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배상 판결’ 외면하는 문재인:
한일위안부합의 폐기는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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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1월 18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피해 배상 판결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문재인은 ‘법원의 판단을 존중하겠다’는 입발림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제징용 문제처럼 배상을 강제 집행하는 것은 한일 관계에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며 법원을 압박했다.
법원은 2년 전 강제동원(징용) 배상 판결을 내리고 이에 불복하는 일본 기업들의 한국 내 자산을 압류, 강제 현금화하기 위한 절차를 밟았지만 수출 규제 등 일본 정부의 강력한 반발로 집행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문재인은 이렇게 강조했다. “한국 정부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양국 정부 간의 공식적인 합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일본 정부의 책임이 남아 있고 위안부 문제가 현재진행형이라는 판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을 배제한 채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명시했던 기만적 합의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기자회견 이틀 뒤 수요집회에서 정의기억연대는 “비굴하다 느껴질 만큼 수세적 대응”이라며 문재인을 비판했다. 이 비판대로 문재인 정부의 배신을 규탄하고 항의를 이어가야 한다. 또한 무책임하게 이 쟁점에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민주당 윤미향 의원에게도 정부 비판에 나서라고 촉구해야 한다.
되돌릴 수 없는 국가 간 합의?
문재인 정부는 집권 초만 해도 “한일 위안부 합의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아니”(문재인 대통령)라거나 “합의 파기를 포함한 모든 게 가능하다”(강경화 외교부 장관)고 했었다.
우파들은 이런 입장 발표만으로 대책 없이 한일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고 호들갑스럽게 비난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미 집권 1년 차에 약속을 뒤집어 “일본 정부에게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말이다.
우파들은 이제 대통령 문재인이 합의 유지 입장에 공개적으로 쐐기를 박자 기세등등하게 한일 위안부 합의와 한일 관계를 되돌려 놓으라며 큰소리치고 있다.
앞서 봤듯이, 문재인 정부가 한일 위안부 합의를 유지하기로 한 것은 합의의 일방적 백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다.
현실에서 국가 간 조약 파기, 국제법 위반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특히 강대국들은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국제법을 밥 먹듯이 무시하고 국가 간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리기 일쑤다. 한국 정부도 북한과의 평화 약속을 금세 깨뜨리곤 했다. 미국의 대북 압박에 동참하는 식으로 말이다.
문재인 정부는 한때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를 폐기할 것처럼 굴기도 했다.
국제법상 정식 조약도 파기할 수 있는데, 하물며 양국 외교장관의 회담 결과를 구두로 발표한 것에 불과한 한일 위안부 합의를 왜 파기할 수 없겠는가.
따라서 핵심은 문재인 정부가 합의 폐기를 선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공약으로 걸어 놓고도, 정작 집권한 뒤에는 약속과 염원을 무시하고 한일 관계를 우선하는 선택을 해 왔다는 것이다.
특히 지금 문재인 정부는 동맹 강화를 원하는 미국의 새 정부(바이든 대통령)를 의식하며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고 한다. 한일 경제 갈등은 기업들도 불편해한다.
반식민주의? 페미니즘? — 반제국주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한편, 진보 진영 안에서도 한일 위안부 합의 폐기나 일본 정부의 법적 배상이 비현실적인 요구이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사회진보연대가 그렇다.
사회진보연대는 사실 지난해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관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비판했었다. 정부·여당과 윤미향 의원이 자신에 대한 의혹 제기와 위안부 운동에 관한 비판을 모두 친일 우파 취급하는 것(진영논리)도 올바르게 비판했다.
그런데 사회진보연대는 문재인 정부의 위선(약속 위반)을 꼬집는 데서 더 나아가 애초에 한일 위안부 합의 폐기를 약속한 것부터 문제였다고 본다. 일본 정부를 물러서게 할 도리가 현실적으로 없는데도 문재인 정부가 대중적 인기를 모으려고 포퓰리즘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반일 민족주의적 약속을 내세웠다는 것이다.(사회진보연대는 포퓰리즘을 대중인기영합주의에 가까운 의미로 쓴다.)
“[할머니들이 살아있을 때 일본 국가가 전쟁범죄를 시인하고 사죄·배상을 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그렇다면 ... 정부의 속내는 무엇인가. ... 결국 위안부 문제를 여당의 지지 기반인 반일 민족주의로 묶어 두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아닐까.”(2020년 6월 11일 사회진보연대 한지원 씨가 쓴 〈매일노동뉴스〉 칼럼)
사회진보연대는 일본 정부를 물러서게 할 수 없다는 비관적 전제에 바탕해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정도면 얻어낼 수 있는 최선이었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2015년 한일 합의는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 일본 총리의 사죄, 일본 정부 예산을 통한 보상이라는 측면에서 과거보다 진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위안부 문제와 정의연 운동의 쟁점’, 이유미,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0 가을호》)
문재인 정부의 위선을 비판했지만, 잘못된 전제에 바탕해 정부 비판을 하다 보니, 결국 문재인과 유사한 입장이 되고 만 것이다.
사회진보연대의 분석이 갖는 난점은 위안부 문제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접근법에서 비롯한다. 사회진보연대는 위안부 문제의 현재적 과제를 일본 국가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데서 찾는 게 아니라 성폭력을 양산하는 구조에서 찾는다.
그리고 일본 국가의 제국주의 범죄에 대한 피해자의 항의라는 더 본질적인 문제를 부당하게 반일민족주의적 포퓰리즘과 등치시킨다.
“일본의 사죄·보상의 법적 형식에 집착하면서 현재적 과제가 상대화되고 있다. 대중적으로 위안부 문제는 성폭력을 야기하는 구조를 성찰하기보다 일본이 법적 배상을 하면 해결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민족 피해를 부각하는 운동방식이 반일감정을 부추겨 배타적 민족주의가 강화하[고 있다.]”(이유미, 같은 글)
법적 배상
그러나 법적 배상 문제는 단지 일본 정부로부터 금전적으로 보상받는다는 것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물론 금전적 보상이 중요치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때 피해자 1인당 위로금과 이번 위안부 피해 배상 판결 금액이 같음에도 위안부 합의를 거부했던 할머니들이 배상 판결은 크게 환영한 것을 보면, 돈 문제는 진정한 쟁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법적 배상은 일본 국가가 제국주의 전쟁 범죄의 주체였음을 인정하고 그로 인한 피해에 공식적으로 책임진다는 것을 뜻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지난 수십 년간 일본 측의 위로금 지급이나 사과 표현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와 우파들은 일본 고위 정치인들이 여러 차례 사죄하고 돈도 줬는데 아직도 부족하냐고 따진다. 그러나 그 내용은 기껏해야 위안부 문제를 일부 군부대의 일탈 행위와 그에 대한 군의 “관여”로 보는 데 그쳤다. 2015년 한일 합의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일본 정부와 우파 정치인들은 뒤돌아서서 또다시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등 막말을 해대고 피해자들을 모욕했다.
이런 일본 정부에게 한국 정부는 도전한 적이 없었다. 한국과 일본은 경제적·지정학적 이해관계로 얽혀 있고, 어쨌거나 한국 자본주의도 이 관계에서 득을 봐 왔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의 타협·밀월과 여론의 눈치를 보는 반일 제스처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이득을 얻으려 했다.
사정이 이러니, 위안부 피해자들이 소송을 걸어서라도 법적 배상을 절실하게 바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위안부 문제에서 민족 문제를 거세하고 성폭력 구조 문제로 조명하는 관점도 문제다.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가 바로 이런 논리를 교묘하게 이용해 본질을 흐려서 일본 국가에 면죄부를 주는 대표 인물이다.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는 근본적으로 가부장제의 문제라면서 “반일 민족주의적 피해 의식”을 벗어 던지자고 주장한다.
물론 반일 민족주의적 관점은 효과적이지 않다. 그런 접근법은 오늘날의 한미일 관계를 잘못 이해해 한국 정부(주로 민주당 정부)에게는 부적절하게 면죄부를 주고, 반제국주의적 국제 연대의 가능성은 더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난점은 페미니즘으로 극복될 수 없다. 위안부 문제를 ‘여성이 당한 끔찍한 성범죄’라고 규정하는 것이 언뜻 보면 민족을 뛰어넘는 인류 보편적 연대에 더 도움이 되는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그렇기는커녕 일본의 제국주의 범죄의 심각성을 못 보게 해 오히려 반제국주의적 국제 연대가 자라는 데 방해가 된다. 특히 누가 이 문제에 책임을 져야 하는지, 운동은 누구에 맞서 싸워야 하는지가 흐려져 결국 일본 국가에 면죄부를 주게 되기 십상이다.
제국주의 반대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민족 억압 문제다. 이 점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한-일 관계가 더는 직접적 식민 지배 관계가 아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이유를 규명해야 한다.
그 열쇠, 즉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현재적 의미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제국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은 제국주의 야욕을 키우고 있고, 일본 정부는 그런 드라이브를 계속 걸기 위해 어떻게든 과거의 전쟁 범죄를 은폐하려고 한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일본이 패전국으로서의 제약을 벗어던지고 다시금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을 동아시아의 핵심 동맹으로 여기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미국 제국주의가 있었다.
미국은 동아시아의 동맹국들이 과거사 ‘따위’는 잊고 현재의 제국주의를 위해 협력하기를 바란다.
한국 지배계급은 전통적으로 한미일 동맹에 기초해서 성장했다. 이 때문에 역대 한국 정부들도 한미일 동맹을 과거사 해결보다 중시했고, 결국 위안부 문제 해결은 매번 뒷전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문재인 정부의 태도를 제국주의 분석에 기초해서 보지 않고 대중적 인기를 노린 반일 민족주의로만 보면, 문재인 정부가 왜 대중의 염원을 무시하고 배신을 거듭하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협조해 힘을 키우려 하는 한국 지배계급에도 맞서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건설해 나가야 한다.
그런 운동은 민족이나 성별 분단선이 아닌 제국주의 반대와 계급적 분석에 기초할 때 일관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