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의 파시즘 분석과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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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12월 28일에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를 다듬어 발표하는 것이다.
최근 10여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파시즘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얼마 전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형제당의 대표인 조르자 멜로니가 총리가 됐습니다.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 꼭 100년 만에 파시스트 총리가 탄생한 것입니다.
올해 4월 프랑스 대선에서는 파시스트 정당인 국민연합의 후보 마린 르펜이 1차 투표에서 23퍼센트로 800만 표 이상을 득표했고, 결선에서는 무려 1300만 표 이상을 득표했습니다. 2017년 대선보다도 더 많이 득표한 것입니다.
이렇게 파시즘이 성장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1922년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한 뒤에 벌어진 일을 돌아보면, 최근에 파시즘이 다시 성장하는 것은 실로 섬뜩한 일입니다. 파시즘을 이해하고 대처할 방법을 아는 것은 사활적으로 중요한 일이 됐습니다.
오늘 발제에서는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의 분석을 살펴봄으로써 그 실마리를 찾으려고 합니다. 트로츠키 평전 3부작을 쓴 아이작 도이처는 트로츠키의 파시즘 분석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파시즘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분석 가운데 유일하게 일관되고 현실적인 분석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망명지에서 비춘 등대
트로츠키는 1929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의 나치당, 정식 명칭은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을 분석하는 글을 가장 많이 썼습니다. 당시 독일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가 국제 정세의 핵심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1918년에 시작해 1923년까지 이어진 독일 혁명이 패배한 1920년대 중반, 독일 자본주의는 일시적으로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한편으로, 세계경제의 호황 덕분에 많은 외국 자본이 독일로 유입되며 경제 상태가 좋아졌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혁명이 실패한 뒤에 들어선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의회제 민주주의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바이마르공화국을 떠받친 가장 중요한 세력은 개혁주의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 줄여서 사민당이었습니다.
사민당은 걸출한 혁명가들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살해를 방조하는 등 혁명의 패배에 한몫했습니다.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사민당은 단독으로 또는 다른 정당들과 연립해 중앙 정부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프로이센 주정부를 1920년부터 1932년까지 운영했습니다. 프로이센주는 당시 독일 인구의 3분의 2가 살고, 수도 베를린을 포함하는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1929년에 시작된 세계적 대불황은 독일에 엄청난 타격을 줬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면, 1929년에는 130만 명이던 실업자가 1930년에는 300만 명으로, 1931년에는 430만 명으로, 1932년에는 510만 명으로 급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마땅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의회제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팽배했습니다. 심각한 불황과 그것이 낳은 절망 속에서 나치당이 급성장했습니다. 1928년에만 해도 득표율이 5퍼센트가 안 되던 나치당은 1930년에는 18퍼센트를 득표하며 제1 야당이 됐고, 1932년에는 37퍼센트를 득표하며 제1당을 차지했습니다.
나치당은 선거에서만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나치의 폭력 조직인 돌격대는 이미 1931년에 10만 명으로 성장했고, 1932년 초에는 30만 명으로, 그해 7월에는 40만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히틀러의 집권이 필연이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노동계급 정당인 사민당과 공산당이 얻은 표를 합치면 나치당보다 많았습니다.
더구나 노동자 조직들이 건재했습니다. 1928년 독일 노총 ADGB의 조합원은 500만 명이나 됐습니다. 그리고 사민당은 당원이 무려 100만 명이었습니다. 공산당도 당원이 13만 명이나 됐습니다.
노동계급의 힘은 단지 숫자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의 생명줄인 이윤을 생산하기 때문에, 투쟁의 영역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은 훨씬 더 강합니다.
그런 노동계급 대중에게 올바른 지도력이 제공됐다면, 나치의 성장을 저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 노동계급은 방어는 물론 거기서 더 나아가 혁명적 투쟁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후의 역사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당시 트로츠키는 소련에서 추방돼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스탈린의 박해와 중상모략과 방해 공작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트로츠키는, 앞에서 제가 인용한 아이작 도이처 말대로 파시즘에 대한 일관되고 현실적인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트로츠키의 날카로운 통찰은 암흑기에 어둠을 비춘 등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파시즘은 아래로부터 반혁명이었다
트로츠키는 파시즘을 아래로부터의 반혁명 또는 반혁명적 대중 운동으로 봤습니다. 대중 운동이라는 점에서 파시즘은 여느 권위주의 정치 세력과는 다른 특성이 있었습니다.
파시즘의 주된 지지 기반은 농민, 중소 상공인, 전문직 등 중간계급이었습니다. 중간계급은 ‘계급’이라고는 해도 실제로는 공통된 이해관계가 극히 적은 파편성이 특징인 집단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의 양대 계급인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서 동요합니다. 물론 보통의 시기에는 자본가 계급의 지배와 이데올로기에 더 친화적입니다.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 같은 엄청난 위기 시기에는 노동계급은 물론 중간계급의 삶도 망가집니다. 중간계급의 하층은 노동계급보다 더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노동계급은 노동조합 같은 조직으로 저항하면서 소득과 생활조건을 일부 지킬 가능성이 있지만, 중간계급은 대부분 그럴 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독일은 ‘책상을 주먹으로 꽝꽝 내려치고 싶은’ 울분이 사회 전반에 가득한 때였는데, 자본가 계급이든 노동계급이든 대안을 제시하고 그만한 힘을 보이는 쪽이 없었습니다. 자본가 계급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들은 전통적 지배 수단 갖고는 위기도, 저항 가능성도 끝낼 수 없었습니다.
노동계급 쪽에서도 무능한 지도부들 때문에 뾰족한 해법이 나오지 않았고, 투쟁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1928년부터 1932년까지 독일의 파업 일수는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심각한 경제 불황이 노동자들의 투쟁 정신을 고취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감과 사기를 떨어뜨렸던 것입니다.
중간계급의 하층 사람들은 때때로 임금노동자가 될 수 있지만, 당시 독일은 기존의 취업 노동자들도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전망이 희박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은 절망에 빠진 중간계급을 끌어당기며 커다란 대중 운동을 건설했습니다.
그 모든 고통의 주범은 바이마르공화국이라는 인식, 그리고 바이마르공화국의 주춧돌인 사민당과 노동운동에 대한 적개심이 중간계급 대중을 나치 주위로 모이게 한 동력이었습니다. 나치 운동의 형성과 성장에서 히틀러의 개성이라는 요소는 광기에 빠진 중간계급 사람들의 분노를 한데 모으는 것 정도의 구실만을 했습니다. 트로츠키는 “중간계급 사람들이 모두 히틀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히틀러라는 입자는 모든 분노한 중간계급 사람들 안에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나치와 그 지지자들은 동네 호프들을 근거지 삼아 그곳을 ‘막사’라고 부르며 회합을 열고, 거리 행진을 통해 세를 과시했습니다. 그러면서 좌파와 소수 인종들을 공격했습니다.
이렇게 지역사회에 깊숙이 침투하는 네트워크와 능동적인 대중 운동을 동시에 구축하는 파시즘은 노동계급 조직들을 효과적으로 파괴할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시즘은 노동계급 전체에 특별하고도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시작해 1927년 중국에까지 이른 혁명적 흐름에 최종 마침표를 찍은 것이 독일 나치의 역사적 기능이었습니다. 트로츠키는 바로 이 때문에 독일 노동계급의 패배는 전 세계 노동계급의 패배가 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유대인 혐오
이 대목에서 파시즘 일반과 특히 독일 나치당의 이데올로기에서 중요했던 유대인 혐오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나치가 유대인 혐오를 개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8~19세기에 자본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사회적 위기에 대처하며 각국 지배계급은 유대인을 속죄양 삼았습니다. 나치는 이를 더 공공연하고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시켰을 뿐입니다.
유대인 혐오는 나치의 모순되고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에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독일 경제를 파탄 낸 국제 금융 자본가들 중에도, 지도적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도 유대인이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혐오는 오늘날의 파시즘에게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형태는 약간 바뀌었습니다. 현재 파시스트들은 서구에서 가장 첨예한 인종차별인 이슬람 혐오를 주된 무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슬림이 유럽을 침공해 이슬람화한다는 거짓 선동을 합니다. 이 이른바 무슬림 ‘침공’의 배후에 유대인들의 비밀결사체가 있다는 식으로 주장합니다.
공동전선 vs. 종파주의
트로츠키는 파시즘이라는 위협에 맞선 대안으로 공동전선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노동자들이 단결한다면 나치의 성장을 능히 저지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런 방어에 성공한다면 중간계급을 파시즘으로부터 떼어 내고 오히려 그들의 지지를 얻으며 노동계급이 공세로 전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트로츠키의 전망은 공상이 아니었습니다. 히틀러가 총리가 된 뒤에도 저항의 가능성은 있었습니다. 공산당이 불법화되고 간부 수천 명이 수감된 뒤인 1933년 3월에 치러진 총선에서도 사민당과 공산당은 합쳐서 1200만 표를 얻었습니다. 나치당은 부정을 저지르고도 1700만 표를 얻는 데 그쳤습니다.
그 모든 가능성이 유실되고 이렇다 할 저항 없이 히틀러가 권력을 잡게 된 것에는 당시 독일 노동운동의 지도부들이 저지른 치명적 오류가 있었습니다.
사민당의 지도자들은 완전히 무기력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헌법 질서 수호만을 얘기했습니다. 노동자들이 법을 잘 지켜서 헌정 질서를 안정화시키면 나치는 자동으로 소멸될 것이라는 허황한 꿈을 꿨습니다. 진정한 위기 앞에 몸을 움츠리는 개혁주의의 본능이 발동한 것입니다.
사민당은 1932년 7월, 사민당이 잡고 있던 프로이센 주정부를 우파 정부가 무너뜨렸을 때도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헌법을 어기는 일이었는데도 말이죠. 이 사건은 독일 지배계급이 나치당에 권력을 넘기는 모험을 벌였을 때 일어날 저항의 수준을 가늠해 보려 저지른 쿠데타였는데, 사민당은 그냥 방임했습니다.
트로츠키는 사민당 지도자들에게는 그 어떤 기대도 걸지 않았습니다. 트로츠키에게 중요했던 것은 적극적이든 미온적이든 여전히 사민당을 지지하는 노동자 수백만 명이었습니다. 그 노동자들은 나치에 맞선 저항에 나설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트로츠키는 사민당을 지지하는 노동자 수백만 명을 움직일 핵심 고리는 공산당이라고 봤습니다. 비록 스탈린주의에 종속돼 있지만 혁명적이고 당원이 10만 명 이상인 대중 정당이었던 공산당이 적절한 전술을 택한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공산당을 향해 계속해서 공동전선 전술을 구사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트로츠키가 말한 공동전선은 제한된 목표를 둘러싼 공동 행동을 위해 혁명가들이 개혁주의자들과 맺는 협약을 뜻합니다. 공동전선은 강령과 이데올로기의 통일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공동의 대중 행동을 건설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치에 맞선 공동전선을 펴려면 공산당은 사민당 지도자들을 향해 공개적으로 협력을 제안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공산당은 정반대로 나아갔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독일에서 노동계급 투쟁은 고양되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공산당은 자본주의가 최종적 쇠망에 빠지는 때라면서 공세를 주장했습니다. 그런 시기에는 사민당이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기능을 하므로 파시즘과 본질이 동일하다고, 그러므로 공산당의 주적은 사민당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공산당은 노동조합 영역에서도 사민당의 영향을 받지 않는 별도 노조를 만들려 했습니다.
트로츠키는 사민당이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는 구실을 하는 것은 맞지만 파시즘과는 지지 기반이 다르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파시즘의 목표는 노동계급 조직들을 파괴해 노동계급을 원자화시키는 것이므로 사민당과 파시즘의 이해관계는 정면 충돌한다고 반박했습니다.
결국 공산당의 노선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길이고 사민당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유지되는 비결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혁명적 조직 부재의 아쉬움
트로츠키의 분석과 주장은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등대와도 같았지만, 그 불빛을 따라 운항하는 배는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트로츠키가 전망했듯이 독일 노동계급 전체, 더 나아가 전 세계 노동계급에게 참담한 비극이었습니다.
당시 독일에서 트로츠키 지지자들은 수백 명 규모였습니다. 그나마 노동계급 속에 뿌리 내린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10만 명 이상의 공산당을 움직임으로써 100만 명 이상의 사민당을 움직이고, 그래서 결국 수백만 노동계급을 움직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럼에도 트로츠키의 노력은 후일 헛되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와 2000년대 영국, 그리고 바로 몇 년 전 그리스 사회주의자들은 파시즘의 성장을 성공적으로 저지했습니다. 그 밑바탕에는 트로츠키가 남겨 놓은 분석이 있었습니다.
물론 1930년대 초의 패배는 너무나 통탄스럽습니다. 올바른 이론과 지침도 그것을 현실에 구현할 세력이 있을 때 빛이 나는 법입니다. 그런 세력은 지금부터 건설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에 시청자 여러분이 함께하기를 절실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