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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사관의 성소수자 지지, 반길 일 아니다

주한 미국 대사관은 2017년부터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6월마다 대사관 건물 외벽에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을 걸어 왔다. 얼마 전에는 페이스북 공식 계정에 민주노총 금속노조의 ‘모범 단협안’(기준 단협안)에 성소수자 권리가 포함된 것을 지지하는 글도 올렸다.

미국 대사관의 무지개 깃발 게양은 제국주의적 악행을 가리려는 핑크워싱에 불과하다 ⓒ이미진

한국 성소수자 운동 주류는 미국 대사관의 이런 행보를 환영해 왔다.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는 여러 해 동안 축제 부스에 미국 대사관을 유치해 왔다.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서구 나라들에 대한 환상이 어느 정도 있는 듯하고, 미국 국가 기구의 지원을 얻는 것이 친미적인 한국 보수파들을 침묵시키는 데 유리하다는 생각도 있는 듯하다.

좌파 일부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표명한다. 미국 대사관의 금속노조 단협안 지지에 대해 정의당 심상정 대선 후보는 “가장 먼저 화답한 고용주”라고 칭찬하고, “한국의 고용주들도 분발해야겠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좌파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노동전선)의 운영위원 권수정 금속노조 여성할당 부위원장도 “심지어 주한 미국 대사관이 금속노조를 지지한다고!!” 하며 흐뭇해 했다.

그러나 미국 대사관의 이런 지지는 제스처일 뿐이며, 그조차 결코 거저가 아니다. 그래서 성소수자 운동이 그것을 반기며 그들에 대한 환상을 조장해선 안 된다고 본지는 지적해 왔다. 이는 국제 성소수자 운동의 급진 좌파들이 강조해 온 바이기도 하다.

미국 대사관의 무지개 깃발 게양은 미국 제국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저지른 악행을 가리려는 전형적인 “핑크워싱”이다.

최근에는 이런 위선이 한국의 성소수자 운동 일각에서도 반감을 일으켜, 2020년부터는 서울 퀴어문화축제 부스에서 미국 대사관이 빠졌다. 특히, 미국에서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이 분출하자, 미국 지배자들의 위선과 그에 대한 비판이 밝히 드러난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도 성소수자 운동 주류와 일부 좌파가 여전히 미국 대사관의 지지를 반기고 이를 활용해야 한다고 보는 것은 정치적 실용주의와 성소수자 예외주의의 산물인 듯하다. 미국 지배자들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고 그 의도가 얼마나 위선적이든 간에 예외적으로 성소수자 문제에서만큼은 미국 대사관의 지지를 활용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한국 성소수자들의 처지 개선에 도움이 될까?

지렛대

미국 대사관이 성소수자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일부 성소수자들에게는 ‘사회 주류로부터 존재를 인정받았다’는 느낌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한국 성소수자의 차별 완화에 실제로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미국을 포함한 서구 주요국 대사관들이 서울 퀴어문화축제에 수년째 참가해 왔지만, 개최 장소·행진 코스조차 쉽게 얻었던 적이 없다. 개신교 우파는 집회 신고 단계부터 집회 가처분 신청 등으로 끈질기게 방해해 왔다.

더구나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안철수 등 보수 후보들은 이 축제를 도심 외곽으로 밀어내겠다고 공언했다.

서울 퀴어문화축제 조직위는 미국 대사관 측을 인용해 이렇게 반박했다. “2015년에도 리퍼트 미 대사가 … 서울퀴어문화축제는 매우 뜻깊은 행사였고 참석한 것이 영광스러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지금껏 집회의 권리는 만만찮은 항의를 통해 쟁취해 왔던 것이지, 미국 대사관의 권위를 빌려 얻은 것이 아니었다.

지난해 서울시는 서울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의 사단법인 설립도 불허했다.(현재 행정심판 중이다.)

미국 대사관의 성소수자 지지는 겉치레인 반면 한국 지배자들과 우파 사이의 이해관계 수렴(가족 수호, 우파 결집 등)은 실질적이다. 때문에 (성소수자 운동 일각의 기대와 달리) 미국 대사관의 지지는 성소수자 권리 개선의 지렛대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성애를 처벌하는 군형법 92조의6 폐지나 차별금지법 제정 등 성소수자를 위한 개혁입법을 성취하려면 만만찮은 대중 투쟁이 필수적이다. 이미 유엔이 차별 시정을 수차례 권고했어도 한국 정부는 꿈쩍도 안 했다.

그렇다고 미국 대사관(혹은 유엔)더러 겉치레(혹은 점잖은 권고)를 넘어 지렛대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대안일까? 일부 온건 개혁주의자는 이를 대안으로 삼는 듯하다.

그러나 미국 지배자들은 적대 국가의 성소수자 억압을 비난할 줄은 알아도(그러나 우방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정작 자국에서 성소수자 난민 수용은 한사코 거부해 왔다.

무엇보다도, 미국 대사관의 지지에 기대를 거는 것은 성소수자들이 차별에 맞서 스스로 대중 투쟁을 하는 것을 고무하기보다 권력자의 선의에 기대를 걸게 함으로써 수동성을 강화한다.

성소수자 운동의 예외성을 강조하는 것은 성소수자 운동을 더 넓은 사회운동과 분리시켜 협소하게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특히, 이 나라에서는 미국 제국주의의 지지를 받으며 활동하는 것이 반제국주의적 운동과 정서적으로 이반하는 길이 될 수 있다. 다수 한국인들은 분단과 친미 독재정권의 경험 때문에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크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성주 주민들의 투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역사적으로, 주요한 개혁은 모두 아래로부터의 만만찮은 투쟁을 통해서 성취됐지 권력자들의 선의로 선사된 것이 아니다. 성소수자 운동은 차별과 착취에 맞선 광범한 저항의 일부로 자리잡을 때 성장할 수 있고 실질적 개혁도 성취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개혁만으로 충분한가 하는 질문도 던져야 한다. 설사 운동의 성과로 일부 개혁을 성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부과하는 한계 때문에 매우 불충분할 수밖에 없고 언제든 후퇴할 수 있다. 권력자 일부와 연대하는 방식은 성소수자 운동 내 일부 중간계급 활동가의 지위 향상을 가능케 할지는 몰라도, 대다수 성소수자들(노동계급 소속이다)의 처지를 개선시키지는 못한다.

미국에서 성소수자 차별금지법이 여러 주에 생기고, 2015년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것은 분명 진보였다. 하지만 그곳 성소수자 운동의 일부 지도자들이 동성결혼 합법화를 계기로 미국에서 동성애자 차별도 거의 끝났다고 본 것은 옳지 않았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적·경제적 차별과 편견은 여전히 뿌리 깊다. 그래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됐어도 결혼을 선택할 수 없는 동성애자들이 여전히 많다. 또한 동성결혼 합법화는 성소수자 권리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다.

핑크경제가 성장하고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면서 일부 중간계급 전문직 동성애자들이 상대적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는 동안, 차별을 완화할 물질적 부를 갖고 있지 못한 하층계급의 동성애자들은 차별이 가하는 고통과 압박에 크게 시달려 왔다.

트랜스젠더를 향한 지배자들과 우파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지난해 미국에서 공식 집계된 것만으로도 트랜스젠더 43명이 살해됐다. 지난해 8개 주에서 트랜스젠더에 적대적인 법안 25개가 통과됐고, 33개 주에서 130개 이상 발의됐다.

성소수자 차별은 다른 차별들과 마찬가지로 이윤 획득에 모든 것을 종속시키고, 이를 위해 노동자들을 이간시켜 각개격파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동역학에서 비롯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한 성소수자 해방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성소수자가 해방되려면 개혁을 위한 투쟁을 벌임과 동시에, 더 넓은 사회의 근본적 변혁에 대한 전망을 가져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성소수자 지지자들은 미국 대사관의 말뿐인 ‘성소수자 지지’를 반기며 환상을 조장해선 안 된다.

왜 미국은 성소수자 친구인 양 행세할까?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자들은 패권 유지를 위한 자국의 대외정책에 언제나 ‘민주주의’, ‘인권’ 등의 미사여구를 사용해 왔다. 조지 부시 2세는 아프가니스탄·이라크를 침공하며 여성 인권을 들먹였고, 바이든도 중국·러시아를 견제하고 동맹을 결속시키려고 ‘민주주의’를 운운하고 있다.

지배자들은 이런 레토릭으로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고, 국내외 피차별 대중의 동의를 구하려고 한다.

‘성소수자 인권’은 오바마 정부 들어 미국 대외정책에 사용하는 미사여구의 하나가 됐다. 2011년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국제 인권의 날’ 기념 유엔 연설에서 동성애자의 권리는 인권이라며, 동성 간 관계를 처벌하는 국가들을 비판하고 미국이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 있는 미국 대사관들이 6월에 무지개 깃발을 걸기 시작한 것도 오바마 정부 때부터다.

이것은 특히 미국이 벌이던 ‘테러와의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때 내세운 ‘성소수자 인권’은 이슬람 혐오를 부추기는 데 이용됐고, 이슬람 혐오는 ‘테러와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했다.

핑크워싱

이후 핑크워싱은 미국 지배자들이 사용하는 대외 전략의 하나가 됐다. 심지어 성소수자에 적대적이던 우파 트럼프 정부조차 2019년 이란을 압박할 한 수단으로 ‘동성애자 인권’을 내세우며 ‘동성애 비범죄화를 위한 세계적 캠페인’을 벌인 바 있다.

미국은 한국에서도 성소수자 친화적 이미지를 내세워 진보 운동 일부의 지지를 얻고 싶어 한다.

이를 통해서 미국이 진정으로 노리는 바는 분명하다. 미국은 대중국 견제를 위해 한국과의 동맹 강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한반도를 더 불안정하게 하고 군비 증강으로 내몰기 때문에 대중의 반감과 저항을 부른다. 이런 반감을 누그러뜨리며 한미동맹을 원활히 운용하기 위해 미국은 한국 대중의 동의를 일부 얻을 필요도 있다. 이런 일은 각 국가 대사관이 하는 ‘외교’의 일부다.

2019년 주한미국대사 해리 해리스는 대사관 건물에 붙이는 무지개 깃발의 크기를 3배로 키우고, 직접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한겨레〉나 〈경향신문〉은 이를 우호적으로 보도했다. 몇 달 뒤 그는 한국에 방위 분담금 5배 인상을 요구했고, 이에 항의하며 미국 대사관저를 ‘월담’한 학생들을 비난했다. 또, 미국의 이익을 위해 한일 지소미아(군사정보보호협정)를 유지하라고 한국 정부에 압박을 가했다.

고작 무지개 깃발 게양 같은 얄팍한 성소수자 지지조차 공짜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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