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모욕’ 램지어 논란과 외면당하는 배상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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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버드대학교 로스쿨 교수 존 마크 램지어의 ‘위안부’ 관련 논문(《태평양 전쟁에서의 성매매 계약》)이 논란을 낳고 있다.
램지어는 오랫동안 일본 기업 미쓰비시의 후원을 받아 온 일본법 연구자인데, 일본 정부와 우익의 입장을 학술적으로 대변하는 일에 적극적이었고 그 공로로 일본 정부의 훈장도 받은 인물이다.
한편, 미쓰비시는 하버드대학교에 큰 돈을 후원해 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로런스 배카우 하버드대학교 총장도 램지어 논문을 “학문의 자유”라며 옹호하고 있다.
램지어 측은 이 논문이 게임 이론 등을 적용해 법경제학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접근했다고 하는데, 검토한 이들은 일본 우익들의 오래된 역사 왜곡을 긁어모은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램지어의 주장을 요약하면, 위안소 생활이 ‘고위험’이었던 만큼 ‘고수입’이 보장됐으며, 대부분의 위안부는 “예비 매춘부”로서 매춘업자와 “상호 이해관계를 충족하는” 자유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램지어는 이런 뻔뻔한 주장을 펴면서 실제 계약서 증거를 단 한 건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램지어의 논문을 검토한 하버드대학교의 역사학과 교수들은 “학문적 진실성을 해치는 지독히 폭력적인 부분이 있다”고 비판했다.
또, 위안부 피해자 고 문옥주 할머니의 증언과 관련해서는 일부분(‘돈을 벌어 저축했다’)만 취사선택하고 자신의 주장과 정면 배치되는 증언(‘일본군 헌병에 의해 끌려갔다’ 등)은 배제하고 인용했다.
램지어는 위안부 역사 왜곡으로 악명 높은 하타 이쿠히코가 1999년 출판한 《위안부와 전장의 성》 등 일본 우익들의 기존 출판물과 익명의 우익 블로그들을 주로 참조·인용했다.
강제 동원된 수십만 명의 식민지 여성들과, 침략 전쟁을 수행하며 식민지를 강압하던 일본 제국의 관계를 합리적 거래 관계로 설명하려는 시도에서부터 진실에는 아무 관심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세계적 명문 대학교의 교수라는 자가 증거도 없이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저질 논문을 국제 학술지에 정식으로 실을 수 있다는 사실은, 위안부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배상 판결 회피하는 정부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를 향해 법적 배상을 통한 공식 사죄를 요구해 왔다. 법적 배상 과정을 통해, 일본 정부를 재판정에 세워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죄를 인정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명예를 온전히 회복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다.
피해자들의 끈질긴 싸움 끝에, 지난 1월 8일 한국 법원은 일본 정부에게 고 배춘희 할머니 등 피해자 12명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판결 이후 50일 가까이 흐른 지금, 배상은 이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일본 정부가 강력하게 반발하는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조차 피해자들의 편을 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배상 강제집행에 대해 반대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고, 이후 정부는 일본 측과 물밑 접촉해 배상 판결을 우회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한국 정부가 배상금을 대신 지급해 주고, 추후 일본 정부에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안(이른바 대위 변제)을 제시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일본 측이 구상권 청구에 순순히 응할 리가 만무하고, 무엇보다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을 바라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뜻을 전혀 충족시킬 수 없는 안이다.
결국 논란이 생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당사자들이 납득해야 [하므로] ...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에 달렸다”며 한 발 물러섰다.
이처럼 문재인 정부가 법원의 배상 판결을 집행하지 않고 일본 정부와 위안부 피해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외교적 해법을 찾아 헤매는 사이, 위안부 피해자 고 정복수 할머니가 생을 마감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이제 남은 피해 생존자는 15명뿐이다.
국제사법재판소
이런 갑갑한 상황 때문에, 2월 16일 위안부 피해 당사자인 이용수 할머니는 기자회견을 열고 눈물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일본 정부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해 달라고 촉구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개인이 아니라 정부만 소를 제기할 수 있다.
이날 기자회견을 함께 주최한 ‘일본군위안부문제국제사법재판소회부추진위원회’의 신희석 박사(국제법)는 ICJ 재판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고 부연했다.
막다른 길에 가로막힌 듯한 처지에서 ICJ에 마지막 기대를 걸어 보는 피해자의 심정은 십분 이해된다.
그러나 얼마나 효과적인 방향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위안부 단체들이 1990년대부터 일찍이 유엔, 국제노동기구 등 국제 기구에 개입해서 위안부 문제가 국제법 위반이라는 보고서와 결의문을 이끌어 냈지만 끝내 이행되지 못했던 과거 경험도 있다.
ICJ 재판은 일본이 응하지 않으면 열릴 수 없고, 판결이 나더라도 강제가 아닌 ‘권고’ 사항이라서 한국 측이 승소하더라도 일본은 이를 무시할 수 있다. 일본은 2014년에도 남극해 고래잡이 문제로 호주에 의해 ICJ에 피소됐지만 고래잡이를 중단하라는 판결에 불응한 바 있다.
무엇보다 ICJ와 그것을 관장하는 유엔이 단지 법리나 인도적 판단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봐야 한다. 이 기구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서구 강대국들(미국의 주요 동맹인 일본도 그 일부이다)의 강한 영향력 하에 있고, 제국주의 질서 앞에서 완전히 무력하다.
예컨대 예방 전쟁(적의 공격을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벌이는 선제적 전쟁)은 불법 침략 전쟁이라는 1986년 국제사법재판소 판례는 이후 미국이 벌인 이라크 전쟁에서 정면으로 무시됐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명분으로 침략 전쟁을 벌였지만 이후에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미국은 국제사법재판소보다 훨씬 핵심적인 기구인 유엔 안보리마저 무시하고 전쟁을 강행했었다.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1996년 유엔 인권위원회는 위안소를 설치해서 운영한 것이 국제법 위반이라는 의견을 내놨고, 같은 해 ILO(국제노동기구)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일본이 ILO 29호 조약(강제노동 금지규약)을 위반했으므로 적절한 피해 배상을 하라고 권고했지만 모두 무시했다.
위안부 문제는 단지 국제법이 규정하는 추상적인 인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과거 역사에 대한 해석 다툼만의 문제도 아니다.
일본 정부가 집요하게 과거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이유는 그것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것이 오늘날의 군사대국화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또, 미국은 대중국 견제에 필요한 아시아의 두 동맹국(일본과 한국)이 과거사 문제로 틀어져 긴장을 일으키지 않도록 개입해 왔다. 미국의 “중재”는 결국에는 더 중요한 동맹인 일본보다는 한국에 자제·양보 압력을 넣는 것으로 이어지곤 했다.
따라서 제국주의 질서에 도전하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건설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런 강조점을 분명히 하지 않고 국제 기구 설득하기에 몰두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다.
한·미·일 동맹을 우선해 한일위안부합의 폐기, 배상 판결 이행 등 위안부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외면하는 문재인 정부를 비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