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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자 멜로니의 이탈리아 총리 등장을 계기로 무솔리니의 집권을 돌아보다

1922년 ‘로마 진군’을 벌이는 무솔리니와 그 지지자들. 로마 진군은 엉망진창이었지만, 좌파들의 무능 덕에 파시스트들은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

100년 전인 1922년 10월 28일 ‘로마 진군’으로 베니토 무솔리니가 집권했다. 그러나 실제로 ‘진군’한 것은 아니었다. 파시스트 대부분은 제때 로마에 도착하지 못했고, 도착한 자들도 폭우에 쫄딱 젖어 꾀죄죄한 몰골로 비척거렸다. 파시스트 무장 집단들은 크레모나와 피사에서 참패를 겪었다.

피렌체에서 파시스트들은 습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탈리아 공군 최고 지휘관 아르만도 디아스가 건물 안에서 무솔리니 지지 연회를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습격은 정부군도 참가하는 열병식으로 황급히 대체됐다.

로마에서 이탈리아 국왕은 응전을 허가했다. 그에 따라 철도가 차단되고 도로가 봉쇄됐다. 그러나 국왕이 계엄령 선포를 거부하자 총리가 사임했다. 1만 2000명 병력이 로마를 지키고 있었지만 이들은 무력을 쓰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국왕은 한 우익 정치인에게 정부 구성을 요청했지만, 무솔리니가 그 정부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자 국왕은 무솔리니를 총리로 지명했다.

쿠데타는 모두가 빤히 보는 앞에서 공공연하게 진행됐다. 따지고 보면, 수도 로마로 “진군”한 것은 무솔리니를 태우고 밀라노에서 출발한 침대 열차뿐이었다.

쿠데타가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은 1919~1920년 ‘붉은 2년’ 동안 벌어진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 운동에 기업주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붉은 2년’ 당시 이탈리아의 기업주들이 어찌나 혼비백산했는지, 자동차 기업 피아트의 사장은 자기 공장을 노동자들에게 넘기겠다고 제안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좌파는 이를 성공적인 혁명으로 발전시키지 못했고 이는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 역사가 존 풋은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안팎의 100만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추산한다.

그보다 몇 년 전 벌어진 제1차세계대전은 이탈리아에 재앙을 몰고 왔다. 하지만 이때 맹렬한 산업 발전이 시작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날 때쯤 이탈리아의 금속 노동자 수는 50만 명에 달했고, 노동조합원 수는 300만 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물가 상승 때문에 생활 수준이 열악해졌고 식량 부족이 심각했다.

이에 대응해 노동계급의 전투성이 분출해 정치 질서를 산산조각 냈다.

이탈리아 북부의 산업 자본가들은 자유당을 자신들의 당으로 여겼다. 가톨릭 정당 연합은 더 오래된 지배계급인 지주들을 대변했다. 가장 막강했던 정치인 조반니 졸리티는 그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득을 봤다.

졸리티는 이탈리아 사회당(PSI) 지도부와 주요 노동조합 연맹인 이탈리아 노총(CGL)을 포섭하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무솔리니는 제1차세계대전을 지지한 것 때문에 사회당에서 제명됐다. 무솔리니는 조선업 기업주들과 영국 첩자들에게서 돈을 받아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킬 새 신문을 창간했다.

1919년 4월 파시스트가 조직한 폭력배가 최초의 공격을 감행했다. 사회당 기관지 〈전진〉의 밀라노 사무실에 불을 질렀고, 네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19년 9월 이탈리아군은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아드리아해 북부 항구 도시 피우메에서 철수했다. 민족주의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여기에 항명하는 병사 2000명과 함께 피우메시를 점거했다.

정부는 이들과 협상을 벌이는 것으로 대처했고, 이는 부상하던 파시스트들에게 순풍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기업주들은 파시스트를 집권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이탈리아 파시즘을 연구한 한 역사가는 이렇게 지적했다. “부유층이 수세에 몰려 있는 동안, 파시즘은 대단찮은 성공조차 거두지 못했다.” 1920년 9월, 금속 노동자들의 사용자들은 파업에 직장폐쇄로 대응했고, 이에 노동자 50만 명이 공장을 점거하고 노동자 통제를 선포했다. 총선에서 사회당은 156석을 얻어 최대 단일 정당으로 부상했다.

토리노에서 노동자들의 점거는 이중권력의 요소를 품고 있었다. 노동계급 권력이 공식 정부의 권력에 맞섰고, 무장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방어했다.

밀라노에서 열린 [노총 지도자들과 사회당 지도자들의] 공동 회의에서 노총 지도자들은 사회당 지도자들에게 혁명을 일으키러 나서 주면 자신들의 권한을 넘겨 주겠다고 제안했다. 사회당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대신 정부는 산업을 통제할 노사 공동위원회 설립을 약속하는 합의를 맺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동조합은 공장 점거를 끝냈다.

한편, 농민들은 토지를 점거했고 농업 부문 일용직 노동자들은 전투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해 많은 양보를 얻어 냈다.

지주들은 정부가 자신들을 지켜 주지 않는다고 불평했고, 산업 자본가들은 노동자 통제라는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태세가 돼 있었다. 이제 두 집단 모두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이 거느린 무장한 깡패에 기대를 걸었다. 그 결과, 부자들의 돈이 무솔리니에게 흘러갔다.

1920년 겨울에서 1921년 봄에 이르는 시기가 결정적이었다. 파시스트 무장 집단들은 사회당 지지자들을 상대로 체계적인 폭력 테러를 자행했다.

파시스트들이 군부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도 중요했다. 참모총장은 6만 명에 이르는 제대 장교들을 파시스트 무장 집단에 가입시키라고 지시했다.

경기가 둔화하자 고용주들은 공세에 나섰다. 1921년 1월에는 실업자가 60만 명에 이르렀다. 고용주들은 정부가 감세와 보조금으로 자신들을 구제해 줘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무솔리니는 사장들의 요구 일체를 자신의 것으로 차용해, 사회당과 노총을 포섭하는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한 지배계급의 불만을 모아 내는 데 주력했다.

주류 우파 역시 파시스트들을 포섭하려 했다. 파시스트를 의회 정치로 길들일 수 있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1921년 봄 졸리티는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공표해 “국민연합”의 후보로 출마했는데, 이 선거 연합에는 무솔리니도 포함돼 있었다. 선거 결과 파시스트 30명이 의원으로 선출됐다.

1922년 초에 이르면 수천을 헤아리는 파시스트 대열이 농촌 지역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었다. 1922년 8월에 파시스트들은 밀라노와 리보르노의 시청을 점거할 만큼 자신감이 높았다. 두 도시의 시의회 모두 사회당이 주도했다.

1922년 8월 잠시나마 파시스트들을 막아낸 파르마의 노동자들. 그러나 사회당은 이런 움직임을 만류하고 공산당은 협력을 거부했다

파시스트들은 제노바의 항구를 점거하고는 노조를 분쇄하고 좌파 신문사 건물을 불태웠다. 이탈리아 지배계급 일부가 확실히 파시스트들의 편으로 돌아섰다. 아나키스트 역사가 다니엘 게렝이 10월 28일 사건에 대해 쓴 대로, “무솔리니와 제조업자총연맹 지도자들 사이에 매우 열띤 회의가 몇 차례 열렸다.

“로마 진군에 돈을 댄 은행협회 대표들, 제조업연맹 지도자들, 농업연맹 지도자들은 정부에 전보를 쳐서 유일한 해결책은 무솔리니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교황 역시 무솔리니를 분명하게 지지했다. 사회당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파시스트들의 위협에 맞선 행동을 조직하기를 거부했다. 1921년 3월 사회당 지도자 지코모 마테오티는 이렇게 권고했다. “집에 계십시오. 도발에 대응하지 마십시오. 침묵도, 비겁함도 때로는 영웅적인 것입니다.”

사회당과 노총의 지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여러 좌파 성원들과 전직 군인들이 반(反)파시즘 전투 부대 ‘아르디티 델 포폴로[인민의 돌격대]’를 창설했다. 이들은 때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는데, 예컨대 1922년 8월 파르마에서 대중적 맞불 행동을 조직해 무솔리니의 검은셔츠단 수천 명을 물러서게 했다.

이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1921년 8월] 사회당은 무솔리니와 양측 모두 무장 해제를 약속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정부 당국은 이를 노동자 조직들을 단속하는 근거로 이용했다. 1922년 2월 노총은 여러 노동조합을 모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연합을 꾸렸다. 7월 31일 이 연합은 바로 다음 날 총파업을 소명했다가 곧장 이를 취소했다.

그러고 나서 노총은 무솔리니를 상대로 협상에 나섰는데, 로마 진군이 벌어질 즈음 노총은 무솔리니의 입각 제안을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1921년 1월, 사회당에서 분열해 나온 사람들이 4만 명 규모의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했다. 공산당에서 주도권을 잡은 인물이었던 아마데오 보르디가는 사회당과의 협력 일체를 원칙적으로 거부했다.

보르디가는 지배계급의 정당들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타협이 이뤄질 것이라고 하면서 파시즘의 권력 장악 가능성을 일축했다. 보르디가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파시즘의 특수한 위험성을 부정하고 파시즘을 또 다른 형태의 부르주아 지배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총리에 지명될] 당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은 35석의 의석을 보유한 의회 내 소수파였다. 무솔리니가 독재를 수립하려면 자기 동맹들을 약화시켜야 했다. 무솔리니는 조세에 대한 전권과, 사법부·군대·학교 등 국가 기구를 개편할 전권을 장악했다. 1922년 12월 무솔리니는 공산당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1924년에는 사회당의 마테오티를 살해했다. 이에 대한 반발은 무솔리니 정부를 위협했다.

자생적 시위들이 분출했다. 하지만 사회당은 기회를 허비했다. 사회당이 한 일이라고는 의회에서 퇴장하는 것뿐이었다. 무솔리니는 사회당을 이렇게 비웃었다. “사회당이 총파업이나 하다못해 부분 파업이라도 선포하고 있나? 거리 시위를 조직하고 있나? 군대 내 반란을 선동하고 있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파시스트 무장 집단은 이어서 자유당을 맹렬히 공격했고, 자유당 기관지를 인쇄하는 윤전기를 박살 냈다. 1925년 10월 사회당은 불법화됐고, 뒤이어 모든 야당이 불법화됐다. 로마 진군은 엉망진창이었지만, 결국 파시스트가 승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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