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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의 어제와 오늘:
냉전 시기 한·일 지배자들은 어떻게 유착했는가?

일제 강제동원 배상 책임 기업에 대한 법원의 현금화 절차 집행이 가능해지면서, 한·일 갈등이 다시금 불거졌다. 일각에서는 오늘날 한·일 갈등이 한국과 일본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불일치하는 데서 비롯한다고 본다. 지난해 한·일 갈등이 불거졌을 때 유행한 ‘일본 패싱론’에도 이런 관점이 반영돼 있다. 그런데 한·일 사이의 실제 관계는 어땠을까?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과 일본은 경제적·지정학적으로 오랜 유착 관계를 맺어 왔다. 한국과 일본은 기본적으로 경제적·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공유했다. 물론 전(前)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 국장 빅터 차의 책 제목 《적대적 제휴》가 보여 주듯이 관계가 늘 매끄럽지는 않았다. 한국과 일본을 ‘화해’시키고 갈등을 중재하며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서 미국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두 나라는 미국의 관장 하에서 관계를 발전시켰다.

냉전기 동안 미국은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한국을 주요 동맹으로 삼았다. 그중에서 일본이 단연 더 중요한 파트너였다. 한국은 대소련 전진기지로서 일본을 방어하는 데 중요했다.

전후에 미국은 동아시아에서도 유럽의 나토(NATO, 북대서양 조약 기구) 같은 형태의 집단안보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직전에 일본이 벌인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의 경험 때문에 일본과 다른 아시아 나라들을 한데 묶는, 그것도 일본을 중심으로 집단안보체제를 꾸리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았다. 미국은 일본, 한국, 필리핀 등과 각각 양자 동맹을 맺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동맹을 맺지 않더라도 이들 국가 사이의 협력은 필수적이었다. 특히 한·미·일 삼각 안보체제는 냉전 시대 동북아시아에서 서방 세계를 위한 반(反)소련 방어망의 핵심 토대였다.

한·일 국교정상화

미국은 1951년부터 한·일 관계 정상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협상은 14년이 지난 196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타결됐다. 이때 중국은 핵무기 개발에 성공해(1964년) 아시아에서 긴장이 고조됐다. 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며 부담이 점차 가중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일본이 미국을 대신해 한국에 대한 지원을 맡아 주기를 바랐다.

당시 미국이 보기에 이런 구실을 할 경제력을 가진 나라는 일본이 유일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패전국 일본의 미래는 어두워 보였지만, 일본 경제는 1955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연 10퍼센트 정도씩 성장해, 이미 1968년에 서방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됐다. 얄궂게도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로 경제 부흥의 시동을 걸었다.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유럽과 미국보다 월등히 높았다. 미국이 안보를 책임져 준 덕분에, 일본은 군비 지출을 GNP(국민총생산)의 1퍼센트 정도로 낮게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산업(기술개발)에 투자할 수 있었다. 일본을 아시아의 ‘반공 방벽’으로 키우려 한 미국의 지원도 주요했다.

미국은 성장한 일본이 한국 등 동아시아 나라들과 교역을 확대하도록 지원하는 한편, 이 나라들에 경제 원조를 하도록 촉구했다. 이런 맥락에서 1965년 한일기본조약(한일 협정)은 한·미·일 ‘3자 협정’이라 할 만큼 미국이 핵심적 구실을 했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경제 원조가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자금 부족으로 경제 개발 계획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의 원조는 국내의 엄청난 저항을 감수하고라도 얻어내야 할 만큼 중요했다. 이 때문에 과거사나 독도 영유권 문제 등은 오히려 양국관계 개선에 걸림돌로 여겨졌다. 1960년대 한일 협정 추진 과정에서 당시 한국 측 대표 김종필이 협력 관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독도를 폭파하자고 일본 측에 제의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1965년 한일회담 가조인식 한일 협정은 오늘날까지 한·일 관계를 형성하고 규정해 온 핵심적 기초다 ⓒ출처 국가기록원

1965년 양국은 국교를 정상화하며 일본은 한국 정부에 무상원조 3억 달러, 공공차관 2억 달러와 상업차관 3억 달러, 청구권 자금 4500만 달러 등 총 8억 4500만 달러의 경제 원조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당시 한국의 수출 총액이 고작 2억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한국 입장에서는 상당한 액수의 자금이었다.(당시 일본의 국내총생산은 한국의 30배가 넘었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한테도 이런 원조는 일본 자본이 한국 시장을 확보할 기회였다. 남한의 경제성장과 정치 안정화는 일본의 안보에도 중요했다.

한일 협정은 오늘날까지 한·일 관계를 형성하고 규정해 온 핵심적 기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한·일 간의 경제 관계는 급속히 발전했다. 교역, 투자, 원조가 모두 늘었다. 이미 1970년대 초에 일본은 한국의 가장 중요한 수입국이자 두 번째로 큰 수출국이 됐다. 또한 미국을 추월해 한국에 대한 최대의 해외투자국이 됐다. 한·일 경제가 긴밀해지는 과정은 한·미·일이 경제적으로 통합되는 과정의 일부였는데, 한국은 일본한테서 기계와 부품·재료를 수입해 제품을 만들어 미국 시장에 판매했다.

또한 일본의 자본은 한국 경제의 기반을 닦고 철강, 조선업 같은 핵심 산업들이 성장하는 데서 매우 중요했다. 예를 들어 1969년 일본은 포항종합제철 건설과 운영을 위해 (한국 정부가 요청한 액수보다 더 많은) 1억 2370만 달러의 보증금과 신용대출을 제공하기로 했다. 당시 포항제철 건립은 단일 사업으로는 한국 역사상 최대의 비용이 지출된 계획이었다. 서울지하철과 소양강댐,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도 일본의 자금이 들어갔다.

양국의 경제 관계 때문에 두 나라 정부와 기업 권력자들 사이의 인적 관계도 긴밀해졌다. 당시 한·일의 정치인과 기업인들은 수많은 공식·비공식 채널을 통해 잦은 회합을 가지고 긴밀하게 의견을 교환하며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말 신흥공업국들의 외환 위기가 일어나면서 1983년 무렵 한국도 외환 위기 가능성이 높아지자, 전두환은 일본에 차관 제공을 요구해 또다시 차관(40억 달러)을 받을 수 있었다. 40억 달러는 당시 한국 국민총생산(GNP)의 5퍼센트였고, 외채의 10퍼센트에 이르는 액수였다. 심각한 외환 위기를 겪은 다른 라틴아메리카 나라들과 달리, 한국은 일본의 차관 덕분에 외환 위기를 피해 갔다.

한·일 간 초보적 수준의 군사 협력도 이미 냉전 하에서 시작됐다. 1969년 미국 대통령 닉슨과 일본 수상 사토야마는 공동성명에서 “한국의 안보가 일본 자체의 안보에 긴요하다”(‘한국 조항’)고 공식 선언했다. 또한 일본은 한국 방위를 위해 미군이 오키나와 기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끔 하는 방침을 승인했다.

때로는 불일치하기도 했지만, 한국과 일본은 냉전 시대에는 미국과 함께 소련-중국-북한에 맞선다는 같은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공유했다.

물론 이렇게 공통의 이해관계를 공유했음에도 냉전기 동안 한·일 간 군사 협력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일본과 한국 모두에서 한·일 군사 협력은 내부적 반발을 부를 민감한 쟁점이었기 때문이다. 식민 지배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던 당시 한국에서 일본과의 군사 협력 추진은 대중의 커다란 반발에 직면할 문제였다. 일본 지배자들도 전수방위 원칙*에서 벗어나 일본의 군사적 구실을 확대하고 싶어했지만, 강력한 반전·평화 운동의 전통 하에 있는 일본 대중의 눈치를 봐야 했다. 주변국들의 경계도 신경써야 했다.

한·일 간 군사 협력이 눈에 띄게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냉전이 끝난 뒤인 1990년대 중후반 들어서부터다.

대일 무역 적자

한편, 두 나라의 경제적 상호의존은 정치·경제 지배자들에게 막대한 이득을 안겼지만, 갈등과 모순이 불거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국의 대일 무역 적자는 고질적 문제였다. 1960년대 초반 수억 달러이던 액수가 1990년대 초에는 수백억 달러에 이르게 됐다. 1980년대에 한국은 이것이 일본의 보호무역 정책 때문이며, 일본이 한국으로의 기술 이전을 의도적으로 막는다고 비난했다. 미국 시장에 수출해서 벌어들인 돈을 일본 상품 수입으로 다 까먹는다는 자조 섞인 얘기도 나왔다. 한국 자본주의가 ‘기술 강국’으로 나아가려고 부단히 애를 쓴 한 배경이다. 그러나 이것이 일각의 견해처럼,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됐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과 맺은 관계로부터 한국의 기업들은 커다란 이익을 얻고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서는 1980년대부터 한국 산업이 일본의 경쟁 산업으로 성장한 것이 골칫거리였다. 철강산업과 조선업 등이 대표적이다. 가령, 한국 철강산업은 1970년 당시 생산량이 겨우 50만 톤으로 일본의 20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는데, 1980년대에는 일본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 경쟁력을 얻게 됐다. 조선업에서도 현대중공업은 설립 10년만(1983년)에 미쯔비시중공업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몇몇 산업이 도드라지게 성장했음에도 1980년대에 일본과 한국의 전체 경제 규모는 17대 1로 차이가 매우 현격했다.

다른 한편, 일제 식민 지배와 역사 왜곡 문제는 그때에도 한·일 관계를 흔들 수 있는 폭발력을 가진 쟁점이었다.(냉전기에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등 전쟁 범죄 문제는 쟁점이 되지 못했는데, ‘위안부’ 문제는 한국에서 1990년대 들어 피해자들이 공개 증언을 하면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강제동원 등에 대해서는 박정희 정권이 1965년 한일 협정을 체결하며 이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일본에 합의해 준 탓이다.)

그런데 한국의 독재정권 통치자들은 이런 문제를 일본과의 협력 강화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겼다. 물론 때때로 ‘반일’ 제스처를 취하곤 했지만, 잠시뿐이었다. 또한 이는 어디까지나 경제 문제 등을 둘러싼 일본과의 협상에서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거나 국내 통치를 수월하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가령 전두환은 일본한테서 막대한 차관을 얻어내려고 ‘반일’을 표방하고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에서 강경 태도를 취했다. 전두환의 ‘반일’은 국내에서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던 전두환은 얼마 안 가 국교정상화 이후 처음으로 일본 수상과 만나 “새로운 동반자 관계”의 시작을 알렸고, 1965년 이래 최대 규모의 차관 제공을 약속받았다.

무엇보다 냉전기에 한·일 간의 갈등은 서방 진영 내에서 미국의 두 동맹이 빚은 갈등으로, 미국의 주도 하에서 중재되고 봉합됐다. 때로 한·미 관계가 갈등을 빚던 시기에는 한·일 관계도 아주 껄끄러웠다. 가령 1969년 미국은 베트남 전쟁 패배를 만회하려고 중국과의 긴장 완화를 택했고, 한국에서 주한미군을 감축시키려 했다(닉슨 독트린). 일본은 이런 미국의 ‘데탕트’(해빙) 정책에 부응하면서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미국과 일본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며 독자적 핵무장까지 시도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 회복으로 한·일 간의 갈등도 봉합됐다.

냉전 시기에 미·소 양국은 전 세계에서 상대를 억제하고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해, 경쟁자한테서 자신의 세력권을 지키려 했다. 이 경쟁의 특징은 세계 도처에서 국가 간 관계를 모두 양대 진영의 틀 안에 욱여넣었다는 것이다. 미·소 어느 한 쪽의 동맹국이 돼 양극적 질서에 복종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같은 진영 내 국가 간 갈등은 일정 수준 이하로 억제됐다. 대신 미국은 자기 블록에 속한 국가들이 소련 쪽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경제적 성장과 안보를 보장했다.(관련 기사: ‘미국과 중국은 신냉전에 돌입했는가’)

이런 질서 하에서 일본은 서방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한국도 서방 진영에 속해 미국이 관장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성장하는 전략을 취했다. 일본과의 관계 증진도 이런 냉전적 세계 질서 속에서 한국 자본주의에 부과된 것이었다. 그래서 냉전기 동안 일본에 대해서 한국은 상대적으로 열등한 지위임을 인정하면서 협력하는 태도를 취했다.

냉전 해체와 세계 자본주의 변화 속에서 이런 관계는 지속되는 와중에도 부분적으로 변화를 겪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살펴볼 것이다.

참고자료

빅터 D. 차, 《적대적 제휴》, 문학과지성사

강동훈, ‘발전국가론과 한국의 산업화’, 《마르크스21》 11호(2011년 가을)

김도형· 아베 마코토 외, 《한일관계사 1, 2》 역사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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