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0주년 ②:
열강의 힘겨루기가 낳은 끔찍한 파괴와 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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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보수 언론과 정부의 왜곡, 거짓말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전쟁의 진정한 성격을 다루는 한규한의 연재 기사의 후속편과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인 이언 버철의 한국전쟁에 대한 논평을 함께 싣는다.
특히 이언 버철의 글은 냉전의 시작이라는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한국전쟁의 의미를 평가하고 있다.
또한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이 소련·북한을 국가자본주의로 보면서 사실상 서방 제국주의를 지지했다는 일부 종파주의자들의 근거없는 음해를 반박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그래서 일부 중복되는 내용에도 특별히 번역해 싣는다.
미국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신속하게 개입했다. 미국이 보기에 “북한의 공격은 특별히 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신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고 전 세계적인 반공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트루먼이 말했듯이 한국전쟁은 “서방의 힘과 결의의 상징”이 됐다.
미국은 동맹국을 끌어 들여 이 전쟁을 많은 나라들이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지만, 실제 남한을 제외한 ‘연합군’ 병력 대부분은 미군이었다. 비록 남한은 많은 병력을 제공했지만, 그들을 지휘하고 무기를 대 준 것은 미군이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힘과 결의”를 보이는 과정은 한편의 거대한 파괴와 살육의 드라마였다.
폭격은 남과 북,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았다. 미국은 군사시설에 한정해 정밀폭격을 수행한다고 했지만 ― 지난 번 이라크 침공 때도 그랬다 ― 이는 자신들도 믿지 않을 거짓말이었다.
김태우의 논문을 보면, 당시 미 극동공군 작전분석실 실험 결과, B29 중폭격기가 “가로 10미터 세로 2백 미터 크기의 대형건물을 폭탄 하나로 적중시킬 수 있는 확률은 0퍼센트에 가까우며, 최소한 1백∼2백 발의 폭탄으로 대량폭격을 가해야만 50∼80퍼센트의 적중률을 기록”할 수 있었다.
사실, 한국전쟁 기간에 벌어진 도시, 산업시설 들의 파괴는 대부분 공중폭격 때문이었는데, 북한군과 그 동맹군들의 공군이 한반도 상공을 지배한 적이 거의 없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쨌든 미국의 공중 폭격은 북한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고, 대규모 지상군을 파병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 주었다. 그리고 미국은 이를 발판으로 반격에 나섰고, 서울을 탈환했다.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은 자신의 기만적 도주에 대해 사죄하기는커녕, 서울에 남아 있던 시민들을 부역자 취급했다. 도망갔던 우익 지배자들은 ‘충실한 대한민국 시민이라면 거기 남아 있을 리가 없다’며 남은 자들을 욕보였다. 도처에서 부역자 색출이 벌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처형됐다.
학살
우익들은 북한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만을 부각하는데, 사실, 양측이 저지른 학살자 수는 불비례했다. 〈조선일보〉가 펴낸 책자를 보면 북한 측이 학살·납북한 민간인 수는 약 15만 명이다.
그러나 남한 측이 저지른 수치는 이를 훨씬 웃돈다. 박태균 교수는 보도연맹원 20만 명, 형무소 수감자 5만 명,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10만 명이 학살됐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이 추산은 결코 과장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1960년 4·19 혁명으로 반공체제가 잠시 이완되자 그동안 숨죽여 왔던 희생자 가족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는데, 그때 ‘전국 피학살자 유족회’에 접수된 신고 건수가 1백만 명에 이르기 때문이다.
미국의 반격으로 북한군은 38선 이북으로 퇴각했다. 이제 전쟁은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내친김에 북한 지역까지 밀고 올라가길 바랐다. 그는 이번 사태를 상전의 힘을 빌어 북진통일 할 기회로 여겼다.
미국은 중국이 개입할까 봐 내심 찜찜했지만, 승리에 눈이 멀어 북진을 감행했다. 미국의 북진이 성공한다면 소련을 망신 주는 것과 동시에, 동북아시아 패권 경쟁에서 미국은 훨씬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할 수 있을 터였다.
자신이 승인하고 지원한 전쟁이었기에 스탈린은 북한의 실패에 위신이 크게 깎였지만, 이를 만회하기 위해 소련군을 직접 출동시키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는 중국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북한을 포기하려 했다. 북한 정권은 궁지에 몰렸다.
미군과 남한군은 평양을 함락시키고 한때 압록강까지 도달했다. 미국과 남한의 북한 점령은 야만적인 학살과 도륙으로 점철돼 있다. 수많은 기록들이 미군, 남한 군경과 우익 폭력단 들의 만행을 증언한다.
남한 지역에서 벌인 이들의 행태를 봤을 때, ‘빨갱이 소굴’ 북한에서 벌인 행태가 어땠을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북한 지역 도처에서 약탈, 강간, 집단 학살 등이 대대적으로 자행됐다.
게다가 서북청년단과 같은 ‘민간’ 반공폭력단체에는 총기류가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그야말로 온갖 야만적인 방법으로 북한 주민들을 학살했다.
중국군이 개입하자 전세는 다시 역전됐다. 이미 중국은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한다면 개입하겠다고 여러 차례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국은 북한의 몰락을 안보위협으로 여겼다. 저우언라이의 표현처럼 “한반도는 중국의 머리를 때리는 망치”가 될 수 있었다.
북한 몰락을 방치하는 것은 단지 동북지역이 불안정해지는 것만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 티벳 등 국경 도처에서 불안정이 커질 수 있었다. 게다가 국민당 잔당을 고무할 수도 있었다.
중국 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이 점을 이렇게 요약했다. “만약 미 제국주의에게 한반도 점령을 허용하게 되면 우리에게는 직접적인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이어서 미국은 병력을 베트남, 버마로 돌려 갖가지 음모를 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수동적인 위치로 전락하여 국방과 변경 방위는 모두 극히 불리한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중국군 참전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한반도는 이제 본격적으로 열강의 싸움터가 돼 버렸다. 주력군은 중국군이었고, 북한군 통제권도 중국측으로 넘어갔다. 전쟁에 관한 주요 결정들은 이제 스탈린과 모택동 사이에서 이뤄졌고, 그 과정에서 김일성은 거의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맥아더는 중국군이 참전하기를 “밤마다 무릎 꿇고 [빈다]”고 큰소리쳤지만, 막상 중국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패퇴를 거듭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폭격은 더욱 광폭해졌다. 맥아더는 민간인 거주지역까지 군사시설물로 간주하라고 명령했고, 소이탄과 네이팜탄이 도시와 농촌을 가릴 것 없이 비오듯 쏟아졌다. 북한 전 지역이 불바다가 됐다. 〈뉴욕타임스〉 종군기자 바렛은 북한의 한 농촌을 방문해 그 참상을 이렇게 보도했다.
중국군이 마을을 점령하기 3∼4일 전에 마을에 대한 네이팜 공격이 진행됐다. 마을 어느 곳에서도 시체가 매장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를 행할 사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연히 늙은 여인 한 명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곳에서 생존한 유일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 4명의 시신으로 가득 찬 검게 그을린 마당 안에서 몇 벌의 옷을 부여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 [시체들]은 네이팜 공격을 당했을 때 그들이 취했던 자세를 그대로 정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한 남성은 막 자전거를 타려는 참이었고, 50명의 소년과 소녀들은 고아원에서 뛰놀고 있었으며, 한 가정주부는 이상하게 아무 상처도 없었다. … 약 2백 구의 시체들이 그 작은 마을에 놓여 있었다.
심지어 미국은 원자폭탄 사용까지 진지하게 고려했다. 특히 맥아더의 광기는 극에 달했다. 그는 원자폭탄을 사용해서라도 중국과 일전을 원했다. 그는 “만주의 좁은 통로를 따라 … 30∼50기의 원자폭탄을 줄줄이 떨어뜨리고”, “50만에 달하는 국민당 군대를 압록강에 투입하고”, “동해에서 서해에 이르기까지 60년 내지 1백20년 간의 활동성을 지닌 … 방사성 코발트를 뿌”리길 원했다.
미군이 북한 지역에서 철수할 때 남쪽으로 피난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는데, 우익들은 이를 두고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피난민들의 성격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상당수 피난민들은 군당국의 소개 명령에 따라 ‘피난’했고,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위협도 피난의 중요한 이유였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선은 다시 38선 근처에서 교착됐다. 사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결과는 어느 쪽도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보여 줬다.
그러나 전쟁은 그 뒤로 2년이 넘게 계속됐다. 순전히 열강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포로교환 문제는 그 상징이었다. 양쪽 모두 포로들을 이데올로기 선전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
예를 들어 미군은 많은 공산측 포로가 고국으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는다고 선전했다. 이들은 반공포로를 이용해 갈등과 분열을 조장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포로들이 사망했다.
북한측의 ‘무조건 강제송환’ 주장이 제네바 협정 원칙에 부합하는 게 사실이지만, 남한 지역에서 징병한 남한 출신 포로까지 모두 북한으로 송환하라는 주장은 남한 출신자들의 처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맥아더의 광기
남한 군대는 남한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가난한 집 자제들은 최전방에서 총알받이로 죽어갔지만, 부잣집 자식들은 병역을 면제받거나 안전한 후방에서 근무했다. 남한 정부는 국민방위군(일종의 예비군) 50만 명을 소집해 놓고는 그중 5만~10만 명을 굶겨 죽였다. 고위 장교들과 그들과 결탁한 모리배들이 자금을 착복했기 때문이었다.
전쟁 때문에 모든 사람이 고통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부유층은 전쟁을 통해 더욱 배를 불렸다.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재벌들의 일부는 한국전쟁을 기회로 부를 급속히 축적했다.
이 전쟁은 우익이 주장하듯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도 아니었다. 또한, 상당수 좌파들이 직간접적으로 주장하듯이 모종의 해방전쟁 또는 계급전쟁도 아니었다.
북한이 남한 점령 지역에서 시행한 토지개혁 등 ‘민주개혁’은 북한체제를 그대로 복제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남한 주민의 자발적 참여는 거의 없었다. 북한이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시행하기 전에 이미 남한에서 지주-소작제는 약해지는 추세였다. 미군정기 탄압으로 와해된 인민위원회를 복구했다지만, 실권은 북에서 내려온 요원들에게 있었다.
이승만과 김일성 모두 한국전쟁을 이용해 독재정권의 기틀을 닦았다.
한국전쟁 결과 강화된 냉전 질서 속에서 미국은 서방을 결속시킬 수 있었고,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성장을 시작할 수 있었다.
결국, 한국전쟁은 한반도 분쟁 상황을 이용한 열강 간의 힘겨루기였을 뿐이었다. 우익들은 한국전쟁의 책임을 김일성과 스탈린에게 돌리려 하지만, 이승만과 미국이 져야 할 책임의 무게는 결코 김일성과 스탈린이 져야 할 몫보다 가볍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