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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한국전쟁에 대한 통찰이 왜 여전히 중요한가

한국전쟁에 대한 권위 있는 연구자이고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비판적인 브루스 커밍스(이하 커밍스)의 새 책이 나왔다. 트럼프가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겠다며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는 지금,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이하 《한국전쟁》)은 상당히 시의적절하다.

커밍스는 이 책에서 트럼프가 내뱉은 ‘화염과 분노’가 한국전쟁 동안 북한에 실제로 쏟아부어졌던 역사를 생생히 폭로하면서 트럼프의 전쟁 위협을 비판한다.

한국전쟁 동안 미국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북한은 ‘달 표면처럼’ 변했고, 그야말로 ‘대량 학살’이라 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지음|조행복 옮김|현실문화|2017년|416쪽|25000원

제2차세계대전에서 태평양전쟁 구역 전체에 투하된 폭탄 총량이 50만 3000톤이었는데 한국에는 63만 5000톤이 투하됐다. 여기에 3만 2000톤 이상의 네이팜탄을 더해야 한다. 네이팜탄의 파괴적 효과는 베트남보다 북한에서 훨씬 더 강했는데, 북한에 인구가 조밀한 도시와 도시 산업 시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 도시 60곳이 평균 43퍼센트 수준으로 파괴된 반면, 북한 도시와 마을이 파괴된 정도는 40~90퍼센트까지로 추산됐다. 북한의 주요 도시 22곳 중에서 18곳은 적어도 50퍼센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미국은 무게가 5.4톤인 가장 큰 재래식 폭탄 ‘타존’을 28발 투하했는데 이 폭탄으로 쓸어버릴 만한 표적이 남아 있지 않다고 판단하고서야 투하를 멈췄다. 1953년 5월에는 식량 생산에 타격을 가하고 기아를 유발하려고 댐 여러 개를 파괴하기도 했다.

미국은 핵무기 사용도 여러 번 고려했다. 1951년 4월 초에는 거의 실행할 뻔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핵무기 사용을 고집하던 맥아더를 해임해서 핵무기 사용이 중단됐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트루먼은 핵무기 사용을 결정하더라도 ‘현장에 더 신뢰할 만한 지휘관이 필요했기 때문’에 맥아더를 해임했다. 실제 트루먼은 4월 6일 중국과 북한의 표적에 핵폭탄을 사용하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1951년 9월과 10월에는 ‘핵무기 사용 역량을 확증’하려고 북한 상공에서 핵폭탄 투하 연습까지 했다.

잊힌 전쟁

커밍스는 미국에서 한국전쟁은 베트남 전쟁과 달리 ‘잘 알려지지 않은 전쟁’, ‘잊힌 전쟁’이 됐다고 얘기한다.

1968년 네이팜을 생산하는 다우케미컬은 신입 사원을 선발하러 대학에 갔지만 대부분 들어갈 수 없었다. 베트남 전쟁 반대 분위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이팜이 한국전쟁 동안에도 사용된 사실은 미국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커밍스는 체계적 억압과 검열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미국에서 로젠버그 부부가 소련 간첩 혐의로 기소됐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처형됐다. 1950년 9월 23일 국내보안법(매캐런법)이 통과되면서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가둘 강제수용소가 설치됐다. 그해 12월에 트루먼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해 임금을 통제하고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억눌렀다.

1951년 1월 종군기자들은 완전히 군대의 사법권 아래 들어갔다. 동맹국과 동맹국 군대를 겨냥한 비판이 금지됐고 군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논평은 무엇이든 ‘검열관의 검은 붓질’에 지워졌다.

전쟁의 기원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견해는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시작했는데 미국이 성공적으로 막아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전쟁을 ‘누가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인데 커밍스는 이런 견해에 분명히 반대한다.

커밍스가 분석하는 한국전쟁의 기원은 일본의 한국 식민 통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커밍스는 이 시기에 형성된 계급 간 갈등은 항일 세력과 친일 세력 사이의 갈등과 결합돼 이후 큰 전쟁으로 이어지는 씨앗이 됐다고 본다.

커밍스에 따르면,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국이 남쪽을 점령해서 친일·지주 세력을 지지하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탄압하면서 많은 충돌과 학살이 벌어졌고, 일제 시대에 형성된 모순이 증폭됐다. 반면 북한에서는 일본에 저항했던 세력이 중심이 돼 ‘항일 국가’를 형성해 남쪽과는 대립되는 체제를 이뤘다. 따라서 1950년 남쪽과 북쪽 사이의 전쟁은 남한 내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의 연장인 ‘내전’의 성격을 갖는다.

위와 같은 커밍스의 주장은 우파의 전통적 논리를 반박하는 데 유용하다.

우파가 한국전쟁을 ‘6·25전쟁’으로 부르는 것은 분명 이데올로기적 이유가 있다. 자신들은 피해자이고 먼저 공격한 북한을 응징하는 것은 정당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 소련 비밀 외교문서가 일부 공개되면서 김일성이 스탈린의 승인 하에 전쟁을 준비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파는 이것을 자신들의 근거로 삼았지만, 커밍스에게는 반박이 되지 못했다. 그에게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는지는 진정한 쟁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군사 전략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다’ 하고 말했다. 레닌은 이 문장을 인용해 제1차세계대전에서 자국 방위를 위해 전쟁에 찬성한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를 비판한 바 있다. 이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이전에 형성된 모든 정치적 관계들이 중지되고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 등장한다고 전제했다. 단순히 공격하는 자와 방어하는 자들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레닌은 전쟁 이전에 형성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 제국주의가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상황, 노동계급 운동에 대한 공격 등 정치적 맥락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커밍스는 이런 정치의 한 쪽 측면을 봤다. 남쪽 정부는 진정한 독립과 해방을 원했던 대중의 열망을 짓밟고 미국의 후원 하에 수립됐다. 이 정부는 한반도의 다른 쪽 경쟁자를 물리치고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기를 원했고, 커밍스의 말처럼 1950년 6월 25일 이전 38선에서 벌어진 충돌의 상당 부분은 남쪽이 시작한 것이었다.

전쟁의 성격

하지만 북한이 남한보다 더 나은 체제는 아니었다. 커밍스는 소련이 북한을 점령했을 때 ‘분명한 계획이나 미리 결정한 행동 방침이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아래로부터 분출하는 운동을 억누르는 데에서 미군과 같았다. 소련군의 첫 포고문은 일본 경찰이 치안을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인민위원회를 인정하긴 했지만, 자신들이 통제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소련은 많은 쌀과 산업시설을 약탈했고 신의주, 함흥에서 대중 저항을 폭력으로 진압했다.

커밍스는 김일성이 ‘거의 우연히 권력 구조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고 말하지만 김일성은 스탈린과의 면담 후 북한으로 들어왔다. 소련군은 김일성에게 적극 협력하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받았다.

소련군의 후원 속에 수립된 북한은 대중에 대한 착취와 억압에 있어서 남한과 다를 바가 없었다. 1946년 7월에 이미 억압기구인 보안대는 1만 5000명으로 늘어났고 노동자 생산 통제가 아니라 지배 관료의 노동자 통제만이 있었다.

따라서 커밍스가 한국전쟁을 스페인 내전이나 미국 독립전쟁과 유사한 성격의 전쟁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스페인 내전은 파시스트에 맞선 노동자 혁명과 결합됐고, 미국 독립전쟁은 대중 반란과 함께 벌어져 봉건적 굴레를 깨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박명림(《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2》(나남)의 저자)의 말처럼 ‘좌파 역량의 최저점에서 시작’됐고 대중 반란이라 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의 전쟁’이라 할 수는 없다.

커밍스가 주목하지는 않지만, 한국전쟁을 미국과 소련 두 제국주의 사이의 경쟁이란 맥락 속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유럽·중동·아시아에서 누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미국과 소련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1948~1949년 사이에 있었던 베를린 분쟁에서 미국은 핵무기를 동원하는 전면전을 고민하기도 했다. 이렇게 형성되기 시작한 냉전이 실제 열전으로 표출된 것이 한국전쟁이다. 한반도는 제국주의 간 힘의 대결장이 됐다. 그 과정에서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죽어갔다.

위의 몇 가지 지적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의 전쟁 위협이 고조되는 때 커밍스의 책은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