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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배운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군국주의 비판
군국주의는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비롯한다

최근 반년 동안 〈노동자 연대〉가 꾸준히 다룬 주제 하나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제국주의 문제였다.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현 시기의 중요한 과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주요국들 간의 군사적 경쟁에 기름을 붓고 있다. 주요국의 지배자들은 지구상에서 공존하려면 군사적 경쟁을 격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듯이 경쟁적으로 군비 지출을 늘리고 있다.

미국이 여전히 세계 군사비 지출의 큰 부분(39퍼센트)을 차지하지만, 중국과 러시아도 무서운 기세로 군비 지출을 늘려 왔다.

최근에는 독일이 군비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1년치 국방예산을 1000억 유로(약 135조 원)로 책정했다. 지난해 국방예산의 갑절이 넘는다.

한국도 무기 경쟁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한국이 개발한 첨단 초음속전투기 KF-21 보라매가 첫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 한국의 무기 수출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데, 특히 문재인 정부 집권기인 2017~2021년 한국의 무기 수출은 2012~2016년에 견줘 무려 177퍼센트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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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광기 어린 무기 경쟁의 동학은 무엇이며, 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 점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진지하게 천착해 온 문제였다.

그중에는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의 혁명적 좌파 카를 리프크네히트(1871~1919)가 있었다. 리프크네히트는 정치 활동 내내 군국주의와 자본주의에 혁명적으로 반대한 결과 독일 지배계급과 사민당 지도부 모두로부터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돼 심지어 혁명 초기에 살해당했다.

리프크네히트는 1907년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라는 중요한 저작을 썼다(영역판: 2011, 208pp.).

당시 독일은 영국과 무기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 해군이 1906년 처음 진수한 드레드노트(20세기 초에 사용된 전함)는 새로운 군비 경쟁을 촉발시켰다. 독일은 1907년에 처음 드레드노트를 건조했고, 장차 더 늘릴 계획이었다.

그러자 당시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는 영국 해군의 우위를 유지하고 독일의 계획을 좌절시키려고 1억 파운드를 지출할 것이라고 주영 독일 대사에게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해군 증강 계획을 밝히며 이렇게 기염을 토했다.

“독일은 젊고 성장하는 제국이다. 독일의 무역은 세계적 규모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 독일은 매우 먼 바다에서도 이 무역과 여러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함대를 보유해야 한다.”

독일 사민당의 지도부는 자국의 무력 증강을 지지했다. 이에 반대해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드레드노트 추가 건조를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국회의원이 되고서도(1912~1918) 리프크네히트는 독일 지배계급과 소속 당 지도부를 거슬러 군국주의 반대 운동을 이어나갔다.

군국주의는 무엇이며 어떻게 맞설 것인가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는 1906년 만하임에서 열린 독일 청년노동자협회 제1차 총회에서 한 연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 책의 주요 목적은 청년들에게 사회주의적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바로 판매 금지당했고, 리프크네히트는 반역죄로 기소돼 1년 6개월 동안 수감됐다. (변호사이기도 한) 리프크네히트는 재판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베를린 노동자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자본주의적 군국주의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독일 해군의 전함 중대

리프크네히트는 이 책에서 군국주의의 역사적 부상,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난 군국주의의 양상, 사회주의자들(제1차세계대전 개전 전까지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었다)의 군국주의 반대 투쟁을 대략 살펴본다.

리프크네히트는 군국주의가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지적한다. “군국주의는 자본주의에 특유한 것이 아니다. 계급으로 분열된 모든 사회 질서에서 정상적이고 필연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군국주의는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군국주의와 다른 특징이 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보편적 군 복무 제도에 기반한 군대와 조응하며, 이 군대는 보통 사람들에 기반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군대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 적대적이거나 적어도 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군대이다. 상비군 형태를 띨 때도 있고, 민병대 형태를 띨 때도 있다. 상비군은 자본주의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로 나타나고, 심지어 정상적 형태로 나타난다.”

군국주의는 외국을 침략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내부 탄압 수단이기도 하다. “계급 분열이 날카로워지고 노동계급의 의식이 발전하면 군국주의가 언제나 전면에 부각된다.”

독일의 반전주의 판화가 케테 콜비츠의 작품,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

리프크네히트는 군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분리시키려는 시도를 비판했다. “사회민주주의[당시엔 혁명적 사회주의]는 군국주의만 떼어 내어 철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군국주의는 오로지 마지막 계급사회 시스템인 자본주의와 함께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다.”

따라서 “개별적인 병역 거부, 무력 행사에 대한 개별적 거부, 개별적 저항을 크게 강조”하는 아나키즘과 달리 “사회민주주의적 반군국주의는 계급투쟁에 기반”을 둔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혁명가들은 “계급투쟁과 이 투쟁에서 노동계급의 이해관계, 계급투쟁에서 군국주의의 기능, 계급투쟁에서 노동계급이 하고 있고 해야 하는 역할”을 설득해야 한다.

리프크네히트는 특히 청년들 속에서 반군국주의 활동을 해야 함을 크게 강조했다. 당시 독일의 군 복무는 의무였고, 사병들은 주로 노동계급과 농민으로부터 충원됐다. 대개 귀족 가문 배경에서 나온 장교들은 매우 야비하게 사병들을 괴롭혔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쓰여 있다.

“이 청년 노동자들은 사회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의 반군국주의에 포함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 과제를 수행한다면 그들은 이길 수밖에 없고 그럴 것이다. 청년을 얻은 사람이 군대를 차지한다.[강조는 원저자 리프크네히트의 것]”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 때문에 리프크네히트는 독일(프로이센) 국가의 탄압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민당 지도부에게도 미운털이 박혔다. 당 지도부는 리프크네히트가 사병들 속에서 반군국주의 주장을 하며 군국주의에 공공연하게 도전하는 것을 미친 짓으로 여겼다.

리프크네히트를 어릴 때부터 알아 왔고 자식처럼 아꼈던 아우구스트 베벨 당대표도 ‘모험주의적’ 제안이라며 리프크네히트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민당 지도부는 독일의 무력 증강을 반대하면 보통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당 지지가 올라가는 상황이었음에도(1907년 사민당의 제국 의회 의석수는 43석이었고, 1912년에는 110석으로 늘었다) 합법적 지위를 잃고 독일 지배자들이 사민당을 더는 ‘책임 있는 공당’으로 인정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누구인가?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1871년 8월 13일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1919년 1월 15일에 죽었다(우익 군장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출처 Library of Congress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사실상 독일 사민당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사민당 대표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카를의 대부였다. 그는 삶의 대부분을 사민당 내 급진좌파로 보냈다. 1919년에 살해당하기 몇 년 전에 사민당에서 분당해 나와 혁명적 정당 ‘스파르타쿠스동맹’을 창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군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정치 활동을 해 온갖 비방과 수감을 당했다. 반역죄 혐의로 두 번 수감됐고, 1916년에는 사민당 의원단에서 제명됐다.

리프크네히트의 인생 스토리는 오랫동안 극소수한테서만 지지를 받던 혁명적 좌파가 특정 상황에서는 돌연 광범한 지지를 받을 수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독일 사민당은 1914년 제1차세계대전 개전 전에는 반전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1914년 7월 25일까지도 사민당 지도부는 노동계급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지배계급은 평시에 당신을 억압하고 경멸하며 착취하고 총알받이로 이용하고 싶어 한다. 폭군의 귀에 들어가도록 도처에서 외쳐야 한다: 우리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 전쟁을 중단하라. 국제 형제들이여, 영원하라.”

그러나 사민당은 8월 4일 제국 의회에서 전쟁 수행 비용 마련을 위한 공채 발행에 찬성했다. 사민당 의원단 회의에서 리프크네히트와 다른 의원 13명은 전쟁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 14명은 그 뒤 당 규율의 적용을 피하려고 전쟁 찬성 당론을 지지했다.

1914년 12월 2일 의회에서 전쟁 공채 추가 발행 여부를 묻는 두 번째 투표가 있었다. 다른 모든 사민당 의원들은 정부 안을 지지했다. 하지만 리프크네히트는 이번에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반대표를 던졌다.

이 소식을 들은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크게 기뻐했다. “리프크네히트만이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의 대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대표한다. 나머지 독일 사민당은 냄새가 고약한 송장이다.”

고약한 냄새

그러나 리프크네히트는 용기를 발휘한 대가로 큰 고초를 겪었다. 그는 국회의원이었는데도 군대에 징집됐다. 그가 전투 참가를 거부하자 군 지휘부는 동부 전선에서 사망한 병사들의 시신을 매장하는 임무를 맡겼다. 리프크네히트는 건강이 매우 나빠져 귀국했다.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 주위에 모인 사민당 내 소수 반전파는 대중의 애국주의적 히스테리에 맞섰지만, 오랫동안 고립되고 정치의 주변부로 밀려나 사태 전개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1915년 베를린에서 두 번의 반전 시위를 조직했다. 처음에는 100여 명이 모였고 두 번째는 1500명이 참가했다.

1916년 초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사민당 내 좌파 당원들을 모아 스파르타쿠스동맹을 창립했다.(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 73~71년 로마에 맞서 전설적인 노예 반란을 이끌었던 검투사의 이름이었다.)

사민당의 규율에서 벗어나야만 진정한 사회주의 전술·전략을 제시할 수 있음이 분명해졌다. 스파르타쿠스동맹은 반전 선동을 하고, 불법 유인물을 반포해 노동자들과 전선의 병사들의 불만을 서로 연결하고자 했다.

1915년 5월 리프크네히트는 “주적은 국내에 있다”는 유명한 제목의 리플릿을 노동자들과 병사들 속에서 광범하게 반포했다.

“국제 노동계급 투쟁은 우리 시대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다. 독일 대중의 주적은 독일에 있다: 독일 제국주의, 독일의 전쟁 정당, 독일의 비밀 외교.”

스파르타쿠스동맹은 1916년 메이데이에 맞춰 반전 시위를 조직했다. 불법 집회였는데도 1만여 명이 모였다. 개전 이래 최초의 규모 있는 반전 시위였다. 리프크네히트는 “전쟁을 반대하라! 정부를 타도하라!” 하고 연설했다.

국회의원 면책특권이 있었음에도 그는 구속됐다. 그리고 군사법정에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2년 반 동안 수감됐다.

학살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전선의 야만이 국내로 옮겨졌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불만도 늘었다. 리프크네히트가 선고받던 날 군수공장 노동자 5만 5000명이 파업했다!

이 노동자들은 사민당 평당원들 사이에서 늘어나던 전쟁에 대한 불만으로 새롭고 폭넓게 형성된 좌파의 일부였다.

독일의 급진좌파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런 분위기를 묘사하는 시를 썼다. “전쟁으로 유혈이 낭자하지만 수프는 부족했다 / 그리고 수프가 부족하자 알게 됐다 / 전쟁은 당신의 전쟁이 아니다 / 수프를 위한 투쟁이 시작되다.”

1918년 10월 많은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반정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정부는 압력을 받았고 리프크네히트를 석방해야 했다.

11월에 4년 간의 전쟁 동안 쌓인 비통함이 폭발했다. 킬과 빌헬름스하펜 항구의 해군 사병들이 반전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 전역에서 거리 항쟁과 파업 물결이 일었다. 전선에서 사병들은 총을 내려놓고 전쟁을 거부했다.

며칠 만에 황제가 쫓겨나고 정부가 퇴진했다. 노동자 혁명이 제1차세계대전을 끝낸 것이다. 노동자들은 보통선거권, 8시간 노동, 단체교섭권 등 주요 개혁도 성취했다.

그러나 사민당 지도자들은 끝까지 혁명의 분출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들은 안전한 방향으로 운동을 이끌려고 운동의 전선으로 달려갔다.

1919년 1월 초 (설익은) 봉기 시도는 패배했다. 그 결과 1월 15일, 동갑내기 친구이자 동지였던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사민당 지도부의 사주를 받은 자유군단(우익 민병대)에 붙잡혀 살해됐다.

리프크네히트는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이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데서 필수불가결한 무기임을 몸소 실천한 혁명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