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퀴어퍼레이드(성소수자 자긍심 행진)가 수만 명 규모로 성대하게 열렸다. 종각-을지로입구역 간 도로 일대에는 오전부터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퀴어퍼레이드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서울광장에서 열리지 못했다. 서울시장 오세훈은 ‘책 읽는 서울광장’ 행사 개최를 이유로 퀴어퍼레이드 측의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했다.
퀴어퍼레이드는 1년에 한 번 성소수자가 모여 자신의 존재를 맘껏 드러내는 날이다. 그래서 이 행사는 성소수자 차별에 맞선 항의이기도 하다. 오세훈의 서울시가 2년 연속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한 진짜 이유다. 오세훈은 지난해 “동성애 반대”를 공개적으로 밝히며 우익에 구애했다.
이런 방해에도 행사는 활력 있게 치러졌다.
언제나처럼 10~30대 사이의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참가했다. 이 연령대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우호적 인식이 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퀴어퍼레이드 행진에 처음 참가하거나 비교적 최근에 참가한 젊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감격이 넘쳤다.
올해 퀴어퍼레이드는 제국주의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제기되는 와중에 열렸다.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 대사관들은 지난 10년 동안 한국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해 왔다.
노동자연대는 그 초기부터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대사관)들이 한국 최대 성소수자 행사를 자국의 악행을 가리고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이용하는 핑크워싱을 비판해 왔다. 그 때문에 주최측에게 부당한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상황은 달라졌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인종청소를 벌이는 것을 전 세계가 목격하고 있다. 지난주 이스라엘은 라파흐 피난민 텐트촌을 폭격해 사람들을 산 채로 불태웠다. 이런 이스라엘을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가 지원하고 있다. 미국은 라파흐 학살이 “레드라인을 넘은 것은 아니”라며 이스라엘을 두둔했다.
이에 맞서 세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강력하게 성장해 왔다. 자국의 이스라엘 지원에 반대하는 미국 대학생들의 캠퍼스 점거는 유럽 등으로 확산됐다. 최근의 라파흐 학살로 저항이 더 격렬해지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올해는 퀴어퍼레이드에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 대사관들이 참가하는 것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더 넓은 층에서(특히 대학생들) 더 크게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퀴퍼 조직위는 미국 등 대사관의 후원과 부스 철회 요구를 거부했다. 그래서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 대사관들은 오프닝 영상, 후원, 부스 등으로 참가했다.
주최측의 사회자는 주한 미국 대사관의 후원에 감사 인사를 하는 한편, “팔레스타인에서도, 전 세계 성소수자에게도 자유롭고 해방된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이런 억지 절충은 오히려 당사자들에게 모욕으로 들릴 수 있다.
대학 성소수자 모임들을 포함한 십수 개의 부스는 “미국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대학살을 지원한다. 우리는 미국의 핑크워싱에 이용당하지 않겠다”는 손팻말이나 리플릿을 비치했다. 한 성소수자 청소년은 연단에서 연설 말미에 “프리 프리 팔레스타인” 구호를 외쳤다.
이날 같은 시각에 열린 두 개의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 참가자들도 각각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미국·영국·독일 등의 핑크워싱을 비판하고 위선을 폭로하는 행동들을 했다.
한편,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퀴퍼 조직위가 다국적 제약회사인 길리어드 코리아에 부스와 행진 차량을 배정한 것에 대한 항의도 있었다. 길리어드 코리아는 특허 독점으로 HIV 예방약을 높은 가격에 폭리를 취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25회를 맞은 올해 퀴어퍼레이드는 행사의 외연이 넓어지는 한편, 그 안에서 날카로운 차이도 존재함을 보여 줬다.
동성혼 등 성소수자 권리가 거의 보장되지 않는 한국의 조건 때문에, 이런 모순이 아직 서구만큼 뚜렷하진 않지만 점차 심화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