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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청년 사회주의자가 《반일 종족주의》를 비판한다

《반일 종족주의》의 공동 저자들인 김낙년(좌)과 이영훈(우)

뉴라이트의 정치적 대두

최근 뉴라이트 진영의 정치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다. 지난 8월에는 친일 과거사 청산을 부정하고 1948년 건국절을 주장한 김형석 대한민국역사와미래 이사장이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임명됐다. 동북아역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에 이어 독립기념관까지 뉴라이트 인사가 수장에 취임하게 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강조하며 뉴라이트 역사관을 반영한 발언을 해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뉴라이트 진영이 주목을 받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이영훈 교수 등 연구자 6명이 집필한 《반일 종족주의》 출판이었다. 2019년 7월에 출판된 이 책은 교보문고 2주 연속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며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일본어판 역시 출판 전부터 아마존 일본 서적 종합 1위를 기록하는 등 큰 주목을 받았다. 출판 후 아마존 리뷰란에는 “한국에 의해 왜곡된 근대 한일사를 바로잡는 내용. 저자의 용기에 감사한다,” “한국인 저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등의 우익의 찬사가 이어졌다. 일본 우익들은 자신들의 역사관을 한국인 연구자가 대변해 주니 이보다 반가운 일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반일 종족주의》가 뉴라이트 진영의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당초 읽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듯한 찬사가 넘쳐나는 리뷰를 보자 같은 일본인으로서 강한 분노를 느꼈다. 거짓된 주장이 마치 역사적 진실인 양 확산되며 한국과 일본의 우익들에게 이용되는 현실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반일 종족주의》를 읽고, 일본인 사회주의자로서 이 책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하기로 결심했다. (《반일 종족주의》 출판 후 제기된 비판에 대한 반론으로 2020년 5월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이 출판됐다. 그러나 기존의 주장을 수정하려는 태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반일 종족주의》의 내용에만 초점을 맞춰 기술하기로 했다.)

이영훈의 《반일 종족주의》와 그 논조

이영훈 등은 《반일 종족주의》에서 일본 정부와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과 책임을 묻는 행위를 ‘반일’로 규정하고, 그러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민족주의자가 아닌 미개한 ‘종족주의자’라고 폄하한다.

그에 따르면, 종족주의란 일종의 샤머니즘적 원시 종교로서 자기 종족이 아닌 이웃을 악(惡)으로 감각하고 불변의 적대 감정을 품는 미개함이 특징이다. 또한 이런 종족 사회에서는 거짓이 토템으로서 결속을 강화하는 역할을 해, 거짓말이 선(善)으로 장려되고 집단 문화로서 확산된다고 주장했다.

이영훈은 한국인의 사상이 이런 원시적 샤머니즘에 사로잡혀 있어서 이웃 국가인 일본에 대해 무지하면서도 세세(歲歲)의 원수로서 적대감을 키우며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제국주의 범죄에 대한 비판이 종족주의라는 황당한 논리다.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 저자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와 공동 저자인 김낙년 동국대 교수가 소속된 낙성대경제연구소는, 198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중반에 일본 도요타재단의 지원을 받아 식민지 연구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은 일본 우익이 선호할 만한 주장을 철저히 펼치고 있다.

너무 유치한 견해라 이러한 주장들을 자세히 검토할 생각은 없으나, 그들이 《반일 종족주의》를 통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전면적으로 주장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일본이 식민지 시대에 조선 경제를 성장시키고, 해방 후 한국의 고도성장을 위한 기초를 마련했다고 주장하며, 식민지 시대의 수탈과 억압의 사실을 부정한다. 또한 박정희나 이승만과 같은 독재자들을 공산주의로부터 한국을 지키고 국가 발전을 이끈 영웅으로 미화하고 있다.

또한 《반일 종족주의》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일제의 식량과 토지 수탈 문제, 조선인 노동자 강제 동원 문제, 쇠말뚝 신화, 한일 청구권 협정, 독도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다양하지만, 그들은 그 책임을 일본 정부가 아닌 전근대적인 조선 사회나 “거짓말하는” 한국 국민에게 돌리고 있다.

이영훈은 “국익을 위해 잘못된 주장을 옹호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하며, 자신의 비판이 “엄격한 학문적 비판”에 기반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주장이 과장되거나 거짓인 경우가 많아 학자들로부터도 지탄을 받고 있다.

지면 관계상 왜곡투성이인 이 책의 모든 주제를 반박할 수는 없으므로, 나는 《반일 종족주의》의 핵심 주장인 식민지 근대화론과 조선인 강제 동원 문제, 그리고 위안부 문제에 초점을 맞춰 논하고자 한다.

《반일 종족주의》의 핵심 주장, 식민지 근대화론의 문제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영훈 등은 일제의 식민 지배가 조선에 경제 성장을 비롯한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가져왔고, 해방 이후 한국이 발전하는 원동력이 됐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좌파 민족주의자들 역시 비판을 제기하고 있지만, 이들의 비판에도 결점이 있다.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식민지 조선에 수탈만 있었을 뿐 유의미한 자본주의 발전은 없었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 지배에 반대하려면 식민지하 조선의 자본주의적 근대화도 부정해야 한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근대화가 있었다고 해서 식민 지배가 옹호되고 정당화될 수는 없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매우 잘못된 인식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가 일찍이 영국과 인도의 사례로 설명한 바 있다.

영국은 식민 지배를 통해 인도의 전통적 사회 구조를 파괴했으며, 동시에 착취를 위한 자본주의적 경제 구조를 도입하여 산업 발전(근대화)을 촉진시켰다. 더 많은 자원을 약탈하고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영국 제국주의는 인도에 철도를 건설하고 고가의 산업 기계를 도입했다. 그 결과, 영국의 제국주의 지배 동안 인도의 생산력은 증가하고 근대적 산업이 발전했으나, 마르크스는 그 혜택이 결코 인도인들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다. 그는 인도의 민중이 해방되지 못하고, 사회적 조건 역시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며 영국의 식민 지배를 통렬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도입으로 노동계급이 탄생해 자본주의에 맞서 싸울 주체가 성장할 잠재력이 생겼다는 점에 대해서는 변증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식민 지배는 결국 심각한 착취와 억압을 만들어내며 식민지 민중에게 더 큰 고통을 강요한다는 점을 마르크스는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이런 날카로운 통찰은 일제에 의한 조선의 식민 지배에도 적용될 수 있다.

뉴라이트는 자본주의를 최고이자 최선의 체제로 여기기 때문에, 전근대적인 조선의 사회 구조를 파괴하고 자본주의를 도입한 일제의 침략 행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들은 조선이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할 전근대적 국가였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 지배를 통해 근대화가 실현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매우 문제가 있다. 일부 근대화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영훈이 주장하는 “경제 성장”과 “발전’은 철저하게 일제의 이해관계에 따라 불균등하게 이뤄졌을 뿐, 결코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이 구축한 도로나 공장은 자원을 약탈하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의료 시설이나 학교 역시 기본적으로 조선인을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심는다는 의미의 “식민(植民)”이라는 단어 그대로, 일본인들이 조선에 정착하기 위해 마련된 인프라였다.

조선의 민중은 가혹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민족 차별에 시달렸다.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지적했듯, 도로나 철도 같은 인프라 정비는 겉으로는 “문명의 보급”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착취하고 지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반일 종족주의》에서 이영훈 등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 식민 지배에 면죄부를 주려는 허구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인 노동자 강제 동원과 차별을 부정하는 뉴라이트

이어서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 동원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영훈 등은 《반일 종족주의》에서 “강제 동원이라는 역사 왜곡이 반일 종족주의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강제 징용”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당시 “강제 연행”이나 “강제 징용”이라는 용어 자체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한, 법에 근거한 강제 동원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의 8개월 동안만 이루어졌으며, 그 이전의 노동은 “모집’이나 “관 알선”에 의한 자발적 노동 형태였다고 주장하며 강제성을 부정한다.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식민 지배 35년 중 강제 징용이 이루어진 기간은 불과 8개월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이전의 노동을 “자발적 선택”으로 간주함으로써 일본의 강제 노동 책임을 과소평가하게 된다.

그러나 “강제 징용”이나 “강제 노동”이라는 용어가 당시 사용되지 않았다고 해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 노동을 강요받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는 식민지 시대에 제국주의 국가 권력을 배경으로 조선 민중에게 가해진 억압과 차별, 그리고 체계적인 지배 구조를 무시하는 발상이다.

1944년 9월부터 1945년 4월의 징용뿐 아니라 법과 제도를 통한 불평등이 존재했고 조선 민중은 억압과 차별에 시달렸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조선, 대만, 사할린, 남태평양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노무 동원 계획”을 추진하며, 전쟁 장기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만드는 황국화 정책도 인적 자원 총동원 목표와 연관돼 있었다.

1940년 5월, 국가총동원법이 개정되면서 전쟁 수행을 위한 착취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일본 본토와 식민지, 점령지 등 모든 지배 지역에서 인력과 물자, 자금을 전쟁에 총동원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이 일제 정부에 위임됐고, 이로 인해 조선인은 일본 본토와 만주, 더 나아가 전쟁터에까지 동원돼 가혹한 노동과 착취를 감내해야 했다.

평범한 일본인들 역시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전쟁 수행을 위해 동원되었다. 일본 남성뿐 아니라 여성과 학생들까지도 동원되면서, “제국”은 그 범위를 확장해 나갔다. 제국주의 전쟁의 최대 희생자는 결국 평범한 한일 양국의 민중들이었다. 물론 이 점이 식민지 차별이 없었다는 것의 근거가 될 순 없다.

또한, 이영훈 등은 조선인 탄광 노동자에 대해 언급하며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 간의 업무 환경이나 노동 강도에 차이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역사 자료와 증언이 말해주듯이, 조선인 노동자가 광산 등에서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해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1939년 이후 노동자 “모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도광산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 노동자는 암반을 뚫거나 지지대 설치, 운반 작업 등 특히 위험한 작업에 주로 배치되었다. 폐질환인 규폐증에 걸린 일본인 노동자를 대신하거나, 징병된 일본 청년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들이 주로 갱내에서 위험한 작업을 맡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인 노동자의 재해율과 사망률은 일본인보다 훨씬 높았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저자도 책에서 언급하는데, 이를 “민족 차별”이 아닌 탄광의 노동 수요와 조선의 노동 공급이 맞물린 “불가피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식민 지배하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민족 차별과 깊이 연관된 문제다.

임금 차별에 관해서도 이 책의 저자들은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 정당하게 임금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근속 기간, 경험, 기술 수준에 따른 성과급 차이, 가족 수당 적용 여부, 공제액 차이 등이 존재해 민족차별적 임금 격차가 발생했다.

강제 저축에 대해서도 저자들은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에게 적용된 국가 정책이었기에 차별이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에게 더 많은 저축이 강제됐다. 사도광산 문제를 다룬 논문 〈조선인 노동자와 사도 광산〉의 저자 히로세가 지적했듯, 이러한 강제 저축은 도주 방지를 위한 조치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 현금 지급액에 있어서도 조선인들이 주로 독신이어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는 점을 악용해 일본인보다 현금을 적게 주는 등의 차별이 있었다.

놀랍게도, 저자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임금이나 처우 차별이 없었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7장의 마지막에서 “조선인은 1910년대에도 일본의 탄광에서 일했다. 당시 조선인의 임금은 일본인의 절반 정도였다. 하지만, 그 격차는 전쟁과 함께 해소되었다”라고 모순되는 서술을 한다. 저자 스스로가 식민지 시대에 존재했던 민족 차별적 임금 체계를 인정한 셈이다.

《반일 종족주의》의 아성(牙城), 위안부 문제의 진실

이영훈 등은 저서에서 100페이지 이상을 할애해 위안부 문제를 다루며, 이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아성(牙城)으로 자리 잡았고 역사적 사실보다 민족적 감정에 의해 해석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한국 측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해에 중대한 결함이 있으며, 엄밀하고 객관적인 사실 인식이 요구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영훈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크게 세 가지 정도 논거를 통해 비판을 전개하는데, 그중 첫째는 위안부 제도가 갑작스레 등장한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연속성을 지닌 제도라는 주장이다. “위안부”라는 명칭은 없었지만, 15세기 이후 조선에도 위안부와 유사한 역할을 한 여성이 존재했고, 식민 지배가 끝난 후에도 한국군 위안부나 미군 위안부가 우리 사회 안에 존재했기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운영된 1937년부터 1945년 사이의 기간만을 떼어내 역사를 평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위안부를 성매매 여성과 동일시함으로써 위안부 제도의 본질을 ‘역사적 연속성’이라는 말로 감추고, 일본의 국가 범죄와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모호하게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영훈이 언급한 민간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는 명백히 서로 다른 맥락에서 존재했다. 15세기 이후 존재했던 성매매 여성은 민간에서 운영되었고, 한국군 위안부는 한국 정부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미군 위안부는 민간 성매매(기지촌)를 한국 정부가 위안부로 명명하고 정책적으로 관리한 것일 뿐, 국가에서 직접 운영한 것은 아니었다.

반면 일본군 위안부는 국가 조직인 군이 위안소의 설립, 유지, 확장에 조직적으로 관여하며,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조선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 여성들에게 심각한 인권 침해를 저지른 명백한 일제의 국가 범죄이자 전쟁 범죄였다. 각 문제에 대해 역사적 맥락으로 평가하고 분석하지 않은 채 동일선상에 두고 같은 ‘위안부’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엄밀하고 객관적 사실 인식과는 거리가 꽤 먼 궤변이다.

또한, 이영훈이 한국군 위안부나 미군 위안부, 즉 “우리 안의 위안부” 문제에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특히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마찬가지로 논의가 확산되는 것을 경계한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미군 위안부 문제의 근원에 한미동맹이 있으며 박정희, 전두환 정부의 책임이 크다는 사회 운동가들의 주장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한미일 동맹을 중시하는 이영훈이 일본 정부의 만행을 옹호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미국과 한국 정부의 책임도 감싸 주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두 번째로, 이영훈은 위안부 모집과 동원이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강제성을 입증할 일본 정부나 관련 공문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 노동과 마찬가지로, 정부와 군의 기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강제성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무리한 논리다.

이영훈은 일본 측의 설득력 없는 주장은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정작 피해 여성들의 증언에 대해서는 신빙성이 없다며 무시한다. 물론 구술 자료를 사용할 때 신중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이 남긴 수많은 구술 자료는 일본 제국과 군의 책임을 일관되게 뒷받침하며, 구술을 모은 연구자들의 검토 과정을 거쳤다. 따라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구술 자료는 그 어떤 자료보다도 강력한 증거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또한 이영훈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때 여러 차례 문옥주 할머니의 사례를 인용하지만, 정작 그녀가 일대기에서 헌병에 의해 연행되었다고 증언한 부분은 인용하지 않는다. 역사의 진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입맛에 맞는 기록만 골라 일본의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이영훈은 자신을 학자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아울러 군·관·헌이 ‘사냥하듯 끌고 간’ 강제 연행만을 강제성이라고 규정해 폭력적인 모집과 운영 체제를 묵인하는 태도도 용납할 수 없다. 감언이나 강압으로 당사자를 사실적 지배하에 두는 것도 같은 범죄이다.

세 번째로, 이영훈은 위안부를 ‘성노예’로 표현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위안부가 개인 영업의 형태였고 전차금(前借金)만 갚으면 자유롭게 일을 그만둘 수 있었으며 높은 수입을 받아 대우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노예’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군 위안부 제도로 동원된 여성들은 거주의 자유는 물론, 공창 제도가 명목상 허용하던 자유 폐업의 권리조차 인정되지 않았고, 외출의 자유도 박탈된 상태였다. ‘고객’을 선택할 자유 또한 전혀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전차금으로 사람을 속박하는 것 자체가 비인권적인 행위이다.

또한 높은 수입을 이유로 성노예가 아니었다는 주장 역시 명백히 잘못된 주장이다. 일본이 점령했던 지역들은 1943년경부터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겪었으며, 특히 일본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일수록 물가 상승은 더욱 극심했다.

앞서 언급한 문옥주 할머니가 머물렀던 버마(현 미얀마) 지역에서는 전황 악화로 인해 군대가 현지 물자 조달 및 기타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발행한 군표가 거의 무가치해질 정도였다. 당시 군표로 지급된 임금은 표면적으로는 높은 액수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종합해 《반일 종족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짚어 보면 첫째, 《반일 종족주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다. 식민지 시대를 통해 한국이 근대화를 이루었고 전후 발전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영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반일 감정에 기반한 잘못된 역사 인식이 현재의 국가 발전까지 저해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이영훈은 “반일 종족주의”가 자유민주주의의 붕괴를 불러오며, 총체적인 국가 위기를 초래했다고도 한탄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의 권리나 평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재벌과 대기업이 자유롭게 시장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그는 최저임금 인상을 반대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실은 인상 후 최저임금 제도를 개악한 ‘줬다 뺐기’에 불과했다)에 대해 “한국 경제의 실태와 특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마추어 집권 세력이 분배 지향과 규제 일변의 정책에 집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결국 이영훈 등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바탕으로 개발과 경제 성장을 찬양하며 지배계급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영훈은 ‘반일=공산주의’라는 냉전 시대의 논리를 학술적으로 포장하고 있다. 이는 뉴라이트 진영에서 오랫동안 주장해 온 논조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공산주의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고 한국 경제 발전의 기초를 닦은 영웅으로 미화하는 데 힘써 왔다.

한·일 양국의 지배자들과 우익은 지금 일제 식민 지배를 긍정하고 미화함으로써 현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 구조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또한 한미일 동맹을 강화함으로써 군사력을 증강하고 더 나아가 제국주의를 확대하려 하고 있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편이 아닌 한·일 양국 지배자들의 논리와 역사관에 속지 말고, 역사의 진실을 들여다봐야 한다. 이영훈의 《반일 종족주의》가 역사의 진실을 알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반면교사가 되기를 바란다.