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본 가짜뉴스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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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9월 21일 같은 주제로 진행한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표문이다
2017년 영국의 사전 출판사 콜린스는 올해의 단어로 ‘가짜 뉴스’(fake news)를 선정했다.
아마 SNS와 메신저를 통해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을 본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루머와 비방, 혐오 표현들도 계속해서 생산되고 온라인에서 떠돈다. 최근에는 유명한 박사의 주장, 모 대학의 연구 결과, 해외 언론의 보도 등의 제목을 달고서 코로나19에 관한 여러 허위 정보들이 떠돌고 있다. 잘못된 치료법을 믿었다가 목숨까지 잃는 일들도 벌어진다.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가짜 뉴스를 문제라고 여긴다.
가짜 뉴스를 세계적 쟁점으로 부상시킨 핵심 계기는 2016년 미국 대선이었다. 특히 트럼프 지지자들은 ‘대안 우파’를 자처하면서 이민자에 대한 혐오, 주류 언론들에 대한 불신을 반복적으로 퍼뜨렸고, 우익 온라인 웹사이트들과 SNS가 여기에 동원됐다.
가짜 뉴스에 대한 비판과 경고가 넘쳐 나지만 가짜 뉴스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배경
가짜 뉴스 현상은 대통령과 고위 관료들, 정부 기관들의 공식 발표나 저명한 교수와 대학 연구팀이나 연구소(또는 전문가 개인), 또는 그들을 인용한 제도권 기성 언론의 신뢰(권위) 추락과 연결된 현상이다.
영국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의 2020년 연구를 보면, 전 세계 40개 나라에서 뉴스 전반에 대한 신뢰도는 38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한 해 전보다 4퍼센트 더 하락한 수치다.(한국은 21퍼센트로 조사 대상 국가 중 가장 낮았다.)
2008년 세계 불황 이후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는 듯하다. 세계 자본주의는 이때 시작된 경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강대국 간 갈등이 깊어지고, 각국 지배계급 내 암투와 분열도 심상치 않다.
정부들은 시장주의적 방법만 고수하는데, 시장 경제는 회복될 줄 모르고 사람들의 삶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배계급 정치인이나 경영자들, 공식 정치와 제도(언론, 학교, 연구소 등)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급추락했다. 이 체제에 그럭저럭 적응해 체제의 규칙을 지키면서 노력하고 살면 어지간한 삶은 유지하고 이어 갈 수 있다는 대중의 믿음은 파탄 났다.
그래서 주요 국가들에서 공식정치를 수십 년간 지배해 오던 (중도파) 정당들이 심각한 위기에 빠지고 정치체제도 불안정에 빠졌다.
이 기간에 아랍 혁명이 일어났고 주요 서방 국가들에서 광장점거 운동이 펼쳐졌다. 그러나 아랍 혁명은 대체로 반혁명 세력에게 패배했다. 점거 운동도 큰 성과 없이 종료됐다. 이후 극우 세력이 대중 운동을 건설하며 성장했다. 그리스에서는 좌파 개혁주의(시리자)가 급성장해 정권까지 잡았지만 대중의 염원을 배신하는 바람에 정권을 다시 내줬다. 미국에서는 기성 정치에 대한 실망과 환멸을 이용해 우익 대중을 고무하며 트럼프가 집권했다. 영국에서는 보수당 정부가 유럽연합(EU) 탈퇴 문제를 놓고 거의 만 4년을 마비돼 있었는데, 좌파가 이끌던 노동당은 정권 교체에 실패했다. 돌아보면, 2008년 불황 이후 좌파 개혁주의가 여러 나라에서 유력한 기회들을 잡았다가 거의 모조리 실패했다.
정말이지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기성 정치와 기구들이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경제 위기가 닥치자 각국 정부들은 막대한 재정을 투여해 은행과 자본의 수익을 지키려 했다. 반면에 노동계급에게는 긴축을 강요했다. 지배자들은 이것이 모두를 위한 고통 분담이라고 했지만 노동계급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일부 기업과 부자들의 삶은 별로 손상되지 않았지만, 노동계급의 삶은 추락하고 있다. 예컨대, 지난 10년 동안 미국 소득 상위 5퍼센트의 평균 가구 소득은 28퍼센트 늘었지만, 하위 20퍼센트는 11퍼센트 느는 데에 그쳤다. 영국 런던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비싼 집값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운하 위 배에서 살고 있다.
분명 정치인, 기업주, 주류 언론들은 입만 열면 기업이 더 많은 이윤을 내야 우리 모두에게 이롭고, 모두가 고통을 감내해야 위기가 끝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었다. 코로나19가 곧 해결된다면서 어서 일터로 돌아가라고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이 말들이 더는 진실이 아님을 경험하고 있다. 더군다나 날로 심각해 지는 기후 위기까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지만 지배자들은 위기에 대응하는 제대로 된 대책은커녕 일관된 설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가짜 뉴스의 범람과 일부 사람들이 그런 것을 믿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것은 현 체제가 대중에게 신뢰를 잃어버린 것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한편,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술들의 발달 덕분에 가짜 뉴스는 과거보다 훨씬 빠르고 널리 퍼질 수 있게 됐다. 자동으로 SNS에 여러 글을 한 번에 게시할 수 있게 하는 기술(봇), 한 번 본 게시물과 유사한 영상들을 반복 노출시키는 유튜브와 페이스북의 알고리듬, 메신저앱 등.
지배자들의 거짓말
“가짜 뉴스”는 전례 없는 세기말적 현상 같은 것이 아니다.
2003년 미국 조지 부시 정부는 이라크 침략을 정당화하려고 그 나라에 “대량살상무기”가 은밀하게 비축돼 있다고 공표했다. 이 주장들이 고스란히 거대 언론을 통해 매일 보도됐다. 그러나 이 말은 순전히 거짓이었다. 거짓말이 밝혀졌지만 이 자들은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한국의 노무현 정부도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도왔다.)
기성 체제를 옹호하는 친자본주의 언론은 흔히 ‘팩트’를 맥락에서 떼어내거나 비틀고, 침소봉대를 해서 진실을 왜곡한다. 그렇게 해서 대중이 진실을 올바로 인식하는 걸 방해한다.
이런 경험들이 거듭되면서 상식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금이 가고 기존 지배 권력에 대한 대중의 환멸 정서가 커졌다. 그러나 개혁주의 정당들도 대안이 되지는 못했다. 그리스 시리자나 스페인의 포데모스 같은 정당들은 개혁을 제공하기는커녕 긴축의 주체가 되거나 이런 일에 협력했다.
위기에 대한 명쾌한 이해와 대안을 찾지 못한 채 혼란이 커지자, 애먼 이민자, 난민, 무슬림들을 희생양 삼고, “대안적 사실”을 내세우는 우파들의 주장에 솔깃해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불확실성이 커지자 오히려 자신이 동조하는 주장만을 들으며 허구적(상상된) 위안이라도 얻으려는 확증편향 심리도 강화됐다. 즉, 가짜 뉴스는 대중이 현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상황(마르크스는 이것을 ‘소외’라고 불렀다) 속에 영향력을 넓혀 온 것이다.
과거 우파 정부의 국정원과 국방부가 아예 조직적으로 트위터나 댓글 등에 개입한 일이나, 매크로를 이용한 드루킹 사건 등은 지배계급이 이런 기술을 이용해 누구보다도 여론을 왜곡하는 일에 효과적으로 나섰음을 보여 준다.
또한 가짜 뉴스 유포도 서슴지 않는 우파 단체들을 전경련 같은 기업주 이익 단체가 후원했던 일이나, 미국 공화당을 후원하는 ‘큰손’ 로버트 머서가 우익 웹사이트 브라이트바트의 창립자 스티브 배넌을 후원한 일 등은 지배자들이 가짜 뉴스를 이용하기도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가짜 뉴스는 명백한 공작, 제도권을 통해 유포되는 것들, 그리고 비제도권에서 유포되는 것 등 여러 형태를 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본질은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와 주류 언론들은 가짜 뉴스가 기존 언론의 바깥에서, 지배자들과는 무관하게 벌어지는 일탈적 문제인 것처럼 규정하면서 처벌 강화를 주장한다. 기존의 질서(실패한 기성의 권위)를 보호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의 통치 하에서 대중의 삶이 파탄 났기 때문에 우파들의 허위 선동이 먹히고 있고, 부와 권력을 쥔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해악적 결정을 정당화하려고 퍼뜨리는 거짓말이야말로 비할 데 없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지배계급의 가짜 뉴스 비난은 책임 회피이자 위선이다.
민주당과 우파, 대안 없는 정쟁
한국의 우파들은 유튜브와 카카오톡 등을 이용해 광주항쟁과 세월호 참사, 난민과 성소수자들에 대한 온갖 역겨운 가짜 뉴스들을 퍼뜨려 왔는데, 최근에는 코로나19를 주요 소재로 삼고 있다.
2월 13일 문재인이 나서서 코로나 사태가 곧 종식될 테니, 경제 활동을 재개하자고 했었다. 그런데 이 발표 직후 코로나19가 급속히 확산했다. 이후에도 문재인 정부는 기업주들만 걱정하며 방역 단계를 완화했고 감염 경로를 알 수 없는 사례들이 오히려 늘고 있다. 생계 위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느는데도 정부의 지원은 쥐꼬리만 하다. 이런 상황이 반년 이상 지속되면서 사람들의 불안과 위기가 커지고, 분노도 자라고 있다. 우파들은 바로 이런 불신을 파고들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개혁 배신이 우파 부상의 중요한 토양을 제공했다. 문재인 정부는 개혁을 내세우며 집권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실천은 세계경제 위기와 제국주의 강대국 간 갈등 속에서 한국 자본주의를 더 효율화해 위기를 극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지배계급 기반 정당으로 자본주의 수호에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정부는 열심히 친기업 규제 완화를 해 왔고, 노동자들에게는 알량한 개혁마저 줬다 뺏기를 반복했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개혁 염원을 완전히 배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향으로 경제 회복이 되지 않고 있다. 한국 지배계급은 지금 위기에 대한 해법을 못 찾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신경질적 태도로 서로의 부패를 폭로하며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서로 달라 보여야 하는데, 정권을 잡고 하려는 일은 같고, 그런데 둘 모두 그 일에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가짜 뉴스가 유용한 무기가 되고 있다. 또, 상대의 공격을 그저 가짜 뉴스 취급해서 자신의 지지층이라도 묶어 놓으려 한다. 일종의 악순환인 것이다.
최근 아들에 대한 특혜 의혹에 휩싸인 현 법무부장관 추미애와 민주당은 아들 특혜에 관한 의혹들이 날로 드러나는데도 가짜 뉴스라면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다. 민주당은 지난해 조국 당시 법무부장관 자녀 특혜 의혹에 대해서도 비슷한 전술을 택했다.
스스로 진보 언론을 표방하는 친정부 언론들도 정부·여당의 부패를 감싸고 덮어 주는 일의 일부가 됐다.
지난해 〈한겨레〉가 부패 의혹에 대해 조국의 말을 그대로 옮겨 “명백한 가짜 뉴스”, “일축” 등의 제목을 뽑는다는 비판도 있었다.
〈한겨레〉는 문재인 정부의 실천을 괜스레 부풀리기도 했었다. 예컨대 문재인 취임 첫해 정부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대책’을 발표하자 〈한겨레〉는 “비급여 전면 건강보험 적용”이라고 보도했다. OECD 평균 건강보험 보장률과 비교하면 여전히 매우 낮은 수준이었는데도 부풀린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한겨레 출신 기자들을 청와대 요직에 앉혔었다.
주류 언론들이 문재인 정부가 한일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도, “이 합의가 피해자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부각해 배신의 본질을 흐리기도 했었다.
문재인의 열성 지지자들은 노동자들의 대정부 항의를 흠집 내려고 민주노총이 이명박·박근혜 때는 투쟁하지 않았다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거짓말을 퍼뜨리기도 했었다.
박근혜 정부의 책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비난하고,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을 비난하며 기업주들을 옹호해 온 우파 정당과 보수 언론들의 행태는 분명 역겹지만, 문재인 정부와 그 지지세력들도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은 것이다.
가짜 뉴스 문제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가짜 뉴스의 상당수는 미국 제국주의와 시장주의를 편들고, 세월호 유가족, 난민, 성소수자 등을 희생양 삼아 체제를 옹호하고, 분열과 차별을 조장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가짜 뉴스가 쉽게 유통되도록 하는 한 포인트가 대중의 기존 편견(지배 이데올로기가 유포한 상식에 부합하는)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반동적 주장은 진실을 왜곡하고 대중을 분열시키므로 피억압 대중에게 해롭다. 편견을 이용해 어떤 사건들이 야기한 결과의 책임을 대중에게 돌림으로써 체제를 옹호한다. 이런 흑색선전은 표현의 자유로 옹호될 수 없다. 국가보안법 등을 이용해 피억압 대중의 입에 재갈을 물려 온 국민의힘이 이런 가짜 뉴스를 방어한답시고 “표현의 자유”를 입에 올리는 것도 역겨운 일이다.
표현의 자유는 각 개인의 천부인권이어서가 아니라 노동계급 대중 스스로 토론하고, 투쟁을 조직하고, 정치조직을 만들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노동계급은 집단적 투쟁과 토론을 통해 지배계급의 기만에 도전하고 진실을 깨닫고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면 가짜 뉴스를 막기 위해 국가의 규제와 처벌을 요구해야 할까?
지난해 문재인은 “가짜 뉴스를 조직적으로 유통하는 것에 대해선 정부가 단호한 의지로 대처해야 한다”고 했다. 올해 8월 27일 방송통신위원회는 ‘팩트체크 오픈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가짜 뉴스 처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SNS 사업자가 가짜 뉴스 게시 후 24시간 내에 삭제하지 않으면 처벌받도록 독일이나 규제 법안을 마련 중인 프랑스 등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이 나라들에서 인종차별적 파시스트들이 세력을 키우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법적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국가의 검열·규제·처벌 권한을 강화하면 피억압 대중 운동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국가의 힘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대중 행동을 통해 우파적 주장과 그 세력에 맞서야 한다. 이런 행동을 통해 대중은 자신감을 얻고 대안적 세계관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커진다.
대안적 세계관
언론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높여 권위를 획득해야 한다는 주장은 또 어떤가?
착취와 억압을 이용해 이윤을 뽑아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계급과 노동계급은 대립하는 사회적 관계에 놓여 있다. 착취가 잘 이뤄지면 자본가들은 부를 얻지만 노동계급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편부당함이란 허구적이다.
지배계급은 오히려 다원주의나 심지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용해 한 줌밖에 안 되는 자신들의 계급 이익이 사회 전체에 이로운 것이라고 포장하고, 이것을 언론의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보도하도록 만든다.
예컨대 기후 위기가 엄연한 현실인데도, 기업주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서 기후 위기가 음모라는 “연구” 결과들을 내놓고 이것이 마치 비등한 논쟁 거리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식이다.
반면에 노동계급의 이해관계에 철저하게 근거하면 오히려 보편적 진실을 인식할 수 있다.
노동계급은 착취받는 노동을 통해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부를 생산한다. 노동계급을 매일매일 착취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이윤을 생산할 수 없고 세계를 운영할 수 없다. 노동계급은 자기를 지배할 계급도 자기가 착취할 계급도 필요하지 않다. 현 체제의 위선과 편견, 한계를 수용하거나 변호해서 얻을 것이 없다.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인구의 나머지 집단을 분열 지배할 필요도 없고, 힘으로 억누를 필요도 없으며, 따라서 그런 강제력을 정당화할 정교한 사상 통제 장치들도 필요 없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노동계급은 자신을 해방함으로써 인류를 해방시킨다. 그런 과정에서 인류는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다.
소수인 지배자들은 체제의 진실을 가리고 자신들을 신비화해서 이익을 얻지만, 이 사회의 진정한 다수인 노동계급에게는 진실을 훤히 드러내는 것이 오직 이롭다. 즉 사회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이익이 되고 또 그럴 능력까지 있는 계급은 노동계급뿐이다.
따라서 지배계급이 허위를 이용해 대중을 통제하고, 좌절감을 강요하는 것에서 벗어나 진실에 도달할 수 있으려면, 노동계급의 단결과 투쟁, 해방을 얻게 하는 혁명적 사상과 세계관, 이에 따른 투쟁의 건설이 중요하다.
자본주의와 언론
자본주의는 소수의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통제하며 나머지 압도 다수를 착취함으로써 굴러간다. 이 사회에서 소수인 지배계급은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 경찰, 국정원 같은 억압기구들과 물리력을 이용하는 동시에 대중이 지금의 체제를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것, 즉 상식으로 받아들이게끔 만들려고 한다. 교육과 언론 등이 여기에 이용된다.
부르주아 언론들은 객관성을 표방하지만 사실 이들이 정치에 대해 보도하고 말하는 방식은 언론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지배자들의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반영한다.
기업이 더 많은 이윤을 내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거나, 국방비에 돈을 쏟아붓는 것이 국익이라거나, 여성과 남성은 너무 달라서 단결할 수 없다거나, 경쟁과 차별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따위의 주장들이 진실인양 포장돼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중 일부는 일상적 시기에 사람들의 경험과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언론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마르크스는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고 이것을 설명했다.
과거 미국 CIA는 언론인들을 포섭해 뉴스 보도를 조작하는 ‘앵무새 작전’을 수행했다. 〈워싱턴 포스트〉 출신 칼 번스틴은 “CIA 본부의 내부 문서를 근거로 25년 동안 400여 명의 미국 언론인이 앵무새 작전을 비밀리에 수행했다고 결론지었다.”(《가짜뉴스의 고고학》, 최은창, 동아시아) 같은 시기 옛 소련의 KGB도 국제기자협회(IOJ)에 관여해 비슷한 일들을 벌이고 있었다.
중국의 관영언론인 CCTV와 〈인민일보〉는 홍콩 항쟁을 서방의 음모와 개입이라고 주장하고 시위대를 폭도로 몰았다. 1980년 〈조선일보〉 등 한국 언론들도 광주항쟁이 폭동이라는 전두환 계엄사의 말을 그대로 보도하면서 군부 정권의 학살을 정당화했다. 오히려 항쟁 참가자들이 외치는 진실을 유언비어로 둔갑시키면서 말이다.
최근 네이버 사장 출신으로 문재인 정부의 홍보수석을 거친 민주당 의원 윤영찬이 뉴스 배치에 불만을 품고 카카오를 불러들이라고 한 일은, 2017년에 폭로된 네이버 뉴스 배치 조작이나 삼성이 이재용의 비리 보도를 축소하려고 주요 언론들뿐 아니라 포털 통제에도 나선 일들과 본질적 성격은 같다.
기업주들도 언론을 직접 소유하거나 막대한 광고비를 이용해 언론을 길들인다. 2000년대에 들어서 미국의 언론 시장은 6개 거대 언론 그룹들이 차지하게 됐다. 클린턴 정부가 언론사 소유 제한을 대폭 풀어 준 덕분이었다.
지난해 〈경향신문〉은 1면에서 모 기업에 대한 불리한 기사를 실으려 했지만 이 기업한테서 협찬금 약속을 받고는 인쇄 전에 기사를 삭제해 버렸다. 2010년에도 〈경향신문〉 사측은 광고주인 기업들을 의식해 삼성 일가의 무노조 경영 등을 비판한 김상봉 교수의 칼럼 게재를 거부했었다. 이런 일들은 자유주의 언론들도 기업의 통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언론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다. 정권 비호 방송이 판을 쳤어도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몰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듯이 경제 위기 등으로 지배 이데올로기가 도전받을 때 언론의 영향력도 약해진다. 특히 대중이 집단적 투쟁을 벌이면서 자신의 행동이 거짓말의 대상이 될 때, 대중은 부르주아 언론의 거짓말을 꿰뚫어 볼 가능성이 커진다. 2008년 촛불 운동이나 박근혜 퇴진 운동이 성장하자 보수 언론들이 ‘찌라시’라고 거부 당한 것이 그런 예 중 하나다.
대중 투쟁이 더욱 크고 급진적으로 벌어질 때, 대중이 대안적 세계관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노동계급 속에 뿌리내린 혁명적 좌파 조직의 개입은 이런 투쟁의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때, 투쟁의 전략을 제시하고, 대중 의식 발전에 가교 구실을 할 혁명적 신문도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