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잠수함에 쓸 돈을 노동자에게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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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에게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받은 이재명 대통령은 받고 싶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뻐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미안보협의회의 참석차 방한한 미국 전쟁부 장관 헤그세스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군의 역량이 크게 강화돼 한반도 방어를 한국이 주도하게 되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방위 부담도 경감될 것이다.”
민주당은 축제 분위기다. 정청래 대표는 “오랜 숙원”을 이뤄낸 “쾌거”라며 핵 잠수함 건조 승인을 받은 것을 환영했고, 전현희 의원은 이재명 대통령을 “외교 천재”라고 찬양했다.
중도좌파 언론 〈한겨레〉, 〈경향신문〉도 (주변국과의 관계를 우려하면서도) 핵잠수함 건조 승인 받은 것을 반기고 있다.
그러나 핵잠수함은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한껏 키울 위험천만한 무기다. 핵잠수함을 반대해야 한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오판을 유발하는 데 탁월한” 핵잠수함의 위험성을 이렇게 지적했다. “막강한 공격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장시간 잠항할 수 있기에 상대가 언제 어디서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상대의 핵잠수함이 사라질 때마다 위기 관리의 어려움 속에 군사적 위기가 고조될 우려가 크다.”
‘국민주권 정부’를 표방했음에도 이재명 대통령은 그토록 위험한 핵잠수함을 어떠한 공론화 과정도 없이 도입하려 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중앙일보〉 보도를 보면, 핵잠수함 한 척의 건조 비용은 3조 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4∼6척을 건조할 경우 12조∼18조 원이 필요하다. 운영·유지에도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노동조건 개선, 주거, 의료, 교육, 복지에 쓸 수 있는 예산을 핵잠수함 도입에 쾌척하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핵잠수함 도입 시도는 갈수록 첨예해지는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군비 경쟁과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데 일조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평화 염원을 배신하는 것이다.
윤석열 탄핵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윤석열 정부가 미국 제국주의를 노골적으로 지원하며 군국주의를 강화하는 것에 대부분 반대할 것이다.
그런데 이재명 정부는 윤석열의 친미·친일 외교에 반대한 사람들의 염원을 배신하고 있다. 한·미·일 군사 동맹을 위해 ‘위안부’ 합의와 강제동원 합의 등 대일 합의를 인정했고, 중국을 겨냥한 한미·한미일 연합 훈련(전쟁 연습)을 지속하고, 미국 해군력 강화를 위한 ‘마스가’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대대적 군비 증강에 나서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왕관까지 선물하면서 “왕은 없다”는 수많은 미국인들을 거슬러 트럼프에게 아첨하고, “북한과 중국의 잠수함을 추적”해야 한다며 트럼프를 설득해 핵잠수함 건조 승인까지 받아 냈다. 윤석열 정부에 이어 이재명 정부도 제국주의 강대국들간 쟁투를 격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가 미국 제국주의를 지원하고 국방비를 증액하는 것은 주로 미국의 압박 때문이 아니다. 이재명 정부는 미국이 요구하는 ‘한미동맹 현대화’를 “국방력을 업그레이드시킬 좋은 기회”(조현 외교부 장관)로 삼아 미국 제국주의에 협력하기를 선택하고 있다. 미국 제국주의의 힘이 예전만 못한 상황에서 한국 자체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이재명 정부가 핵연료 생산도 승인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미국의 핵우산이 약화될 것을 대비해 핵무장 잠재력을 갖추려는 것이다.
독일, 영국, 일본 등 미국 동맹국들도 트럼프의 강한 촉구로, 그리고 이를 기회 삼아 군비를 경쟁적으로 대폭 늘리고 있다.
한국 지배계급의 숙원
한국 지배계급에게 핵잠수함 승인 받아 낸 것은 그야말로 희소식이다.
대기업들의 언론 〈한국경제〉는 이재명 대통령이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받아 낸 것을 “대담한 승부수”라며 이렇게 호평했다. “자칫하면 한국 혼자만 디젤 잠수함으로 영해를 지켜야 하는 처지가 될 수 있다. … 핵무장 우려를 덜어주면서 미국이 원하는 한국의 자체 방위력을 높이고 중국 견제에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 이 대통령의 동맹외교, 실용외교가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다.”(10월 30일자 사설)
〈조선일보〉 주필 양상훈은 황홀감마저 드러내며 이렇게 썼다.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미 대통령 앞에서 ‘북한 중국 잠수함 추적을 위해 원자력 추진 잠수함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순간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 ‘꿈인가 생시인가’라는 게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국힘은 안보 의제에서 치고 나가는 이재명 정부에게 허를 찔렸다. 핵잠수함 도입은 이번 대선에서 국힘 대선 후보들의 공약이었는데, 이재명 정부에게 빼앗긴 셈이다.
〈노컷뉴스〉 보도를 보면, 윤석열 정부의 외교부에서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했던 국힘 의원 김건은 이렇게 아쉬움을 토로했다. “국민의힘은 원자력 잠수함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지속해서 냈지만 민주당은 대선 공약으로 내지도 않았다. 야당의 그런 노력까지 쌓여 이번 성과를 이룬 것[이다.] … 협상이 타결되는 시점에 누가 정권을 잡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국민의힘은 안보 문제에서 밀릴 수 없다는 듯 “기술 자립”과 “국내 건조”를 외치며 이재명 정부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 ‘성과’를 깎아내리고 있다. 이에 질세라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국내 건조가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핵잠수함 도입에 누가 더 진심인지 겨루고 있는 것이다.
역대 한국 정부들은 어느 당이 집권하든 군사력 강화에 매진해 왔다.
〈조선일보〉 주필 양상훈은 민주당의 실천을 칭송하며 이렇게 썼다. “우리가 유럽에 떨어지지 않는 방위산업 기술 국가, 세계 최고 수준의 정밀 탄도미사일 국가가 된 것은 해방 후 지금까지 역대 정부가 없는 살림, 빠듯한 재정에도 막대한 군비를 쓰며 군사력을 강화해 온 덕분이다. 이재명 대통령까지 포함하면 진보 정부 집권이 20년이다. 만약 민주당 대통령들이 군사력 강화에 제동을 걸었다면 지금의 우리 군사력과 막강한 미사일 전력, 원잠[핵잠수함 — 인용자]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는 자본주의 국가들 간 경쟁 시스템 속에서 한 국가의 군사력은 그 나라 자본가들이 세계시장에서 벌이는 경쟁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세계시장에서 미국 기업의 경쟁력은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러시아 혁명가 니콜라이 부하린은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의 고전 《세계경제와 제국주의》에서 자본주의 국가들 간 군비 강화 경쟁이 일어나는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군사력이야말로 서로 투쟁하는 ‘국민적’ 자본가 집단들의 최후 수단이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증가하는 국가 예산의 더욱더 큰 몫이 군국화의 완곡어인 ‘방위 목적’에 사용된다.
“무기의 존재가 전쟁의 주요 원인이나 동력이 아니라(비록 무기 없이는 전쟁이 불가능하지만) 경제적 충돌의 불가피성이야말로 무기의 존재 조건이다. 이 때문에, 경제적 충돌이 이례적으로 격렬해진 우리 시대에 미친 듯한 군비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도 자본주의 국가간 경쟁의 맥락 속에서 한국 국가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핵잠수함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핵잠수함, 어떻게 반대할까?
진보·좌파 계열에서는 이재명 정부의 핵잠수함 도입 시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궁금하게도 정의당, 노동당은 이 기사를 쓰는 11월 7일까지 비판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그런데 핵잠수함 도입에 대한 진보·좌파의 비판에는 약점과 한계도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군사 전략에 핵잠수함이 무용하다는 비판이 있다. 한반도 연해를 방어하는 데는 디젤 잠수함으로 충분하다거나, 서해는 수심이 얕아 핵잠수함을 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한국 지배계급은 핵잠수함을 단지 한반도 주변에서만 쓰려고 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역대 한국 정부들은 모두 ‘연안 해군’을 넘어 ‘대양 해군’을 꿈꿔 왔고, 이를 위한 핵심 수단으로 핵잠수함을 원했다.
핵잠수함 “무용”론은 핵잠수함을 도입하는 실제 목적과 대결하지 않기에 금세 힘을 잃게 된다.
이재명 정부의 핵잠수함 도입이 “진정한 자주국방”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다. 반미자주파 경향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자주국방론은 동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군비 경쟁과 군사적 긴장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 대응하려면 불가피하게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는 논리 앞에 취약해진다. 이재명 대통령이 바로 그런 논리로 ‘자주국방’을 말하고 있다. “전 세계가 갈등 대립을 넘어 대결과 대규모 무력 충돌을 향해 간다. … 강력한 자율적 자주국방이 현 시기 우리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반미자주파 경향은 또한 핵잠수함 도입이 ‘대미 종속’을 심화시킨다고 비판한다. 핵잠수함의 연료, 운용, 유지, 정비 등 모든 과정에서 미국의 통제를 따라야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재명 정부가 미국 제국주의를 지원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짓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 이재명 정부는 한국 자본주의의 이익(“국익”)을 위한다며 능동적으로 미국 제국주의를 지원하고 국방비를 증액하는 것이다.
‘대미 종속’은 현실과 맞지 않는 개념이다.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세계 5위의 군사력을 갖춘 군사 강국이다.
미국 트럼프 정부가 한국 이재명 정부를 압박하는 것은 맞지만, 세계 1위 경제·군사 강대국의 압박을 받는 게 다 ‘종속’인 것은 아니다. 독일, 영국, 일본 같은 국가들도 미국의 압박을 받지만,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기에 미국 제국주의와의 협력을 선택하는 것이다. 국가들 간의 불균등한 발전과 위계 질서 속에서 강대국의 압박은 늘상 있는 일이다. 또한 종속국과 지배국(패권국, 중심국)은 ‘협상’하지 않는다. 후자가 전자에게 명령하지.
이재명 정부가 한국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한다며 능동적으로 미국 제국주의를 지원하며 군비 증강에 나서고 있기 때문에,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은 이재명 정부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대미 종속’을 강조하는 것은 한국 자체의 국방력을 강화하려는 자국 정부를 향해야 할 공격의 초점을 흐리는 효과를 낸다.
‘한국 대 미국’의 (좌파적) 민족주의의 관점이 아니라, 자국 지배계급의 전쟁 노력에 맞서는 계급적 관점이 필요하다.
어디에 힘을 쏟아야 할까?
반미자주파 경향은 강한 어조와 수위 높은 표현으로 이재명 정부의 친미주의와 군비 증강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반미자주파 경향은 이재명 정부의 친미주의를 비판할 필요성과 민주당과의 전략적 연대(민중전선 전략) 사이에서 모순이 커질 것이다. 예를 들어, 진보당 안팎에서는 지방선거가 다가올수록 이재명 정부에 대한 비판을 자제해야 한다는 압력이 커질 것이다.
지금도 비판 수위와 행동 사이에 간극이 있다. 진보당은 이재명 정부의 핵잠수함 도입 시도에 반대하면서도, 국회에서의 논의와 검증을 주되게 강조하고 있다. “우리 국민의 우려와 걱정이 여전한 이때, 진보당은 지금부터 ‘국회의 시간’에 집중하겠습니다.”(홍성규 진보당 대변인)
물론 진보당이 원내 좌파 정당으로서 국회에서 군비 증강과 핵잠수함 도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필요하고 옳은 일이다(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핵잠수함 “숙원”이 이뤄진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는 민주당 정치인들을 설득(설득이 일부 가능하다손 치더라도)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할까? 핵잠수함 도입과 군비 증강에 반대하는,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도록 고무하고 조직하는 일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20세기 초 독일의 마르크스주의자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독일 제국의회 의원 신분으로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했다. 제1차세계대전 때는 사민당 의원단에서 제명되고 수감되는 등 탄압을 당했지만, 혁명적 국제주의의 원칙을 저버리지 않고 자국 정부의 군비 증강과 전쟁 노력에 반대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인민의 진정한 적은 그들 자신의 국가 안에 있다. 독일인들의 주적은 독일에 있다. 독일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는 독일 정당들, 독일의 비밀 외교가 바로 그 주적이다.”
낭비적이고 위험천만한 군비 경쟁을 벌이고 있는 자국 지배계급에 맞서는 저항이 일어나야 한다. 한국의 좌파들은 (미국 제국주의에 협력하고 군비 증강에 나서는) 자국 정부를 조금치라도 지지하지 말아야 한다.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강조했듯이 “주적은 국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