린 폭탄을 투하했는데 네이팜탄의 희생자들을 수습하러 사람들이 나왔을 때 터지는 폭탄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 도시 60곳이 평균 43퍼센트 파괴된 반면, 북한은 도시와 마을의 40~90퍼센트가 파괴된 것으로 추산된다. 최소한으로 봐도 북한 주요 도시 22곳 중에서 18곳은 절반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51년 7월 미 공군 B-26 전폭기의 원산 시가지 폭격 모습 ⓒ출처 미 해군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폭격은 끊이지 않았다. 1953년 5월에 미군은 식량 생산에 타격을 가하고 기아를 유발하려고 북한 댐 여러 개를 파괴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댐 파괴는 제2차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자행한 대표적 전쟁 범죄 행위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미국은 핵무기 사용을 여러 차례 고려했다. 1951년 4월 초에는 거의 실행할 뻔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1951년 4월 6일 중국과 북한의 표적에 핵폭탄을 사용하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1951년 9월과 10월에 미군은 ‘핵무기 사용 역량을 확증’하려고 북한 상공에서 핵폭탄 투하 연습까지 했다.

미국 제국주의의 이런 무자비한 짓은 이후 베트남과 이라크 등지에서 계속됐다. 미국이 그때나 지금이나 자유와 평화 운운하는 것은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전쟁은 보여 준 것이다.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는 부적절한 질문이다

우파들은 북한이 먼저 공격했다는 사실이 한국전쟁의 성격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문제라고 주장한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도 이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나?’에서 전쟁의 성격을 찾아서는 안 된다.

한국전쟁 연구의 권위자인 브루스 커밍스가 잘 지적했듯이, 미국 내전(남북 전쟁)에서 남부군이 섬터 요새에 먼저 총을 쐈다는 사실이 전쟁의 성격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전쟁에 참여한 세력들이 노예제도와 인종차별 정책에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지가 중요했다.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을 미국이 먼저 시작했다는 점이 베트남 전쟁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미국이 아니라 베트남이 먼저 전쟁을 시작했더라도, 베트남 전쟁이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베트남의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이렇듯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에 초점을 맞추면 전쟁의 성격 규정과 그에 대한 태도에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한국전쟁은 제국주의적 경쟁의 결과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 두 제국주의 강대국 사이의 경쟁이란 맥락 속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 영국, 소련 등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은 국제연합헌장을 채택하고 국제연합(UN)을 결성했다. 하지만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약속한 국제연합헌장이 채택된 그날로부터 정확히 5년 후 바로 그 날짜에 한국전쟁이 시작됐다.

양차 대전의 원인이었던 제국주의 간 경쟁은 이제 미국과 소련을 두 축으로 하는 경쟁 구도 양상을 띠었다.

제2차세계대전 때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만 2000만 명 이상을 잃었지만, 유혈 낭자한 전쟁에서 살아남아 종전 무렵에는 중동부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에서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은 소련의 세력 확장을 자신이 관리하는 자본주의 국제 질서에 대한 주된 위협으로 여겼다.

미국과 소련의 경쟁은 점점 가열돼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냉전이 공식화된다.

제국주의 경쟁이 냉전이라는 형태로 양극화하면서 어떤 점에서 이 대결은 전보다 더 격렬해졌다. 왜냐하면 양 진영이 서로 상대방을 단지 라이벌로만 여기지 않고 이데올로기적 적수로 여겼기 때문이다.

미국, 소련 어느 쪽도 자유와 해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전후 세력권 분할을 위해 얄타회담에 모인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미국과 소련은 점령지에 자신의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우호적인 정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남한과 북한의 정부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렇게 탄생한 남과 북의 정부는 달려나가서 서로 물어뜯고 싶어 안달이 난 투견과도 같았다.

1948년 북한 정부 수립 이후에 김일성은 ‘국토완정’을 내세우며 무력 통일 의지를 불태웠고, 이승만도 북진통일을 부르짖으며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여러 차례 38선에서 선제공격을 했다. 1950년 6월 25일이 (전면전의 시작이 아니라) 유격전과 국지전의 끝임을 강조하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양측의 충돌은 빈번했고 사상자도 많았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남과 북 사이의 충돌의 근본 동력은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적 경쟁에 있었던 것이다.

이미 한국전쟁 이전 미국과 소련의 갈등은 특히 유럽에서 커지고 있었다. 독일에서 특히 1948~1949년 베를린 봉쇄로 불린 충돌이 불거지자, 미국은 한때 핵무기 동원도 심각하게 고려했다.

미국은 한국전쟁 발발 전부터 대소련 봉쇄 전략을 추진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진행한 먀셜플랜과 일본의 ‘역코스’가 그 사례였다.

마셜플랜은 유럽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한 경제 봉쇄 정책이었고, 일본에서 역코스는 일본을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과 1949년 중국혁명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 거점으로 삼기 위한 조처였다. 이를 위해 일본의 미 군정청이 독과점을 해체하려던 초기 정책을 뒤집어서 대기업 집단들의 발전을 촉진하고 기존 국가 관료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1949년 8월 소련이 핵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그러자 미국은 자신의 공격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소폭탄을 개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50년 봄에는 방위군사비를 3배로 올리는 내용이 포함된 정책문서인 NSC-68을 내놓아 본격적인 군비경쟁의 시작을 알렸다.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과 이들을 후원한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했다. 중국혁명의 승리로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의 힘이 커져서 전쟁으로 나갔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것은 사태를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이다.

소련은 자국의 제국주의적 이익 실현을 최우선시 했는데 중국에 대한 정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탈린은 중국이 분열해 약한 중국으로 남아 있기를 원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마오쩌뚱이 장제스의 국민당을 물리치고 중국의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스탈린의 구상과 달리 중국공산당은 중국대륙에서 국민당 군대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는 데 성공했다. 소련은 중국이 자신의 턱밑에서 덩치 큰 적대 국가가 되거나 마오쩌뚱이 ‘아시아의 티토’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후 소련의 동아시아 정책에는 미국과의 경쟁과 더불어 중국에 대한 경계도 반영됐다.

스탈린은 중국을 일방적인 속국처럼 대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영향력이 유지되기를 원했는데, 미국에 대한 강경정책은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됐다. 이런 맥락에서 스탈린은 일본공산당에게 미군정에 대한 강경 투쟁을 촉구하고 김일성의 전쟁 개시 요청을 승인했다.

마오쩌뚱은 중국 내 소련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하면서도 소련에게 될수록 많은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얻어내고 싶어했다. 중국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복구하고 대만을 정복하기 위해 소련의 공군 지원을 상당히 중시했다. 이를 통해 미국과는 적대 관계(직접 충돌을 포함해)가 되겠지만 당시 중국의 처지에서는 냉전이 본격화되는 와중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피해 보였다.

1949년 3월 김일성(가운데)은 모스크바를 방문해 전쟁 개시를 요청했다. 김일성이든 이승만이든 상대방을 향한 적의에 가득차 있었다
맥아더와 이승만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배자들은 중국혁명의 승리에 자신감을 얻었다. 마오쩌둥은 중국혁명에 참전한 조선인 부대를 대거 북한에 보내 줬는데, 이 부대들이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 주력 부대를 형성했다. 이것이 중국 내전에서 북한의 도움에 대한 보답(의리)이라는 시각이 있지만 사실 중국 입장에서도 자국의 동북 지역을 방위하는 전초기지로서 북한이 구실해 주길 원했다. 중국은 아직 죽지 않은 장제스와 미국이 한반도를 통해 중국 대륙으로 침입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김일성이 마오쩌뚱과 스탈린 사이의 긴장을 이용해 스탈린에게 한국전쟁의 승인을 얻어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제국주의 경쟁이라는 더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시각이다. 김일성과 이승만은 세계적 차원의 제국주의 경쟁이라는 큰 장기판에서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한국전쟁을 통해 냉전은 실제 열전으로 이어졌다.

한국전쟁의 기원

한국전쟁과 관련한 논의들 중에 단연 중심에 있는 것은 전쟁의 기원과 성격에 관한 것이다.

전통주의는 미국과 남한 지배자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한국전쟁이 팽창주의와 공격적 본성을 가진 소련의 스탈린이 김일성을 하수인으로 삼아 벌인 전쟁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국과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전쟁을 했고 참혹한 전쟁의 책임은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것이 수정주의이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베트남 전쟁 반대 등 급진화 분위기 속에서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비판적인 논자들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브루스 커밍스(이하 커밍스)다.

1980년대에 나온 《한국전쟁의 기원》과 이후 여러 저서들을 통해 밝힌 그의 주장은 한국전쟁과 관련한 논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

그는 한국전쟁이 기본적으로 내전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전쟁의 기원은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형성된 계급 간 갈등과 함께 항일 세력과 친일 세력 사이의 갈등이 해방 이후로 이어졌다. 그리고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국이 한반도 남쪽을 점령해서 친일·지주 세력을 지지하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탄압하면서 많은 충돌과 학살이 벌어졌다. 그래서 일제 시대에 형성된 모순이 증폭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해방 이후 한국에서는 진정한 독립과 해방을 원하는 아래로부터의 열망이 분출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공장 자주관리 운동이나 각 지역 인민위원회들의 등장은 이런 분위기의 표현이었다.

미 점령군은 대중운동과 그 조직을 파괴하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에 대한 폭력적 진압은 그 대표적 사례다. 1948년 2월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 이미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학살됐다. 이 기간에 제주 4·3항쟁에 대한 잔인한 진압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등장한 남쪽 정부는 진정한 해방과 독립을 원하는 대중의 열망에 적대적이었을 뿐 아니라 소련이 점령해 북쪽에 수립한 정부에도 적대적이었다.

반면 커밍스는 북쪽에서는 남쪽과 달리 항일 세력이 권력을 잡았고 토지 개혁도 이루었다고 봤다.

그래서 커밍스는 남쪽에서의 지주와 농민 사이의 그리고 친일과 항일 세력 사이의 대립과 투쟁(커밍스의 표현에 따르면 작은 전쟁)이 남북 사이의 전쟁(큰 전쟁)으로 확대됐다고 봤고 그래서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했다.

커밍스의 주장은 명백히 장점이 있다. 그의 주장은 한국전쟁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낸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는 미국과 남한 지배자들의 주장에 대한 분명한 반박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분명한 한계도 있다.

북한 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커밍스가 가정하듯이 북한이 남한보다 더 나은 사회였던 것은 아니다. 남쪽을 미군이 점령한 것처럼 북쪽도 소련군이 점령했고, 소련도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억압하고 통제하면서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체제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커밍스는 소련이 북한을 점령했을 때 ‘분명한 계획이나 미리 결정한 행동 방침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소련이 어떤 전략적 의도 없이 북한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도 미군과 마찬가지로 아래로부터 분출하는 운동을 억눌렀다. 소련군이 발표한 첫 포고문은 일본 경찰이 치안을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인민위원회를 형식적으로 인정하긴 했지만, 자신들이 통제하는 것을 전제로 한 조처였다. 소련은 북한에서 많은 쌀과 산업시설을 약탈했고 신의주, 함흥에서 대중 저항을 폭력으로 진압했다.

커밍스는 김일성이 소련의 계획에 따라 북한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명백히 김일성은 스탈린과의 면담 후에 북한에 들어왔고 소련군의 적극적인 협력을 받으면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미 점령군 사령관 하지가 옆에 앉아 있는 가운데 남한 대중에게 소개된 것처럼 김일성은 소련 관리들이 뒤에 서 있는 가운데 북한 대중에게 항일 영웅으로 소개됐다.

이렇게 소련군의 후원 속에 수립된 북한 정부는 남한과 다를 바 없이 대중을 착취·억압했다. 즉 노동자들의 생산 통제가 아니라 노동자에 대한 지배 관료들의 통제만이 있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남한보다 진보적인 북한이 남한 민중 해방을 위해 벌인 전쟁이 아니다. 실제 한국전쟁 중 북한의 남한 점령 지역에서 만들어진 인민위원회는 북한의 규율에 확실히 순응하게끔 북한 관리들이 빈틈없이 통제했다.

커밍스 주장의 또 다른 문제는 제국주의 경쟁이라는 맥락을 간과함으로써 한국전쟁의 진정한 원인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양대 제국주의와 그들이 수립한 남북 정권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대안을 추구하는 데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전쟁의 전개과정 — 제국주의 갈등이 한반도에서 분출하다

전쟁의 과정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 초기(6월 말에서 7월에 걸쳐)에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 8월에는 낙동강 부근에서 참호전의 양상을 보이다가 9월 15일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돼 압록강 부근까지 미군이 밀고 올라갔다. 그러나 10월 25일 중국군이 개입해 다시 전선이 내려와 38선 부근에서 전쟁이 고착 상태에 빠져 2년을 더 끌다가 정전에 이르렀다.

전쟁의 과정은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쟁 개시부터 10월 25일 중국군이 개입해 첫 전투를 벌이기 이전 시기(전쟁 초반 4개월)와 이후 시기다.

중국군의 개입 이전에는 주로 미군이 주도하는 유엔군·한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중국군이 개입한 이후에는 미군 주도 유엔군·한국군과 소련 공군 지원을 받는 중국·북한 연합군(중국군이 주도했다) 사이의 전투였다.

전쟁 초기 미국은 김일성의 예상과는 달리 신속하게 개입했다. 미국 공군은 6월 27일 폭격을 시작했고, 1950년 6월 30일 오전 트루먼은 미국 육·해·공군 부대의 전면적인 한국전쟁 개입을 제안한 맥아더의 요청을 승인했다.

북한군은 전쟁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개입으로 이내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됐다. 특히 미군의 제공권 장악은 북한군의 전진을 상당히 더디게 만들었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북한군 점령 하의 남한지역 도시와 농촌에서 일상적으로 폭격을 벌였다. 1950년 9월 서울 수복 후 한국 공보처 통계국은 6월 25일부터 9월 28일까지 서울지역 사상자를 조사했는데 공중폭격으로 인한 것이 4250명으로 가장 많았다.

미군은 흰 옷을 입은 민간인 무리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비행기에서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미군이 민간인들을 학살한 ‘노근리 사건’은 이런 과정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노근리 사건’은 결코 ‘특수한’ 사례가 아니었다. 미군은 민간인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다.

미군은 압도적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쟁 4개월 만에 북한군을 압록강 근처까지 밀어붙였다. 미군은 중국군과의 충돌의 가능성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38선을 넘어 중국 국경 근처로 진격했다. 이 시점에서 중국군과 소련군이 전쟁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미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면 산업 중심지 가운데 하나이고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한 중국 동북 지역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중국군은 10월 25일 미군과 첫 전투를 벌였고 11월 1일에는 처음으로 소련 공군(중국군으로 위장했다)이 압록강 상공 교전에 참가했다. 특히, 중국군의 참전으로 미군은 지상전에서 굴욕적인 참패를 겪고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인천상륙작전 중인 미군. 이후 미국은 핵무기 사용까지 고려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몰래 도주하며 한강철교를 폭파해 그 자리에서 피난민 수백 명이 죽었다

한국전쟁은 전쟁이 시작된 휴전선 부근에서 교착상태에 빠지고 2년이 지난 후에야 끝날 수 있었다. 양쪽 모두 자신들의 힘으로 적을 완전히 제압해 통일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전쟁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서로가 조금이라도 우월한 입장에서 전쟁을 끝내길 바랐기 때문에 전쟁은 지속됐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희생됐다.

한국전쟁은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면서 시작됐지만 그 배경에는 제국주의 사이의 투쟁이 있었다. 한쪽 제국주의(미국)가 전면 개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쪽 제국주의(소련과 중국)가 개입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지역적으로 제한적이긴 했지만 실제 제국주의 사이의 충돌로 발전한 사실상 제국주의 전쟁의 한 형태로 봐야 한다.

전쟁의 결과와 진정한 교훈

전쟁의 결과 인구의 10분의 1이 희생됐다. 1000만 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00만 명이 난민이 됐다. 한 역사가가 말한 것처럼 한국전쟁은 ‘죽임과 절망의 역사’였다.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한국전쟁이 ‘고맙고도 기다리던 전쟁’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군비를 대폭 증가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전쟁을 미국이 일부러 유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잘못일 것이다. 한국전쟁이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 경쟁의 산물이었고 역으로 경쟁을 더욱 강화시키는 구실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국과 소련의 군비경쟁은 1991년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 계속됐고 그 사이 미국과 소련 지배자들은 지구를 몇 번이나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축적했다.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부가 조직적으로 벌인 보도연맹원 학살로 적어도 10만 명이 죽었다

미국과 소련 양쪽 모두에서 획일적인 이념이 강요됐다. 서방 진영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내세웠고 동방 진영은 ‘사회주의’를 내세워 억압적인 착취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다. 양쪽 모두 자신의 체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상대방의 첩자로 몰아 탄압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해 미국과 충돌하면서 대만해협이 냉전의 전선으로 굳어지게 되고 중국은 우선적 과업인 ‘대만 해방’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은 한국전쟁 이전 신장 지역을 점령했으며 한국전쟁 개입과 함께 티베트로 군대를 진군시켰다. 또한 한국전쟁 동안 중국은 외부의 위협을 내세워 내부의 억압을 강화하고 급속한 자본축적을 위한 지배 체제를 다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소련과의 냉전이 본격화되고 중국혁명이 성공하면서 자신이 후원하던 국민당 정부가 중국 본토에서 쫓겨나자,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소련 봉쇄정책을 강화했다. 한국전쟁에 신속하게 개입한 것도 ‘반공의 전초기지’인 한국이 소련 진영의 손에 넘어갈 경우 아시아에서 서방 진영의 주요한 산업 경제인 일본까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 제국주의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일본의 구실이 강조되면서 일본은 구 지배질서를 재건했을 뿐 아니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경제적으로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냉전 시기 일본은 서방 진영 안에서 경제발전에 주력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남한에서 지배자들의 묵인 속에 일본 제국주의의 과거사 문제(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 등)의 진정한 해결은 무시됐다.

남북 양쪽 지배자들은 상대방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끔찍하게 억압적인 착취체제를 만들었다.

상대방보다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급속한 자본축적이 이루어지면서 대중의 삶과 정치적 권리는 남북 모두에서 바닥을 향해 경주해야 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남한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반대파를 제거하고 국가 주도의 급속한 자본축적을 해 나갔다. 북한의 이런 성장은 1970년대 자본의 국제화 경향이 우세해지면서 국가자본주의 방식의 축적이 위기에 처하기 시작할 때까지 계속됐다.

남한의 이승만은 지배 기반의 취약함 때문에 한국전쟁 이전부터 이미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었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북한의 위협을 내세워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1950년대 내내 경찰·검찰과 같은 탄압 기구와 미국의 지원에 의존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지배계급이 원했던 경제발전도 이룰 수 없었고 북한과의 경쟁에서도 밀렸다. 대중이 요구한 삶의 질 개선과 정치적 권리도 가져다 줄 수 없었다. 결국 이승만은 대중의 광범한 불만을 샀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을 통해 급속히 몸집을 불린 군부와 미국의 지지를 잃게 됐다.(1960년 4월혁명)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해방 직후 강력했던 좌파와 노동자 운동은 완전히 붕괴됐다. 좌파의 커다란 공백 속에 진행된 4월혁명은 이승만 제거에서 더 전진하지 못하고 군부 쿠데타로 파괴됐다. 이후 반공과 북한의 위협을 내세운 군부 지배는 30년이나 지속됐다. 이 기간 국가가 주도해 세계 자본주의에 깊숙이 편입되는 방식의 급속한 자본축적이 이루어졌고 대규모 노동계급이 창출됐다.

해방 직후 존재했던 좌파는 미국(남한)과 소련(북한)의 대립이 낳은 강력한 진영논리 하에서 어느 한쪽 또는 양쪽 모두의 지지를 얻어 독립과 한반도의 평화를 얻어내려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자체가 보여 줬듯이 그것은 대안이 될 수 없었다. 급진적·혁명적 좌파가 남한에서 부활한 것은 1980년 광주항쟁을 거친 이후였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계속된 양 진영의 대립이 낳은 진영논리는 이때 부활한 좌파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의 원인인 제국주의는 오늘날 그 양상은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압박을 지속하는 이유는 중국과의 제국주의적 경쟁이라는 큰 틀에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간 경쟁 때문에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하지 못한다.

예나 지금이나 제국주의(현재는 미국뿐 아니라 중국도 포함한다)에 반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정치는 자본주의 위기의 책임을 대중에게 떠넘기려는 문재인 정부와 기업주들에 맞선 투쟁과 결합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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