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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한일협정:
한미일의 반소·반중 공조 협정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이 발표된 지 며칠 만에 일본 외무상 하야시 요시마사는 강제동원 배상 문제는 “일한(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이 끝난 일”이라고 말했다. 강제동원 사실 자체도 부정했다.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일제 식민지 피해 배상 문제가 해결됐다는 것은 그간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다. 일본 정부는 일본 전범 기업이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한국 대법원 판결(2012년, 2018년)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해 왔다.

윤석열 자신도 얼마 전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대법원 판결이 1965년 청구권 협정과 모순된다며 대법원 판결을 문제 삼았다.

모든 문제의 출발점에 1965년 한일협정이 있는 것이다.

독재자 박정희는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경제 개발 자금을 일본한테서 제공받는 대가로 강제동원 등 일제의 식민 지배 피해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합의해 줬다. 일본 국가의 배상은 물론 어떠한 사죄 문구도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돈을 준 일본도, 돈을 받은 박정희 정부도 그 돈을 피해자들의 청구권 몫으로 여기지 않았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한국이 받은 돈에서 피해자 지원에 쓰인 돈은 무상 지원금 3억 달러 중 5.4퍼센트에 불과했다.

한일협정은 미국 제국주의의 동맹 구조 강화에 기여했다. 1965년 한일협정 조인식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 협정의 진정한 성격은 냉전 시기 동북아시아에서 반反소련 안보 체제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전략의 일환이었다. 당시 한일협정 체결의 가장 강력한 추동력은 미국한테서 나왔다.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냉전 전략을 실행하는 데서 일본은 핵심 파트너였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일본은 총부리를 겨눈 사이였지만, 소련과의 냉전적 대립이 뚜렷해지자 미국은 일본을 동북아시아에서 소련을 견제할 핵심 파트너로 삼았다.

이를 위해 미국은 패전국 일본을 재무장시키고, 천황제를 비롯한 구질서와 기존 권력자들의 권력을 유지시켰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대일강화조약)으로 미국은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 책임에 면죄부를 주고, 같은 해 미일안전보장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나라들에서 저지른 식민 지배와 전쟁 범죄 때문에, 일본을 포함한 집단안보동맹을 구축하는 것은 여러모로 부담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미국에게 동맹국들이자 대소련 전초기지인 일본과 한국의 협력은 필수적이었다.

특히, 1964년 중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해 동아시아에서 긴장이 고조되는 한편,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부담이 가중되자 미국은 국교를 ‘정상화’하라고 동맹국들인 한국과 일본 모두를 강하게 압박했다.

미국은 전후 급속하게 경제가 성장하던 일본이 한국을 지원해 안보 비용을 분담하고, 대신 한국이 일본의 파트너 구실을 해 주길 바란 것이다.

삼각 협력

미국의 이런 이해관계는 당시 일본과 한국 지배자들의 이해관계와도 맞아 떨어졌다.

새로운 시장과 투자처가 필요했던 일본 자본주의에도 한국과의 국교 수립은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대소련 전초 기지인 한국의 대일 우호 정부의 안착과 경제 성장은 일본의 안보와도 연결된 문제였다.

한편, 자본축적을 위한 자금이 절실했던 박정희에게 일본의 원조는 매우 긴요했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에게 경제 성장은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에서도 중요했다.

이렇게 체결된 1965년 한일협정은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동맹 구조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이때 형성된 한미일 협력 구조가 오늘날 다시 강화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이따금 갈등하기도 하지만, 갈등은 삼각 협력 구조 자체를 뒤흔드는 수준으로 발전하기 전에 미국의 적극적 개입과 중재로 봉합돼 왔다.

이런 한미일 협력 관계 속에서 이득을 취해 온 한국 지배계급은 그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려 애써 왔다. 반대로, 강제동원, 위안부 등 식민 지배와 전쟁 범죄의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는 완전히 무시됐다. 이 문제에서 한미일 3국 지배자들은 공범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의 지도자들은 그저 굴종적으로 미국과 일본의 압력에 응한 게 아니다. 한국 자본주의와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한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선택이었다.

윤석열의 제3자 변제 ‘해법’도 바로 이런 노선의 연장선에 있다. 그런데 이 노선에서 역대 민주당 정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컨대 반일 민족주의를 정치적 위기 탈출용으로 활용했던 문재인 정부도 정작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 강제집행은 중단시켰다.

노동자·민중 쥐어짜기

우파는 한일협정 체결로 일본(그리고 미국)과 긴밀해졌기 때문에 한국경제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일본이 제공한 자금과 기술 지원은 한국 자본주의가 자본축적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포스코 등 철강 산업과 반도체 같은 한국의 주력 수출 산업의 성장도 일본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다. 철도, 지하철, 통신, 송전시설, 댐 등 기간 시설을 짓는 데서도 일본의 자금이 많이 쓰였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 자본가 계급과 국가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급속한 경제 성장 속에서도 노동자들을 비롯해 한국 서민층은 미국·일본이 후원한 독재 정권하에서 쥐어짜이고 짓눌려 살아야 했다.

한일협정이 발판을 마련한 한미일 협력 구조는 일본 제국주의 부흥의 발판이 돼 지금 아시아 긴장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강제동원 합의는 민족적 굴욕 문제가 아니라 미일 제국주의, 그리고 이에 협력하는 한국 지배계급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