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게재
징벌적 손해배상제 논란을 계기로 보는:
가짜뉴스 검열과 표현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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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7일,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담은 언론중재법 개정안(민주당 정청래 대표 발의)이 국회 상임위(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위원회를 통과했다. 언론이 고의 또는 중과실로 허위 정보를 보도했을 때 손해배상 금액을 5배로 물린다는 내용이다.
한편에서는 언론들의 ‘아니면 말고’식 보도 행태나 범람하는 가짜뉴스를 규제해야 한다는 정서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의 언론 자유 침해를 우려하는 분위기도 있다. 게다가 국민의힘이 위선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운운하고 있어 문제가 더 복잡하게 느껴진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기사를 재게재한다. 이 기사는 6월 24일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 발제문에 청중토론 일부를 덧붙인 것인데, 최신 상황을 반영했다.(2021.7.29)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미디어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러나 그만큼 세상을 잘 알게 됐는가?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유네스코가 지난해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2030년 지구가 직면하게 될 가장 큰 걱정거리 네 가지를 물었더니, 기후위기(67퍼센트), 분쟁, 불평등 문제와 함께, 가짜뉴스와 표현의 자유 문제(32퍼센트)가 상위에 꼽혔다. 또, 2018년 10월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설문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90퍼센트가 가짜뉴스를 심각한 사회 문제로 본다고 답했다.
이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국가가 언론을 더 강력하게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려는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그런 제안의 일환이다.
민주당 정청래 의원이 대표 발의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담고 있다. 언론이 악의적인 허위보도를 하면 피해액의 최대 5배를 손해배상 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이 법안은 7월 27일 국회 상임위 소위를 통과했다.
이외에도 윤영찬 의원이 대표 발의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에도 징벌적 손해배상(최대 3배)를 담고 있는데, 이 법안은 신문사 같은 전통 매체뿐 아니라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등 SNS도 적용 대상으로 한다.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언론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다 보니 이런 시도들이 대중의 적잖은 지지를 받는다. 올해 2월 〈오마이뉴스〉와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 조사 대상자의 62퍼센트 가까이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찬성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축소될 수 있다는 우려와 혼란스런 마음도 존재한다. 매우 이해할 만하다. 이미 한국의 언론의 자유 수준은 낮은 편이다. 2019년 국제인권단체인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는 한국을 인터넷 ‘부분적 자유국’으로 분류했다. 국가보안법 등을 이유로 인터넷 감시와 처벌이 심하다는 것이다.
더 복잡한 문제는 우파와 국민의힘이 끼어들어 표현의 자유 운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파들은 누구든, 언제, 어디서든, 어떤 말이든 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거기에는 역사 왜곡, 차별과 혐오, 전쟁 위협을 부추기는 주장 등 온갖 우파적 주장이 포함된다. 전두환도 광주항쟁 희생자 모욕과 거짓말로 가득한 자신의 회고록을 표현의 자유로 정당화했다.
국제적으로도 우파들이 자신들의 망언을 표현의 자유로 정당화하는 일이 하나의 패턴이 됐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인종차별적 우파들이 ‘표현의 자유 협회’를 설립했고, 미국의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대학 내 인종차별적 우파 지지자들을 보호하려고 ‘대학에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었다.
요컨대, 국제적으로 가짜뉴스 현상이 논란이 되면서 국가의 언론 검열이냐 아니면 우파가 말하는 표현의 자유냐 하는 구도가 생겨났다. 그 가운데는 혼란스런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다.
기성 질서의 신뢰 추락
가짜뉴스 규제 강화법을 앞장서서 도입한 국가는 독일이었다. 2017년 독일은 가짜뉴스 삭제를 강제하고 벌금을 최대 65억 원까지 물릴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지난해 8월, 독일에서 코로나19 음모론을 이용하는 극우 세력이 노 마스크(마스크 안 쓰기) 시위를 벌였다. 그 규모가 4만 명에 이르렀다.
유사한 법안을 도입했던 프랑스의 경우, 파시스트 정치인 마린 르펜은 2017년 혐오 발언으로 법적 처벌을 받고서 그해에 대통령 선거 결선에 진출했다.
이는 국가의 법적 규제로는 가짜뉴스나 혐오 표현을 막을 수 없음을 보여 준다.
가짜뉴스 현상은 심각한 사회적 위기의 증상이지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는 그 위기 발생의 한 당사자이다. 2008년 이후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경제 위기가 계속됐지만 해결은커녕 코로나19와 기후위기까지 겹쳤다. 각국 정부와 지배자들은 적절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오히려 대중에게 불투명하고 비민주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그들 사이에서 이전투구를 벌였다. 이런 위기로 정부, 언론, 학계 등 기존 이데올로기 생산 기관들에 대한 신뢰는 심각하게 손상됐다.
이처럼 기성 질서의 권위가 추락하고 무너진 자리에 가짜뉴스가 자라난 것이다.
서구에서는 가짜뉴스를 이용한 극우와 파시즘 운동이 큰 문젯거리다. 그들은 제1의 기치로서 인종차별과 이슬람 혐오를 내세운다. 그런데 이는 또한 2000년대 초 미국의 부시 정부가(서유럽 정부들도) ‘테러와의 전쟁’ 명분을 위해 부추기고 만들어 낸 산물이다. 그리고 여전히 서구 강대국 정부들은 무슬림 차별을 한다. 이러니 국가가 혐오 표현을 막을 수단이 될 수 있겠는가?
가짜뉴스를 막아서 자유를 증진하고 차별받는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것이 국가 검열 도입의 흔한 명분이다. 그러나 몇 가지 사례를 제외하면 가짜뉴스 규제법은 명분과는 정반대 구실을 했다. 지난 3월 국제언론인협회는 지난해 3월부터 10월까지 가짜뉴스 규제법을 도입한 여러 나라들이 “허위정보 유포를 제한한다는 구실로 정부 비판을 단속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러시아의 한 기자는 병원의 인공호흡기 부족 문제를 보도했다가 벌금형을 받았다. 싱가포르 정부는 한 달간 4건을 적발했는데, 모두 반정부 인사의 SNS 게시글이었다.(다행히 이 법은 나중에 폐기됐다.)
여러 전문가들(가령 마르코 밀라노비치 영국 노팅엄대 교수)도 이렇게 지적한다. “많은 정부들이 언론의 자유를 더 광범하게 억제하기 위한 모호한 수단으로 가짜 뉴스 방지법을 활용하는 듯하다.”
국가가 언론 검열을 ‘억압’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결코 우연적이거나 일부 국가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는 세상 수많은 주장들 사이에서 진실을 가려낼 능력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전혀 중립적인 기구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본질은 강제력을 사용해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억제함으로써 지배계급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국가는 반국가·반자본주의 언론과 표현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헌법이 언론 검열을 금지하지만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는 조항(헌법 제37조 2항)을 이용해 국가보안법이 헌법 위에 군림한다.
국가는 진실의 담지자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 중인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놓고, 진보 진영 내에서는 언론 엔지오를 중심으로 우려가 크다. 그러나 비판의 초점이 대부분 가짜뉴스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데 있지, 국가의 검열 문제 자체에 있지 않다. 정의당도 “규제 대상을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규제는 문제”라는 입장이다. 특히, 혐오 표현 규제 문제로 가면 찬성하는 진보 진영 입장은 더 많아진다.
그러나 국가가 내세우는 명분은 진실이 아니므로 말 그대로 실현될 리 없다. 국가의 언론 통제 강화 문제를 정말 공정한 것으로 인식해선 안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제약은 결국 노동계급을 겨냥한 제약이 된다. 언론 검열의 권한을 국가에 주고 그것을 강화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노동자와 차별받는 다른 사람들의 운동에 부메랑이 돼 돌아올 수 있다.
특히, 심각한 경제 불황과 정치적 불안정이 증대하는 가운데 각국 정부들은 경찰력 강화 등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조처를 강화하고 있다. 국가의 언론 통제 강화도 이런 맥락의 일부임을 알아야 한다.
한편, 미국 등 여러 국가들은 플랫폼 사업자들이 알아서 자율 규제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쓰고 있다. 그러나 SNS 기업들의 검열이 낳을 진짜 효과를 직시해야 한다. 올해 초 페이스북은 미국 극우 세력의 의사당 폭력 난입 사건 이후 트럼프의 소셜미디어 계정들을 정지시켜서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페이스북은 지난해 인종차별 반대, 팔레스타인 연대 활동을 한 영국의 좌파 활동가 45명의 계정과 15개 조직의 페이지를 정지시켰다. 페이스북측은 알고리듬이 실수한 것 같다고 둘러댔지만 결국 몇 달 뒤 다시 영국사회주의노동자당의 계정을 정지시켰다. 진정한 효과는 여기서 드러난 것이다.
반면 트럼프는 페이스북 계정이 없어도 우호적인 다른 매체나 자금을 이용해 자신이 원할 때 수천만 명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짜뉴스나 우파 언론들의 망언 같은 문제를 그냥 두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반동적인 언론과 주장에 맞서 아래로부터 저항해야 한다. 러시아의 혁명가 트로츠키는 1938년 국가의 언론 검열에 반대하면서, 반동적 언론에 맞선 투쟁은 노동계급이 자신의 언론을 이용해 스스로 조직해서 완수해야 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부르주아 국가의 억압적인 주먹에 의존”해서는 언론·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적 권리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국가 자체가 진실을 가려 대중을 속이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중요한 행위자인 것이다.
우파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해야 하나?
국민의힘 등 우파들은 집권 민주당의 언론 규제에 맞서 ‘표현의 자유’를 들먹인다. 국제적 우파들의 레퍼토리 그대로이다.
그러나 냉전적 대결이나 부추기고 차별과 혐오 언사나 내뱉는 우파들의 표현의 권리를 옹호해야 할까? 가령 지난해 6월 ‘신 전대협’이라는 우파 단체가 전국 대학들에 “문재인 정부가 중국 시진핑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대자보를 붙였다가 벌금을 선고받았다. 우파측 주류 매체들은 이 사건을 표현의 자유 억압 사건으로 규정했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그 사건의 경우에도 표현의 자유가 위축돼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러나 좌파가 나서서 국가 단속을 주장하는 것도 부적절하지만, 반대로 투쟁해야 할 대상인 우파에게도 “말할 자유”를 줘야 한다고 나서서 옹호하는 것도 적절치 않은 태도였다.
또 다른 사례로, 2015년 있었던 프랑스의 신문 샤를리 에브도 편집부 살해 사건에 대한 태도를 들 수 있다. 샤를리 에브도는 무슬림을 조롱하고 편견을 고무하는 만평을 실었다가 총격 공격을 당했다. 끔찍한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 공격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도전이라는 프레임이 힘을 얻었다. 안타깝게도 프랑스의 반자본주의신당(NPA)도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며 총격을 비난하기만 했다. 이는 차별받는 집단에 대한 조롱을 진보·좌파가 변호해야 한다는 셈이 됐다. 그러나 이 사건의 본질은 ‘언론의 자유’ 침해가 아니고 제국주의와 관련된 문제였다. 프랑스 제국주의가 조장한 인종차별에 대한 천대받는 측의 (그릇된 방식의) 항의였던 것이다.
‘누구의’ 표현의 자유인가?
이처럼 우파적이고 차별적인 주장에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견해는 표현의 자유를 추상적으로 모든 개인이 누려야 할 법적 권리로만 형식적으로 생각하는 오류이다.
어떤 권리가 법 조문에 적혀 있고 형식적으로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해서 현실에서 실제로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예컨대 우리는 모두 서울 강남 한복판에 아파트를 구입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이 사실상은 누릴 수 없는 자유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법적으로는 동등하게 말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부자들은 훨씬 더 널리, 더 효과적으로 말할 자유가 있다. 언론사에 광고를 싣거나 싣지 않아서 움직일 수도 있고, 아예 언론사를 세울 수도 있고, 정치인들을 통해 말하게 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우파들이 말하는 표현의 자유는 차별과 편견, 불평등과 억압을 지지하며, 나아가 다수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래서 실제로는 표현의 자유가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들이 말할 기회(표현의 자유)를 앗아가고 침해한다. 그럴 “자유”를 옹호해서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게 대체 무엇이겠는가?
계급으로 분열한 사회에서는 구조적으로 누릴 자유와 권리도 계급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표현의 자유를 말할 때는 반드시 누구의, 무엇을 위한 표현의 자유인가를 물어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표현의 자유의 역사는 언제나 투쟁의 역사였다. 국제 노동계급 운동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한 투쟁의 수단으로서 표현의 자유(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지배자들과 우파들이 아래로부터의 반론이나 항의에 시달리지 않고 말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게 결코 아니었다.
표현의 자유가 법조문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의 성과였다. 자본가 계급은 자유, 평등, 우애 같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새롭게 만들고자 했던 사회는 여전히 계급 사회였고, 자본가 계급은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없는 것인 양했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보편적 권리(자유)들은 실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본가 계급이 지배계급이 된 후에도 보통선거권이 노동계급이 쟁취해야 할 몫이었듯이, 표현의 자유도 마찬가지였다. 자본가 계급은 표현의 자유를 독점하고 억압하는 계급이 됐다. 반면, 노동계급은 법조문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메우려고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투쟁은 바로 1907년부터 시작돼 제1차세계대전 기간에 벌어졌던 미국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의 표현의 자유 투쟁(Free Speech Fight)이었다. 그들은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억압됐던 전쟁 기간에 거리 곳곳에서 정부와 부패한 사용자들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경찰은 폭력으로 진압했다. 5000명이 넘는 연설가가 한꺼번에 체포된 적도 있었다.
저항의 역사에서 민주적 권리를 쟁취하거나 또는 그것을 실질적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들은 중요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민주적 권리를 매우 중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의 힘을 빌려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파들의 주장처럼 누구도 무엇이든 말할 자유, 그래서 천대받는 사람들을 모독할 자유 같은 게 아니다.
진정한 언론·표현의 자유는 노동계급과 천대받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해방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급 자신의 힘으로 얻는 것이고 투쟁으로 확대하거나 지켜가는 것이다.
끈질기게 지배자들을 폭로하고, 사상의 충돌을 빚고, 노동계급의 상호교류와 투쟁 경험이 더 많아지도록 고무하는 활동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노동계급에 진실을 말하는 수단인 혁명적 언론과 조직을 끈질기게 건설해 나아가야 한다.
청중 발언
한 참가자는 국가의 혐오 표현 규제가 오히려 혐오 세력에 맞서려는 좌파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수단으로 사용되곤 했다고 지적했다.
“최근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을 유대인 혐오로 몰아서 처벌하거나 제재하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영국 노동당의 좌파 당수였던 제러미 코빈이 팔레스타인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유대인 혐오로 몰려 징계를 받았는데, 유럽 각국 지배자들도 같은 프레임을 이용해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를 인종차별적 반유대주의 시위로 몰아 금지했습니다. 이스라엘이야말로 인종청소를 자행하는 인종차별 국가이고, 유럽 지배자들은 이런 이스라엘을 후원해 왔는데 말이죠.
영국에서는 1965년 블랙파워 운동의 영향으로 인종적 선동 금지법이 만들어졌는데, 이걸로 기소당하고 감옥간 첫 인물은 백인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블랙파워 활동가였던 마이클 엑스였습니다. 백인에 대한 혐오선동을 했다는 이유였습니다.”
또 다른 참가자는 1930년대 초 ‘나치에게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좌파 내 논쟁을 돌아보며, 자본주의 국가가 중립적인 기구라는 환상이 핵심 문제라고 지적했다.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 독일에서 나치의 발언권과 표현의 자유를 놓고 좌파들 안에서 논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바이마르공화국의 집권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은 나치도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맞서, 사회민주당의 일부 좌파와 공산당은 국가가 나치에게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둘 모두 국가의 중립성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국가에 검열 권한을 주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계급적 성격 때문에 결국 좌파를 향해서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요컨대 국가 문제가 핵심입니다. 진정한 대안은 노동계급이 중심이 된 광범한 대중이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통해서 나치에 맞서 대결하고 위력적인 세력으로서 시위를 하면서 나치가 감히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치가 연단에서 발언할 자유를 주지 말아야 하지만, 국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힘을 보여 줌으로써 그렇게 해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와 주류 양당의 위선을 꼬집는 발언도 있었다. “민주당은 역사왜곡처벌법을 추진하면서 과거 우파 정부 하에서와는 정반대의 주장을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금성 교과서 탄압이나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왜곡 시도를 비판했으면서, 정권을 잡더니 입장이 바뀐 것이죠.
민주당의 표현의 자유 억압은 세계적인 체제 위기와 정당성 위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우파에 대한 공포와 그들의 악선동에 대한 반감을 이용해 진보 진영의 일부를 포섭하는 데에 이용하려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보 진영의 일부가 우파 정부 하에서는 언론 통제에 반대했다가 지금 민주당이 하는 것은 지지하거나 묵인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과 진보 진영 일부의 이런 말 바꾸기를 이용해서 자신을 정당화하고 노동계급이 추구해 온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에 흠집을 내려 합니다. 이들 모두는 진정으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자들이 결코 아닙니다.”
한 참가자는 국가더러 ‘규제를 강화해서 우파를 처벌하라’고 요구해선 안 된다는 것은 법제화된 검열을 말라는 것이지 모든 문제에서 전술적으로 경직된 태도를 취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예컨대 사회주의자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위안부 피해자들이 박유하[위안부 피해의 진실을 왜곡한 책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을 때, 사회주의자들이 국가 규제에 반대한다면서 피해자들의 소송 제기를 반대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에서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다는 관점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지해야 합니다.
또, 그리스에서 나치 정당인 황금새벽당이 기소돼 재판 받을 때 그리스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재판장 밖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여서 국가가 약한 처분을 내리지 않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 아래로부터의 힘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그런 상황을 이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국가를 이용해서 우파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입장에 대해 타협해서는 안 되지만, 표현의 자유 문제는 상황마다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